"따 목"(Ta Mok)이란 이름은 크메르어로 "목 할아버지"란 의미로, 크메르루즈 지도자 칫 쪼은(Chhit Choeun: 1924년 따께우[Takéo] 도 출생 - 2006.7.21. 프놈펜에서 사망)의 별명이다. 그는 "엑 쪼은"(Ek Choeun), "오응 쪼은"(Oeung Choeun), "웅 쪼은"(Ung Choeun)이란 이름도 사용했다고 하며, 크메르루즈 정권에서는 "브라더 넘버 파이브"(Brother Number Five)로도 불렸다.
크메르루즈에서
(사진) 따께우에 있는 따 목의 집 ☜ 확대사진보기
그는 따께우 지방의 상당히 부유한 농가에서 출생했는데,(주1) 이 집안은 화교계 크메르인 가계로 알려져 있다.(주2) 1930년대에 그는 불교의 승려가 되었다가 16세에 환속했다.(주3) 1940년대에 따 목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이후에는 일본 점령군에 대항했다. 따 목이 반-프랑스 무장세력이었던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에 참여할 무렵에, 그는 불교의 승려들에게 빨리어(Pai)를 가르치고 있었다. 1964년경 그는 프놈펜으로 돌아갔다가 크메르루즈에 가담했다.
1960년대 말, 그는 장성 계급을 달았고, 일군의 조직원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크메르루즈 정권에서 중앙위원회(당중앙) 상임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북서구역"(southwest zone)을 중심으로 당내에 매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폴 포트(Pol Pot)는 그에게 "민주 캄푸치아국군"(크메르루즈 정규군) 지휘관을 맡기기도 했다.(인용각주 필요) 1970년경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따 목은 한쪽 다리의 절반 정도를 절단했다.
크메르루즈는 1975년 4월 17일에야 캄보디아 전역의 정권을 장악하지만, 이미 1973년부터 자신이 장악한 지역에서 따 목은 여러 학살을 지휘했다고 믿어지고 있다.(인용각주 필요) 또한 1975-1979년 사이에 단명한 "민주 캄푸치아"정권기에는 대량 숙청을 지휘해 그에게 "버처"(Butcher: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크메르루즈 정권 몰락 후
1979년 1월에 크메르루즈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따 목은 당렉산맥(Dângrêk Mountains)의 안롱 웨잉(Anlong Veng)을 근거지로 북부지방을 장악하면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남아있었다. 당시 폴 포트에게 충성하던 병사들 중 3,000-6,000명 정도가 따 목의 지휘하에 있었다.
1997년 당 내분이 발생하여, 따 목이 한 분파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이라 칭했다. 폴 포트는 크메르루즈의 북부 요새로 탈출했지만, 곧 따 목에게 체포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8년 4월 정부군이 공격해오자 따 목은 폴 포트도 동행하여 정글 속으로 피신했다. 며칠 후인 1998년 4월 15일 폴 포트가 사망했는데, 그의 구금처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한 따 목은 다시금 안롱 웨잉으로 피신했다. 1999년 3월 6일 태국 국경 근처에서 "왕립 캄보디아군"(RCAF)이 그를 체포하여 프놈펜으로 압송했다. 그는 "군검찰부" 구치소에서 옛 동지인 깡 껙 이우(Khang Khek Ieu: 별명 "돗"[Duch])와 조우했다. 따 목은 캄보디아에 남아있던 크메르루즈의 주요 지휘관으로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당시 크메르루즈의 다른 주요 지도자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누온 찌어(Nuon Chea), 키우 삼판(Khieu Samphan), 이엥 사리 (Ieng Sary) 등은 훈 센(Hun Sen) 정부와 협상하여 항복한 이후였다.
캄보디아 법률에 따르면 구속 6개월 안에 재판이 진행돼야 했지만, 구치소에서 그의 구속기간은 재판절차도 없이 반복적으로 연장되었다. 처음에 그는 "법외자" 신분이었다가 이후에는 "탈세범"으로 바뀌었고, 2002년 2월에 "반인륜 범죄자"로 처리되었다. 따 목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통원치료시만 독방에서 풀려나곤 했다. 2006년 7월 21일 따 목은 군부대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후 사망했다.(주4)(주5) 군의관 뚜옷 나라(Tuoth Nara)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노인이라 쇠약해진 데다 호흡기 질환이 겹쳐 자연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읽어볼만한 자료들
- Bizot, François (2003). The Gate. Euan Cameron, trans. New York: Alfred A. Knopf.
- Becker, Eizabeth (1998) [1986]. When the War was Over: Cambodia and the Khmer Rouge. New York: Public Affairs.
첫댓글 따목이 그런분이 었군요,,, 고집도 있어보이고,, 남자로써,,큰그림그리며,,한세상살다 갔구나,,, 후회없는 삶이었을까?
캄보디아 역사에서 크메르루즈는 일종의 딜렘마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정권 시절의 학살이나 이런 것만을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 이들이 20세기 캄보디아 역사에서 그래도 정권을 잡기 전가지는 최고의 지식인이자 양심 세력이었고, 외세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항거했던 세력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개인개인이 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인물들이었다는 데서 .... 참 찹작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