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젊은 날 한 세월을 보낸 곳이 밀양이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청년교사로 초등교단에 섰다. 밤에는 열차나 시외버스로 대구까지 야간강좌 국어국문과를 1학년부터 다시 입학해 졸업했다. 쓰린 사랑도 해 보았고 결혼 후엔 강변 동네인 삼랑진과 수산에서 두 아이를 보았다. 중등교단으로 옮겨온 이젠 그 때 그 시절을 아련한 추억에 묻고 가끔 회상에 젖는다.
창원으로 옮겨와 살고 있는 지도 여덟 해째다. 며칠 전 일요일이자 개천절 날 마음이 통하는 선배교사랑 밀양을 다녀왔다. 밀양을 떠난 뒤로도 문학 모임이나 알던 분들의 경조사 때 더러 방문했다. 이날은 재약산 등산을 위한 밀양행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에 도계동에서 선배와 접선하여 교외로 빠져나갔다. 잘 여물어 가는 들판의 벼이삭에서 가을의 정취가 뭉클했다.
선배가 운전한 차는 금새 밀양시가지를 지나 긴늪 송림을 지났다. 얼음골과 표충사로 나뉘는 금곡 삼거리에 닿았다. 우리는 바짝 산 아래까지 차로 가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하산할 때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지 않기 위함이다. 등산의 묘미는 늘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이다. 올랐던 길로 되돌아 내려오면 이 묘미가 반감된다.
우리는 금곡 농협 창고 앞에다 차를 두었다. 그리고 얼마간 기다려 표충사행 시외버스를 탔다. 나는 자주 타 보는 시외버스이지만 선배는 오랜만이라고 했다. 우리같은 등산복 차림이 서너 사람이고 나머지는 그 지방 사람이었다. 시외버스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 표충사 아래 주차장에 닿았다. 절 입구의 아름드리 적송과 활엽수림으로 골짝이 깊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사자평 등산로 세 갈래 가운데 대밭 뒤쪽을 택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층층폭포로 오르는 길과 작전 도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 있기도 한다. 선배는 이야기로만 들은 사자평에 처음 오른다고 했다. 나는 열 번 넘게 올랐다. 밀양의 시내 학교에 근무 할 때 전 학년 팔백여 명 학생들의 소풍으로 오르기도 했다.
숲길엔 꿀밤이 익어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단풍은 아직 물들지 않았다. 자연산 땀은 숨이 차도 흘릴수록 좋은 일이다. 사자평까지는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 올랐다. 다른 일행들도 우리를 앞서기니 뒤서기니 하면서 동행이 되어주었다. 간밤 절 아래에서 민박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먼저 올라 내려오고 있는 팀이 있기도 했다.
그곳 사자평은 예전엔 화전민 촌이 있어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가 있기도 했다. 고사리학교로 불린 아주 작은 학교였다. 약초나 깨고 밭을 일구어 생업으로 삼든 사람들이 가축을 기르고 등산객들에게 막걸리를 팔다가 점차 백숙이나 염소고기도 구워 팔았다. 이러다 보니 조계종단에서는 사찰 뒤편에서 고기냄새를 피우고 피를 흘리는 것이 온당치 않아 이주시켰다.
사자평에서 고사리학교 터는 잔디로 꾸며 놓았고 나머지 철거민 집터에는 잣나무가 심겨져 자라고 있었다. 몇 자리는 떠난 주민들이 등산객들에게 막걸리와 손두부를 팔고 있었다. 우리도 땀을 식히면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면서 잠시 쉬었다. 사자평이 팔구백 고지가 되고 뒤의 두 봉우리는 천 고지가 넘는 꽤 높은 곳이다. 벌써 서늘한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다시 사자봉을 향해 올랐다. 선배는 막걸리 두어 잔에 숨이 더 차 오른다고 했다. 사자평원을 돌아 정상인 사자봉을 가려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수미봉을 먼저 올랐다. 건너편에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 재약산 정상인 사자봉이다. 수미봉을 내려와 사자봉 오르기 전 억새밭에서 출발 전에 사온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우리는 잠시 창녕 화왕산 억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근에서 억새밭 명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드라마 '허준'의 촬영 세트 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의 억새는 산성 안의 분지형 분화구 모양에서 자라 가을 한철 장관을 이룬다. 요즈음은 자치단체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억새 태우기 행사를 한다.
그곳 억새는 매년 새 그루터기에서 돋아나기에 이삭에 해당하는 억새꽃이 아주 굵다. 키도 아주 높이 자라서 등산객들이 억새 숲에서 사진을 찍을라치면 웬만한 사람도 억새무더기에 묻혀 얼굴만 나오기가 예사다. 이는 억새를 태운 재가 거름이 되고 해마다 새 그루터기에서 돋아나기 때문에 무성히 자란다. 사자평보다 해발고도가 낮음도 이유가 된다.
반면에 이곳 사자평의 억새는 아주 열악한 생장 환경이다. 바위가 풍화하여 부석부석한 층을 이룬 척박한 맨땅이다. 운무가 산정을 뒤덮여 있는 날도 많다. 비바람이야 말할 나위 없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이런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억새이기에 화왕산 억새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앉은뱅이 억새'라 할 수 있다.
이 낮은 키의 은빛 물결이 산정을 뒤덮고 있었다. 이 억새말고 철쭉도 앙상한 뿌리를 드러내고 낮은 키로 자라고 있었다. 바위에 붙은 이끼들이야 말할 나위 없다.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준말이 풍수이다. 이 풍수가 인간이 지향하는 삶과 죽음의 공간 아니던가. 그럼에도 산정의 억새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있었다. 바람 잘 날 없는 곳에서, 물이 머물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는 얼음골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산을 내려왔다. 예전의 논밭마다 꿀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해는 중천을 지나 기울고 있었다. 다시 밀양행 시외버스를 타고 금곡에 내려 두고 온 차로 바꿔 타고 창원으로 되돌아왔다. 둘은 도계동에서 돼지국밥으로 소주를 한 잔 곁들였다. 그 날의 주제는 모진 비바람 앞에 살아 남으려면 자신의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사자평 등산로...한번 오른적이 있는데,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단풍이 절경이더군요...
주 선생님 혼자 좋은 구경 잘 하시고 저도 다음에 데리고 가세요 추석 다음날도 도청 뒤 산에 가시더니 그래서 우리 가락도 소모임 등산회 한 번 만들어야 할것 같네요 글작품 잘 보고 갑니다 억새풀이 남기는 묘미 다시 생각 해보고 순정어린 갈대도 생각 해 봅니다 저 멋진 은바다 물결이 보이려 합니다 자연그대로
'가락등반' 좋네요...언제 한번 추진하시죠? 거창한 계획보다는 불시에 "모여! 해체!"하시면 어떨까요? 가락카페 단합겸해서(운영자의 변^^), 창원시내의 가까운 곳으로요...
그럼 언제하나 날 잡기 힘드네 가을 추수맞이 콤바인 50마력으로 함안 백산들에서 타작도 해야 하는데 전 9일 토요일 아침부터 산 타는데 그리고 오후 3시 그시기 저시기 가려고 하는데요 그런데 우리들님 토요일 거의 출근이라서 나 혼자라도 산인이 되어 산사로 가야지 가을 좋은 풍경에 그리움 가득 접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