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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과 기쁨 가운데서 살아가다가 행복하게 죽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한, 위에 있는 것들에 관한 확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인격적 존재가 바다의 잔물결 이상의 것이고, 도덕적인 싸움은 자연의 질서를 훨씬 뛰어넘으며, 영혼의 지극히 높고 순수한 이상들은 허구들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양심의 고발들과 죄의 무게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죽음과 심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 다. 우리는 흔히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이다. -p.23
과학은 죄책과 형벌, 죽음과 내세와 관련해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거미줄 같은 빈약한 논거를 제시하고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포기하라 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영원히 잘되느냐 잘못되느냐 하는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적인 무오한 확신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한다. -p.27
신학은 우리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죄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삶의 환난들 가운데서 인내와 소망을 지니며, 죽음을 앞두고도 찬송을 불러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고 오직 비평적이고 역사적인 연구들에 몰두하는 신학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온갖 신학적인 쟁점들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지만, 병상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멸망 받게 될 죄인들의 심령 속에 있는 질문들에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신학자는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p.30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 의거해서 얻은 지식이 우리 자신의 관찰과 조사에 의거해서 얻은 지식보다 덜 가치가 있다고 볼 이유가 없지 않는가? 우리는 관찰과 조사를 행하면서 온갖 종류 의 잘못들과 오류들에 노출될 수 있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모든 것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과 그들의 증언이 과연 신뢰할 수 있고 믿을 만한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권위에 의거해서 얻는 지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관찰로부터 얻는 지식보다 더 참될 수 있다. -p.41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신비들을 한층 더 깊이 꿰뚫어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가 서 있는 단단한 땅이고, 그가 의지하는 반석이며, 그의 사고의 출발점이고, 그의 지식의 원천이며, 그의 삶의 준칙 이고, 그의 길에 빛이자 그의 발에 등불이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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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믿음의 확신’이라는 주제는 오늘도 여전히 적실할까?
‘믿음의 확신’의 가치
이 문제는 성경시대나 교회 역사에서 언제나 적실했다. 헤르만 바빙크가 1901년에 저술한 이 책 『믿음의 확신』은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 훌륭한 책 속에 그의 신학의 거의 대부분의 특징들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바빙크 자신의 입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개혁교의학』에 나타난 그의 확장된 사상의 빛 속에서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종교는 죽음의 침상에서 검증된다고들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의 순간에 그의 믿음의 유효성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헤르만 바빙크는 죽음의 침상에서도 믿음의 싸움을 싸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이 무엇입니까?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직 믿음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죽음의 순간에 구원을 확신했다. 그 확신의 근거는 믿음이었다. 믿음의 내용은 성령님을 통한 계시와 말씀이었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었다. 바빙크의 죽음의 침상에서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고 있는 그의 대작 『개혁교의학』보다 『믿음의 확신』이 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가 ‘믿음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1891년에 이미 강의했으니 『개혁교의학』 출판보다 앞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죽음의 순간에 그의 영혼을 붙들어 주었던 것은 ‘교의학’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이었다. 실제로 바빙크는 『믿음의 확신』에서 “인간이란 자고로 죽음의 순간에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해답을 찾든지 못 찾든지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바빙크가 1891년 한 『믿음의 확신』 강의록이 10년 후(1901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일반 성도를 대상으로 한 책이라 입교하는 자녀들에게 선물로 많이 보급되었다고 한다.
바빙크의 보편성
바빙크의 신학은 이 책 『믿음의 확신』의 역사적 부분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독교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다른 입장들을 평가하면서 그것의 유산을 소중히 붙잡는다. 예컨대 그는 경건주의의 주관적인 경향을 비판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것이 가진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든 그는 종교개혁의 근원으로 돌아감을 통해 개혁신학을 다시 되살리기를 바란다. “전통은 이전 세대의 모든 보화들이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로 전달되는 수단이다.”(개혁교의학)
바빙크는 또한 평화주의 신학자이다. 개혁 신학은 그에게 있어 보편적 신학이다. 그는 반대자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그들의 의견에도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신학적 논제들을 반(反)의 방식이 아니라 합(合)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바빙크의 적실성
바빙크의 책들은 세 가지 이유로 오늘날에도 큰 적실성을 갖는다.
첫째, 그 책들은 교리와 영성의 일치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빙크는 신학적 지식을 항상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실존적 요소는 『개혁교의학』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대중적 신학 저서들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교리적 요소와 실존적 요소를 일치시키기를 원했다. 그는 그의 경건주의적 배경과 현대적 주제들에 대한 그의 열정이라고 하는 두 기둥 사이에 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확신의 주제와 구원의 확신의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문제가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이 책과 『개혁교의학』 사이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바빙크는 우리가 일반적 지식을 얻는 방식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확신하게 되는 방식을 일치시킨다. 인식론과 신학의 일치는 성령의 증언 위에 기초한다. 종국적으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믿음, 즉 감각적 지각에 대한 신뢰나 혹은 역사적 자료에 대한 신뢰 위에 기초한다. 진리 없이는 지식도 없으며, 이러한 신뢰를 위해 우리는 객관적 세계와 세계에 대한 주관적 지식을 함께 붙잡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믿음을 필요로 한다.
셋째, 바빙크는 믿음과 과학 사이를 구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함께 붙잡는다. 그에 따를 때, 믿음의 확신은 모든 형태의 과학적 확신과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의 최고의 확신은 증거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은 매우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 믿음의 확신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과학적인 확신보다 약하다. 과학적인 확신은 이성적인 기초에 근거한다. 반면 믿음의 확신은 계시와 권위 위에 근거하며, 따라서 그것은 그러한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의 결과이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의 주관적 힘은 과학적 확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 믿음의 확신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깊고 강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확신은 가장 완전한 안식이며, 최고의 영적 자유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믿음의 확신과 과학적 확신은 서로 병행관계를 이룬다. 왜냐하면 믿음과 과학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 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눈을 믿음과 과학의 일치로 향하도록 이끈다.
확실성
믿음의 확신과 이와 연결된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종 목적지는 오직 오랜 싸움 후에 도달될 수 있을 뿐이다. 도리어 믿음의 확신과 이와 연결된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개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왕이며, 그는 이러한 직분들을 의식한다. 믿음과 과학, 신학과 인식론, 영성과 교리는 정확하게 하나로 일치된다. 그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충분하고 참된 의미에서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