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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의 푸른 꿈
원덕교 교사/김 기 완
1. 글머리에
1979년 8월 6일 신문을 펴든 나는 깜짝 놀랐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입탄리“지○○씨 댁 일가족 13명 산사태로 사망”이라는 기사가 신문 1면에 톱기사로 났기 때문이다. 이 신문 기사를 펴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마는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입탄이라는 곳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제2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일한 생존자인 지○○(17)양은 내가 입탄교 제직시 3학년이었고 참변을 당한 지○○(22)양은 6학년때 6개월간 담임을 하였었으니까 나의 놀람은 더욱 컸다. 지○○씨 내외분이나 지씨의 사위인 김○○씨 내외분 모두 순박하고 착하신 분들이었으며, 특히 지○○씨는 조그만 상점도 경영하셨기 때문에 내가 음으로 양으로 신세를 많이 졌었다. 이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입탄에서의 생활을 되돌아본다.
2. 산골짜기의 푸른 꿈
가. 부임길
1970년 12월 5일 내가 교직에 첫발을 디디며 부임한 곳은 강원도에서 오지인 평창군 입탄국민학교였다. 교육청에 들려 발령장을 받고 장학사님께 학교 현황을 들었다. 분교장으로 있다가 1969년 3월 1일 본교로 승격 개교한 벽지학교로 3학급 전교생이 160명 정도라고 하였다. 학교위치와 평창교육의 특색, 교사로서의 몸가짐 등 자세한 말씀을 듣고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침 평창 장날이라 입탄리에 사시는 분들과 동승을 한 덕분에 함께 가게 되었다.
약수리라는 곳에서 내려서 하얀 눈을 밟으며 해발 500-600m 되어 보이는 모래재라는 고개를 넘어서 입탄리로 접어들었다. 양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고 그 사이로 냇물이 흐르며 여기저기 드문드문 인가가 있었다. 학교 같은 건물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옆에 있는 집에 들어가 여쭈어 보았다. 마침 그 댁이 교장 선생님 사택이었다. 사모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학교가 그곳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또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분교장 당시 2개 교실이 있었고, 본교로 승격하면서 2개 교실을 신축할 때 장소가 협소하여 새로 부지를 매입하여 신축하였다는 것이다. 교사가 떨어져 있어 아동의 생활지도와 학습지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교장 선생님과 두 분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훈훈한 난로가에 앉아 홍차를 마시면서 교장 선생님께 학교와 지역사회 실정을 들었다. 직원이 4명뿐이라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두 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셨다. 나는 “아무 특기도 없지만 열심이 하겠습니다. 많이 지도하여 주십시오.”라고 간단히 인사를 하였다.
저녁엔 닭고기 만둣국에 막걸리 환영 파티가 있었다. 이곳엔 음식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도 멀기 때문에 닭이 유일한 별식이라 닭이 씨가 마른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 도중 이곳에는 차가 다닐 수 있는 길도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지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차가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에 철근, 목재, 시멘트, 모래 등을 일일이 부락 호수별로 배분하여 부역으로 하였고, 모래는 말로 되어서 받았다고 하신다. 학생들도 수업이 끝나면 4km가 넘는 대상리라는 곳까지 가서 벽돌 한 장, 각목 한 개씩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학생과 학부모들이 땀을 흘려 지은 학교이기에 애교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 마을 이장님, 육성회회장님 등 마을 유지 분들이 찾아주셨다. 그 당시만 해도 먹을 줄 모르는 막걸리를 자꾸 권해서 애를 먹었다. 우선 숙식은 마을 이장님 댁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이장님 아드님이 2개월 전에 군에 입대를 해서 방이 비어 있었고 아들 대신이라고 좋아하셨다.
나. 학습 부진아 지도
다음 날부터 나의 학교생활은 시작되었다. 나에게 맡겨진 반은 3-4학년 복식학급으로 3학년 18명, 4학년 36명이었다. 햇병아리 교사에 복식수업이라 어리둥절한 가운데 아이들 이름만 겨우 알게 되었을 때 겨울 방학을 맞았다. 방학이 끝나고 졸업식, 종업식 등 어수선한 가운데 70학년도가 끝나고 71학년도를 맞았다.
새 학년도에는 5-6학년을 맞게 되었다. 우선 기초학력 부진 학생 해소를 위해 기초학력 검사를 하고 부진아 일소를 1차 목표로 삼았다. 의외로 부진아가 많았다. 멀지 않아 초등교육을 마치게 될 이 아동들에게 기초적인 학력은 꼭 정착 시켜야하겠다는 생각에서 부진아 일소에 나섰다. 우선 교사와 친밀감을 갖도록 미소와 음성으로 학생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한편 수업이 끝난 후 틈틈이 지도하였다. 또한 문장력을 길러주기 위하여 일기쓰기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렇게 몇 달 지나자 읽고 쓰고 셈하기에는 큰 불편을 겪는 아동이 없게 되었다.
6학년 14명 중 여학생은 2명이었다. 이 중에 ○○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가정환경을 조사해 보니 살기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통 말이 없다. 분명 말을 듣고 할 줄도 아는데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니 책읽기는 엄두도 못 내었다. 옆에 앉은 학생의 말로는 책을 읽을 줄 아는데도 책을 읽지 않는다. 출석을 부르면 모기 소리보다도 적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답답하여 큰소리도 쳐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전에 담임하셨던 분들도 꾸중만 하셨기 때문에 옥이가 공포감을 갖는 것이 아닐까 ? 하는 생각에서 태도를 바꾸어 항상 관심을 갖고 대해 주고, 동화책 읽는 것도 권해 보았다. 한 3개월쯤 지나자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웃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책도 읽게 되었다.
며칠 후 ○○이 어머니께서 찾아 오셔서 벙어리 입이 떨어지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하셨다. 사실 내가 ○○이에게 특별이 해 준 것은 없었다. 그저 매일 조금씩 관심을 보였고 모든 활동을 기피하는 것을 참여 시키려고 노력한 것이 전부였는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참 좋았다. 내가 뭐 대단한 것이나 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 병아리 교사 첫걸음
학생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유난이 부스럼(염증)이 난 아동들이 많았다. 학교 약장을 열어 보니 머큐롬, 과산화수소, 붕산연고 등이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독을 한 후 붕산 연고만 발라주어도 상처가 잘 나았다. 아마 병원이 멀어서 의료혜택을 못 보았기 때문에 약효가 잘 듣는 것 같았다.
3월 말 쯤에 처음으로 교장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김 선생은 도대체 일을 왜 배울 생각도 안하고 안 하느냐는 것 이었다. 여기서 일이란 학생들 학습지도가 아니라 사무 관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처음 부임하였을 때 업무분장이란 것을 본 것도 같은데 처음이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몰랐고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그때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문서접수 및 발송, 당직명령, 출장명령이 전부였다. 그 당시에는 행정직 직원이 없어서 봉급이나 세입, 세출까지도 교사들이 하는 때였는데 직원이 3명밖에 없는 학교에서 나의 태도를 더 두고 볼 수 는 없으셨던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서무였다. 다음날부터 나는 헌 법령집을 찾아서 읽으면서 기안 하는 것부터 새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문서하나 발송하려면 기록해야 하는 장부는 왜 그리 많은지 기안지에 통제도장 받고, 문서발송대장, 문서통제대장, 관인날인기록부, 문서 사송부 등등…… 그러나 복무, 문서기록, 보안 등에 대하여 제대로 배운 것은 다음해 있었던 정기 사무 감사를 받고 난 이후였다. 사무 감사는 잘 못된 것을 찾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 잘못된 것을 알려주는 기능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덕분에 사무 관리나 복무 부문에는 내 경력에 맞지 않게 빨리 업무를 습득하게 되어갔다.
라. 푸른 꿈을 키우며
입탄국교는 본교로 승격 된지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각종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없었다. 교장선생님께서 학생들의 특기도 신장 시켜주고 성취의욕을 북돋워주기 위하여 가능한 많은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 제일 처음 도전한 대회가 5월에 개최된 학도체육대회 평창군 예선대회였다. 육상만 출전하기로 하고 5-6학년에서 선수를 선발하였다. 전제 50명도 안 되는 학생에서 선발하였고 그나마 여학생은 5학년이 중심이었다. 참가에 의의를 갖고 출전하기로 하고 꾸준히 연습을 하였다. 대회날 새로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14명의 촌닭들은 출전을 하였다. 개교 이래 첫 출전한 결과는 모두가 예선 탈락이었고 원숙이만이 200m에서 2위를 하는데 그쳤다. 학생들이나 나나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었다.
6월에는 반공 포스터,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학교에서 작품을 제출하면 교육청에서 취합하여 전시회를 갖고 시상하는 제도였다. 수상에 대하여 기대는 하지 않고 몇 명의 학생들을 지도하여 글짓기와 포스터를 제출하였다. 어느 날 아침 아마 6시 반 쯤 순자가 뛰어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순자가 낸 작품이 포스터 부문에서 2등에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어제 저녁 지방 뉴스시간에 방송에 나왔다는 것이다. 당시 평창지역은 난청 지역이서 KBS 중계소가 있었고 이 중계소에서는 지역뉴스를 전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밤에 잠도 잘 못자고 새벽같이 달려왔을까 ?
1971년 7월 14일 2년 4개월간 재직하셨던 박재석 교장선생님께서 노산국교로 영전하시고 본교에는 신리국교서 석운경 교장선생님께서 승진 발령을 받으셔서 2대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하셨다. 학교장 이취임 및 학기말의 어수선함 속에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9월 1일 개학을 하고 곧 운동회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제일 시급한 것이 운동장 문제였다. 지난해 교사 신축을 마치고 낙성식 겸 운동회를 하느라고 서두른 까닭에 말이 운동장이지 야트막한 산비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이것만은 도저히 우리 직원과 학생들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학부모님들의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당시 육성회는 폐지되었지만 육성회 임원 조직은 그대로 있었으므로 육성회 임원회를 소집하고 교장선생님께서 지난해 교실과 숙직실 신축에 협조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리고 운동장 정지작업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학부모들은 학교의 요구에 선뜻 응해 주셨다. 회의가 끝난 후 임원들이 마을 호수 비례에 의해 운동장을 나누고 다음날부터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이튿날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입탄리 전체 주민들이 총동원되었다. 지게에 소쿠리를 달아지고 삽, 괭이, 거기에다 밭을 가는 쟁기, 서래 까지 동원되어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 직원들도 수업이 끝나고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달려들어 일을 도왔다. 다행이 바닥이 밭으로 사용하던 참흙 땅이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작업을 하면서 나는 이곳에도 하루빨리 트럭이라도 다닐 수 있는 농로를 내어야 학부모님들의 고생이 적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이곳은 벽지였기 때문에 무상급식으로 옥수수 빵을 제공하였는데 이 빵을 트럭으로 약수리까지 갔다 놓으면 매일 2명씩의 학부모들이 동원되어 4km를 지게로 져다가 주는 실정이었다. 학교에서 교재교구를 구입할 때도 학부모들이 일일이 지게로 져다고 운반해 주셨다.
운동장 정지 작업은 5일간이나 걸렸다. 작업도중 작업 할당량 문제로 조그만 시비는 있었으나 큰 사고 없이 끝났다. 학생들과 함께 뒷마무리를 하고 지금까지 설치하지 못했던 운동기구를 설치하고 수업이 끝난 후 틈틈이 운동회 연습을 하였다. 전교생이 160여명이고 직원이 3명뿐이라 운동회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 하는 운동회에서 꾸미기 체조를 맡았는데 연습에 목이 쉬어버린 적도 있었다. 여러 가지 준비물로 만들고, 등용문, 개선문 글자도 새겨 세우고 규모가 큰 학교에서 하는 것을 모두 흉내를 내다보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가을 대운동회는 10월 1일 개최되었다. 개교 기념으로 10월 1일 하는 것이 전통이란다. 이곳에서 운동회는 학교만의 행사가 아니고 주민 전체의 축제였다. 입탄 주민 전체가 아침부터 학교에 나와 학생들과 함께 뛰고 웃으며 즐기는 행사였다. 특히 금년에는 학부모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하여 일반인 참여 프로그램을 많이 넣었으므로 인기가 좋았다. 특히 장로님이기도 하신 교장 선생님께서 운영한 종목이 재미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지도한 꾸미기 체조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교직원이 적어 마을 청년 몇 명이 도와주었지만 운동회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다행이 아무 사고 없이 운동회를 끝마쳤다.
마. 재건학교 개교
운동회가 끝나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이곳 학생들의 중학교 진학률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셨다. 나는 지난해 진학률은 60%정도이고 금년에는 70%정도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 후 나는 이이야기를 거의 잊어버렸을 즈음 우리 직원들에게 협의 겸 이야기하셨다.
“이곳 입탄리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소녀들이 60여명이 넘고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이유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농한기를 이용해 지도해 보도록 합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틈에 비진학 학생들의 실태까지도 파악하고 계셨다. 우리 직원들은 처음에는 반대하였다. 야간에 교사를 사용하면 관리가 어렵고, 야간에 하는 활동이라 다 큰 청소년들 생활지도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으며, 직원 3명 중 출퇴근 하는 1분을 제외하고 2명이 지도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들이 힘든 줄 알고 있지만 이런 오지에서 이런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것도 우리 교육자들의 사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여러 차례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처음에는 마지못해 응낙하였다.
가을 추수가 거의 끝난 11월 1일부터 입탄재건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수업에 들어갔다. 교장선생님은 윤리를 나이가 많으신 교무 선생님은 국어를 나는 영어, 수학, 사회를 맡았다. 입탄리는 4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는데 속칭 아칭골이라는 마을은 학교를 오려면 해발 200m정도 되는 산을 넘어와야 되어서인지 한 명도 없고 나머지 3개 부락에서 30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문제는 이들의 나이와 학력이 문제였다. 금년 2월에 졸업한 청소년부터 며칠 있으면 군에 입대할 20세 청년까지 있는가 하면,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친구들이 오니까 따라온 청년까지 다양하였다. 공부를 하여야 하겠다는 열정 반 호기심이 반이라고 할까? 햇병아리 교사인 나는 덩치가 나보다도 큰 처녀, 충각들 앞에 서려니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교회 장로이신 교장선생님은 성인들을 지도하신 경험이 많으셔서 지도를 잘 하셨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억지로 시작한 나였으나 학생들과 접하는 시간이 제일 많고 나이가 거의 비슷했던 내가 이들과 제일 친해지고 이 일에 점점 빠져 들어갔다.
바. 산골짜기의 전기불
재건학교는 밤에 하는 야간학습이라 조명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대한등이라는 커다란 호롱불 4개를 커놓고 수업을 하고 다음날은 일찍 온 학생들이 호야(유리덥개)를 닦아서 사용하였으나 어두운 것이 문제였다. 여러 가지로 고심하던 중 교육청에서 사용하던 중고 발전기를 관리전환을 해서 받아서 사용하였다. 발전기를 돌려 밝은 전깃불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자 전기의 혜택을 보지 못하던 이곳에서는 대 환영이었으나 연료(휘발유)가 문제였다. 처음 한 드럼은 학교에서 우선 구입하여 사용하였으나, 그 다음에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부담을 지울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교장 선생님께서 평창읍내 기관장님들 모임에서 협조를 부탁 하셔서 평창기관장님들이 휘발유 1드럼, 군청에서 1드럼을 제공해 주셔서 해결하였다. 또한 당시 문화공보실에서 근무하셨던 교장 선생님 제자분이 전선을 제공해 주셨다.
재건학교 수업에 사용하는 교재는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발간한 재건학교 교재를 사용하였다. 재건운동본부 평창군위원회를 통해 제공 받고 가격은 80원 이었으므로 큰 부담은 가지 않았으나 교재의 내용이 좀 문제가 있었다. 이 교재는 60년대 초반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발간하여 중학교 비진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간하였으나 그 당시 (70년대초)중학교 교육과정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3집까지만 사용하고 나중에는 평창여중 교장 선생님께 부탁드려 중학교 교과서를 참고하여 프린트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재건학교 학생들에게 소속감을 갖게 하기 위해 수업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 마다 재건학교 교가(재건국민운동본부 제정)를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 우리들은 자라나는 푸른 솔이라. 하늘에 흰 구름을 만지려는 …… ” 이렇게 큰 소리로 나도 교가를 부르고 나면 하루에 피곤도 잊은 채 간단한 청소 후 하교를 시키곤 하였다.
그런데 재건학교 운영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첫째로 밤에 여학생들이 3-4km를 떨어진 곳에 오는 관계로 밤10시 넘어서 집으로 귀가할 때 짓궂은 청년들이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무서워서 밤에 다니기 힘들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동리별로 집단하교를 시키고, 인원이 적은 곳은 내가 귀가할 때 마을 중간까지 바라다 주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교장선생님께서 교회 장로이신 관계로 기독교 선교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 지역에는 ‘성덕도’라는 유사 종교가 있었는데 이들의 방해였다. 나이든 처녀 총각들이 밤에 학교에 나오는 것을 풍기 문란이라거나 혼사 길이 막힌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장 선생님께서 재건학교 학생들 집들을 가가호호 방문해서 학부모들을 설득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수업 도중 발전기가 정지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수업은 구교사에서 하였기 때문에 전기불이 꺼지면 1km떨어져 있는 신관까지 뛰어가서 발전기를 다시 돌리곤 하였다. 가끔은 여학생들이 만들어 온 시루떡으로 조그만 잔치를 하는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술을 먹은 동네 청년들이 들어와 소란을 피운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싫은 것을 억지로 시작한 일인데 자꾸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재건학교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감기를 달고 살았다. 감기에 목이 잠기면 학생들이 집에서 기른 닭의 달걀을 가져다주며 목에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겨울 방학이 다가오자 교장 선생님께서는 연세대학교 기독교청년회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셔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12월말에 2명의 대학생이 와서 사전 답사를 하고 1월 6일부터는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내려와서 봉사활동으로 지도를 하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내려오자 우리 직원들은 좀 쉬기로 하였고, 나도 며칠 휴가를 내고 고향에 다녀왔다.
사. 서울로 수학여행
일주일 정도 고향에 가서 쉬고 돌아와 보니 우리 재건학교는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연세대 남학생 4명과 이화여대생 2명이 지도하고 있었는데 하루 5교시씩 10시반 까지 지도를 하고 기타 반주에 맞추어 건전가요와 율동까지 지도도 하면서 지금까지 잘 나오지 않았던 학생들도 나와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으며 영어나 수학 실력도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이 대학생들 중에서 개인 사정으로 4명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2명(이호연, 남정하)의 남학생은 계속 남아 2월 15일까지 지도해 주었다. 2월 15일 수업을 마치고 송별회를 하였다. 부락별로 학생들이 가진 실력을 총발휘하여 준비한 음식으로 조촐한 송별회를 마치고 많은 재건학교 학생들의 아쉬움 속에 이 두 명의 대학생들도 서울로 떠나갔다. 학생들이 떠나자 방학 전 처럼 우리 교사들이 다시 지도하였으나 활기도 떨어지고 학생들도 줄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교장선생님께 여러 가지로 노력하신 덕분에 1972년 4월 9일 서울과 인천으로 수학여행 길에 올랐다. 본교 5-6학년 학생들과 재건학생들을 52명이 대상이었다. 숙식은 서울 청산여자상업전수학교 고명균 이사장님이 제공해 주셨고, 당시 평창과 영월이 지역구였던 이우현 국회의원님이 버스 한 대를 제공해 주셨다. 잠은 청산여상 강당에서 잤는데 첫날 이사장님이 시골 아이들이라 목욕을 못 했을 거라고 단체로 목욕을 시켜 주셨다. 저녁에는 청산여상 학생들의 장기자랑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다음날은 지난번 겨울방학 때 내려와서 지도해 주었던 대학생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서울 시내 안내도 해 주었다. 서울의 고궁과 창경원 인천의 자유공원과 산업체 등을 관람하고 2박 3일간의 수학여행을 마쳤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것은 입탄국교 개교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마친 후 재건학교 문고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서울 수학여행 때 서울청산여상과 연세대 학생들이 마련해준 책, 그리고 마을문고에 있었던 책을 모아서 재건학교 문고를 설치하고 학생들이 대여하여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여름방학 때는 연세대생으로 겨울방학때 봉사하러 왔던 김문규 학생이 100여권의 책을 갖고 직접 방문하여 주었다. 4월 중순에 접어들자 농번기가 시작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결석생이 많아졌다. 농번기 기간인 10월말까지 휴교하기로 하고 월 1회씩만 모이기로 하였다.
아. 서울 송촌국교와 자매결연 및 농로개통
서울 송촌국민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다. 5월 중순경 교장 선셍님께서 서울 중앙교육행정연수원에 연수를 받게 되어 입교하셨는데 자유 토론 시간에 학교실정을 말씀하시고,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자 함께 연수를 받으시던 서울 송촌국교 교장 선생님께서 쾌히 승낙하셔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자매결연 후 서울 송촌교에서 많은 학용품과 도서를 보내 주셨다. 학용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전교생 150여명이 1년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학교에서는 답례로 싸리비를 200 여 자루 만들어 보내 주었고, 여름에는 우리 고장 평창의 특산물인 옥수수를 보내 주었다. 여름 방학에는 지난 봄에 우리 학생들을 초대해 주었던 서울 청산여상 대표학생들의 방문이 있어 우리 재건학생들과 만남이 있었고, 자매결연을 맺은 송촌국교 교장선생님과 학생대표들의 방문도 있었다. 특히 이번 방문에는 축구공과 배구공을 많이 가져오셔서 우리 학생들이 너무 좋아하였다.
1972년 가을이 되자 당시 전국 휘몰아쳤던 새마을 운동은 이곳 입탄리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새마을 지도자가 위촉되고 부녀회, 4H회 등이 조직되고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반가운 것은 농로(마을 길)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시 입탄리로 들어오는 길은 두 곳로 나누어져 있었다. 약수리에서 내려 모래재를 넘어 오는 길이 하나 있고, 다른 길은 대상리에서 들어오는 길이었다. 이 대상리에서 오는 길은 대상리에서 내려 평창강을 건너서 들어오는 길이다. 이 평창강은 여름에는 여울을 이용하여 신발을 벗고 건너고, 가을철이 되면 섶다리를 놓아 봄철 큰비가 내리기 전까지 이용하였다. 대개 평창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약수리 길을 이용하고 제천이나 원주에 볼일이 있는 분은 대상리 길을 이용하였다. 대상리에서 오는 길은 큰 고개가 없어서 냇가 옆으로 길을 만들어 입탄리 입구(1반)까지는 트럭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학교까지를 잇는 공사가 추진되었다. 추수가 끝나고 발파작업을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 되었다. 이 공사는 73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도로가 완공되어 트럭이 마을에 들어오던 날 마을 사람들은 트럭에 올라타 새마을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물론 이 공사는 대상리에 다리가 놓이지 않아 비가 많이 오면 사용할 수 없는 미완성 공사였다. 우리 학교에서도 교육청에 교사 증축을 건의하였다. 지금까지는 구교사와 신교사가 1km 가량 떨어져 있어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다.
가을 추수가 거의 끝나고 11월에 다시 재건학교를 개교하였다. 지난해 경험을 살려 금년에는 발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용 배터리를 구입하여 형광등에 연결하여 사용하였다. 조명이 밝고 중간에 꺼지는 일은 없으나 1주일에 한 번씩 학교 기사님이 어깨에 메고 교육청에 갔다가 오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래서 재건학교 남학생들이 교대로 평창읍 교육청까지 메고 가서 충전을 해 사용하였다. 재건학교는 73년 3월까지 운영하고 2년 동안 재건학교 과정을 끝마쳤다. 그동안 어려운 점도 많았으나 조그만 보람도 찾았다. 중학교 졸업장만 없을 뿐이지 웬만한 중학생 못지않은 실력을 갖게 된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재건학교 학생들은 4H회에 가입하여 핵심요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자. 배드민턴부 조직 운영
지난해에 이어 72년에도 소년체전 예선대회에 육상부가 참가하였다.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우리 3명의 직원들이 의논해 본 결과 육상이 우리 학교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선 학생들의 영양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체력이 너무 열세이고, 운동장이 비좁아서 직선코스로 60m도 나오지 않는 곳에서 노력을 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는 1교 1운동이라고 해서 한 가지 종목을 지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키가 적으면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고, 다른 학교에서 많이 하지 않는 종목을 생각하여 선택한 것이 배드민턴이었다. 또한 배드민턴은 학생들에게는 흥미가 있는 운동이었다. 나 자신 배드민턴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못해 규칙도 잘 몰랐다. 책을 찾아보며 지도하여 73년 4월 소년체전 평창군 대회(평창국교)참가하였다. 우리는 배드민턴 남자부만 출전했다. 지도기간도 짧고 경험도 없어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다음 해 출전을 대비해 군 예선대회가 끝난 후 5학년과 4학년을 대상으로 남·여 선수를 선발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1974년 소년체전을 대비한 예선대회가 금년에는 9월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배드민턴은 실내 운동이라 실내체육관에서 연습을 하여야 하나 당시 평창군에는 실내 체육관이 있는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수업만 끝나면 운동장에서 맹렬히 연습을 하였다. 내가 제일 강조한 것은 체력이었다. 당시는 순환운동이라고 해서 체력을 강화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좋게 말해서 순환운동이지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체벌 수준이었다. 당시 초등부 단체전은 2복 1단이었다. 단식경기를 하려면 체력이 필수적이었다. 비가 안 오면 운동장에서, 비가 오는 날은 실내에서 체력훈련을 실시하였다.
배드민턴 지도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예산 문제였다. 라켓은 학생들이 개별로 구입하여 사용하였으나 샷틀 콕은 제공해 주어야 하는 데 이것이 보통 많이 소모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샤틀 콕은 도매가격으로 80원 정도였는데 매일 10개 이상의 샷틀 콕이 소비되었으므로 3학급짜리 학교 예산으로는 뒷받침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우선은 체육사에 가서 구입을 해다 사용하고 차후에 학교에서 대금을 지급하였다.
배드민턴 연습은 주로 운동장에서 실시하였다. 그런데 그해 5월부터 교사 증축공사가 시작 되었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공사 자재가 운동장 여기저기에 쌓이면서 연습에 지장이 있었다. 그때마다 배드민턴 지주를 여기저기 옳기면서 연습을 하였다. 예선 대회는 9월 말로 예정되어 있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나는 휴가계획을 열흘(방송대출석기간)만 하기로 하고 훈련계획을 세웠다. 여름방학 대부분을 아이들과 보내다 보니 나도 검둥이가 되고, 아이들도 검둥이가 되어갔다. 방학기간이라 공사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운동장 전체를 사용하기로 하고 배드민턴 지주를 여러 개 세워서 활용하였고, 샷틀 콕은 내가 휴가 중 많이 사다가 무한정 투입하였다. 남학생은 지만준이가 여학생은 이선녀 학생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 나는 이들을 단식에 출전시키기로 내정하였다. 특히 지만준 학생은 나도 이기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다.
소년 체전 예선대회는 9월 27일 진부국교에서 개최되었다. 여름방학 내내 땀을 흘려서인지 남녀부 모두 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다. 남자부는 방림국교와 여자부는 노산국교와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샷틀 콕이 네트를 넘어 왔다 갔다 할 때 가슴 졸이는(속이 타는 느낌)것은 운동 지도를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결국 남녀부 모두 우승을 차지하였다, 본교 개교 이래 최고의 경사라며 학부모들이 기뻐하셨고, 우리 아이들도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하였다.
3. 글을 끝내며
교육의 사회화는 벽지교 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 같다. 처음 이곳 입탄도 처음 부임해 오는 선생님을 배척하였고, 1년 이상 근무하는 교사가 적었다고 한다. 그동안 여러 선배님들이 노력하신 결과 이제는 지역사회 학교가 된 것이다.
나는 좀 늦은 군 입대관계로 10월 4일 2년 10개월 근무하였던 입탄을 떠나왔다. 새로 지은 교사 준공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 교실에서 수업도 못해보고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떠나올 때 주민들이 보여 주신 과분한 송별회, 학생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짐을 들고 4km나 떨어진 약수리까지 따라온 재건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도서나 벽지 초임지 학교를 떠나며 울지 않는 교사가 별로 없다고 들었다. 울고 왔다가 울고 가는 곳이 벽지 학교인 것 같다. 그 후 76년에 입탄에 한 번 다녀왔다. 배드민턴부는 그 후 예산문제로 남자부만 도 예선대회에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결국 전국대회에는 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규칙도 잘 모르면서 지도하는 초보 선생님의 지도에 잘 따라준 학생들이 고맙기만 하였다.
내가 처음 부임할 때 넘던 구불구불 하던 모래재 고개도 직선도로로 넓어졌다고 한다. 이제는 전기까지 가설되어 문화시설도 좋아졌다고 들었다. 이번 수해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하루 빨리 수해가 복구되어 더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며 부끄러운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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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1979년 경기도 양평군 원덕교 재직시
도서벽지 교사 수기 공모에 제출 하였던 김기완선생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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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이에게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던 원고를 이제야 송부하네.
오래전에 써놓은 글이라 찼는데 시간이 걸렸고,
다시 읽어 보니 옛 생각도 나지만, 뭐 특별이 한일도
없는 것 같고.
그러나 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 과장된 부분,
잘못 기억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네.
이런 점들이 오해가 없도록 부탁하네
2015.06.13
김기완
위 글은
선생님이 위 작품을 제게 보내며 메일에 남겨 주신 글~
선생님께서는 글의 공개를 꺼려 하셨지만
고향의 생생한 살아있는 역사이기에
간곡히 부탁하여 원고를 받아 여기에 올릴 수 있게 됨을
선생님게 감사 드리며
기쁘게 생각 합니다.
아니 주셨으면 섭섭할뻔 했습니다.
전혀 모르던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오지 산골의 아득함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진실로 감사드려요!!
선생님!
이 글을 읽으니 두메산골 오지 우리 고향에
초임지로 부임 하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그리고,고향을 변혁시킨 선생님의 공로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됩니다.
이제 막 개교 하여 부실하기 짝이 없던 산골 학교를
교육의 전당으로 단단한 기초를 다져 주시고,
두메산골 주민과 동네 청소년에게 신문화 신지식을 전파하며
개몽의 중심에서 젊음과 열정을 다 쏟으신 교육적 열의
간략히 적은 글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피 땀이 스며 있는지
가슴을 칩니다.
기억 저편에 가물 가물한 그 당시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기록 관리 해 주셔 고맙습니다.
계속>
나의 고향 입탄에 대한 선생님의
남다른 애정 관심 열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커다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고향 사람들은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늘 만나면 이야기 하고 고향분 모두의 선생님으로 기억 하고 있답니다
늦게나마 고향분 모두의 마음을 담아
선생님 노고에 깊은 존경심과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선생님!
감사 합니다.
소중한 사람에겐 소중한 일만 남기고 전파 되는 법,
귀한 후배님이 있기에,
소중한 글도 공유 할 수 있고
우리 모두가 나눔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감사를 더불어 보냅니다.
김 선생님은
입탄 우리모두의 영원한 선생님이셨습니다.
먼저. 송화 마니고맙다는말
을 전하는바 김기완.선생
님감사합니다 먼저 입탄
국민학교 4회졸업생 감사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길
을 찾아 만들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찻고
또선생님은 승낙을하여서
오늘날 선.후.배들이
애정을 갓게된것 않인가
생각듬니다 4회졸업선배들
정말.정말 고맙다
여러분들에 우정에 진심
을담아 찬사를보냄니다
여러분들이 오늘가고있는
이길이 뒷사람의 이정표
가되길 기원합니다 홧팅
후배님도 남다른 고향의 열정이 있기에 참으로 감사해요.
누군들 가난과 고생이 없는자 어딧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세상에서 성공하고
여유로운 삶의 그늘을 내려다 볼 수있는 넉넉함이
우리를 더욱 알차게 만들어 내지요.
참 삶이란 아름답습니다.
범아!
우리 입탄국교를 졸업한 많은 선후배 동문에게
특히 4 5 6학년을 선생님게 배운 우리동창은
김기완선생님은 큰 스승님이고,
그 한분이 10명의 스승 부럽지 않은 큰 가르침이 있었고,
스승의 사표 였고, 우리의 성장기에 큰 울림을 주셨다.
가난때문 울친구들 배움이 짧았지만 험난한 이 세상을 꿋꿋이 잘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큰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 되네~
그 깊은 산골짜기 암울한 시기 선생님을 만난건
우리에겐 큰 행운이 었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 가이 없네~~
@송화 이운용 감사함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 오네,
누구든~~~
아우님의 큰 마음이 절로 공감을 불러 옵니다.
입탄을 소재로 쓰신 "산골짜기의 푸른 꿈"수기는 현대판"상록수" 소설이라 명명해도 손색없습니다.
일제 강박기 암울한시절 애국심 하나만으로 문명퇴치 운동에 앞장 섰던
주인공 "채명신"의 生, 오로지 어린 아이들의 문명 깨우침에 자신을
송두리째 받치고 떠나간 참다운 처녀성이었지요.
어쩌면, 김기완 선생님도 그런~
새상떼 묻지 않은 처녀 선생님으로 산골 오지에 초임하셨고,
올곧은 심성으로 생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으니까요.
평생, 제자 양성에 헌신하시고 교직 최고의 꽃 교장직까지 오르시어 퇴직하셨지만
그시절 순박함 꿈은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습을 확신합니다.
이제는 그 순결을 우리가 이어야 합니다.
공모에 응하신 믿음직한 생의 발로~
참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여기에 수록된 모든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옛 기억을 가꾸고 영원히 보존하여 나가야 되겠습니다.
참 잘하셨어요.
망설이다가 주신 글,
겸손의 용기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이또한 정성 기울여 올려준
운용 후배님에게 진실한 마음을 담아
감사를 보냅니다.
옛 시절을 보듭고 기억하는 모든분들과 함께 많은 그리움을 나누며
감성의 보금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자도 빠질까 조심조심 읽어 내렸습니다.
어쩌면 입탄에서 살아오신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사실에놀랐습니다.
생생한 기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하고요. 찬찬히 옛 기억 떠 올려보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나요!
수 번 바뀐 강산은 세월에 갇혀 옛 고향은 오, 간데 없었는데
선생님의 글마음으로 다시 살아 돌아왔습니다.
좁고 비탈진 굽은 길도, 전기불 대신 호롱불도 이 글속에 고스란히 살아 남게되었으니까요.
어찌 잊으리오. 이 오랜 입탄의 역사적 보물을~
고귀한 선생님의 진심이 서린 생명의 글은 영원히 간직하렵니다.
선생님 삶은 성공하셨습니다.
복된 생을 축복드립니다.
총각 선생님-----김 기완-----
수기 공모전에 출품하신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습다.
가슴이 메여 왔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들의 어린시절~기억 저--ㅡ편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림그리듯 끄집어 내셨습니다.
오지학교 첫 부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그땐 몰랐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울고왔다 울고가신 길이 역역히 보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항시 건강하세요.
가슴에 찡~함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모두의 감성...
입탄리 고향을 둔 사람이라면 진정
꼭 같은 마음 일 겁니다.
소수가 아닌
많은 입탄 출신 분들이 지금 우리 같이
선생님의 글 마음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댓글달기도 부담스러울정도로 사실주의 있는그대로의글 첫머리에 아픔을 표현한글
나는 현장에서 보았고 느꼈던 사람으로 너무나 가슴아픈 일들이 였습니다.
아마도 그당시 역사를 그누구도 표현하기 어려운 기억들을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해주신
선생님이 계시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모두가 공감하는
저 먼 기억들...^^
선생님이 글로서 남기니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영원히 간직 할 우리 고향의
역사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