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적(靜寂)의 중요함
본장에서는 「마음의 평온함」 「평안(平安)」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선 나는 「정적이라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대문명의 가장 문제점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결국 「너무 바쁘다」 혹은 「시끄러움 속에 있다」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여간 시끄러운 문명이다. 이 문명의 측면을 음악적으로 본다면, 예를 들면, 재즈라든가 록이라든가 마음이 고요한 사람에게는 소음으로 밖에 생각할수 없는 듯한 음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현대문명의 하나의 앙식이리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 전의 클래식 음악의 시대가 지나고 그러한 고급령이 지도하고 있지 않는 경우의 지옥적인 음악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외는 있다)
이것은 비즈니스맨에 있어서도 같은 것으로 「하여간 바쁘다. 전화, 팩스, 메일, 또는 손님, 방문이라고 하는 분 단위의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살고 있어서, 마음이 쉴 때가 없다」라고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적이라는 것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고 옛 도시인 교토나 나라나 가마쿠라 같은 곳을 문득 까닭 없이 걷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에서 고대 불상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을 쉬고 싶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이고 또 일상의 시끄러움 속으로 그 모습이 사라져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닐까 한다.
정적의 중요함은 배우지 않고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인데 사람은 때때로 일 년에 한 번 혹은 수년에 한 번 그러한 정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면 신주쿠의 부도심 같은 대도시의 50층짜리의 초고층 빌딩 속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어서 「이런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문득 교토 같은 산사(山寺)의 처마 끝에 서성여보고 자기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름에 놀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 앉아서 서적을 읽거나 생각을 하며 정원석(庭園石) 등을 바라보면서 하루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문득 생각하고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보면 「대도시의 몇 십 층짜리의 고층 빌딩에서 바쁘게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과 「암자(庵) 혹은 절 같은 곳에서 조용하게 자기의 마음을 되돌아본다」는 것, 어느 쪽이 과연 인생에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면 일률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 사람은 화려한 것을 구하는 것이지만 문득 「마음의 고향은 거기에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러 가지 서류를 쓰거나 전화로 바쁘게 이야기 하거나 하는 것 속에는 진정한 마음의 편안함은 없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느낌은 지상을 떠나 저세상의 세계 즉 영천상계에 돌아가 보면, 더 깊게 되어온다. 지상적인 바쁜 비즈니스 세계라는 것은 영계에 있어서는 매우 낮은 세계이다. 고급영계에 갈수록 마음은 조화되고 평안한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산들은 푸르고 들은 아름답다. 꽃은 어우러져 피고 나비가 춤추고 새가 날고 사람들은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영원한 지금」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하층 영계에 가면 사람들은 시간에 쫒기고 있는 것처럼 바쁘게 부지런히 일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물론 상단계의 지도령이라 하더라도 일 자체는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의 편안함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정적이라는 것은 역시 마음의 깊은 속에 있는 근원적인 욕구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정적을 구하는 마음이 어디인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적을 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찍이 혼의 고향에 있어서 맛보았던 감각이기 때문이다. 혼의 고향에 있어서 그러한 정적이 가져오는 행복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수도원 등에서는 하루에 일정한 시간, 관상(觀想) 혹은 침묵을 시키고 있는데, 누구와도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을 마련하는 이유는 「자기의 안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내적인 마음을 파낸다. 내적인 마음과 대화한다」는 것을 통해서, 옛날에 혼이 맛보았던 향수를 상기할 수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 중의 하나이다. 외면적인 화려함을 구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혼에 있어서는 위아(爲我)에 가까운 방향이다. 외측인 면이고 허위의 부분이다. 그런데 정적을 구하는 마음은 혼의 깊고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구해가는 행위, 즉 신불에게로 향해가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정적이 가진 의미라는 것, 그 중요함이라는 것을 현대인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정적인 채로 산다. 정적 안에서 생각한다. 정적 안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하나의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바쁜 매일이면 일수록 바쁘게 여러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정적한 시간을 가진다」라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을 되돌아보고, 여러 가지 이세상적인 파동에 흔들리는 일 없이, 마음의 즐거움을 맛보아가는 것이다. 이 마음의 왕국, 마음의 왕국에 있어서 자유의 만끽은 누구에게서도 침해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이다. 이 영원한 행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쁘게 사는 사람이면 일수록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그러한 정적의 시간을 가져봐 주세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조용하게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오 분이라도 십 분이라도 십오 분이라도 상관없다. 그러한 시간이 있는 것만이라도 인간의 혼은 그만큼 영적인 순간을 가지는 것이 된다. 그 영적 순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