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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시대에 불교가전해진 것은 묵호자 곧 아도화상이
제19대눌지왕(419-458)때에 고구려로부터 와서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善山)에 이르러 신라인들이
불교를 싫어하여 모례의 집에 숨어서 3년 동안 있었는데 그때 양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향(香)과
경상(經像)을 보내왔다.그러나 이름과 용도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그것을 아도화상은 아는 것이라 말하여 주었다.
“이것은 향이고 태우면 향기가나고 신령한 성신에게 통하는 것이다. 성신은 삼보(三寶)인데
삼보 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삼보에게 태우고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마침 그때에 왕의 딸이 병이 심하여 의사를 구할 때에 스님이 왕성에 들어가 분향하고
발원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으므로 왕이 기뻐하여 절을 짓고 불교를 일으키게 하였다.
또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그런데 그때에 신라 풍속이 검소하여 초가로 흥륜사(興輪寺)를 처음 짓고 스님께서 설법을 하였다.
모례의 누이 史氏도 비구니가 되어 삼천기(三川岐)에 영흥사(永興寺)를 지었다.
조금 있다가 아도화상(묵호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21대 소지왕(비처왕: 479-500)때에 아도화상이 시자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는데 의표가 묵호자와 같았고, 그가 머무른 지 수년 만에 병도 없이 죽어 그 시자 3인이 그대로 머물러 있어 경율(經律)을 강독하니
왕왕이 신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삼국유사 아도기라조)
이와 같이 향을 피워 신성과 통하게 하는 의궤(儀軌)로서 발원하여 기도로서 병을 고치는 주법을 행하였다.
이차돈은 신라의 순교자다.
신라 22대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514-540)은 불교가 신라에 들어 온지도 100년이 넘은 시기에 이르러
법흥왕 14년(527)에는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시행하여 살생을 금하였으며 법흥왕 15년(528)에는
아도화상이 오자 왕이 불교를 전파하려하나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여 왕이 주저하였다.
그때에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차돈만이 불교의 전파를 주장하여 아뢰었다.
“소신의 머리를 베어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정 하소서„
하니 왕은“불도를 일으키려 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살생하게 하느냐?„ 하고 대신을 모아 말하기를
“승려들은 머리를 갂고 이상한 옷을 입고 말이 야릇하니 상도(常道)가 아닙니다.
만일 이 도를 행하면 후회가 있겠으니 신 등은 왕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차돈은“비상한 사람이 있고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이다.
불교는 깊고 묘한 것이니 믿지 아니 할 수 없나이다. 하니 왕이
“여러 사람의 말이 일치하거늘 네가 어찌 딴 말을 하느냐?„ 하고 옥졸을 명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차돈이 삼보에 서원하되
“내가 불법(佛法)위하여 형벌을 받사오니 내가 죽은 후에 이상한 일이 있을 지어다„ 하였다.
목을 베니 흰 젖이 목에서 솟아오르고 천지가 캄캄하여지고 하늘에 꽃비가 내리었다.
군중들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감히 불교를 훼방하지 못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그때 목을 찍으니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경주) 꼭대기에 떨어지고 뒤에
그곳에 랄추사(剌楸寺)를 지었다 한다.
현덕 왕 9년(817) 국통 혜강(國統 惠降)등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고 흥륜사 영수(永秀)는
이 무덤에 모여서 예배하는 향도(香徒)들을 결속하여 단을 만들고 매월 5일에 영혼을 조상 하였다한다.
아도화상과 이차돈의 관계를 생각 아니 할 수 없지 않은가? 이차돈이 불교를 깊이 믿음에 아도화상을
친견하지 않았을 리 없고. 아도화상께서 불법을 설하지 않았을 리 있었겠는가?
그러면 이차돈의 순교의 정신은 아도화상 비법의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삼보의 영험력을 알고 믿어
신비한 가지력이 이차돈 순교정신 속에서 나타난 것이리라.
삼보 앞에 신비력을 얻으려는 발원은 곧 비밀 가지력을 나타낸다. 이것이 진언의 비결이다.
진언은 불보살에서나 있다 순수한 서원의 발원 진언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언이다.
순수한 서원으로 삼보에게 귀명하고 발원 하는 것을 불보살님의 가지력에 통한다. 이것이 진언의 비밀이다.
신라 24대 진흥왕 (재위540-576)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로 7세에 즉위한 진흥왕 12년(551)
시대에 고려 혜량스님께서 신라로 귀화하셨다.
진흥왕의 뜻으로 승통에 추대되어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었다 한다.
이때 백좌강회 는 외적으로 부터 국가를 진호하는 것이고
진언의 비밀 호국경전인《인왕반야 바라밀다경》으로 강설 하였다.
팔관회는 여덟 가지 계행을 지켜서 그 공덕으로 악취와 잡신에게 회향하여 진호국가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러한 진언의 의궤의 의한 수법을 실행 하였음이다.
신라 진평왕 35년(613)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왔을 때 황룡사 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차리고
원광법사 등을 맞아들여 경법을 말하였다 하니 백고좌 란 무엇인가?
법회(法會)인데 사자좌(獅子座)를 百을 만들고 큰 스님 내를 모셨다. 설법하는 큰 법회를 말한다.
사자좌(獅子座)란 무엇인가?
부처님이 사람 가운데 師子가 되므로 부처님의 자리를모두 사자좌(獅子座)라 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獅子)의 우는 소리에 비유한말 사자가 소리쳐 울 때는 작은 사자는 용기를 내고
기타 일체의 짐승들과 새들은 도망쳐 숨어버리는 것과 같이 불타(佛咤)의 설법을 들을 때 보살(菩薩)은
정진(精進)하고 도(道)를 벗어난 악마(惡魔)들은 숨어 버린 다는 것,
이때 신라가 이웃나라인 백제와 고구려 침공을 막았다고 하니 진호국가 불사 가된다.
호국 적 불교의 수법이다, 이러한 호국 적 기도는 현교보다 비밀 경전에서 더욱 많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안함(安含) 법사는 진평왕 22년(600) 고승(高僧) 혜숙(惠宿)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왔다.
이듬해 중국 사신과 동행(同行)하여 중국에 가서 대흥성사(大興聖寺)에 있으면서 현지(玄旨)를 이해하고
그 후 27년에 우전 국 사문 비마진체와 사문 농가 파 등과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해동고승전)
또 신라 진평왕(眞平王) 22세 때 혜숙대사가 처음에는 랑도(郞徒)가 되었다가
뒤에 안강현 혁선촌(지금은 安康縣 弈谷村이 있다.)에 20여년 숨어 살았다.
국선 구담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국선공은 귀족이다) 구담공은 이름이 높았다.
공이 사냥을 즐겼다 하며 스님과는 친분이 있었다한다.
공이 사냥하여 살생을 많이 하게 되므로 스님께서는 그의 살생을 막기로 생각했다.
하루는 구담공이 사냥을 가는데 따라갔다.
사냥을 하고 고기를 구워먹고 삶아먹고 하므로 스님께서자신의 다리를 베어 소반에 담아 내 놓으니
옷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지라 공이 깜짝 놀라 묻는다. “스님 어찌된 일이요„ 하니 스님대답
“내가 보아 왔는데 공이 어진 사람이라 능히 자기를 미루어 물건에 통하리라하여 따라왔더니
지금 공이 좋아하는 것은 오직 살생만즐기어 다른 물건을 해치고서 자기를 봉양할 뿐이니
어찌 어진군자(仁人君子)의 할 일이요„ 이리 대답하고는함께할 사람이 아니다 하며 가버렸다.
혜숙스님이 가버리고 소반을 본 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반에 고기가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깊이 이상하게 생각한지라 이 일을 조정에 아뢰니 진평왕이 듣고 사람을 보내어 맞으려 했다 한다.
얼마 후 스님께서 입적하시매 마을 사람들이 동쪽에 있어 고개 모퉁이에 장사를 지냈더니 그 마을 사람들이
고개 서쪽으로 오다가 스님을 길에서 만났었다.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더니 스님 대답 “오래 이 땅에 살았으므로 다른 곳에 놀고자한다„ 하였다.
서로 작별을 하고 반리쯤(半里)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스님을 길에서 본 그 사람이 동쪽에 이르니
장사 지내는 사람들이 아직 있는지라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니 무덤을 헤치고 봄에 짚신 한 짝 뿐 이었다.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이라는 절이 있으니 곧 그가 있던 곳이라 하고 또한 부도(浮圖)도 있다.
명랑(明郞)법사 스님께서 정통적인 진언의 비법을 수행한 스님 자장율사 생질인데 사문이 된 분이시다.
선덕여왕(善德女王)원년(632)에 당나라로 들어 가셨다가4년(635)되어 귀국 하셨다.
귀국 하실 때 용왕이 청하므로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받고 용왕이 주는 황금(黃金) 천량을 가지고
땅 밑으로 잠행하여 나오시니 이미 스님의 자택 우물 밑으로부터 솟아 나와서 본집으로 절을 만들고
용왕으로부터 얻은 황금으로 불탑을 건립하고 불상을 장엄하니 그 광채가 찬란하므로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스님의 아버지는 사간(沙干) 재량(才良)이시며 어머님은 남간부인(南澗夫人)이신데 자장율사의
누이 되시는 분이다. 그리하여 진언의 비법(신인비법)을 많이 행하여 중생을 교화 하셨다.
스님께서는 진언의 비밀 신인비법을 수행하시므로 신인종(神印宗)이라 하고 종주(宗主)인 조사(祖師)이시다.
문무왕 8년(668)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케 하고 다시 신라를 치려고 마음이 변하여
당나라(高宗)의 설 방(薛邦)으로 하여금 군사 50만을 거느리고바다로 쳐들어왔다.
문무왕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여 모든 신하를 모아 방어할 계책을 물으니 각간(角干:뿔한) 김천촌이
임금님께 가로되,
“근자에 명랑이라는 법사가 있어서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 받았다하니 청하여 봄이 어떨지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문무왕은 명랑법사를 청하여 물었다.
명랑법사 대답 하였다.
“낭산(浪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라는 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도량(道場)을 개설하면
좋을까 합니다.„
이미 때에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국경 바다위에서 돌고 요란하게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 왕이라
다급한 마음에 명랑법사에게 또 물었다.
“일이 이미 핍박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라 명랑법사 대답,
“여러 가지 고운 비단으로 절을 가설로 만들고 얽어 맬 지니다„ 우선 얽어놓고
뒤에 절을 세울 량으로 한 것이다.
왕이 여러 가지 고운 비단으로 절을 가설로 만들며 풀 칡넝쿨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유가(揄枷) 의
명승(名僧)(삼밀유가, 삼밀가지, 삼밀수행 하는 이름 높은 스님)12人(사람)과 함께 명랑법사님께서
상수(上首)가 되시고 신인비법(진언의 비밀법)을 지었더니 때에 성낸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
당나라 군사의 배들이 물에 침몰하니 물러났다.
그 후에도 다시 조헌(趙憲)으로 하여금 5만 명을 거느리고 침입하므로 역시 전과같이 함몰 시켰다한다.
스님께서 후손으로 제자 안혜(安惠) 낭융(朗融) 광학(廣學) 대연(大緣) 등 4대덕(大德)이 계셨다.
신라 선덕왕 1년(632)에 당 유학을 하고 오시면서 용왕으로 부터 신인비법을 받아 오셔서 자택을
절로 만들고 신인 문두루(만다라)법으로 중생 교화를 시작한 신인종은 진언불교다.
금광사, 원원사, 금산사, 돌백사, 현성사는 신인종의 유명한 절이다.
뒤에 중도종(中道宗)과 함께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이라불러졌다.
이조 3대왕 태종(재위1400-1418)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방원은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강행 하므로
태종17년(1417)에는 진언 밀주경이나 다라니 집 등 진언의 비밀법과 관계되는 서적을 불살라 버리게 하고
간신히 청우법(雨法) 시식수법(施食修法)만 남게 되었다 한다.
당시 불교의 11종파로 발달하여 왔는데 태종에 이르러 17종으로 묶어졌다. 이조 초에는 12종까지 있었다.
※十二宗 고려에 있던12종
①소승종(시흥종) ②률종(남산종) ③자은종 ④유가종(중도종) ⑤신인종(문두루종) ⑥지념종(총지종)
⑦해동종(도문종) ⑧화엄종 ⑨천태종(천태유자종) ⑩천태법사종 ⑪선종 ⑫조계종
당시 11종은 다음과 같다.
조계종, 지념종(持念宗), 천태종, 법사종, 도문종, 화엄종, 자은종, 중도종, 신인종(禪印宗), 남산종,
시흥종의 11종이었다.
조계종은 선종(禪宗)이고 지념종(持念宗)은 다라니 종으로서 곧 진언의 불교이고
신인종은 진언의 불교 중에 결인 비밀종이다.
천태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이 둘로 나누어 진 것. 이때 진언의 불교 신인종이
중도종(고려 때부터 있어온 불교종파)과 합치되고 중신종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뒤에 조선 세종6년(1424)에 부왕의 배불정책을 이어받아총남종 이조 太宗7년(1407)년에 남산종(南山宗)과
총지종(總持宗)을 통합하여 總南宗(총남종)으로 개칭됨.
다시 世宗6년(1424)년에 禪宗(선종)과 敎宗(교종)으로 폐합되면서 총남종은 천태종과 조계종과 합하여
禪宗(선종)이 되었다. 중신종 조선 초의 불교 종파의 하나다. 고려 때부터 있어온 중도종, 신인종을 합한
종파로 太宗初(태종초)에 11종을 합하여 7宗(종)으로 할 때 合宗(합종) 된 것이 7宗은 世宗朝(세종조)에
이르러禪(선) 敎(교) 兩宗(양종) 으로 다시 폐합되면서 중신종은 敎宗(교종)으로 되다.
이때 교종이 된 종파는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중신종이다.
태종이후 7종(宗)이었던 불교 종단을 폐합하여 2종으로 하게 되었다.
조계종(曺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總南宗)의 3종(宗)을 합치하여 선종(禪宗)으로 하였고,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의4종(宗)을 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하여
선(善)과 교(敎) 양종으로 만들어져 버렸다.
신라시대 명랑대사께서 진언의 불교 신인종을 널리 전파 하였으며 여러 번 외적의 침노를 신인(神印)의
진언 비법으로 물리쳤다. 명랑대사께서 진언의 비법을 즉 문두루 비법을 구사하는데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모신 것 이며 정통진언의 비밀 법 (정통 비밀법)의 차원 높은 수법 이였음이요, 명랑대사의 뒤를 이은
진언 비밀 법 스님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을 도운 광학, 대연, 등 두 큰 스님이시다.
명랑대사의 신인종이 중도종과 합하여 중신종이 되었고중신종은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과 합하여
교종이 되었다.
진언의 불교 신인종이 중신종으로 되고 다시 교종이 된 것이 세종6년(1424) 예조의 요청에 의하여 화엄, 자은, 시흥과 합하여 교종이 된 후 명종20년(1565) 승과를 폐지하므로 선교가 하나 되어 이는 융합된 통불교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혜통대사께서는 신라시대 고승(高僧)이다.
당나라에 가셔서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을 찾아 법을 구하였다.
스님께서 출가하기 전에 어느 날 물가에서 수달피를 잡아서 먹고 뼈를 버렸더니 뼈가 제 굴속으로 찾아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발심하여 출가 하셨다.
일찍이 문무왕 때 당나라에 들어가서 인도에서 오신 무외삼장 스님께 배우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3년 동안 섬겼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으므로 불을 담은 화로를 머리에 이고 뜰에 서있으니 이마(정수리)가
터지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하였다.
그때 무외삼장께서 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혜통스님의 벌어진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진언을 외우니
전과 같이 되었다. 머리가 본래 데로 되니 터졌던 자리의 흉터가 생기기를 임금 왕(王)자 모양이 되었다 한다.
그 후부터 王 자 흉터 가진 스님이라 하여 王화상(和尙)이라하고 크게 높여 선무외삼장의 진언의 비결
인결(印結)을 전수하였다.
그 후 하루는 당나라 공주가 병이 위중하므로 고종(高宗)이 무외삼장에게 구원하여주기를 청하므로
자기를 대신하여 혜통화상님을 천거하였다.
이에 혜통화상님은 전수받은 진언의 의궤에 따라 흰콩 한말을 은그릇에 담아놓고 진언을 외우니
흰콩이 흰 갑옷을 입은 신병(新兵)으로 변하여 병 귀신을 쫓다가 이기지를 못하므로
또 검은콩 한말을 금 그릇에 담아놓고 진언을 외우자 검은콩이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였다.
그 두 신병들이 힘을 합쳐서 병 귀신 을 쫓으니 홀연히 용이 나와서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혜통대사님은 그 후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하셔서 지념종(持念宗)의 종주가 되셨다.
진언의 불교 삼밀로서 진언을 염송 하고 관법을 닦고 계를 지키는 의궤로서 사람을 구하고 물건을 변화 시키며 또 진언(다라니:神呪)으로서 신문왕(신라31대왕) 제위(681-692) 문무왕의 맏아들 신라의 전성시대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가 배출된 시대)의 병을 고쳤다. 스님께서는 숙명(宿命)에 밝았으므로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고통을 겪을 때 스님께서 보아 주기를 청하므로 스님께서는 진언을 외워서 신문왕의
등창이 나았다 한다.
스님께서는 숙명(宿命)에 밝았으므로 그때 신문왕에게 가로되
“폐하께서 옛적에 재관(宰官)의 몸이 되었을 때에 신충(信忠)이란 사람에게 그른 판결(判決)하여 종을
삼았으므로 신충은 원한이 있어 환생할 적마다 보복을 하니 이 등창 또한 신충의 짓이라 마땅히 신충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명복(冥福)을 빌어 원한을 풀게 할 것이 니이다.„ 왕은 옳게 여기고 절을 세우고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 하였다.(경상북도 경주에 있었다) 절을 이루니 공중에서 소리가 나기를 王께서
절을 세워 주므로 인고(因苦)를 벗고 천상에 나니 원한이 풀렸노라. 하였다 한다.
효소왕의 공주(王女)의 병을 고치니 왕은 기뻐하였다 한다. 일명 총지종(總持宗)이라고도 한다.
지념종(持念宗)은 남산종(南山宗)과 합하게 되는데 이조 太宗7(1407)년이다.
그때 합치 되여 나타나게 된 이름이 총남종(總南宗)이고다시 世宗6년(1424)년에 禪宗, 敎宗으로 폐합되면서
총남종은 천태종과 조계종과 합하여 禪宗이 되었다.
진언의 비밀불교가 이와 같이 신인종은 교종 지염종은선종으로 되어서 나중에는 선교 양종도 없어지고
융합된 통불교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는 현재 어느 종파 이던지 불교행사를 집행할 때 천수경을 독송하고 또 시식을 하는 때나
각종 재를 올리거나 불공의 전반에 걸쳐 진언을 독송하는데 이것은 바로 진언의 비밀불교다.
이와 같이 현교에서 진언을 하고 있는 것은 융합된 통불교가 된 것이고 진언만 외우는 것은 구밀이고.
결인 만하는 것은 신밀이고. 관행만 하는 것은 의밀인데 신밀이나 의밀을 하지 않고 진언만 외우며
집행하는 모습 이것은 엄격하게 진언의 불교도 아니며 또 현교 쪽에서 보면 진언을 독송하니
의밀이나 신밀 없는 진언의 비밀불교를 하고 있으니 완전한 현교도 아니다 할 수 있다.
선종에서도 진언은 외우면서 신밀이나 의밀을 하지 않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여서
선 쪽에서는 선도 아니고 진언도 아닌 셈이 된다.
율, 선교, 밀교, 교종, 현교, 정토종, 이 분명했던 과거의 고려시대 十二宗 을 생각하여 보면
세종6년(1424)에 선교 양종이 통폐합 되므로 불교수행자가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불보살, 호법호주, 일체 성중, 의 세계를 어찌 알겠는가?천룡팔부는 옹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