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칠순에 80을 꿈꾼다. 자신의 삶이 완성되는 것을 미리 그려보기라도 하듯. 꿈 속 그의 모습은 모드 할머니다. 모드는 미국 작가 콜린 히긴스(Higgins)가 쓴 시나리오 ‘해롤드와 모드’(Harold & Maude)의 주인공. 우리나라에서는 ‘19 그리고 80’이라는 이름의 연극 또는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배우 박정자는 2003년 이래 이 작품만 네 번을 했다. 죽음에 집착해 있는 19세 청년 해롤드에게 삶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사랑스러운 80세 할머니 역이다. 모드 할머니는 배우 박정자가 꿈꾸는 삶의 롤모델. 자신의 마음 속에 모드 할머니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앞으로 80세까지 적어도 2년에 한번씩 ‘19 그리고 80’을 무대에 올린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는 지난 20일 저녁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마련한 <우리시대 예술가의 명강의> 프로그램에 초청돼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그의 삶, 그의 연극이야기를 풀어냈다. 예술가의집에 모인 약 100명의 방청객 중 한 사람으로 배우 박정자의 강의를 듣기 직전 잠시 그를 따로 만나 근황을 들어보았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연극인복지재단 사무실이 있는 근처 설치극장 정미소 건물 3층에서였다. 연극배우로서의 삶의 편린들과 함께 미래의 조그만 계획들을 들려주면서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다섯 번 모드 할머니 역을 하다 보면 이제 80이 되겠지... 그리고 난 진정 모드가 되는 거야."
그 누구보다도 발성이 뛰어난 배우. 무대 위에서 숨넘어가는 소리로 죽어가는 장면을 연기한다 하더라도 또렷또렷하게 그 목소리가 객석 뒤에까지 꽂힐 수 있는 배우.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카랑카랑했다.
강일중 지난 번 인터뷰 약속 때문에 전화를 드렸을 때 지방에 계시다고 했는데 무슨 일로 지방에 내려가셨는가요?
박정자 전남 장흥에 있었어요. 연극 ‘나는 너다’(정복근 작ㆍ윤석화 연출)로 지금 지방순회 공연 중이거든요. 예술의전
당에서 앙코르공연을 끝낸 후 경남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고, 두 번째로 장흥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
이 있었어요. 24일과 25일 주말에는 제주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있습니다.
강일중 지방에 순회공연 다니시려면 좀 힘들지 않으신가요? 얼마 전에도 지방순회 공연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
다만...
박정자 작년 11월 말부터 12월까지 뮤지컬 ‘어머니의 노래’로 지방 열 한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힘이 들지는 않아요. 버
스 타고 대여섯 시간 이동하거나, 한 군데 공연 끝나고 곧바로 다음 공연지로 떠나는 강행군이 있는 경우가 있
기는 하지만. 어쨌든 건강한 몸 덕분에 특별히 힘든 건 잘 모르겠어요. 감사하고 있죠.
강일중 지방 순회공연은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 하는데 대단하시네요. 내년이 칠순 아니십니까?
박정자 1942년생이니까 올해가 칠순이죠. 내년은 내가 연극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는 해예요. 1962년 대학(이화여대)
에 다닐 때 ‘페드르’에 출연했었으니까요.
강일중 아~! 그러시군요. 굉장히 의미가 있는 해인데 무슨 특별한 행사 같은 걸 준비하고 계시는가요?
박정자 몇 주년이다 해서 뭐 드러내놓고 하는 성격이 못돼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연극과 아무 관계가 없는 젊은 친구
가 연극인으로서, 배우로서 반세기를 보냈다는 것은 대단한 건데 그 걸 그냥 넘겨버리면 도리가 아니라고 하
더군요. 후배들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배우로서 선배가 살아온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조그맣게 뭘 하나 준비하고 있어요. 안국동에 가면 선재아트센터와 윤보선 고택 사이에 아트링크라고 한
옥으로 된 작은 갤러리가 하나 있어요. 거기서 내년 5월에 소박하게 전시회를 하려고 해요. 무대에서 신던 신
발 하나라도 놓으면 되는 거니까. 배우로서의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게요. 화랑밀집지역이라 오가는 사람들도
많고, 또 내 연극을 한 번도 안 본 사람도 들러보면 "이게 연극인의 삶이구나"라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고. 그
것도 하나의 연극운동이니까요.
강일중 의미있는 전시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저런 자료들을 좀 많이 모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박정자 그렇지 않아도 국립예술자료원에서 내게 없는 테이프를 몇 개 빌려왔어요. 그런데 내 계획을 듣고는 자료원측
에서 제안을 하나 해 왔어요. 얼마 전부터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예술가들의 창작활동 과정에서 생겨난 기록
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어차피 아트링크에서 전시하는 거 예술가의집에서도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갤러
리 전시를 마치고 예술가의집에서 일정 기간 다시 보여줄 계획입니다.
강일중 전시도 전시지만 작품을 하나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연극배우시니까.
박정자 ‘19 그리고 80’을 내년에 다시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연출이나 무대하는 사람, 해롤드 역을 누구에게 맡겨
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재공연이라는 게 맥 빠지는 거거든요. 항상 새롭게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늘 연출과 해롤드 역을 바꿔서 해 왔어요.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요.
강일중 ‘19 그리고 80’은 '배우 박정자' 그러면 연상되는 분신과도 같은 그런 연극 아닙니까?
박정자 그래요. 내가 워낙 좋아하는 작
품이라서. 윤석화가 2003년 설치
극장 정미소를 열면서 개관공연
으로 어떤 작품을 올릴까 구상하
고 있을 때 이 작품을 하자고 제
안해서 처음 했죠. 모드 할머니
역을 맡아서 지금까지 연극으로
세 번, 그리고 2008년에 뮤지컬
로 한 번, 모두 네 번 했어요.
<박정자의 아름다운 프로젝트
‘19 그리고 80'.> 내가 이름도 그
렇게 지었어요. 적어도 2년에 한
번씩 해야 되는데. 그러면 80이
될 때까지 다섯 번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모드 할머니처럼 세상을
딱 뜨면 좋은데(웃음). 지나친
욕심 같기도 해요.
강일중 한 작품을 꽤 오래 하시는 것 같
네요. 그 전에도 같은 작품을 오
랜 기간 여러 번 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박정자 산울림극장에서 ‘엄마는 50에 바
다를 발견했다’를 19년간 했어요.
작년까지도 했으니까요. 물론 몇
년간 쉬었다 하기도 했지만. 딸
역들을 여러 번 바꿔가면서 했지
요.
강일중 두 작품을 굳이 비교하자면 어떻습니까?
박정자 다 좋지만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엄마의 이야기고... ‘19 그리고 80’은 작품이 향기도 있고, 지혜롭
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요. 작품 속 모드 할머니가 내 인생의 롤모델이기도
하구요. 그런 할머니들로 이 세상이 넘쳐났으면 싶어요.
♣‘ 19 그리고 80’ 줄거리 : 주인공 해롤드는 장례식과 죽음을 병적으로 좋아하며 어머니의 애정과 관심을 끌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자살 시도로 시간을 허비하는 청년이다. 그는 한 장례식장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별나고 괴팍스러운, 그러나 유쾌하고 활력 넘치며 삶을 사랑하는 80세 노인 모드를 만난다. 모드는 해롤드에게 삶의 즐거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자기파괴적인 이 부유한 청년의 삶의 지표가 되고, 해롤드는 그런 모드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믿기 어려운 로맨스는 해롤드로 하여금 인생의 아름다움, 가능성 그리고 의미에 대해 깨우치게 한다. |
강일중 화제를 좀 바꿔서요.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계신데 평생 연극배우 생활만 하시다가 조직을 이끌
고 대외활동도 하시는 게 어떤지요?
박정자 나는 조직이란 걸 좋아하지 않아요. 또 연극인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혼이 자유로워야죠. 그런데
주변에서 하도 권하는 바람에. 처음엔 거절했다가 "연극을 하면서 분에 넘치는 명예를 얻은 만큼 봉사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맡게 되었지요.
강일중 3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을 하신거죠? 요즘 이 재단의 현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박정자 6월이 굉장히 중요한 달입니다. 예술인복지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어서요. (마침 인터뷰 도중 재단 직원이 국
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예술인들에 대한 고용ㆍ산재보험 적용을 뼈대로 하는 이 법안이 가결돼
법제사법위원회로 넘겨지게 됐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왔다).
강일중 전망은 어떤가요?
박정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당장 큰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핵심은 4대 보험 혜택인데 우선은 그 혜
택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정해야 하구요. 현재는 법안의 통과와는 상관없이
연극인복지재단이 연극인들의 건강검진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강일중 여전히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은
생활이 어렵지요?
박정자 우리가 받는 출연료를 보통 개런
티라고 하는데 (보장 또는 약속
이라는 뜻의) 개런티라는 말을
우리가 쓸 수 있는지 잘 모르겠
어요. 출연료로는 입에 풀칠하
기 힘듭니다. 명색이 나도 배우
지만 옷 방도 없어요. 얼마전 아
들과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50년
연극배우의 생활이 너무 초라하
다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아들이 내 말을 듣고
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것을 개런티로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출연료만이 내 자존심이라고 생각한 것이 잠깐 동안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배우들이 허덕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일중 예술인복지법의 시행으로 춥고 배고픈 연극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해 봅니다.
바쁜 시간에 인터뷰 감사드리구요. 마지막으로 올해는 어떤 작품 일정이 있습니까?
박정자 지난 2월에 명동예술극장에서 (장님 예언자 티레시아스 역으로) ‘오이디푸스’를 했었는데 연말에 앙코르공연
을 하게 될 것 같구요. 그 전에 10월에는 일본 작가 오타 쇼고 원작의 ‘모래의 정거장’에 출연하게 될 겁니다.
김아라 연출이 하는 거죠.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다시 예술인복지법안의 국회통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관
계자들과 모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