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8. 10. 15:03
■이정암(李廷馣) 선생 유서(遺書)
죽음을 보름여 앞두고 아들과 손자, 사위에게 준 유서이다.
자기 사후의 일을 꼼꼼하게 당부했다.
글의 주요 부분만 살펴보면 나이 쉰을 넘겼다. 젊어서는 곤궁하여 늘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동분서주했다.
성격은 뻣뻣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사물과 더불어 어그러짐이 많았다.
혼자 자신을 헤아려 봐도 필시 세속의 근심을 받으려니 하였다.
애써 세상을 떠나 지내느라 너희들을 어려서부터 춥고 주리게 하였다.
내 일찍이 한나라 왕패(王覇)의 어진 아내 유중(孺仲)의 말에 느낌이 있었다.
낡은 솜옷을 걸친다 해도 어찌 자식들에게 부끄럽겠느냐.(중략)
질병을 앓은 후로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친구들이 날 버리지 않아 매번 약과 침으로 도움을 받지만, 수명이 장차 다해 갈까 염려되는구나.
너희는 어리고 집은 가난하여 매번 나무 하고 물 긷는 노고를 감당하니, 어느 때나 면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중략)
『시경』에서는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길을 간다"고 했다.
비록 능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해도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이를 숭상해야 할 것이다.
너히들은 삼갈 진저, 내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이정암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연안성(延安城) 전투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효로는 많은 수효에 대적하기 어려움)의 상황에서도 왜군에게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가 막상 조정에 올린 장계는 "적이 아무 날 쳐들어 와서 아무 날 물러갖습니다"라는 딱 한 줄 뿐이었으니 사류재공의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후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1600년(선조 33) 9월 10일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독역고(讀易攷)》·《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四留齋集)》 등이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윤광부(尹光富)의 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부인윤씨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공의 나이 57세 때인 7월에 먼저 죽었다.
다섯 아들 중 둘째인 이남(李湳)과 넷째인 이위(李湋)는 일찍 죽었고, 큰 아들 이화(李澕)도 공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유서에 두 아들 뿐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정암 선생은 부인윤씨의 상이 끝난 뒤인 1598년(선조 31)에 남은 아들 준(濬/출계 伯父)과 면(沔)에게 재명(齋名)을 지어주며 말에 대한 경계를 강조했다. 제목은〈이자명재설(二子名齋說)〉이다.
옛 사람은 반드시 재명(齋名)이 있었다. 이름을 돌아보아 뜻을 생각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아름다운 이름을 훔쳐 취하여 스스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주자의 호는 실제 회암(晦庵)이고 아버지 주송(朱松)의 호는 위재(韋齋)이니, 또한 스스로
뜻을 취한 것으로, 전기에 기록된 것으로 대개 가늠할 수가 있다.
너희들은 타고난 자질이 아주 둔하지는 않다. 하지만 가정의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또 사우(師友)의 일깨움이 부족한데다 변고를 만나고 시습(時習)에 점차 물들고 말아, 군자가 되지는 못하겠고, 마침내 촌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근심하는 바는 촌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을 걱정할 뿐이다.
지금 네가 어머니의 복을 마치고 사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나는 아침저녁으로 서로 본보기가 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
삼가《논어》의 “행실은 바르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하라.”는 가르침과《중용》의 “침묵은 용납되기에 충분하다.”는 말을 취하여, 준(濬)의 재명은 “손재(遜齋)”라 하고 면(沔)의 재명은 “묵재(默齋)”라 짓는다.
이어서 이렇게 설을 짓는다.
무릇 마음이 쉬 드러나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말보다 심한 것이 없다.
수치와 다툼을 일으키는 연유와 계단이 되는 것도 말만한 것이 없다.
예로부터 성현들이 서로 힘써 삼갔던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준(濬)은 빼어나고 예리하며, 면(沔)은 우직하니 어찌 병에 맞는 좋은 약이 아니겠느냐?
돌아가 이 설을 벽 사이에 써 두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생각하여 이것을 염두에 두게 되면, 비록 천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오히려 슬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께서도 정도대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물러나 뒷말을 하고 장단지를 함부로 뒤집는다면, 내가 오늘 너희 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너희 둘은 힘쓰도록 해라.
이미 써서 주고, 또 인하여 스스로를 경계한다.
무술년(1598년) 상완(上浣)에 쉰여덟의 노인이 덕수별업(德水別業: 본가 외 경기도 개풍에 있던 휴양 집/오늘날의 별장)에서 쓴다.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 아버지 곁을 떠나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당부를 겸하여 지어준 글이다.
준에게는 『논어』의 '위행언손(危行言遜)' 에서 의미를 가져와 '손재(遜齋)'라는 재명을 주고, 면에게는 『중용』의 '기묵족이용(其默足以容)'에서 의미를 따와 '묵재(默齋)'라는 이름을 준다고 했다.
준은 빼어나고 예리하니 겸손으로 말을 다스리라는 뜻이고, 면은 우직하니 고요함으로 말을 다스리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