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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경>해독 (1)
복단대학 전문충교수
삼자경은 우리나라 고대 아동식본 교과서이며 중국전통 아동계몽독서물인데 대략 900여년전 송조때 만들어 졌다.《삼자경》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널리 류전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상 전국통용아동교과서로 되였으며 또한 <백가성><천자문>과 함께<삼백천>으로 불리우는데 오직《삼자경》만이 “경”으로 존칭받아 왔다. 무엇때문에 이 책이 력대사람들에 의해 경전으로 받들리웠을가요? 보기에는 간단하고도 알것같은 글자배후에 어떤《삼자경》의 깊은 뜻이 담겼을가요?
송조에 이르러 《삼자경》이란 래력이 불명한 책이 나타나게 되였습니다.무엇때문에 래력이 불명하다고 하겠습니까?그것은 우리가 그의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삼자경》은 송조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류전되여 왔습니다. 이 책의 특점은 무엇일가요?내용과 형식으로 볼때 이 책은 자기의 특점을 갖고 있습니다. 《삼자경》은 세개 글자가 한마디씩이고 입에 잘 오르며 암송하기 쉬우며 고대에는 노래로도 불리웠습니다.
중국송조이후 류행됐던 이런 전통계몽책에 우리가 알고 있는것이<삼백천>입니다.《삼자경》,《백가성》,《천자문》-통칭“삼백천”이라 합니다. 이는 모두가 어린이들의 계몽독서물입니다.그럼 여러분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것입니다. 무엇때문에 <백가성>을 <백가성경>이라 부르지 않고 무엇때문에 <천자문>을 <천자경>이라 부리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삼자경》의 중요성을 알수 있습니다.
전통문화중에서 한부의 책을 경이라고 부르는것은 그것이 지고무상의 일종지위와 영예를 말합니다. 《삼자경》은 이처럼 중요한 한부의 전통계몽경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께서는 이 책이 아동들이 보는 책인만큼 아주 간단할것이며 무엇을 그렇게 말했겠는가고 느낄것인데 이는 틀린 생각입니다. 《삼자경》은 확실히 간단명료하나 이 간단명료함으로 하여 가장 간결한 방식으로 가장 깊은 문화전통을 응집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공력을 들여《삼자경》을 열독하고 체험해야만이 진정으로《삼자경》을 리해하고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문화정보를 리해할수 있습니다.
《삼자경》을 리해해야만 무엇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류전되였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삼자경》이 오늘날 중국사람을 놓고 볼때 특히 오늘날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을 놓고 볼때 그 어느것도 대체할수 없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 함께《삼자경》을 학습해 보도록 합시다.
인지초 성본선 성상근 습상원
人之初,性本善。性相近,习相远
사람이 출생한할때에는 천성이 본래 선량합니다. 이와 같이 간단한 여섯글자 배후에는 매우 풍부하고도 깊은 문화함의가 내포되여있습니다.이는 한 사람의 인성론의 문제입니다. 다시말해 인성은 구경 어떤것이며 사람의 본성은 구경 선량한것인가 아니면 악한것일가요? 고금중외 소유의 문화전통은 모두가 인성론을 에돌아가지 못합니다.그것은 어떻게 되였던지를 막론하고 우리는 반드시 먼저 자신을 인식하고 사람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전통속에 인성론에 대한 토론은 매우 풍부하고도 다채롭습니다. 선진시기 유가전통속에는 세가지 설법이 있습니다. 한파는 공자의 설법입니다. 뒤에서 우리는 유가의 창시인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공자의 설법은 무엇일가요? 곧 삼자경의 뒤 여섯글자인 <성상근 습상원>입니다. 무슨 뜻일가요? 공자는 사람의 본성차이는 크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후날 세파에 그을리고 환경영향으로 그 차별이 점차 날따라 커질뿐 본성의 거리는 멀지 않다는 것이 공자의 설법입니다.바꾸어 말하면 공자는 우리에게 인성이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사색을 남겼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이고 아주 유명한 사상가인데 그는 법가와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럼 순자의 생각은 어떠했을가요?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들이 비교적 쉽게 리해할수 있습니다. 례하면 어린이는 낳자마자 울어댑니다.그는 배가 고프기에 젖을 먹으려 하는데 그가 어머니의 고생에 대해 알수 있겠습니까?
얘가 어머니가 젖이 있는지 없는지 고려할가요?또 어머니가 앓는지를 알턱없지요.그저 젖먹을것만 알뿐입니다.아울러 만약 아이가 여러명이라면 가능하게 이 아이들은 서로 다투어 젖을 먹으려 할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사람의 본성은 선량하지 못합니다.
그럼 <인지초 성본선>은 구경 누구의 사상일가요? 이는 맹자 일파의 사상입니다. 맹자를 아성이라 부르지요. 맹자 일파의 유가사상가들은 <인지초 성본선>이라 주장합니다. 인성의 선악 이 분야에 관하여 그리 쉽게 볼문제가 아닙니다.실제로 중서문화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서 서로 다른 궤도를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려 합니다. 서방의 전통문화에서는 매사람은 모두 죄가 있으며 사람은 원죄가 있고 오직 하느님만이 죄가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지초 성본악>입니다. 매사람이 모두 죄가 있기에 나는 누구도 믿지 않으며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례를 들어 사회관리운영에서 말하면 나의 소유의 권리를 어떤 사람에게 맡길때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째야 할가요? 관리의 권리와 운영의 권리를 분산시켜 상호 감독하고 서로 독립시킵니다.엄격한 제도를 만들어 너를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서방의 전통문화는 이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문화주류는 삼자경에서 말한 처음 여섯개 글자 다시 말하면 맹자의 사상으로 걸어왔습니다. <인지초 성본선> 매사람의 천성은 선량하며 매사람마다 모두 각오가 있다. 소위 거리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며 사람마다 요순이라는것입니다. 그럼 제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매사람은 모두 각오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두 길을 건널 때 붉은 지시등이 켜지면 건너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마음대로 침을 뱉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모두들 다른 사람의 리익을 해치지 말아야 된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로 교육하고 인도하고 양성해야지 제도로 남을 규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절대 이 여섯글자를 너무 쉽게 보지 말고 이 여섯글자는 함의가 매우 깊다는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맹자는 어떻게 <인지초 성본선>이라고 단정했겠습니까?맹자가 이렇게 말한 리유는 무엇일가요?대사상가로서 맹자는 물론 허튼소리를 한것이 아닙니다.그가 “인지초 성본선”이라고 할때에는 그의 도리가 있습니다. “맹자”에서 그는 사람은 4가지 심 즉 사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측음지심 수악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恻隐之心 羞恶之心 辞让之心 是非之心
맹자는 사람은 반드시 네가지 마음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측음지심은 동정심입니다. 수악지심은 미안함입니다.부끄럽다는반성의 마음입니다.사양지심은 서로간 피차 양보해야 하며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비지심입니다. 그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네가지 마음이 있다고 느꼈으며 이 네가지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맹자의 설법입니다. 례를 들면 부끄럽고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것인데 이를 우리는 리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례하면 미국에 한 저명한 영화배우가 있었는데 마리린 론모입니다 그의 사진이 전세계에 퍼졌지요. 어느날 그는 치마를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지하철 출구로 나가는데 돌연히 큰 바람이 불어 그의 치마를 들어 놓았지요. 론모의 동작은 얼른 치마를 내리는 것이였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은 다 있습니다.
력사상의 여러가지 례를 들어 인성문제의 복잡성을 증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나를 하지요. 조조를 다 알지요. 조조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조식은 재간이 넘치고 문채가 뛰여났으며 위인이 두텁고 아주 온순하다고 했습니다. 조식의 재간이 얼마나 좋은지 조식이후의 몇백년 후 그와 비슷한 대문재인 사령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사령운은 “천하에 시를 쓰는 출중한 시인을 합하여 1석이라고 한다면 조식이 8되를 차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곧 “재고팔두”사자성어의 래력입니다.
그럼 남은 두되는 누구일가요? 사령운은 거침없이 “내가 한되 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반되는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전중국사람이 반되를 나누어 가져야지요. 사령운처럼 재간이 있고 오만한 사람도 조식이 팔두를 점했다고 진심으로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조식처럼 천성이 후한 사람이 아버지 조조의 계승자로 될수 있었을가요? 그는 하늘이 정할것이기에 마음먹고 힘을 들여 다투지 않았습니다. 조비는 조식의 형제로서 모두가 조조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형제의 인성과 본성은 천양지차였습니다.
조비 역시 문재로서 조비의 시가도 류전된것이 있는데 조식에 비해서는 거리가 멉니다.조비는 조식이 혼자서 팔되를 차지하였으니 한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나머지 반되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동시에 무예를 즐겼습니다.
조비의 검술은 중국무술사상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합니다. 동시에 조비는 점유욕이 매우 강합니다.례를 들어 업성을 공격할때 조비는 앞장섰는데 그는 무엇을 했을가요?그는 장령을 지휘하지도 민중을 안무하지도 또 창고에 들어가 어떤 전리품이 있는가를 보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원희의 집으로 달려가 원희의 부인 건씨를 빼앗아다가 자기의 안해로 삼았습니다. 건씨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조비는 이렇게 점유욕이 강했습니다. 후에 그가 어떻게 조조의 자리를 계승했는가는 여러분들도 알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싶이 그는 조식과 친형제이지만 래왕하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또 다른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은 조장이고 별명이 황수아였습니다. 아마 그의 머리와 수염이 노랬을 것이며 아주 장대한 사람이였습니다.조장은 사책에 시를 썼다는 기재가 없었고 그저 힘장사이며 무예가 출중했다는것만 남겼습니다. 그의 활쏘기 솜씨는 백보에 버드나무 잎을 떨구고 백보밖에서 한오리 머리카락을 명중했다고 합니다.
그의 힘은 얼마나 센지 어느 한번 그는 범과 싸웠답니다. 그가 범의 꼬리를 자기의 팔에 감자 범이 움직이질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힘겨루기에서 사람과 대적하는것이 재미없어 또 언젠가 한번은 코끼리와 겨루었는데 코끼리도 그에게 눌리워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한번 전쟁에서 조조는 마초와 맞띠웠는데 마초가 용맹하게 전장을 누비는것을 보고 탄식하며 “만약 내아들 조장이 여기있었다면 네깐 마초가 어찌랴”라고 했답니다. 이로보아 조장의 성격은 곧 용맹무쌍하고 힘이 천하장사였지만 심기가 없었답니다.
조조에게는 또 조충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조충은 중국의 저명한 신동이랍니다. “조충이 코끼리를 뜨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책의 기재에 의하면 당시 손권이 조조에게 잘보이기 위해 큰코끼리 한마리를 조조에게 바쳤답니다. 당시 중원지대에는 코끼리가 없었지요. 이렇게 큰 방대한 동물을 보자 조조는 아래 군신과 장령들에게 “이 코끼리가 얼마나 무거울가”라고 물었답니다.
이렇게 무거운 코끼를 어떤 저울로 떠야 되겠습니까? 모두들 네한마디 내한마디 했으나 방법이 없었답니다. 당시 조충은 아직 열살도 되지 않았지요. 그는 옆에서 소리를 듣다가 “참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자, 가서 배를 한척 가져와요.”라고 했습니다. 배가 오자 그는 코끼리를 배에 실으라고 했습니다. 코끼리가 배에 올라가니 배가 물에 내려 앉았습니다. 그는 배선창에 금을 그었습니다. 그는 다시 코끼리를 뭍으로 끌어내리고 사람들에게 코끼리무게가 얼마인지 알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을가요? 두가지 설법이 있는데 하나는 배에로 돌을 옮겨 싣는 방법이였는데 하나하나의 돌을 배에실어 배에 그어 놓은 선까지 가라 앉힌 후 하나하나의 돌을 저울질하여 코끼리의 무게를 아는 방법입니다. 이는 배수량의 원리입니다.
다른 한 설법은 더욱 교묘한것이였는데 조충은 사람을 시켜 물통에 물을 담아 배에 붓게 했답니다. 배가 그어놓은 선까지 가라앉은 다음 배안에 부어놓은 물통개수를 세고 한통의 물무게가 얼마인가를 알면 코끼리의 무게를 아는 방법이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조조의 같은 아들들이지만 네 아들의 천성은 모두 다르며 완전히 형제같지 않다는것을 설명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지초 성본선” 이 여섯글자에 대해 물음표를 달아야 합니다. 저는 “인지초 성본선” 이 여섯글자는 중국문화가 인류에 대한 아름다운 신념과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를 이렇게 리해한다면 제생각에는 비교적 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아래에 “성상근 습상원”에 대해 말하겠는데 이는 공자의 사상입니다. 이는 앞에 소개한 여섯글자와 서로간 모순됩니다. 앞에서 “인지초 성본선”라고 하고나서 왜서 뒤에는 또 “성상근”이라고 했을가요? 뒤의 여섯글자는 “성상근 습상원”인데 사람의 본성은 본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여기에서의 “습”은 학습의 뜻이 아니라 나쁜것에 물들다, 영향을 받다, 오염되다는 뜻입니다. 본성은 본래 차이가 크지 않지만 후날 환경의 영향과 여러가지 외부환경의 나쁜것에 물젖으면 차이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이로서 제가 앞에서 강의한 이야기를 해석한다면 가히 성립될수 있습니다. 가능하게 조식, 조비, 조장, 조충은 어렸을 때에는 모두들 비슷했을것입니다. 그러나 후날 성장의 경력과 환경이 서로 부동함에 따라 그 차이가 날로 커졌다고 해석할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것은 옛사람들은 후천적 환경에 대해 매우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례는 력사상에도 있었습니다.
저희 고향은 무석입니다. 진조때 무석 의흥에 이름난 주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천성이 선량한 아주 훌륭한 분이였지요.그러나 어릴적 부모들이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를 교육할사람이 없었고 그를 인도할 사람도 없었으며 그에게 규칙을 세워줄 사람도 없었습니다.그래서 점점 망나니 무리에 휩쓸면서 좋지 못한 풍기에 물젖고 영향을 받았습니다.그는 커서 아주 조폭하고 야만적인 인간으로 되였습니다. 쩍하면 무리싸움을 하고 남을 때려 피터지고 이가 빠지게 했습니다.
그는 힘도 무척 셌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위의 사람들은 주처만 보면 달아나기 일쑤였습니다. 누가 헛매를 맞기 좋아 하겠습니까? 주처도 자기가 나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에게는 수악지심과 시비지심이 없었으며 이러한 마음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어느날 그는 불현듯 사람들이 자기를 보기만 하면 피한다는것을 발견했지요. 그래서 한 할아버지를 찾아 물었습니다. 이를 보아 그는 천성이 나쁘지 않으며 로인에 대해 존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로인님, 왜서 동네 마을분들이 저를 보면 피합니까?” 주처는 할아버지를 만나 때려놓은것이 아니라 로인을 존경했으므로 그의 천성은 괜찮은 편이지요.
로인은 주처를 보고 “우리 이곳에는 3해가 있단다”라고 하자 주처는 “어떤 3해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첫째. 앞산에 맹호 한마리가 나타났는데 늘 마을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을 해쳐 모두들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일해이고 두번째는 마을 앞에 있는 강가에 교룡 한마리 있는데 매우 악독한 큰 구렝이란다. 누구도 수영하러 강가에 나가지 못하며 고기도 못잡고 강도 건느지 못한다”
그러자 주처는 “그럼 삼해에서 또 다른 일해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 로인은 “바로 네 주처다”하고 했습니다. 천성이 좋았던 주처는 “아니 원래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됐단 말인가? 나는 원레 좋은 사람이고 또 로인도 존중할줄 아는 사람인데 왜 지금 사람들은 나를 나쁜 대해라고 하는가”라고 생각하며 크게 뉘우쳤답니다.
전설속의 주처는 산에 올라 범을 때려 죽이고 물에 들어가 교룡을 죽임으로써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해를 제거했답니다. 이때로부터 주처는 자기의 량심을 발견했고 본성이 선량한 천성을 발견하고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부터 분발하고 노력하여 후날 큰 벼슬까지 지내며 백성을 위해 많은 좋은 일을 하여 력사상에 아주 좋은 명성을 남겼습니다. 주처의 묘지는 지금도 보존되여 있습니다.
구불교 성내천 교지도 귀의전
苟不教 性乃迁 教之道 贵以专
계속해서 강의할 내용은“구불교 성내천”입니다.어떤 뜻일가요? 만약 교육하지 않고 만약 교육을 받지않는다면 “성내천” 즉 선량한 본성은 곧 변천을 일으키는데 사람의 본성에서 나쁜 것이 뛰쳐나오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주처의 이야기는 이 문제를 설명해 주는데 “구불교 성내천”입니다. 교육의 도는 근본대도입니다.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일가요? 삼자경에서 가장 진귀한것이 무엇일가요?“전일”입니다.
《삼자경》에서 학습은 일종 생명의 과정이며 반드시 일심일의로 경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력사상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찾아 삼자경의 이 점을 설명할수 있습니다. 명조의 저명한 화가 당백호 당연을 여러분들은 다 아실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백호라고 하게 되면 주성치를 떠올리는데 영화 “당백호가 추향을 점찍다”의 영향일것입니다.
력사상의 당백호는 심주, 문정명, 구영과 함께 나란히 선 명대4가입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고 풍류인물이며 재간이 뛰여난 사람이고 대화가입니다. 당백호는 어릴적부터 부자집에서 생활했으며 어릴적부터 회화의 천재이며 천성도 좋고 천부도 있었습니다. 회화는 어릴적부터 명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호들은 늘 어린 당백호를 청해다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물론 당백호도 늘 좋았지요. 소년에 이름날려 풍류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당백호의 어머니는 매우 대단한 녀성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옅게 조그마한 성과가 있다하여 만족해서는 안된다. 너는 반드시 전심전의로 몇년간 그림을 배워 회화예술을 투철히 알아야 한다”고 꾸짖었습니다.
당시 심주는 이미 이름을 날린 대화가였는데 당백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빨리 짐을 싸서 떠나거라. 물론 어머니도 너를 보내기 아깝다. 그러나 너의 전도를 위해 심주한테 가서 배우거라”라고 타일렀습니다. 당백호도 기뻤습니다. 아무튼 집에서 멀지도 않은 곳이였지요. 그래서 어머니가 꾸려준 보따리를 메고 가서 심주를 선생으로 모셨습니다.
심주한테서 일이년간 배운 당백호는 자기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을 보니 자기보다 별로 낫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또 소총명을 부리면서 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심주는 당백호의 심리를 알아차리고 딴 생각없이 자기의 부인 즉 당백호의 사모님한테 밥상을 차려 먹인 후 당백호를 보내려 했습니다.
“그더러 출사하여 집으로 가게 하자. 자기절로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심주는 이렇게 생각하며 밥과 반찬을 한 구석진 방에 차려주었습니다. 이 방은 당백호가 한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방이였습니다.
당백호는 이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아니 천하에 이런 집도 있단 말인가! 정말 괴상한 방이였습니다. 어떻게 괴상할가요? 이 방안에는 네개의 큰 문이 있었는데 동서남북에 각기 문이 나있고 매 문밖에는 모두 부동한 풍경이였습니다. 이쪽 창문밖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울긋불긋한가 하면 저쪽 창문밖은 앵무새가 노래하고 제비들이 춤추고 있었으며 또 저쪽 창문밖에선 시내물이 돌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이 정말 나쁘다. 화원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데 나를 알려주지 않다니, 에라 인젠 졸업도 했겠다 먼저 먹지 말고 놀기나 하자”라고 생각하며 동쪽문으로 다가가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려고 문밖을 나가려 했습니다. “퉁”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또 남쪽창문에 다가가 제비가 춤추는 것을 구경하려 하는데 또 “퉁”소리와 함께 머리를 쫒고 말았습니다. 서쪽창문으로 다가가 돌돌흐르는 시내물을 적시려하다가 또 “퉁”소리와 함께 머리를 쫒고 말았습니다. 이때에야 그는 비로서 이는 심주가 벽에 그려놓은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주는 벽 세개문에 바깥의 풍경을 그려넣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당백호는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천성이 원래 좋았기에 그림 그리기에는 지경이 없으며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것을 뉘우쳤습니다.
이때 심주가 바깥에서 들어왔습니다. “당백호야, 밥을 먹고 빨리 집으로 가거라” 선생님이 말하자 단백호는 얼른 엎드려 절하며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다시 저를 배워주십시오. 저는 몇년 더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당백호는 전심전의로 허심하게 몇년간 더 회화를 배웠습니다. 이때에야 심주는 “인젠가도 된다. 너는 이미 성공했기에 인젠 나를 따를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젠 당백호의 성격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기절로 주방에 들어가 밥과 채를 정성들여 만들어 선생님에게 올림으로써 그의 은덕에 보답하려 했습니다. 그는 또 다른 한가지 채를 만들어 선생님에게 드렸는데 이 채는 물고기였습니다. 옆에서 뛰놀던 한마리의 고양이가 물고기를 먹어치우려하자 당백호는 선생님이 드시기전에 고양이가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고양이를 쫓았습니다. 고양이는 동쪽벽의 창문으로 달아나다가 벽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고양이는 일어나 또 남쪽벽창문으로 달아나려다가 탕하며 또 벽에 부딪쳤습니다. 이렇게 고양이도 세번이나 벽에 부딪쳤습니다.
이는 당백호가 회하를 연습할때 벽에 그려넣은 풍경으로서 고양이도 분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것을 배우려면 반드시 전심전력해야 하며 오래도록 견지해야만이 배워낼수 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래에 계속하여 학습환경문제에 대해 강의하렵니다. 아시다싶이 만약 어린이를 꽃봉오리에 비교한다면 그의 성장과 교육환경이 곧 꽃봉오리가 생존하고 꽃을 피울수 있는 토양입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학습중에 있는 어린이에게 어떤 토양조건을 주어야 하며 어떤 외부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하겠습니까? 다음시간에 강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