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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音樂이 있는곳 스크랩 외나무 다리 & 꿈은 사라지고 - 최무룡
stone 추천 0 조회 93 11.09.06 17: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무룡 - 외나무다리(1962)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눈썹달이 뜨는 내 고향
  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
  헤어진 그날 밤아 추억은 어디
  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 님을
  괴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최무룡 - 꿈은 사라지고

 

 

 

 

1928. 2. 25 경기 파주~1999. 11. 11 부천.
영화배우.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50~60년대의 대표적인 남자 연기자였다.
개성상업학교를 나와 조선상업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1945년 문맹퇴치를 위한 소인극(素人劇)을 시작하면서 연극에 매료되었다.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1949년 연극 〈햄릿〉에서 주연을 맡았다. 1952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신상옥 감독의 〈젊은 그들〉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1954년 채만식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만흥 감독의 〈탁류〉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0),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 같은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에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5인의 해병〉(1961)·〈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빨간 마후라〉(1964) 등 한국영화의 전성기에 전쟁물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이 밖에도 그가 출연한 영화는 〈꿈은 사라지고〉(1959)·〈장마루촌의 이발사〉(1959)·〈남과 북〉(1966) 등 무려 500여 편에 이른다. 이들 영화를 통해 그는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는 강인한 성격의 아웃 사이더 역으로 인식되었다.
깨끗한 용모와 남성적인 이미지로 남궁원·신성일·신영균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며 여성팬들을 사로잡았던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만큼이나 극적인 인생을 살기도 해 언제나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952년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며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여배우 전옥의 딸 강효실과 결혼해 1남(영화배우 최민수) 3녀를 두었다. 그러나 1962년 동료 여배우 김지미와의 스캔들로 강효실과 이혼하고 김지미와 결합했으나 무리하게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막대한 빚을 지는 바람에 다시 이혼해야 했다. 당시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말을 세간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으며 1994년에는 토지 사기 혐의로 구속되는 등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 연출에도 관심을 보여 〈나운규의 일생〉(1966)과 〈덫〉(1986)을 감독·주연했다. 1980년대 들어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위원장과 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1982년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위원장과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93~94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1995년 우리영상사업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말년에는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에 심혈을 기울였고, 소극장 공연이나 유랑극단 공연, 해외동포 위문공연 등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9년 4월 대종상 영화제에서 '영화발전 공로상'을 받았고, 1999년 11월 보관문화훈장(寶冠文化勳章)이 추서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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