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nba.com/history * 연재 : Seasons와 Finals 번갈아서 주말 연재 * 필요한 부분은 의역과 보충 설명을 했으니, 이점 유의해주세요. * 무단으로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NBA 매니아의 '바스켓피버'님께 쪽지를 보내서 허락후에 퍼가십시오 ^^
1953-54 SEASON OVERVIEW
- "Minneapolis Wins Fifth Title in Six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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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쿤드라 | 경기에서 박진감을 날려버리던 극심한 파울들을 줄이기 위한 시도로써 몇가지 재미있는 룰이 도입이 되었다. 각 선수마다 한 쿼터당 2개의 파울까지 저지를 수 있도록 제한되었고, 만약 3번째 파울을 할 시엔 그 선수는 해당 쿼터의 남은 시간을 뛸 수가 없게 되었다. 경기당 파울수는 51개로 줄어들었지만, 경기 후반부의 자유투 콘테스트들은 여전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해체되면서, 서부 디비전에는 단 4개팀만 남게 되었고 이중 3개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됐다. 네일 존스턴은 평균 24.4득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했고(3연속), 밥 쿠지는 평균 19.2득점으로 득점2위 그리고 평균 7.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 1위로 마쳤다. 이제 30살이 된 조지 마이칸은 레이커스가 플레이오프를 위해 그를 보호하면서 예전보다 적은 출장시간이 부여되었다. 노쇠한 그는 하지만 여전히, 평균 18.1득점과 14.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는 디비전 상위 3팀이 서로 경기를 펼쳐 2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이상한 라운드로빈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시라큐스가 동부에서 파이널에 진출하며 뉴욕의 연속 파이널 진출이 멈췄고, 서부에선 미네아폴리스가 또다시 진출했다.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레이커스를 위한 마지막 챔피언십이 될 파이널에서 레이커스는 격렬한 싸움끝에 7차전을 87-80으로 가져갔다.
KUNDLA THE QUIET FORCE BEHIND THE LAKERS SUCCESS
존 쿤드라는 레이커스를 6년동안 5번의 NBA타이틀로 이끄는 동안 많은 영예를 얻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이칸과 짐 폴라드, 번 미켈센과 다른 선수들을 데린 감독이라면 그 누구라도 많은 노력이 없이도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을 거라 말했다. 레드 아워바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위대한 많은 팀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라고 아워바흐는 말했다. "물론 쿤드라는 위대한 팀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데리고 위대한 일을 해냈다."
1953-54 Standings
Eastern Di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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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
L |
Pc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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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 |
New York Knickerbockers |
44 |
28 |
.611 |
|
- |
Syracuse Nationals |
42 |
30 |
.583 |
|
2 |
Boston Celtics |
42 |
30 |
.583 |
|
2 |
Philadelphia Warriors |
29 |
43 |
.403 |
|
15 |
Baltimore Bullets |
16 |
56 |
.222 |
|
28 |
Western Division |
|
W |
L |
Pct. |
|
GB |
Minneapolis Lakers |
46 |
26 |
.639 |
|
- |
Rochester Royals |
44 |
28 |
.611 |
|
2 |
Fort Wayne Pistons |
40 |
32 |
.556 |
|
6 |
Milwaukee Hawks |
21 |
51 |
.292 |
|
25 | |
All-NBA Teams First Team George Mikan, Minneapolis Harry Gallatin, New York Dolph Schayes, Syracuse Bob Cousy, Boston Neil Johnston, Philadelphia
Second Team Jim Pollard, Minneapolis Bob Wanzer, Rochester Paul Seymour, Syracuse Ed Macauley, Boston Carl Braun, New York
Rookie of the Year -- Ray Felix, Baltimore |
피버's Comment
레이커스의 마이칸 시대 마지막 우승입니다. 6년 동안 5번의 우승(NBL시기 2년간 우승 포함하면 8년간 7번의 우승). 그리고 첫 리그 3연覇을 달성한 마이칸. 하지만 이 해의 마이칸은 이미 30이 되었고(당시 기준 30은 요즘으로 친다면 30대 중후반입니다.) 과거처럼 도미넌트하지는 못 합니다.
리그는 과도한 파울난무를 막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지만, 여전히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특히 경기 막판의 무절제한 파울빈발은 여전히 심각했는데, 아래는 저번 시리즈글에서 댓글로 The Big O 님께서 친절히 설명해주신 부분입니다.
"파울 후의 모든 점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이 당시에는 4쿼터 끝나기 3분 전부터는 자유투 이후의 공격권을 점프볼로 결정하는 규칙이 있었더군요. 처음에는 파울당한 선수와 파울한 선수가 점프볼을 했는데, 이러다 보니 무조건 큰 선수가 작은 선수에게 파울을 하는 문제가 있어서 이 시즌인 52-53 시즌부터는 파울당한 선수와 그 선수를 수비하게 되어 있는 선수(아마도 가드라면 상대편 가드 중 한 명이겠지요)가 점프볼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답니다.
1954 NBA Finals: Minneapolis 4, Syracuse 3
- "Minneapolis Makes One Last Title Run"
NBA F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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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neapolis 4, Syracuse 3
Mar. 31: Wed., Syracuse 68 at Minneapolis 79 Apr. 3: Sat., Syracuse 62 at Minneapolis 60 Apr. 4: Sun., Minneapolis 81 at Syracuse 67 Apr. 8: Thu., Minneapolis 69 at Syracuse 80 Apr. 10: Sat., Minneapolis 84 at Syracuse 73 Apr. 11: Sun., Syracuse 65 at Minneapolis 63 Apr. 12: Mon., Syracuse 80 at Minneapolis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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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ern Division |
Western Division |
Division F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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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racuse 2, Boston 0 Mar. 25: Thu., Boston 94 at Syracuse 109 Mar. 27: Sat., Syracuse 83 at Boston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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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neapolis 2, Rochester 1 Mar. 24: Wed., Rochester 76 at Minneapolis 89 Mar. 27: Sat., Minneapolis 73 at Rochester 74 Mar. 28: Sun., Rochester 72 at Minneapolis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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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nd Ro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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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6: Tue., Boston 93 at New York 71 Mar. 17: Wed., Syracuse 96 at Boston *95 Mar. 18: Thu., New York 68 at Syracuse 75 Mar. 20: Sat., New York 78 at Boston 79 Mar. 21: Sun., Syracuse 103 at New York 99 Mar. 22: Mon., Boston 85 at Syracuse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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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6: Tue., Fort Wayne 75 at Rochester 82 Mar. 17: Wed., Rochester 88 at Minneapolis 109 Mar. 18: Thu., Minneapolis 90 at Fort Wayne 85 Mar. 20: Sat., Fort Wayne 73 at Minneapolis 78 Mar. 21: Sun., Rochester 89 at Fort Wayne 71 Mar. 23: Tue., Minneapolis at Rochester (canceled |
비록 30줄에 들어섰으며 격투의 상처들로 범벅이 된 조지 마이칸과 함께 1954시즌에 임했지만, 레이커스에게 달콤한 기억은 1953년과 함께 끝나진 않았다. 아마추어와 프로 커리어 내내 마이칸은 2번의 다리 골절, 양발 골절과 손목, 코, 엄지와 손가락 3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의 평균 득점이 18.1득점으로 떨어지고 네일 존스턴, 밥 쿠지와 에드 맥컬리에 이은 리그 4위로 마치자 마이칸의 플레이에 대한 비난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레이커스를 46승 26패로 리그 최고 성적으로 이끌기에 충분히 도미넌트했다.
레이커스는 이 시즌 팀 로스터에 몇가지 변화를 시도했다. 첫째, 인디애나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내고 1952년 캔자스 대학을 NCAA 우승으로 이끈 6'9"(206cm)의 클라이드 로벨레테를 얻었다. 마이칸의 커리어가 마지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로벨레테는 마이칸의 백업 역할을 맡았고, 평균 8.2득점과 리그 5위에 해당하는 야투율 .423을 기록했다.
또 다른 변화로, 마이어 '화이티' 스쿡이 백코트 선발진에 올라서며 평균 7득점을 기록했다. (그동안 주전이었던) 펩 사울은 오하이오 대학을 졸업한 6'5"(195cm) 리처드 쉬니커와 신시내티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온 6'3"(191cm) 짐 홀스타인과 함께 대부분 시간을 백업으로 기용되었다.
과도한 파울 시도는 3월의 플레이오프(PO)에서도 계속 되었지만, 정말 불합리한 것은 PO방식이었다. 동부 디비전이 여전히 5개인 반면에, 인디애나폴리스 올림피언스가 해산하면서 서부 디비전은 겨우 4개팀만 남게 되었다. 리그 불균형에 처하자 오너들은 PO시스템을 고치길 시도했고, PO 1라운드를 '리그 최고 승률팀에게는 아무런 어드밴티지가 없는' 각 디비전 상위 3팀간의 라운드로빙 방식이 채택되었다. (3팀 중 2팀이 다음 라운드 진출. 맞대결)
레이커스는 이런 불합리한 변화 속에 서부 디비전에서 살아남았지만, 동부디비전은 이변이 발생했다.
뉴욕 닉스는 정규 시즌을 1위로 마쳤지만, 라운드로빙 방식에서 보스턴과 함께 공동 2위로 시즌을 마친 시라큐스 내셔널스에 의해 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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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여단의 수장. 돌프 셰이즈 |
혹독한 동부 디비전 PO 이후 내셔널스는 상처투성이로 어찌어찌 파이널에 올랐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가장 큰 곤경은 PO 1라운드 중 보스턴 홈에서의 경기였는데, 거기서 셀틱스는 내셔널스의 에이스인 돌프 셰이즈를 플로어에 눕혔고 그의 손목을 아작냈다. 그 경기 이후로 내셔널스의 운은 점점 나빠져가는 걸로 보였고, 부상의 악령이 줄줄이 들러붙었다.
"신문들은 우리를 '붕대 여단'이라 부르기 시작했었죠"라고 손목에 깁스를 한 채로 기어이 PO를 마친 셰이즈가 말했다.
비록 팀의 중추는 유지했지만서도, 내셔널스는 1950년 파이널 진출 이후로 몇가지 변화를 수행해왔었다. 은퇴를 권고받은, 알 서비는 코칭에 그의 노력을 집중해왔었다. 셰이즈는 평균 17.1득점으로 내셔널스의 득점을 이끌었다. 폴 세이모어는 여전히 백코트에서의 더 맨이었고, 빌리 가버도 역시 좋은 백업으로 남아있었다. 가드진의 새로운 자원은 조지 킹이었는데, 그는 속공에서 멋지게 달렸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프론트코트에서는 웨스트 버지니아 주립대 출신의 6'6"(198cm) 포워드 얼 '빅 캣' 로이드가 평균 9득점과 7리바운드를 배달했다. 그러나 파이널에서, 로이드는 셰이즈와 함께 '붕대 여단'에 가입했다. 둘 다 손이 부러졌고, 깁스를 하고 임했다. 경기에는 출전했지만, 내셔널스의 다른 선수들; 밥 라보이, 월리 오스터컨과 빌 캔빌에겐 더 큰 부담이 지워졌다.
많은 이들이 내셔널스의 부상이 '파이널에서의 스윕'이라는 결론을 가져올 거라 생각했다. 대신에 리그는 또다른 7차전 시리즈를 제공했다. 3월 31일 1차전이 열린 미네아폴리스에서 내셔널스는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 선수 구성에 변화가 있었지만, 속공엔 짐승같은 수비로 대항하는 서비의 스타일은 똑같이 유지되었다. 내셔널스는 이른 파울 트러블 속에 마이칸과 스쿡을 잡기 위해 밀착수비를 사용했으나, 프론트라인에서 로벨레테가 멋지게 16득점을 채워주었다. 셰이즈와 로이드가 부상으로 인해 플레이에 제한을 받으면서(그들은 합쳐서 3점을 기록했다) 미네아폴리스는 79-68로 승리를 가져갔다.
셰이즈와 로이드는 2차전에서 합쳐서 고작 4점에 그쳤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리고 일리노이 대학 출신으로 프로 3년차의 체격 좋은 6'5"(195cm) 오스터컨은 20득점을 기록했고, 훨씬 신장이 큰 레이커스 선수들 사이에서 인사이드 전투를 별였다. 경기는 수비적인 호각지세로 진행되었다. 하프타임 때 스코어는 고작 28-27로 시라큐스가 1점을 앞섰다. 그러나, 킹이 3쿼터에서 내셔널스를 이끌었고, 그들은 중간에 16-1로 치고나가며 48-38로 앞선채 4쿼터를 맞이했다.
미네아폴리스는 그들의 힘의 농구로 응했고, 점수도 거침없이 따라잡았다. 1분 30초를 남기고, 내셔널스는 킹이 바스켓을 향해 드라이빙을 시도할 때 평상시 맛보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킹의 슛을 블록하려했으나 마이칸은 대신에 킹의 손목을 부러뜨려버렸다. 킹은 플로어를 떠났고, 붕대 여단의 새로운 멤버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18초를 남긴 상황에서 마이칸은 홀스타인으로부터 패스를 건네받았고, 60-60 동점을 이루는 득점을 올렸다. 시라큐스는 마지막 한번의 찬스를 위해 백다운을 했고, 7초를 남기고 세이모어는 골대에서 43피트 바깥에서 세트 슛을 시도했다.(이 당시는 3점슛 제도가 없었는데... 약 12~13m 라인에서 던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친 짓) 그 슛이 림을 가르며 내셔널스에게 62-60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6,277명의 관중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레이커스가 미네아폴리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PO경기에서 패한 것은 (NBA에 가입한 후) 지난 7시즌 내내를 통틀어 처음있는 일이었다.
경기 후, 레이커스의 짐 폴라드는 그 즉시 친구인 세이모어에게 다가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던질 시간이 있었는데, 왜 그런 슛을 던졌는지' 그에게 물었다. 세이모어의 대답은... "I was open"
패배는 레이커스를 일깨울 거라 세이모어는 생각했다. "우리는 그들을 미치게 했고, 마이칸은 패배 이후 어떻게 경기해야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줬죠"
셰이즈와 로이드는 시라큐스의 전쟁 기념관 경기장에서의 3차전에서 플레이할 수는 있었지만, 킹은 출전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기력은 너무나 미약했고, 미네아폴리스는 즉시 리드를 잡았다. 마이칸은 11/18 야투율로 30점과 1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레이커스는 81-67로 승리하며 시리즈를 앞서나갔다.
시라큐스는 꿀맛같은 4일간의 휴식 이후 4차전에 돌아왔다. 세이모어는 25득점을 기록했고, 내셔널스는 80-69로 승리하며 시리즈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빌리 가버가 무릎 부상을 당해 당음 2경기를 결장해야 함으로써 그들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시라큐스에서의 5차전은 인사이드를 온통 레이커스 선수들이 장악하면서 84-73으로 승리했다. 2승 3패인 상황에서 내셔널스는 첫 경기에서 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했던 미네아폴리스로 향했다. 외관상 그들에게 2번째 승리를 약속해줄 상황은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부상 악령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셰이즈는 어느덧 그의 깁스에 적응을 했고, 킹은 고된 임무를 해냈다. 셰이즈는 15득점, 세이모어가 16점을 기록하며 내셔널스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경기 종료 직전 볼을 소유했고, 63-63 동점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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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52년 선수 겸 감독 알 서비 | 서비는 마지막 슛을 위한 볼을 그들이 차지한 후, 작전을 지시하기 위해 타임아웃을 불렀다. 볼은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않은 리틀 워포드 대학 출신의 루키이자 6'11", 250파운드의 백업 센터인 짐 닐에게 갔다. 커리어를 통틀어 겨우 80경기를 뛴 닐은 NBA에서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경기에서 5파울을 잘 했기에(퇴장 당하지 않고 파울을 잘 사용하는) 서비는 그를 로스터에 두고 있었다.
골대 오른편 27풋 거리에서 던진 그의 슛은 4초를 남기고 골로 연결되었다. 레이커스의 화이티 스쿡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슛을 던졌지만, 그 슛은 백보드를 때리고 말았다. 시라큐스는 65-63으로 이겼고, 마이칸의 2번째 30점 경기는 빛을 바랬다.
"그건 패스 실수였어요"라고 서비는 그 플레이에 대해 말했다. "닐은 탑에 있었고, 볼이 그에게 갔죠. 그는 그 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그는 슛을 했어요. 사실 그는 나쁜 슛터는 아니었어요. 그는 좋은 원핸드 슛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후 난 그에게 말했어요. "헤이, 넌 슛을 예상친 못했어. 하지만, 그건 매우 좋은 판단이었어."
레이커스는 그럼에도 거의 당황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네아폴리스에서의 7차전에선 아니었고, 이전 4번의 파이널 경험이 확실히 남아있었다. 여전히 이전보다 더 걱정스런 이유는 더 있었다. 그들은 점점 더 나이들어가고 있었고, 홈에서의 그들의 행운은 깨어졌다.
폴라드는 21득점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그들은 일찍 리드를 거머쥐었고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네아폴리스가 61-45로 치고나간 3쿼터에서 폴라드는 9점을 기록했다. 내셔널스는 87-80으로 패하기 전까지 4쿼터에서 따라잡기 위해 그들의 최선을 다했다. 깁스에도 불구하고, 셰이즈는 18득점으로 내셔널스를 이끌었다.
적어도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레이커스 영광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마이칸은 시즌 이후로 갑작스레 은퇴 발표를 함으로써 NBA를 놀라게 했다. 30살의 나이 전에 그는 (1940년대 NBL시절 타이틀 2번을 포함하여) 8년간 7번의 우승이란 그의 프로 경력을 완성했다.
피버's Comment
드디어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마지막 우승입니다. 이제 왕조의 황혼이 깃들죠. 우선 마이칸이 이 시즌 이후 은퇴 발표를 합니다. 하지만 1955/56시즌 도중 한시적이나마 복귀를 합니다. 마이칸 은퇴 이후 급속도로 하락하던 팀을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복귀를 하지만 평균 10.1득점을 기록하는 마이칸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팀은 PO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죠.
주전 3명과 핵심 벤치 요원 1명이 붕대와 깁스를 하고 뛰는 처절했던 내셔널스였습니다. PO 홈 불패라는 레이커스에게 2번이나 홈에서 이기는 괴력을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우승을 못 했습니다. 이러한 이 당시 리그의 선수들을 보면 얼마나 요즘 선수들이 행복한 세상에서 농구를 하는지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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