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南洞)
⚫남촌동(南村洞)
남동은 남동구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남동공단’이나 제2경인고속도로 ‘남동 인터체인지’ 등의 이름은 모두 여기서 나온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남동구 일대는 거의 대부분이 조용한 농촌과 어촌 마을이었다. 당시 인천의 중심 지였던 중구 일대에서는 시내버스 안내원 아가씨들이 “주안, 석바위, 남동 가요” 라고 크게 외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남동은 같은 인천이어도 중심지 쪽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먼 시골 동네라는 인상을 주었고, 교통이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1968년 인천시에서 처음으로 구(區) 제도가 시행될 때 인천 전 지역이 중구(中區)―동구(東區)―남구(南區)―북구(北區)로 나뉘었다. 지역의 특성이나 역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방위(方位)에 따라 아무 개성(個性)이 없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남동구는 그 뒤 인천시의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자 1988년 남구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생겼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이전 인천의 구 이름은 모두 방위에 따라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동구도 ‘南東區’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남동구는 ‘南洞區’라고 쓴다. 이 지역이 대략 구한말의 ‘남촌면(南村面)’과 ‘조동면(鳥洞面)’에 해당하는 지역이어서 각각 ‘南’과 ‘洞’ 한 글자씩을 따 이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南洞’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日帝)가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남촌면과 조동면을 합쳐 새로 생긴 부천군(富川郡)에 편입시키면서 처음 쓴 것이다.
이중 남촌면이란 인천부(人天府) 관아(官衙)의 남쪽에 있는 면(面)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 기관이었던 인천부 관아가 지금의 미추홀구 관교·문학동 일대에 있었으니 이곳은 대략 그 남쪽에 있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인천부 관아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이 동네를 ‘남촌’이 아니라 그냥 ‘앞말(앞마을)’ 정도로 불렀을 것이다. 인천부 관아 동네에서 볼 때 이 마을은 비스듬하게 남쪽으로 건너편 쪽에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남쪽을 앞으로, 북쪽을 뒤로 본다. 또한 동네 이름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소에 쓰는 편한 말로 지어 부르는 게 첫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앞말’을 읍지(邑誌) 등 한문으로 쓴 공공문서에 적을 때 ‘앞’은 남쪽이고, 마을은 ‘촌(村)’ 이니 ‘남촌(南村)’이라 썼을 것이다.
조동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조동’은 우리말 땅 이름 ‘새말’을 한자로 바꾼 것인데, ‘새말’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이 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땅 이름에 흔하게 나오는 ‘새말’은 우선 ‘(둘)사이의 마을’로 해석 할 수 있다. ‘사이’의 준말이 ‘새’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한자로 이름이 바뀔 때 대개 ‘間(사이 간)’자를 써서 ‘간촌(間村)’ 정도로 바뀌곤 한다.
이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만수중학교 근처에 ‘조곡(鳥谷)’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이 ‘반줏골’과 ‘산박골’이라 불리던 마을 사이에 있어 ‘사잇골’이라 불리다가 ‘사잇골〉샛골’을 거쳐 ‘鳥谷’이 됐다고 본다.
그런데 두 마을 사이를 뜻하는 ‘새골(샛골)’을 날아다니는 새〈鳥〉로 잘못 알아 한자로 ‘鳥谷’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다시 ‘조동(鳥洞)’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별다른 근거 자료가 없어 맞거나 틀린다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두 번째로 ‘새말’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을 갖는다.
한자로 바뀌면 ‘신촌(新村)’이니, 서울의 신촌을 비롯해 전국에 이 이름을 가진 동네가 수 백여 곳이나 있다.
때로는 새말 대신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해서 ‘새터’나 ‘새터말’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이 이름이 한자로 바뀌면 ‘신기촌(新基村)’이 된다.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에 있는 신기촌이나 신기사거리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 해석은 이곳 새말(조동)이 조선시대 도호부 관아가 있던 관청말(지금의 관교·문학동)의 근처에 새로 터를 잡아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조동면은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된 농촌동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해석은 맞지 않을 듯하다.
세 번째로는 실제로 ‘동네에 새〈鳥〉가 많아서’ 새말이고, 그것이 그대로 한자로 바뀌어 ‘조동’이 됐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1760년 무렵에 나온 「여지도서(輿地圖書)」나 1842년에 나온 「인천부읍지」 등의 옛 자료에 ‘조동면(鳥洞面)’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실제로 새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기록의 이름이나 지금의 한자 이름만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땅 이름은 전해오는 과정에서 워낙 변화의 폭이 크기 때문에 이렇게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동네는 논과 들판이 넓게 펴져있던 곳이니 당연히 새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은 인천만 해도 한두 곳이 아니었는데 그 같은 뜻의 이름을 가진 동네가 시내 다른 곳에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실제로 그렇게 새가 많았다면 그와 관련된 동네 전설 같은 것이라도 하나쯤 전해올만한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마지막으로 새말의 ‘새’를 풀〈亨〉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보아 ‘풀이 많은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새’는 벼 종류에 속하는 식물(풀}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억새’와 같은 단어에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새〈草〉’가 ‘새〈鳥〉’로 잘못 전달돼 ‘새〈鳥〉의 마을〈洞〉’이 된 것으로 본다.
이 동네의 옛 형편이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농촌이고 논과 들판이 많았던 만큼 아무래도 새〈鳥〉보다는 차라리 풀〈草〉이 많아서 붙은 이름으로 보는 것이 한결 타당할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남동(南洞)’이라는 이름은 ‘인천부의 앞마을’(남촌)과 ‘사이골’, 또는 ‘풀이 많은 마을’(조동)이 합쳐져 생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