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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운여정 시리즈(1,2,3,7)는 이번 졸업 45주년기념 문화 기행 코스의 중요 부분의 기행 수필입니다. 참여하시는 분들에게는 더욱 보람있게, 사정상 함께 가시지 못한 분에게는 여정의 共感을 위하여..........>
조선후기 르네상스의 꽃 정다산의 고장을 찾아서(3)
-다산초당에서-
주말이면 가장 가고 싶은 서울 근교로 팔당호에 있는 다산생가와 주변의 분위기가 있는 강변 길을 꼽을 수 있다.(표운여정 5편)
그곳에 가서 정다산을 만나게 되면 문 듯 그가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강진의 다산초당과 그의 유배 생활이 깃든 인근 지역에 찾아가고 싶어진다.
나는 몇 해 전만해도 매년 한 두 번 계절에 따라 이 곳을 다녀왔다.
서울에서는 먼 곳으로 한 반도의 끝이라 이 곳을 찾는 길은 웬만한 여행의 즐거움과 가치가 없으면 다녀오기가 힘든 곳이다.
그러나 이 곳은 계절마다 느낌이 다른 경치와 정겨운 분위기가 있고, 다녀오는 여정에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역사적 인물과 문학가 예술가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지역 고유의 풍물과 남도의 전통 음식을 즐기는 것은 또 다른 멋이 아니겠는가?
같이 동행하는 일행이 있을 때는 그들의 정치와 사상,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얘기하기도 하고, 토론도 하며 또한 그들의 삶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들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지는 것 같다.
지난해 연말 어느 일요일 오랜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만난 적이 있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있어 한 친구가 '연말에 우리 한 번 여행을 하면 어떨지?' 하고 제안을 했다.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부인들 쪽에서 '해남, 강진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나를 바라본다.
이들과는 가끔 국내외로 함께 여행을 하였으며 특히 이 지역은 대부분 두 세번 정도 함께 가 본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많은 여행지 중에서 거리가 멀지만 모두들 이 곳을 다시 다녀오고 싶다는 뜻은 이 곳이 갖는 어떤 매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의 여행은 어느 계절에 떠나도 그 계절에 어울리는 경치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어느 벚꽃 피는 봄철 이들과 함께 남도를 기행한 적이 있다.
온갖 봄꽃이 피어 있는 강진까지의 봄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상적인 여행이 아닐 수 없다. 화사한 정읍의 벚꽃 길과 담양으로 들어가는 내장산의 깊숙한 산 속으로 연분홍 진달래와 산 벚꽃이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담양과 광주 무등산, 화순적벽에 걸쳐있는 호남학파들의 정자와 유적지, 배꽃과 복숭아꽃이 어우러진 나주의 봄 정취, 우리의 여행은 지루함을 모른다. 우리들은 예로부터 달빛에 피어있는 배꽃의 은은함을 좋아했고(梨花는 月白하고) 발그레한 복사꽃은 아름다운 여인의 뺨과 같다 하지 않았던가?
더 남으로 내려가면 남국의 소금강,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영암 월출산, 이산을 끼고 30여리나 활짝 핀 벚꽃 터널을 달린다.
커다란 벚꽃 나무 밑의 포장마차에서 잠시 차를 세운다. 떨어지는 꽃잎을 안주 삼아 한잔 술을 마셔 본다. 꽃 속에서 취해 보니 세상에 부러움이 없어라. 월출산 서쪽 산 끝자락에는 백제 시대의 왕인박사 탄생지가 있다. 1,300여년전의 역사를 확인하며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왕인박사의 탄생지를 보면서 또 하나의 보람을 찾는다.
중년이 다 된 여인들은 소녀와 같이 좋아한다. 산등성이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봄의 꽃들을 보면서 이들은 탄성을 보낸다.
'정말로 잘 왔다!'
바로 이 순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무아의 경지인 것 같다. 모두들 행복감에 젖어든 모습이다.
< 이별의 그리움.>
1801년(순조 원년) 정다산 형제는 유배 길에 오른다.
형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떠나야만 했다. 11월 5일 한양을 출발한 두 사람은 11월 21일 율정점(현 나주시 대호동 칠전마을)에 다다른다.
당시 이 곳은 목포와 해남으로 갈라지기 전 마지막 여관과 주막이 있던 거리였다.
이 들의 유배길은 16일이나 걸렸지만 우리 일행은 이 곳 저 곳 유적지를 들러 보면서 7시간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모두들 배가 출출하였다.
이 삼거리에 있는 나주식당, 1인분 5천원, 비록 조그마한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돼지 불갈비를 포함하여 30여가지나 되는 반찬, 푸짐한 남도 음식에 만족한다. 더군다나 소주 한 병 천원으로 나그네들에게 대접한다. 이 지방의 인심을 말해 준다.
이 곳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한잔 술을 나누면서 200여년전 다산 형제를 생각한다. 그 옛날 다산 형제는 이 근처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두 형제는 밤을 지새우면서 이별의 아픔을 나누었다.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데 형제는 어떻게 눈물을 참을 수 있으리요.
주막집 새벽녘, 등잔불이 푸르스름 꺼질 듯 한데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치솟는 슬픔에 목이 메인다 .
<율정이별>
형제가 서로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해어져야했던 그 때는 그래도 다시 만날 희망을 가졌지만, 형 손암은 흑산도로 들어간 후 16년째 되던 해(1816. 6. 6)에 강진에 있는 동생 다산을 그리워하다 병이 들어 먼저 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는 다시 율정점을 거쳐 선산에 묻혔다.
다산은 그 후 3년이 지나 유배가 풀려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에(1818. 9) 율정점에 도착하여 사별한 형의 모습을 그리며 통곡하였다.
살아있는 동안에 미워해 온 이별의 율정점, 이제 사별의 거리가 되어 다시는 형을 볼 수 없으니, 율정점은 다산에게는 얼마나 가슴아픈 곳이겠는가.
다산이 고향집에 돌아온 후 형의 일생을 기록한「손암묘지명」에서도 율정점의 생이별과 비극적인 운명을 애절하게 기록하였다.
처음에 손암이 흑산도로 들어 갈 때 흑산도 앞에 있는 우이도(牛耳島)에서 거주하였다가 흑산도 본 섬으로 들어가서 유배 생활을 했다.
갑술(1814)년에 다산이 해배 되리라는 소식을 잘 못 듣고 아우가 자기를 찾아오리라 믿고 아우를 만나고 싶어 다시 우이도로 나와 3년이나 기다리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다산을 그리며 그 곳에서 죽어갔다. 동생을 그리는 형의 애틋한 사연과 가슴아픈 이별을 간직한 이곳 주막거리, 율정점, 두 형제에게는 기막힌 눈물의 거리가 아니겠는가? 각별한 형제애를 가진 두 분의 정경이 실로 눈물겨웠다.
< 해남 연동의 녹우당과 이웃 강진 귤동의 다산 초당>
아무리 교통 수단이 좋아지고 길이 넓어졌다 하더라도 서울에선 가장 먼 이 나라의 땅 끝인지라, 누구나 쉬 둘러 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꼭 한 번쯤은 큰마음 먹고 길을 나설 만도 하다. 녹우당에는 윤고산의 시와 그의 증손자 공재의 그림, 그리고 해남 윤씨의 멋있는 삶이 깃들어 있고, 강진에는 공재의 외증손 정다산이 긴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활동을 한 초당이 있기 때문이다.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허소치와 같은 분들은 시(詩), 서(書), 화(畵)와 다도(茶道)가 예술적 경지에 이른 분으로 우리는 이들을 사절(四節)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문학과 예술은 모두 해남 윤씨와 정다산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았다. 당시 추사, 초의, 소치들이 가는 곳마다 시인 묵객은 물론 권력가나 명문가들이 이들의 주위를 맴돌며 학문과 예술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스승 뻘인 정 다산을 조선조 후기 르네상스의 꽃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산 초당이 있는 아랫마을을 귤동(橘洞)이라고 부른다. 유자나무가 많아서 란다.
어느 조용한 시골동네와 같다. 무너진 돌담과 토담, 엉성한 싸리나무 울타리, 남녘의 정감을 보여 주는 탱자울타리와 대나무 밭 안쪽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시골집들이 산마루 길을 따라 언덕빼기로 이어져 있다. 집집마다 뒤뜰에는 감나무, 밤나무, 동백나무, 유자나무들이 있지만 아직도 이곳은 가난한 시골 동네같이 보인다. 담 넘어 노오랗게 익은 유자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입 속에 고여진 침을 삼킨다. 또한 겨울이면 활짝 핀 동백꽃이 우리를 반긴다. 삽살개와 검둥이 그리고 토종 누렁이가 낯 선 우리들의 뒤를 따라온다. 내 고향과 같은 정경이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오랫동안 잊어버린 내 고향을 다시 찾은 것 같았다.
늦가을엔 골목 앞마다 이 곳에서 거두어들인 먹음직스러운 홍시나 밤, 노란 유자와 단 호박, 조와 콩들의 좌판이 벌어진다. 같이 동행하는 아낙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초당이 있는 다산(茶山)입구에는 외지의 돈 많은 분이 몇 년 전에 시골집 한 채를 사서 기와를 올리고 마루를 널찍이 낸 시원스러운 별장을 세웠다. 이 마을 정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눈에 더욱 거슬리게 하는 것은 이 고장 토박이 부자, 다산선생의 18제자 중 한 분의 후손이 몇 년 전 별장식 전원 주택을 지었고 마당 한 구석에는 남성의 위대한 상징물을 세워 놓아 이 마을의 서정적 분위기를 깨더니, 최근에는 이 집 마당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 다방을 차렸다. 문 앞에는 녹차 1인분에 2천 5백원이라고 쓰여 있다. 다산에 올라 정다산을 만나기 전에 우리 일행은 그가 즐겨 마신 녹차를 마시기 위해 들어섰다. 다방 주인은 다산이 초당 인근 야산에 심었던 차나무에서 채취한 차를 특별히 다산의 녹차라고 하면서 이를 권한다. 그러나 1인분에 4천원이라 한다. 다산이 마신 차라고 하기에 모두들 한 잔 씩 들게 된다 '스스로 다산은 나의 운명'이라며 다산학에 심취, 이를 연구하고, 다산기념사업회를 설립한 이 분의 뜻은 갸륵하나 마치 다산을 상품화 한 것 같아 차 맛이 씁쓸하다.(이 분은 지금 강진 군수로 있다)
이 집을 뒤로하고 다산초당이 있는 뒷산을 오른다. 오솔길을 따라 오르자면 다산이 심었다는 차나무들이 주위에 자라고 있으며, 빽빽이 들어 선 대나무 숲과 소나무들이 하늘을 감추어 언제나 어둡고 서늘하다. 한 여름에는 초당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소리가 한결 시원스럽다. 제법 긴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 널찍한 공터에 무덤 하나가 있다. 다방 주인의 4대조인 윤종진(尹鐘軫 1803-1879)과 그의 부인을 합장한 묘소로 생전에 다산을 정성껏 스승으로 모신 것과 같이 다산초당을 지키고 있다. 그의 조부 귤림처사 윤단(尹 1744-1821)은 정약용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되는 분이며, 다산 기슭의 자기 산정(단산정)으로 정다산을 모셔 온 분이다. 이 묘를 지키는 석상 2기가 양쪽에 거북살스럽게 서 있다. 석상이 무척 해학적이고 귀여워서 현대적 회화를 보는 것 같아 우리의 눈길을 끈다. 우뚝했던 코는 아들을 바라는 아낙네들에 의해 뭉툭해 졌으나, 커다란 귀, 동그랗게 뜬 눈과 헤벌린 입이 매우 우스꽝스럽다.
이 곳부터 다시 가파른 길을 더 오르니 사방이 트인 곳에 정면 3칸, 측면 1칸인 기와로 지은 반듯한 집이 우리 눈에 들어온다. 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큼직하다. 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이라고 하여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상상하였으나 폐가가 된 초당을 1958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이처럼 반듯하게 지어 놓은 것이다. 당시의 초당은 아니지만 마루에 걸터앉아 보니 숲이 우거져 한낮인데도 컴컴하고 앞에 보이는 전망이 없지만 산림욕 등반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비록 지금의 이 집은 다산이 거처했던 초당은 아니지만 그의 발자취는 아직도 이 곳에 남아 있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뜰 앞에 널찍한 돌 하나가 놓여 있다. 모두들 무심히 보고 넘기기 쉬운 돌이다. 이 곳에서 다산이 홀로 상념에 젖어 차를 마시기도 하고, 찾아오는 학우와 학승, 제자들과 함께 그가 직접 재배하고 만든 차를 달여 마신 곳이다. 이 곳에서 준비한 녹차 한 잔을 들면서 나는 다산의 초당생활을 회상해 본다.
'무진년(1808년, 48세) 3월 다산은 너무 마음에 들어 여생을 살아가기로 하고 읍내에서 이 곳으로 이주를 결정하였다. 1801년 11월 겨울 처음 강진에 유배 왔을 때 모두들 그를 외면하였으나, 성문 밖 주막 집 노파의 배려로 토담 집 방 한 칸을 얻어 이를 '사의재'라고 이름 짓고, 4년간을 지내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시작한다. 그 4년 후 을축년(1805) 다산과 함께 유학과 불교 교리를 토론하고 다산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친 백련사 혜장스님(1772-1811)의 도움으로 고성암 보은산방으로 옮겼다. 병인년(1806)에는 그의 애제자 이학래집에 기식하며 학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8년 가까이 읍내에서 전전하다가 천여 권의 귀중한 책이 소장된 이곳 다산초당에서 아름다운 경치와 인정에 젖으며 유배의 서러움도 잊고, 본격적인 저술과 후학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정신적인 압박을 벗어나 자연과 벗삼고, 여유 만만하게 삶의 즐거움을 되찾은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초당 바로 앞에 차를 달이는 다조(茶 )를 마련하였고, 초당 뒤 서쪽 언덕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새겨 이곳이 자신의 거처임을 징표로 만들었다. 정석 바위 밑 석간수가 나오는 샘물(藥泉)로 차를 끓였다. 초당 오른쪽에는 연못을 파서 잉어와 붕어를 기르고, 온갖 화초를 심어 경관을 멋있게 꾸몄고, 산 속에서 샘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폭포수가 운치를 더한다. 이 곳에 갯가의 괴석을 직접 골라 조그마한 산을 만드니(蓮池石 山) 진짜 산보다 더 멋있었다고 즐거워하였다.
다산은 정석, 다조, 약천, 연지석가산을 '다산4경'이라 이름하고 일경마다 시를 지어 이를 칭송하였다.
초당의 동쪽과 서쪽에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을 새로 짓고, 그는 동암에 거처하였다. 서암은 다성각(茶星閣)이란 현판이 있으며, 다산이 주로 18명의 제자를 가르친 곳이다. 동암에는 다산이 쓴 '茶山東庵'과 추사 김정희가 예서체로 쓴 '寶丁山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초당에 걸려 있는 추사의 현판글씨 茶山草堂은 추사가 실제로 쓴 것이 아니고, 후손들이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해서 만든 것으로 글씨의 크기와 획이 불균형하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보정산방' 네 글자는 추사의 명필로 평가되고 있다. 추사는 24세 연상인 다산에게서 유학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여 그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다산의 자제인 유산공과는 막역한 교유를 나누었다. '정약용 선생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란 의미의 현판을 다산이 이 곳을 떠난 후 그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는 마음으로 추사에게 부탁하여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집에 다산이 쓴 현판 '다산동암'의 글씨는 상당한 명필로 평가받는다. 다산이 이곳에서 10여년 간 지내면서 불후의 명작인 '목민심서'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우리민족을 일깨운 위대한 '다산학'을 이룩하였다. 이는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다산의 동암에서의 생활이 고고하고 서정어린 낭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9월 12일 밤, 나는 다산의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은 외롭고, 맑았다...........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춘다. 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구름을 뚫고 나간다. 어이 더러운 세상의 찌든 창자가 씻어지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간세상의 광경이라 할 수 없도다.'(與人書)
가을이 되면 귤동마을에 노오랗게 익어 가는 유자를 내려다보고, 겨울이면 초당 주위와 백련사로 넘어 가는 산길의 동백꽃을 즐긴다. 봄과 여름에는 때맞추어 차 잎을 따서 말리고 끓이며 격에 맞는 은자의 생활을 보낸다. 풍광이 아름다워 세월 보내기가 즐겁고, 가까운 곳에 백련사가 있어 자주 혜장스님과 교유하였으며, 마을 앞에는 조수가 밀려드는 구강포(九江浦)에서 뱃놀이와 고기잡이로 그는 시름을 잊는다. .
뿐만 아니라 다산은 봄철 꽃이 피면 언제나 꽃 나들이를 간다. 산의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다산초당 뒤쪽 길을 가르는 바위산이 있다. 기기묘묘한 바위가 가히 소금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위 틈새에 핀 진달래 꽃, 싸리나무 꽃으로 착각하는 흰 조팦 꽃, 벚나무와 각종 산 꽃들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동행한 한 분은 마냥 그대와 함께 여기를 걷고 싶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내가 다산에 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봄꽃이 피면 언제나 나들이를 한다. 초당 뒷 편 고개를 넘고 시내를 건너 가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씌며, 용혈(龍穴)에서 쉬고, 청라곡(靑蘿谷)에서 물을 마시고, 윤서유(尹書有:다산의 친구이자 사돈으로 다산을 보살펴 은 당대의 부호) 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농산에 있는 농막에서 낮잠을 자는 것은 늘상 하던 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참선을 마친 뒤에 시원한 누각(사돈 집 정자 조석루)에 올라앉아 향취 좋은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시(詩) 한편을 낭랑히 읊조린다.....(朝夕樓記)
이런 정도면 은자의 생활도 극치에 이른 넉넉한 삶이었다. 누가 그를 죄인이라 하겠는가? 숨막히는 지루함도, 처자와 가정이 그리운 향수도 견딜 수 있게, 그의 삶은 넉넉하고 풍족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어찌 사랑하는 처자식이 그립지 아니하였으리요?
15세에 결혼한 다산은 홍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6남 3녀를 낳았으나 모두 죽고 2남 1녀 만을 키웠다. 남녀 사랑의 완숙기인 40세 때부터 18년 동안 권력에 짓눌려 부부간의 사랑을 강제로 차단 당해야만 했던 생이별의 아픔과 괴로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온다. 당시 유교에 젖은 근엄한 사대부들은 섬세한 사랑 얘기나 그립고 아쉬움에 대한 진솔한 표현을 삼가는 편이다. 그런데도 다산부부의 애잔한 사랑의 표시는 우리를 감동케 한다.
강진에서의 귀양살이가 몇 년이 지난 후 아내 홍씨가 잠 못 이루는 그리운 정을 표시하려고 시집올 때 가져 온 여섯 폭의 치마를 다산에게 인편으로 보냈다. '당신도 내가 그리울 것이요, 나도 당신이 그립지만 달리 정을 표하고 달랠 길이 없사오니 우리의 신혼처럼 즐겁던 때를 회상이라도 하고 싶어요.' 하면서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바랜 다홍치마를 사랑의 정표로 지아비에게 보내노라는 뜻이었으리라. 얼마나 은근하고, 감동적인 사랑의 표시인가?
다산은 이 다홍치마를 가위로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교훈의 글을 써서 두 아들에게 보냈고, 그 나머지로 '매화와 새'를 그리고 그림 아래쪽에 다산의 외로움을 달래고자하는 마음이 담긴 행서체의 4언 시구를 써서 외동딸에게 보냈다. 다행히 외동딸에게 보낸 이 '梅鳥圖'는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에 다산부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새 한 쌍이 동암 뜰에 날아와 매화 가지에 앉았네
매화 꽃 향기에 이끌려 홀연히 찾아 왔네
여기에 머물면서 함께 집 짓고 살면 즐겁지 않은가
매화꽃이 만발하여 그 열매도 많단다.
비단 위에 그린 '매화와 새'는 오른 쪽에서 뻗어 내린 매화 가지에 두 마리의 작은 새가 앉은 이른 봄날을 꾸밈없이 그려낸 예쁜 그림이다. 가지에 활짝 핀 매화꽃과 꽃망울, 아랫 가지 가운데에 서로 교차해서 앉은 새를 단아하고 깔끔하게 표현하였다. 매화가지에 앉은 다정한 두 마리 새는 마치 애틋한 부부애를 상징하는 것 같다. 1813년 7월 한 여름 동암에서 그린 이 서화(書畵)는 다산이 오랜 유배생활로 가정의 화목과 사랑의 중요함을 잔잔한 필치로 그려 외동딸에게 보낸 것이다. 외동딸은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펴 온 강진군 도암면 목리에 사는 윤서유의 며느리가 된다. 다산은 아버지를 위하여 멀리 이 곳까지 시집오는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로 나타냈다고 본다. 그의 사위 윤창모는 다산의 제자로서, 비록 지벌이 낮았지만 외동딸을 이 집으로 보낼 정도로 다산을 감동시킨 집안의 청년이다. 그의 외손자 윤정기(尹廷琦)는 다산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큰 학자가 되어 다산풍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다산이 유거(幽居)한 동암을 지나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天一閣)으로 간다.
숲에 싸여 어두컴컴하고 습한 초당에 비하면, 천일각은 시원스러운 전망으로 구강포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확 트인다.
정다산이 머물고 있었을 때에는 이 누각이 없었다. 다만 선생은 공부와 저술에 지치거나 흑산도로 유배가 있는 형님 손암이 그리울 때 이 자리 어느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심신의 피로를 달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념에 젖기도 하였을 것이다.
천일각 옆길을 따라 초당 뒤를 도니 곧장 백련사로 가는 산길이 나타난다. 동백꽃들이 우리를 마중한다. 따듯한 바람 속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은 여자 입술과 같아 자못 매혹적이다. 산허리를 돌아서면 구강포와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등산길이다. 그 옛날 다산선생이 초당에 머물러 있을 때 이 절의 혜장스님을 만나러 가던 길이다. 혜장과 함께 불교와 유교 사상을 서로 담론도 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차 마시는 다인(茶人)의 길을 알았고, 시문과 학문을 토론함으로서 인간적, 사상적 영향을 적지 않게 서로 주고받았다.
초당과 백련사를 서로 오가던 혜장스님은 우리 나라의 문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흥사 초의선사를 다산에게 소개하고, 그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하였다. 시우(詩友), 다우(茶友), 주우(酒友), 학우(學友)인 혜장의 죽음은 정다산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이 길은 그를 위하여 만시와 제문을 지어 백련사로 가던 길이다. 혜장을 잃은 다산은 초의에게 정을 쏟았다. 다산의 제자가 된 초의선사가 혜장의 빈자리를 메꾸었다. 유학과 불법을 심도 있게 연구, 토론하여 다산학을 여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림도 그리고 시문을 쓰기도 하여 다산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각각 파가 다른 해남 윤씨의 세 집안(해남 연동의 녹우당, 강진 목리의 사돈 집, 귤동마을의 단산정)과 초기 유배시절의 읍내의 몇 집안 그리고 학승들은 다산학 완성에 훌륭한 보조자로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시대의 선구자요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일생은 참으로 위대하다. 정치적으로 당쟁의 희생자였으며, 이로 인하여 옥고와 유배를 당하면서도 학문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은 선비정신으로 5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겼고, 2천 5백 여수 이상의 시를 지었다.
다산선생을 조선실학의 완성자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실학의 중심 사상인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을 수립하였을 뿐 아니라 서구의 인본주의, 실용주의 사상을 그의 저서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연구 분야는 정치· 경제·사회·과학·의학·철학·천문·지리·역사·종교·윤리·음악·서화등 모든 분야에 미치지 않는 것 없이 탁월하였다.
한 달에 한 권 이상을 저술 한 것은 초인간적인 열정 때문이지만 오랜 저술 활동으로 엉덩이에 종창이 번지자 그는 선반을 만들어 선 채로 집필을 하였다 한다.
1818년 8월, 18년 동안의 귀양살이가 풀렸다. 그의 나이 57세.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을 떠나 그의 고향에는 9월 15일에 돌아 왔다.
75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기쁨이나 환락보다는 슬픔과 고통, 외로움과 한스러움의 생애였지만 좌절치 않은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떠난 후에도 다산초당에는 해마다 제자들이 모여서 시회를 열고, 차를 만들며, 초당의 지붕을 이으면서 오랫동안 그의 얼을 되새기곤 했다.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에 회혼일을 맞아 회혼시를 썼다. 그의 최후의 시다.
육십 년 세월 잠깐 사이 흘러갔네.
복숭아나무 봄 빛 성한 것은 신혼 초와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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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 두 사람 마음은 같은 심정
지난 유배시절 아내의 치마폭엔 눈물 자국 번졌노라.
해어졌다 다시 만난 것은 우리들의 참 모습
바가지 두 쪽이나 자손에게 남겨 줌세.
(12. 1998)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구구절절이 다산의 내음이 묻어있고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귀한 집필을 하신 형의 그 정서가 멀리서 고국을 그리는 저에게는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켰읍니다. 이 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