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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욥기라는 성경이름은 이 책의 주인공인 ‘욥’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기원전 2000년대 서부 셈족 사이에 흔한 이름이며 욥의 고향으로 나오는 “우스”는 아람이나 에돔 지역이라 한다. 욥기는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저술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며 게다가 언어들도 다른 성경에 잘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많다.
쓰인 시기는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의 마카베오 시대까지 들고 있다. 아마도 욥기는 족장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상당히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의 복잡한 형성과정을 거쳐 후대에 오늘과 같은 꼴로 굳어졌을 것이다.
내 용 :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경건하게 생활하던 욥이 어느 날, 고통과 재난을 잇달아 겪으면서 그를 위로하러 온 세 친구와 함께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추구하다가 마침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 내용이다.
욥기는 다른 특성을 지녀 저자를 추정하기가 참 어렵다. 아마 욥기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남긴 저자는 의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해결책이 아닌 새로운 견해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유난히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에 민감했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욥기는 고통에 관해 묻고 도전하고 항의하는 책이며 전통적으로 고통은 상선벌악 개념에 따라 이해되었다. 하느님의 보상적 정의를 가리키는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지만, 고통의 모든 문제를 해명해 주지도 않으며 현실적으로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적잖았다.
욥기는 하느님의 정의와 함께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이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은 인간 삶과 연관된 하나의 신비이며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다. 고통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사라져 가며 궁극적으로 그 문제의 답을 얻을 곳은 영원하신 하느님, 창조주 그분 안에서이다. 결국 남은 답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뿐이며 욥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현존을 체험하고 그분께 승복한다. 신약에 와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바로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다.
시편이란?
유다인들이 처음에 시편을 부른 이름은 ‘기도(트필롯)’였다가 후대에 가서는 ‘찬양(트힐림)’ 또는 ‘찬양의 책’이라 불렀다. 구약에서 찬양하라는 동사(hll)의 2/3 이상이 시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도와 찬양은 시편의 두 측면이다. 시편의 영어 이름(psalms)도 여기서 연유하며 우리 말 이름 ‘시편’은 시모음집이라는 뜻의 중국어 이름 ‘시편(詩篇)’을 딴 것이다.
시편 이외에도 성경에 나오는 노래는 적지 않으나, 이런 노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었기 때문에 원작가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시편 첫머리에 다윗, 아삽, 코라의 후손, 모세 등의 작품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들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시편은 사실상 하느님 백성 전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만, 다윗은 음악을 즐기고 시와 노래로 하느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자연스럽게 시편의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시편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어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황금시기인 기원전 10세기와 가장 어려웠던 시대인 바빌론 유배기 전후에 생겨났을 것이다. 현재와 비슷한 꼴로 형성된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그때 모세오경을 모방해서 시편을 다섯 권(시편 1-41; 42-72; 73-89; 90-106; 107-150)으로 나누었을 것이다.
내 용 : 하느님과 대자연의 신비를 찬미하고, 하느님께서 해주신 모든 일에 감사드리며,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해 주십사고 간청하는 신앙인들의 기도가 150편에 걸쳐 절절하게 담겨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두루 애송하는 성경은 아마도 시편이며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고 어려운 처지에서는 구원을 탄원해 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드리는 전례에서도 시편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시편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응답의 성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하신 큰일들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당신 백성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 수가 없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사는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시편 19,14)라 고백해 왔던 것이다.
잠언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첫 구절(1,1; 10,1; 25,1)을 따라 책의 이름을 “솔로몬의 잠언들(미쉴레 쉴로모)” 라고 불렀다. 우리말 이름 “잠언”은 중국어 “箴言”에서 유래하며, 잠(箴)은 병을 고치는 데 쓰는 ‘침(鍼)’을 뜻하기도 하여, 잠언은 침과 같이 톡 쏘면서 생명을 주는 짧고 소중한 가르침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는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이 쓰고 히즈키야가 편집했다고 한다. 솔로몬은 삼천 가지 잠언을 지었고(1열왕 5,12)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나 일부를 썼을 가능성은 크나 전체를 썼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잠언을 쓰고 수집해서 편집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현인들이라고 불리던 ‘서기’들이나 이 책을 솔로몬 왕의 권위 아래에 둠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쓰인 시기는 가정과 부족에서 차츰 생겨난 생활의 지혜가 속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다가 왕조시대에 들어와 몇 차례에 걸쳐 한데 모아졌다. 이렇게 모아진 잠언은 대략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짐작되고, 최종적으로는 기원전 2세기경에 앞의 표제가 붙어져 완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내 용 : 고대 근동국가에서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갖가지 금언이나 충고, 권고 등이 중요시되었고, 이스라엘은 주변국가의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앙체험 안에서 그들 나름의 지혜문학을 발전시켰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실천에 바탕을 둔 지혜로,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 부모·형제·부부·왕·종·노인과 젊은이·여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이 지혜라고 하면서도 다분히 실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한 주변국가와 달리, 이스라엘은 지혜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 여겨 신앙과 연결시켰다. 즉 이스라엘은 지혜의 핵심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파악했다(잠언 1,7; 9,10; 15,33).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지혜만이 최고 최선의 지혜라는 깨달음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이 지혜를 깨달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옳은 길을 택하여 복을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지혜의 글을 묶고 잠언을 시적인 글로 두 행씩 대구법으로 구성한 것도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코헬렛은?
‘코헬렛’의 뜻은 대개 ‘회중 또는 회중 앞에서 말하거나 가르치는 이’를 가리킨다. 우리말 이름 “전도서”는 중국어 이름 “傳道書”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코헬렛을 전도자보다 “설교자”(공동번역 성서), “교사”(NRSV), 또는 “코헬렛”(NAB)으로 옮기면서 책이름도 그냥 “코헬렛”(구약 새번역)으로 쓴다.
책의 첫머리에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1,1)이라 하여 솔로몬을 저자로 암시하고 있으나 글의 성격이나 내용, 사용된 어휘 등을 잘 검토한 결과, 이를 쓴 이는 유배기 이후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던 유다의 한 늙은 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권위 아래에 둠으로써, 코헬렛이 어느 한 무명작가의 개인적인 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에 근거를 둔 권위 있는 가르침임을 드러낸다.
씌어진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살았던 집회서 저자가 코헬렛을 알았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당시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원전 3세기경에, 아마도 기원전 250년 전후에 완성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내 용 : 코헬렛은 헬레니즘 같은 새로운 시대에서 기존의 지혜문학이 지닌 허점을 보완하고, 이스라엘의 신앙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썼다.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는, 즉 코헬렛은 실제적인 경험과 냉정한 관찰을 통해 잠언류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지혜의 한계와 단순한 인과응보 논리의 허구성, 세상의 불공평과 왜곡된 현실 등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종말인 죽음에 부딪쳐 좌절해 있는 인간의 갖가지 모습, 인간의 모든 업적과 소유가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상대적인 것임을 알려 준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보면서 지혜를 깨치려 해보았으나, 세상 일이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만을 깨달았다며 무엇이든 정해진 때에 제 일을 하며 후회 없이 살라는 설교자의 솔직담백한 가르침이다.
그리하여 코헬렛은 창조주 하느님만이 절대가치를 지니시니, 그분을 경외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분의 선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기쁘게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준다. 결국 인간의 한계에 몸부림치면서도 신앙에 매달린 코헬렛에게 궁극적으로 빛과 구원을 던져주시는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가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솔로몬의 노래”(아가 1,1)라는 구절을 따, 가장 뛰어난 노래를 뜻하는 “솔로몬의 노래”라고도 불렀다. 우리 말 이름 “아가”는 중국어 이름 “雅歌”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뜻 역시 ‘지고하고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며 6세기부터 파스카 축제 때 봉독되었다.
아가서는 곳곳에서(1,1; 3,7.9.11; 8,11.12) 솔로몬을 저자로 제시하고 있으나, 단지 솔로몬이 많은 노래를 지었다는 전승과 지혜와 사랑의 본보기로 알려진 점을 고려하여 솔로몬을 저자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몇몇 노래는 솔로몬 시대와 기원전 8세기 왕정시대에 쓰였다고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유배시대 이후에 기록되고 현재와 같은 꼴을 갖춘 것은 대략 기원전 5-3세기경이다.
내 용 : 아가는 여덟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퍽 파격적이며 아무 선입견 없이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뛰어난 한 편의 연애시를 읽는 기분이다. 더구나 그 표현들이 상당히 솔직하고 관능적이어서, 어떻게 이런 책이 성경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사실 아가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옛날부터 줄곧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교회는 아가를 성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계시 역사 전체와 연관시켜 아가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적인 사랑과 성, 넘치는 생명력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선물로 인식한다. 서로를 찾아 헤매는 신랑·신부의 사랑을 통해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감미로운 사랑의 연가이다. 나아가 흔히 혼인관계로 표상되던 하느님과 당신 백성간의 관계를 연인의 관계로 빗대어 표현한 노래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 노래에서 상대에 대한 충실성과 지극한 사랑을 읽으면서 인간 서로 간에, 하느님과 인간 간에 오가는 사랑의 진실을 여실히 알아볼 수 있다.
지혜서는?
지혜서는 세상의 지혜가 많고 많지만, 하느님의 지혜를 능가하는 것은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 쓰인 만큼 지혜서란 책이름이 붙여졌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솔로몬이 썼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가타 성서와 70인역서는 “솔로몬의 지혜서”로 부르기도 한다.
오리게네스, 유세비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등의 교회학자들은 지혜서의 문학적인 표현방식이나 당대에 유명한 사람을 저자 이름으로 내세웠던 관습으로 보아서 솔로몬이 저자일 수 없음을 밝혀냈다. 현재도 누가 지혜서의 저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헬레니즘의 철학과 수사학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어를 말하는 학식 있는 유다인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부분의 내용과 문체가 뒷부분과 다른 점을 들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나누어서 집필했을 거라고 여기는 학자도 있다.
대략 기원전 220년서부터 50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며, 70인역본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면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집필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땅의 끝에서 끝까지 다스리는 통치자들”(6,1)이란 말이 언급되어 있고, “너무 멀리 살기 때문에 직접 경배할 수 없는 군주”(14,17)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쓰여지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기원전 1세기말에 쓰였을 것이며 지혜서는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늦게 집필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용 : 이교적인 문화권에 사는 동료 유다인들이 전통적인 믿음에 긍지를 가지고 지켜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써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마련이므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꿋꿋이 지켜나가라고 촉구하며 현재 겪는 고통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으로 받아 안으라고 권유한다. 나아가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이방인 왕들은 그에 따른 추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숨을 거두면 그만일 뿐인 한낱 인간에 불과한 왕들이 하느님으로 신격화되어 숭배를 받는 일은 가당치 않으므로, 참된 하느님을 못 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도록 촉구한다.
집회서는?
‘집회서’는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용한 책이라서, 교회의 책이란 뜻으로 이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전에는 저자의 이름을 붙여서 “벤 시라의 잠언” 혹은 “시라”라고도 불리웠다.
저자는 집회서 말미에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51,30)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저자가 자기 책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집회서에 소개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벤 시라(=시라의 아들)는 젊은 시절부터 율법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오래도록 명상하고 외국여행도 하면서 쌓은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자 학교를 열었던 예루살렘의 명문 율사로 여겨진다.
기원전 180년경에 쓰였을 것으로 저자의 손자가 “에우에르게테스 왕 삼십팔 년에 저는 이집트에 가 얼마동안 머물면서, 적지 않은 교훈이 담긴 이 책(머리말)” 번역했다는 기록에 비추어, 비교적 정확하게 집필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에우에르게테스 왕 삼십팔 년은 기원전 132년). 따라서 번역자와 할아버지 벤 시라의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이 책이 50년 전에 쓰였으리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하다.
내 용 :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에 의해서 더욱 널리 퍼진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살면서, 전통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회의하는 유다인들을 붙들어 주고자 저술되었다. 인생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므로 현세에서 온갖 쾌락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시대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로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 준다.
율법을 통하여 계시된 참 지혜를 지니고 있으므로, 헬레니즘을 무작정 따라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올바른 지혜의 길을 추구하라고 촉구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생성되고 전해 내려온 지혜의 보고이자,
하느님께 드리던 찬미의 시를 집대성해 놓은 시서와 지혜서.
그 안에서 우리는 시대마다 지혜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생활하다가 겪게 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깊이 고민하고 바르게 행동하고자 애썼던 선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인생살이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영성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시서와 지혜서는 하느님을 향해 온몸으로 부르는 신앙인들의 노래이자 기도이며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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