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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穆陵]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와 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왕릉·왕비릉. 사적.
내용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원래 지금의 목릉(穆基)의 터는 의인왕후의 유릉(裕基)의 터로 택정(擇定)되었던 것을 건원릉(健元陵) 서강(西岡)에 있던 목릉이 물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상소가 있어 1630년(인조 8)유릉 곁에 옮기고 목릉으로 합칭하였다. 왕릉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전통적인 병풍석(屛風石)을 두른 양식이며, 두 왕비릉은 난간만 둘렀다. 임진왜란 뒤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목릉의 석인(石人)은 열악(劣惡)하여 조선왕릉 문무석(文武石)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별검(別檢, 종8품) 1원과 참봉(參奉, 종9품)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대전회통(大典會通)』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사적편(史蹟編) 상(上)-(문화재관리국, 197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의인왕후[懿仁王后]
의인왕후는 조선 전기 14대 국왕 선조의 왕비이다. 본관은 반남박씨이며, 아버지는 반성부원군 박응순, 어머니는 전주이씨 이수갑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다. 성품이 후덕하고 인자하였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와 피란을 동행하지 못하였고, 세자였던 광해군과 함께 난을 피하였다. 1600년(선조 33) 사망하였다.
정의
조선 전기 14대 국왕 선조의 왕비.
가계 및 인적 사항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을 지낸 박소(朴紹), 증조할아버지는 이조정랑을 역임한 박조년(朴兆年)이다. 어머니 전주이씨는 이수갑(李壽甲)의 딸이다. 이수갑은 세종과 후궁 신빈김씨(愼嬪金氏)의 소생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증손이다. 선조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 정안옹주(貞安翁主)의 부마 박미(朴瀰)의 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이 의인왕후의 사촌 동생이다.
주요 활동
1569년(선조 2) 왕비에 간택되어 가례(嘉禮)를 치렀다. 1572년(선조 5)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으로 피란하였다. 이후 피란과 한양으로의 환도에 선조와 함께하지 못하였고, 광해군이 의인왕후를 모시고 다녔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정주(定州)에서 안주목 영유현(永柔縣)으로 이어할 때 세자 광해군과 의인왕후는 정주에 계속 남아 있었다. 관군이 한양을 수복하자 선조는 환도를 결정하고 해주(海州)에 머무른 후 10월 한양에 도착하였다. 의인왕후는 해주에서 묘사(廟社)와 신주(神主)를 모신 광해군과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 의인왕후의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해 10월 중전의 환도를 사간원에서 청하여 11월 10일 환궁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수안(遂安)으로 피란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1598년(선조 31) 11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듬해 4월까지 계속 수안에 거처하였으며, 병이 들어 위중하기까지 하였다. 1599년(선조 32) 윤 4월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1600년(선조 33) 6월 27일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후사를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향년 46세이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비망기를 내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이를 보면 의인왕후는 궁궐 내에서 내명부의 빈들을 대할 때에도 은애가 넘쳤으며, 후궁들이 낳은 어린 아이들을 곁에 두고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의인왕후는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하여 궁인과 여종들을 너그럽게 대하였으며, 해주에서 피란살이할 때도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휼을 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외척들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선조는 이러한 의인왕후가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수명이 길지 못했다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렇지만 선조와 금슬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인왕후가 아닌 인빈김씨를 피란 여정에 동행하였으며, 1602년(선조 35) 6월 27일 의인왕후의 대상(大祥)이 끝나자 보름만에 인목왕후와 가례를 치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이며, 능호는 처음 유릉(裕陵)이었다가 목릉(穆陵)으로 하였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목대비[仁穆大妃]
인목왕후는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과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15세에 선조의 계비가 되고 1603년에 정명공주(貞明公主)를,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영창대군이 유배되어 죽었고 본인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계비.
주요활동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과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15세의 나이로 선조의 계비가 되어 1603년에 정명공주(貞明公主)를,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선조가 사망한 후 대비로서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이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613년(광해 5)에 7명의 서자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은 유배되었다가 살해되고, 아버지 김제남과 형제들도 사사되었다. 인목왕후는 폐모가 되어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갇혔다.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된 정경은 서궁록에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목왕후 폐위와 서궁유폐는 광해군에게 폐륜이라는 올가미로 작용하여 결국 10년 후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서궁 생활 10년이 된 1623년 3월 13일 밤 인조가 반정을 끝내고 신하를 보내 즉위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인목왕후는 즉시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가 직접 서궁으로 가서 승인을 간청하자 비로소 광해군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받고 어보를 내주었다. 이 때문에 즉위식이 늦어지자 인목왕후는 직접 인조를 서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인조의 즉위가 창덕궁이 아닌 서궁에서 이루어진 것은 인목왕후의 의지적 대비권 행사로 인한 것이었다. 대왕대비로 복권된 후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명하여 한글로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해서체로 쓴 족자인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仁穆王后筆跡) 첩(帖)이 남아 있다. 계축옥사와 서궁 생활을 기록한 작자 미상의 『계축일기』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조[宣祖]
1552년(명종 7)∼1608년(선조 41). 조선 제14대 왕.
내용
재위 1567∼160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균(鈞), 뒤에 연(昖)으로 개명하였다. 1552년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조(岧)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했다.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당시 사유(師儒)를 선발함에 문사(文詞)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오직 과거에 의거해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쳐져 있었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해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敎誨)에 힘쓰도록 하였다.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曺植) · 성운(成運) 등 유능한 인재들을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초서(超敍)하기도 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근사록(近思錄)』 · 『심경(心經)』 · 『소학』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윤리와 기강을 기르기 위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하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간행,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그 밖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 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녹훈(錄勳)의 영전(榮典)까지 받았던 이기(李芑) ·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명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중국왕조의 역사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200년간이나 전해 내려온 것을 시정하기 위해 윤근수(尹根壽) 등을 명에 사신으로 보냈고, 마침내 조선의 요청을 수용하여 시정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전질을 가져왔다. 선조 대에 들어와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은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 · 심의겸(沈義謙)을 각각 중심 인물로 하는 당쟁을 벌여 동인(東人) · 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으며, 정론(政論)이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이이의 양파 조정에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에 대한 논죄 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이로써 정계는 당쟁에 휘말렸으며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이 무렵 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온성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그들을 무너뜨리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파견해 그 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다. 그러나 1591년에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부산진을 필두로 각 고을이 무너지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서울도 위급하게 되자 수성(守城) 계획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갔다. 도성이 무너지자 다시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져 의주로 피난하는 한편, 고급사(告急使)를 명나라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와 아울러 세자 광해군(光海君)에게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여 의병과 군량 확보에 열중하도록 하였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해 적의 후방을 위협했고 무기력했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 등 우리 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 장악했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빼앗겼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으로 사기가 꺾인 일본군이 1593년 4월에 한성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자, 이 해 10월 왕이 환도하였다. 다음 해 훈련도감을 설치, 군사 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 온 왜군에게 조총(鳥銃) 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군공사목(軍功事目)을 규정하여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論功)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랜 기간 머물게 되어 군량미 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납속(納粟)을 한 자에게도 납속사목(納粟事目)에 규정한 논공을 설시하도록 하였다. 군공을 세운 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 주로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져 조선 후기 신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게 되었다. 이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굶주리는 사람을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산재한 유해(遺骸)를 수집해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깨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丁酉再亂),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3궁(三宮)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典籍)을 보관한 춘추관(春秋館)이 불타 귀중 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여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 : 校書館)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 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 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에 거처하게 되자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지어 옮기려고 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했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 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병(兵)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강한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 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했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왜란이 끝난 뒤 1604년에 호성(扈聖) · 선무(宣武) · 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 · 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받았다. 더욱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고 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색(聲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전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고, 묘호는 선조(宣祖)이며, 능호는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난중잡록(亂中雜錄)』
『징비록(懲毖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동구릉에 있는 목릉에 딸린 정자각(丁字閣). 능건축. 보물.
개설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宣祖)와 원비 의인황후 박씨, 계비 인목황후 김씨의 능이다.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과 3기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각은 선조의 능 앞에 세워져 있다.
역사적 변천
목릉은 1608년에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능에 물이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에 따라 1630년에 건원릉 동쪽 현 위치로 천장되었다. 그 북쪽 가까운 곳에는 이미 첫 왕비인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裕陵)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선조의 능을 천장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에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왕릉의 동쪽에 능침을 마련하면서 현재와 같이 세 능을 이루게 된다. 정자각은 1608년에 건립한 것을 1630년에 천릉하면서 이건하였다. 이건하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1816년(순조 16), 1879년(고종 16),189
(고종 36)에도 수리가 있었지만 『선조목릉천봉도감의궤(宣祖穆陵遷奉都監儀軌)』(1630)와 비교해 보면 현재의 모습과 대부분 일치한다.
내용
목릉 정자각은 정전과 배위청이 丁자형 평면을 이루며, 일반적인 정자각의 규모와 형태를 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조성된 기단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상면은 3개의 서로 다른 단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전면의 월대, 월대 상면에 비해 반 단정도 높게 조성된 배위청 기단, 그 뒤에 월대 보다 1단 높게 정전의 기단을 설치하였다.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식 공포를 짰다. 현존하는 정자각 중에 다포식 공포를 갖춘 건물은 이 건물이 유일하다. 공포는 내외 1출목이며 외부 살미는 약간의 곡선을 갖추면서 아래로 처져있고 소첨차와 대첨차는 높이에 비해 길이가 길어 안정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문묘 대성전의 공포 짜임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어서 이 시기 많지 않은 다포식 공포의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배위청은 정면 1칸, 측면 2칸이다. 공포는 출목없이 기둥 위에 주두와 보머리가 바로 얹어지며, 기둥 사이는 내외단을 삼분두형으로 처리한 살미와 첨차를 결구하여 화반 역할을 하도록 꾸몄다. 정전은 측면 2칸 구조에서 보통은 평주와 합장보를 사용하는데, 이 건물은 드물게 2개의 고주를 세워 벽체를 구성하였다. 나머지 창호나 화방벽을 한 벽체 등은 대체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정자각의 제도를 잘 따르고 있다.
특징
건물의 규모와 형태는 전형적인 정자각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공포의 구조가 조선 왕릉의 정자각 중에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이다.
의의와 평가
목릉 정자각은 1630년에 작성된 선조목릉천봉도감의궤(宣祖穆陵遷奉都監儀軌)와 비교해 볼 때 이건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서 임진왜란 직후의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3개의 봉분을 연결한 정자각이란 의미와 왕릉제도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선조목릉천봉도감의궤(宣祖穆陵遷奉都監儀軌)』(1630)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산릉도감을 통해본 17세기 정자각의 복원적 고찰」
(구선이, 김동욱, 한국건축역사학회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11)
「조선후기 영악전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 변화 고찰 」(신지혜, 건축역사연구, 2009)
「조선시대 산릉 정자각의 연원 소고」(김동욱,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조선왕릉 8간 정자각 고찰」(김왕직,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9-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