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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내가 아는 어떤 친구는 눈이 많이 안 좋다. 안경이 없으면 1m 앞에 쓰여 있는 큰 글씨도 읽지 못한다. 학교 복도에서 친구에게 인사했다가 무시당한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그는 성격이 별로인 사람이 되었다. 솔직히 실제로도 그렇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사를 안 받은 건 눈이 안 좋아서다. 이런 시력으로는 수업자료도 읽지 못하고 직장생활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멀쩡한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안경이 있어서다.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유행하면서 마스크 착용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마스크는 안경만큼 당연한 물건이 되었다. 마스크가 없으면 대중교통 이용도, 공공시설 출입도 어렵다. 이렇듯 전례 없는 비상사태에 사람들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마스크에 적응해갔다. 반대로 사각지대로 내몰린 사람들도 있다. 바로 청각 장애인이다. 수어를 쓰는 농인부터 어느 정도 들을 수 있는 경증 청각장애인까지 대부분의 청각장애인은 타인과 소통할 때 입 모양과 얼굴 표정을 본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입을 가리자 그들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겼다.
지난 4월 태국 정부의 발표에 지구촌의 눈이 쏠렸다.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있는 ‘특수’ 마스크를 제작·배포한다고 밝혀서다. 입 부분을 투명 필름으로 제작한 이 ‘특수’ 마스크는 말하는 사람의 입 모양과 표정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사회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던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이 되었다. 그러나 특수 마스크는 아직 사회 곳곳에서 체감할 만큼 사회에 보급되지 않았다. 생소한 것은 고사하더라도 필름에 김이 서리거나, 비싼 가격이 부담이 되기도 한다.
안경은 보편적인 생필품이지만 안경이 이렇게 보편적인 도구가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한때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사치품이었고, 그 시대에 저 친구 같은 저시력자들은 일상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시대에는 장애였던 것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도수가 엄청나게 높은 안경을 쓴 사람을 마주쳐도, '저 안경 없으면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못할 텐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경은 그만큼 당연하다.
‘특수’마스크도 마찬가지다. 특수한 자들의 도구가 아닌 보편적으로 보급되어야 하는 생필품이다. 누군가의 필수품에 ‘특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꽤 많은 경우 장애는 이렇게 탄생한다. 다수의 선택과 편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안경을 일상적으로 쓰면서, 누군가의 장애는 몹시 특수한 상황이라고 여긴다면, 그곳이 바로 장애가 탄생하는 곳이다.
통찰의 차별성이 일정 수준 이상 있는 글입니다. 통찰력을 평가한다면 중상 급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목도는 중간 정도 수준입니다. 마지막 문단에 쓰고 있는 내용이 더 전개되고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례들도 곁들여서 더 펼치면 그것이 통찰의 차별성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표현력이 더 높아져야 합니다. 문장을 더 함축적이고 사색적으로 쓰면 좋겠습니다. 인상적인 표현도 몇 군데 정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 22.
1. 서른다섯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매우 사소한 계기 때문이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 두 병과 진라면, 그리고 콜라를 들고 계산을 했다. 밖에 나와 구매한 물건들을 주머니에 대충 담던 도중, 계산한 기억이 없는 숙취해소 음료가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계산대로 걸어갈 때 지갑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음료와 지갑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던 것 같았다. 순간 ‘어차피 이 시국엔 다 마스크 쓰고 다니는데 설마 걸리겠어’ 라는 비열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나는,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도둑질에 매료되었다. 물건을 훔쳐 몰래 집어넣을 때의 그 짜릿한 손의 감각,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나올 때 느껴지는 목이 타는듯한 긴장감, 그리고 무사히 빠져나올 때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감... 그렇게 동네의 모든 편의점을 두세 번씩 방문했다. 나중에는 더욱 큰 스릴을 위해 대형 마트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매번 옷과 모자를 바꿔가며, 나만의 비밀스러운 취미생활을 즐겼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고, 오히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의심을 사는 사회는 나 같은 소박한 도둑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물론 경기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나 역시도 얼마 전 직장을 잃었다.
전 직장 관리자의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새 직장은 생각보다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나는 구직을 포기하고 시골에 내려가 이 전염병이 물러갈 때까지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돌아올 참이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한 건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표는 전 직장 동료였던 박 씨의 집이었다. 박 씨는 성격이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다녔으나, 행동이 굼뜨고 고지식해 남들보다 작업량이 적었다. 그리고 어리바리한 면모가 있어 무엇인가 골려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작업반장과의 개인적 친분을 토대로 자주 ‘뺑끼’를 치곤 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나보다 일찍 결혼을 했고, 그게 벌써 1년이 넘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몹시도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내 자랑을 어찌나 그렇게 해대는지… 박 씨의 신혼집은 집값 문제로 가장 방범에 취약하다는 아파트 1층에 임시적으로 자리해 있었다. 언제 이사를 결심할 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며칠 간 박씨 집의 동태를 살폈다. 나처럼 해고된 박 씨 역시 구직 중인 신세였다. 그는 매일 새벽녘 등산가방을 메고 뒷산에 오르는 것 말고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친정에 갔는지, 며칠 동안이나 코빼기도 뵈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동선을 파악한 뒤, 나는 오늘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가 평소처럼 가방을 메고 나간 이른 아침, 나는 창문을 깨고 집에 진입했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술병들이 나뒹구는 것에, 그도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장갑을 낀 손으로 안방 서랍장을 조심스레 뒤져, 그의 아내 것으로 추정되는 반지와 목걸이 몇 개를 주워담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긴장감에 타오르는 듯한 갈증이 밀려와서였을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냉장고를 열어버린 나는 그 안을 보고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사람의 손과 발이 토막난 채로 비닐에 싸여 있었다.
CCTV를 보고 있던 경비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게 나는 현장에서 절도미수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렇게 유치장에 갇혀있는 지금, 우연히 경찰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이다. “… 그 사람 원래도 심했는데 전염병 때문에 직장까지 잃으니까 (…) 더 난폭해진거지 (…) 요즘같이 집 밖에 나가기 힘든 세상에는 더 심각해 그 문제가 (…) 술 취해 때려 죽였나봐, 자기 아내를 (...) 정신을 차려보니까 수습은 해야겠고 (…) 토막내서 조금씩 산에다 묻은거야. 뒷산에서 흔적이 나오더라고…”
2. 그러니까, 아마도 박 씨가 집 밖에서 쓰고 다니던 마스크는 하나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던 예전부터 그를 봐왔지만, 그 때도 그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집에 오자마자 답답함에 벗어 던졌을...
3. 유치장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포스터들이 보인다. 그 많은 포스터들 중, 구석에 있는 저 하나에 유독 시선이 꽂힌다. “가정폭력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거나 상담을 받고 싶다면 주저 말고 누르세요. 여성 긴급전화 1366, 여성 긴급전화 1366”
주목도가 높게 쓰는 것이 장점입니다. 이 글은 주목도가 중상 또는 상, 통찰은 중 또는 중상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집중하고 몰입하게 하는 스토리를 쓸 줄 아는 능력은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요소의 임팩트를 키우는 방식으로 작문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 23.
“저기요! 학생, 괜찮아요? 119 좀 불러주세요!” 모르는 목소리. 하지만 나를 걱정해주는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현우는 남은 생활비에서 병원비가 나가면 굶어야 한다는 계산을 끝냈다. “아저씨, 저 괜찮아요...” 끝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아저씨를 뒤로 하고 현우는 공원 한 구석 벤치로 도피했다. 마스크를 벗고 잠시 숨을 골라본다. 이번달 만 이 공원에서 현우는 8번 쓰러졌다. 매번 극심한 어지러움과 두려움이 그를 자빠트렸고, 오늘을 포함해서 2번을 제외하고는 다 혼자 견뎌냈다. ‘병원을 가봐야 하나?’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이내 통장 잔고가 떠올라 점점 검은색이 되어가는 보라색 하늘을 올려다 보는 현우였다.
“대학만 보내주세요. 반드시 성공해서 갚을게요.” 19살 현우는 대학에 붙고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는 가정 주부셨고,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라 현우는 대학을 붙고도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나와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해서 멋진 인생을 살고 싶었다. 현우는 나흘을 설득해서 나중에 취업해서 갚기로 약속하고 등록금을 받아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단 하루도 정오의 햇볕을 즐겨본적이 없고, 수업, 공부, 알바로 자신의 일상을 채웠다. 검소한 그의 일상 중 유일한 사치는 오후 6시 언저리에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 미안한데, 혹시 돈 모은거 있니?” 조심스러운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현우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아버지의 가게가 망했다. 기존에 계약한 사람들에게 환불을 해줘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한다. “일단 알았어요.” 현우는 침착하게 전화를 끊고 잔고를 확인했다. 200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 몇 달 동안 취업 사진, 양복 등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밥 대신 라면, 에어컨 말고 선풍기 등 방법으로 모은 것이다. ‘만약... 돈을 보내면 어떻게 하지?’ 대안을 고심하던 현우는 곧 공허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기 가득한 웃음 소리를낸다. 대안은 없었다. 다시 한 푼 두 푼 모으는 방법 외에는. 하지만 없는 형편에 빚까지 내면서 등록금을 마련해준 부모님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알바를 끝내고 귀가하여 공부하던 현우는 문뜩 벽에 붙여둔 포스트 잇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벽과 벽이 서서히 그의 방 창문을 가리고 점점 문마져 가리려고 했다. 현우는 마스크와 핸드폰만 챙겨 급하게 집에서 탈출했다.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을 집 앞에서 서성이던 현우는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도착한 현우는 일부러 인적없는 길을 걸었다. 그는 혼자였지만, 더더욱 혼자이고 싶었다. ‘카톡’ 적막을 깨는 휴대폰 알림음. 현우는 메신저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려 하는데, 같이 알바하는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형 메세지 봤어요?” 현우가 받자마자 동생이 울먹거리며 말을 쏟아낸다. “가게 망했대요. 사장이 다음주까지만 나오래요.” 순간 날카로운 기계음이 귀를 찌르고, 마스크가 젖은 것처럼 현우는 숨쉬는게 힘들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땅이 가까워 지는 것을 두 팔로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 날이 처음으로 쓰러진 날이었다. 그 후 현우는 자신의 사치를 부리려 공원을 찾았지만, 쓰러지는 일이 빈번했다. 더 이상 이 공원도 나에게 안정으 주는 공간이 되어주지 못했다. 현우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어두워진 하늘에는 달과 별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현우는 팔을 뻗어보지만 그날따라 더 아득히 멀었다. 다시 마스크를 쓰고 공원을 나오는 길, 현우는 다시 급격한 답답함을 느꼈다. ‘올라가야해. 아주 높은 곳으로.’ 현우는 필사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푸-어푸. 물에 잠긴 사람의 소리. 현우의 답답한 숨소리가 계단에 울린다. 하지만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면서 ‘이렇게 쉽게 올라갈 수 있었는데, 왜 못그랬을까?’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친다. 점점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숨소리도 편안해지고 있다. 이제 마스크 위 그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는 분명 오르는 중이었다. 낮은 곳으로 오르는 중이었다.
제시어와의 연관성이 부족하게 읽히는 글입니다. 상황만 있고 글쓴이가 계획하고 있는 중심맥락이 어떤 것인지가 직관적으로 파악도지 않는 글입니다. 공감/감동의 요소가 강한 글에서는 중심맥락이 뚜렷하게 정리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중심맥락이 명확하게 정리되는 게 필요합니다. 극단적으로 힘든 상황을 극한까지 몰고 가는 설정에서는 그러한 효과가 읽는 이에게까지 강점이입되는 게 좋은데 이 글에서 그렇지 못하고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다시쓰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 24.
“여기 냉면 한 그릇 추가요” 정신없이 주문이 몰려 들어왔다. 홀에만 손님이 가득 찬 게 아니라 배달주문도 10개는 넘게 밀려있다. 2020년 5월, 작년보다 5월 매출이 높게 나왔다. 코로나여파로 주변에 자영업자들은 문을 다 닫는다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아빠 가게만은 예외였다. 3년 전부터 미리 배달을 시작한 것이 올해 코로나로 인해 덕을 본 것이다. 그렇게 미리 배달을 시작한 업체는 코로나 타격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가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거리두기 상향으로 자영업자들이 매우 힘들다는데 우리 가게는 예외라니...아빠 가게가 잘돼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하는데 나는 마음 한쪽 불만이 가득했다. 7년을 매년 도와드렸는데 올해만큼은 피해가고 싶었다. 2월 졸업 후 취업준비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부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아빠가게 아르바이트생들이었다. 홀만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배달 앱 주문, 전화주문 정신없이 바쁜 틈에서 버틸 아르바이트생들은 별로 없었다. 결국 올해도 카페를 그만두고 아빠가게로 돌아갔다. 주말 오전11시부터 오후9시까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정신없이 일을 도와드린다. 문제는 마스크였다. 코로나가 터지고 처음 일해 본 아빠가게에서 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건 곤욕이었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잠시라도 벗을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홀에 나와 있는 종업원들은 괜찮다. 그러나 주방은 계속해서 불을 틀어놓고 에어컨도 나오지 않기에 땀과의 전쟁이다. 거기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숨 쉴 공간조차 없는 것이다.
아빠는 바쁜 틈에서도 마스크를 계속 벗고 싶어 하셨다. 나는 안 된다며 아빠가 벗으려고 할 때마다 말렸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는 나보다 일찍 나오셔서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을 하신다. 하루 종일 끼고 있는 마스크 때문에 귀가 둘 다 부으셨다. 나는 주말 이틀만 나와서 일을 도와드리면 됐지만, 주7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아빠는 부은 귀가 쉴 틈 없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이유를 알고 나서 아빠의 다른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냉면을 만드시면 바지부터 밑에 발까지 다 젖은 상태로 일을 하신다. 발과 손은 하루 종일 물에 닿아있어 퉁퉁 부어있고 여기저기 데인 화상자국이 눈에 띄었다.
창피했다. 마음 한쪽에 그런 불만을 가진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7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갔다. 홀 장사가 잘되지 않아 배달을 시작한다고 하셨을 때도, 신 메뉴를 매번 만들고 도전하실 때도 나는 항상 말렸다. 잘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왜 시작 하냐며, 주 7일 중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건강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에게는 하루 쉬는 것은 휴식이 아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달시작도, 신 메뉴 개발도 3남매를 어깨에 메고 가시는 아빠가 할 수 있는 노력이자 최선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보이지 않았던 아빠의 표정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일하신 아빠의 무거운 어깨가 보였다. 대학 졸업 후 장녀의 취업으로 한쪽 어깨가 가벼워지시길 기대했을지도 모르신다. 그러나 기자를 준비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빠는 단 한 번의 빨리 취업하라는 압박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훌륭한 기자가 된다고 한들 아빠에게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드는 5월이었다.
공감/감동, 주목도의 두 가지 측면을 꾀하는 글로 읽힙니다. 보통 공감/감동의 요소가 무척 높으면 주목도도 저절로 높아지는데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요소가 밋밋한 수준이어서 그런 효과가 제대로 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요소를 강하게 구현할 것인지를 글쓰기 전에 치밀하게 계산하고 글을 쓰는 버릇을 들이면 좋겠습니다.
# 25.
세상이 고요하다. 어떠한 말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레 옆 자리 커플의 사랑싸움, 앞 자리 할머니의 며느리 욕, 오늘 코로나 확진자가 몇명이더라하는 이야기가 들릴법도 한데, 오늘은 어쩐지 다들 멀뚱멀뚱 앉아만 있다. 아무런 소리도 안 내면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남자친구에게 삿대질하는 여자의 모습이 괜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구석자리에 앉아서 재밌는 세상살이 이야기를 찾아 눈을 열심히 굴려보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다. 오늘이나만 모르는 ‘침묵의 날‘이었나보다. 더이상 같은 자리에만 앉아있다간 엉덩이에 쥐가 날 것만 같아 나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기분전환할 겸 머리 염색이나 해야지. 갈 때마다 전 남친, 전전남친, 전전전남친 이야기까지 소환하는 수다쟁이 미용실 언니가 그리워져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하고 나와보니 거리의 풍경도 커피숍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백화점 앞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영락없이 시끌벅적한 연말 분위기를 뿜어내는데, 어라, 이상하리만큼 적막하다. 트리 앞의 어린아이도, 노인도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 음소거라도 건 듯 조용하다. 역시 오늘은나만 몰랐던 ‘침묵의 날‘이었던 가보다. ‘나같은 수다쟁이에겐 정말이지 최악의 날이네’라고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미용실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머리는 왜 또 이렇게 개털이 되었냐고, 쉬지 않고 쏘아댈 언니도 오늘은 어쩐지 환한 눈웃음과 포스트 코로나식 팔꿈치 인사로 대신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스크 위로 눈을 똥그랗게 뜨며 날 바라본 채 손으로는 머리 컬러들을 가리킨다. ‘아, 무슨 색으로 염색할 건지물어보는 거구나.‘ 하루종일 이어진 침묵에 적응한 나머지 나도 눈치껏 아무말 않고 손으로 가리켰다. 언니가 염색약을 준비하는 사이 단골 답게 알아서 가운을 입고 두리번거렸다. 옆자리 아줌마랑 실장님은 아무 말도 안하는데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거울로 서로 바라보며 연신 손짓하고, 눈웃음을 짓는다.
염색하는 내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말로 하면 편할텐데, 도대체 ‘침묵의 날‘은 누가 만든 건지, 분명 엄청 바보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재미도 없고 손으로만 말하기 지친 나머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이상한 우울감에 염색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집에 와 엄마의 눈과 입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그놈의 바보같은 ‘침묵의 날’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고 짜증 났는지를 쉬지 않고 털어놨다. 어라, 근데 엄마의 눈에는 왜 갑자기 눈물이 맺힌거지.
그 때 깨달았다. ‘아, 나에게만 침묵의 날이었던거구나.‘
나는 청각장애인이다. 귀만 안 들리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눈까지 멀어버린 것만 같다. 눈치껏 사람들의 입모양을 읽으며 잘 살아왔는데, 내 유일한 소통의 창구인 ‘입‘이 하얀 마스크 안으로 쏙 숨어버렸다.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피해 마스크를 끼게 되면서, 나의 하루하루는 ‘침묵의 날’이 되었다. 음소거가 된듯한 세상 속에서 혼자인 이 느낌은 바이러스보다 무섭다. 이 침묵을 깨 주는 건 방구석 TV속 강호동의 쩍 벌어지는 입이다. 강호동의 큰 입모양을 보자니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밤이다.
주목도가 높은 편입니다. 통찰의 요소는 중상 또는 중, 주목도는 중상 또는 상급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반전의 요소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고 있어서 같은 아이디어로 쓴 다른 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통찰의 요소를 상급으로 끌어올리거나, 문장을 더 인상적으로 쓰는 방식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는 게 필요해보입니다.
# 26.
“네?”. 그가 7번째 되물었다. 그의 되물음에선 이전과는 달리 신경질이 묻어나왔다. “침이 아니라 ‘친’이요. ‘친구’할 때 ‘친’”. 나는 다급히 다시 나의 발음을 정정했다. 그 단어를 들은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자신의 자판에 ‘친’을 수정하여 입력했다. 더듬거리며 자판을 찾는 그의 손에서도 신경질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목 뒤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기 위해 침을 묻히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지만, 바스락거리는 kf94의 촉감만 느껴졌다. 건조한 손으로 두꺼운 한의학 논문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애를 썼다. 시간이 지체되자 그가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 소리를 듣자 목 뒤에서 흐르던 땀이 등골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도서관에서 ‘낭독 봉사자’ 팻말이 붙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 비록 낭독을 듣는 시각장애인 이용자들은 나의 목걸이를 보진 못하지만, 그 목걸이를 본 보호자들이 시각장애인을 나에게 인도해준다. 코로나 이전에는 2시간까지 허용된 낭독 시간이, 코로나 이후엔 1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줄어든 시간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낭독을 진행 해야 했다. 특히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한의학 고사를 준비하는 그는, 코로나 이전에도 2시간 동안 쉴틈 없이 봉사자들을 닦달하는 편이었다. 도서관 직원은 비교적 정확한 나를 항상 그의 낭독 봉사자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마스크를 끼기 이전과 이후의 발음은 극명한 차이가 났다. ‘친’과 ‘침’처럼, 작은 받침의 다른 발음은 마스크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10번의 그의 되물음 끝에 1시간의 낭독이 끝이 났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보호자를 불렀고,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3평 남짓의 작은 낭독 공간을 빠져나갔다. 발열 내의를 꺼내 입을 추울 날씨인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혀 있었다. ‘봉사자 휴식실’에 들어가서 마스크를 벗고 차가운 냉수를 들이켰다. 도서관 내에서 유일하게 내가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곳이다. 그마저도 다른 봉사자가 있으면 물을 마실 공간조차 마땅치 않다. 한 손으로는 땀을 닦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음 낭독을 대비하여 타는 목을 축이기에 바빴다. 이어서 낭독을 진행할 시각장애인 이용자는 언제나 일찍 와서 기다리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이 10분이 넘어도 그 할아버지가 오질 않았다.
15분 남짓이 지난 후, 투명 자동문 너머로 숨을 몰아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 할아버지는 가쁜 숨 사이로 변명하듯 자신의 늦은 이유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엘레베이터를 탈 수가 없었어. 아니 탔는데, 층을 누를 수가 없었어.”. ‘엘레베이터 작동 잘 되던데’ 나는 침묵으로 그 의아함을 대신했다. “점자가 만져지질 않았어, 버튼에 비닐이 있어서”. 할아버지가 그 침묵에 답을 했다.
낭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나는 할아버지가 말한 그 문제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의 모든 버튼은 향균 시트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 향균 시트도 코로나와 세월을 함께 했는지,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특히 ‘닫힘’ 버튼과 ‘1층’ 버튼은 바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신경질적으로 뚫려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낡지 않은 버튼이 있었다. ‘장애인 누리터’, 낭독 봉사가 진행되는 우리 봉사실의 위치이다. 그 버튼은 나와 같은 봉사자나 직원, 보호자만 눌렀을 법한 흔적만 작게 남아 있었다. 해당 누리터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은 점자가 가려져 누르지 못한 채 말이다.
주목도가 중상, 통찰이 중 또는 중상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작문입니다.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좋은 편입니다. 두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데 다쓰기를 할 때 그 점을 고려해서 다시 써보면 좋겠습니다. 소수자나 약자를 대할 때 무심결에 우리의 잣대나 관점으로 그들을 대하고 평가하고 지레짐작하는데 그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펼쳐나간다면 통찰의 차별성을 꾀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의 측면에서는 문장의 톤이나 분위기를 더 인상적으로 만들어보고 기억에 남는 표현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 27.
# 발명일지
실화인가? 얼굴의 반을 가리는 이질적인 천을 쓴지도 약 9개월. 반질반질하던 피부엔 이미 뾰루지가 점령했다. 아무리 진정에 좋다는 팩을 해봐도 다시 마스크를 쓰면 말짱 도루묵, 깨진 독에 물 붓기다. 언제까지 이 네모난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가려야 할지는 엄마도, 시장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모른다. 일개 시민인 나지만 이대로 잘못된 문제를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다.
최선인가? 해결책은 문제를 직면했을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일단 마스크 뚫어질 듯 쳐다본다. 생각해보니 네모난 모양, 얼굴의 반을 족히 가릴 수 있는 넓은 면적. 아니, 바이러스로부터 코와 입만 지켜내면 되지 않는가? 현재의 마스크 모양은 단연코 비효율적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효율이 우선되지 않던가. 기술로 사람을 잘라내는 사회다. 주문도 기계가 받는 시대란 말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광개토대왕도 지금 마스크의 면적을 보면 줄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최고의 명품은 발명품.”이라고 발명왕이라 불리는 그가 말했다. 불편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그만이라고. 더는 얇디얇은 소중한 피부에 중국 대륙과 같이 넓은 마스크를 씌우는 짓은 학대다. 이제 피부염과는 안녕이다. 마스크 계의 혁명을 가져오리라 하는 굳은 다짐과 함께 가위질을 시작해본다…. 어찌어찌 만들어진 직사각형과 세모 모양의 마스크는 얼굴 면적을 그다지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코와 입을 가릴 수 있는 최적의 모양이 분명하다.
확실한가? 따끈따끈 방금 이 세상에 태어난 발명품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지 실험해봐야겠다. 실험하기 가장 좋은 장소를 찾다가 신논현역에서 강남역까지 점심시간 10분간 세모난 마스크를 끼고 걸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유동인구가 많은 시간대이므로 마스크의 기능성을 파악해볼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기존의 ‘바보’ 같은 마스크를 벗고 세모 마스크를 낀 채 걸어본다. 어찌 전보다 숨쉬기에도 편하고, 오랜만에 뺨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가 반갑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이 혁명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긴 하지만, 나름 성공적인 것 같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왱~’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여기는 음압병실로 이동하는 구급차 안이다. 목이 칼칼하긴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특별한 증상도 없고, 딱히 그리 아프지도 않다. 알 수 없는 알림으로 시끄럽던 전화기는 배터리 고갈 꺼진 거 같다. 함께 이동하는 의료진들이 수군거리는 걸 자세히 들어보니 이미 난 ‘강남역 세모 마스크녀’로 유명해진 거 같다. 당분간 사회적 활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바보 같은 마스크를 꼈을 때도 소통은 단절된 지 오래다. 아니, 잘됐다. 코로나로 입원한 동안 제대로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글이 어떤 점을 강조하는 것인지, 중심맥락이 의도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가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계획할 때 한 번 읽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의도로 쓰인 글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쓰는 연습이 더 필요해보입니다.
# 28.
2029년 10월 8일 햇살 좋음
연보라색 도톰한 매트 위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통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후...”하고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내쉬었다. 끼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에 쿵쿵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발자국 소리는 뒤를 지나 내 매트 앞에 멈췄다. “나마스테”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렁이는 물결처럼 유연한 허리, 그걸 받치는 단단한 팔뚝과 쪼개지는 등 근육. 영호 쌤의 시범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같이 해 볼 게요.” 그때 영호 쌤과 눈이 마주쳤다. 아! 바로 저 눈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에 놀라 고개를 푹 떨궜다. 괜히 손가락으로 매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선생님이 곁에 다가와 물었다. 화들짝 놀라 애써 웃어 보이며 “아, 괜찮아요.” 대답했다. 하지만 머리속은 수많은 물음들로 가득 찼다. 너무 차갑게 대답했나? 분명 웃었는데 마스크 때문에 안보인 거 아냐? 어색하게 웃어서 눈웃음도 안보였을 수도 있어. 내가 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2달 동안 자신을 설렘으로 채워준 선생님에게 내가 싫어한다는 오해를 살 수는 없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늘 수업 끝나고 말을 걸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때보다 빨리 다가온 마무리 시간 사바아사나. 편안히 누워 아로마 향을 느끼며 영호 쌤에게 할 말을 다시한번 정리한다. 수업이 끝났지만 오늘은 유독 매트를 더 깔끔하게 닦고 싶었다. 천천히 꼼꼼히 결전의 순간을 미뤄본다. “연지님”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수업 후에 항상 차담 시간을 갖는데 코로나 때문에 멈췄거든요. 근데 1:1 수업이라 괜찮으시면 한잔 내려 드릴게요.” 30분, 1시간, 2시간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에서 뜨거운 것들이 오고 간다. 얼굴 뿐만 아니라 인생관까지 비슷한 그에게 나를 맡기고 싶었다.
식사를 제안했다. 스튜디오를 나서기 위해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마스크를 벗는 영호 쌤을 몰래 힐끔 봤다. 세상에. 눈과 두상은 분명 빈지노였는데 마스크를 벗고 나니 개그맨이 따로 없다. ‘분명 마스크 위 까지는 완벽히 내 스타일이였는데…’ 허탈함에 공허했다. 밥맛이 없어져 식사를 취소하자 마음먹고 눈을 다시 바라봤다. 그와 나눴던 부모님 이야기, 공감되는 가치관, 마음이 따뜻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이 남자다. 나는 오늘 인생 처음으로 얼굴이 아닌 마음이 맞는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영호는 노트를 책상에 엎어 두었다. “당신 뭐해? 뭐야 내 일기장 본거야?” 연지가 당황하며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이거 우리 첫 데이트 날이네” 연지는 펼쳐진 부분을 읽으며 깔깔 웃는다. ”진짜 마스크에 감사하다. 그거 아니었으면 너 한테 아주 말도 못 걸어 봤겠어” 영호가 삐죽거리며 말한다. “사실 내가 감사하지. 처음으로 얼굴보다 마음이 맞는 남자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행복 하잖아.” 언제나 쓸 수 있도록 책상 옆에 쌓아 둔 마스크가 눈에 띄었다. 연지는 그것들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처음으로 사람의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보도록 도와준 그 마스크들이 신통방통했다.
주목도가 높아서 잘 읽히는 것이 장점인 글입니다. 주목도가 중상급이고, 통찰은 중 또는 중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통찰의 차별성을 더 높일 수 있는 요소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서 다시쓰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 29.
요즘 들어 약속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일어나는 대신 푹 자고 일어난다. 혹여나 습관처럼 일찍 일어나더라도 부엌으로 향한다. 작은 그릇에 꾸덕한 그릭 요거트를 큰 스쿱으로 퍼서 담고 꿀과 그래놀라 한 줌을 올린다. 깨끗한 나무 도마 위에 사과 반 개를 깎아 가지런히 배열한다. 그저께 산 진회색 테이블 매트를 꺼내 식탁에 놓고 그 위에 요거트도, 사과도 올린다. 창가에는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아래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내일은 뭘 먹지? 유튜브를 보니까 크림파스타 만드는 방법이 꽤 쉬워 보이던데 도전하는 것도 좋겠다.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상의 연속이다.
벌써 여덟 시. 나갈 시간이다. 바쁜 아침을 뒤로 한 채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선다. 수정화장용 팩트나 립스틱이 가득 든 파우치가 없는 내 가방은 가볍기만 하다. 엘리베이터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뒤적이니 아모레퍼시픽에서 희망퇴직자를 받는다고 한다. ‘와, 아모레퍼시픽 건물에서 창문 하나쯤은 내가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바뀌긴 했나 봐.’ 하긴. 나조차도 이제 새로운 화장품을 사지 않는다. 공들여 화장한 들 마스크를 쓰고 뜨거운 콧김 몇 번이면 다 무너져버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세상이 안겨준 평등 속에서 나는 나만 지켜야 했던 답답한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스크 아래 나의 작은 자유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탈코르셋이라며 외치던 변혁의 목소리처럼 대단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하얀 마스크에 묻어나는 화장품의 찝찝함과 불편함은 스스로 화장을 내려놓게 했고, 마스크의 유무 외에 그 속의 얼굴까지는 타인의 판단지표에서 벗어났다.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가림막이나 ‘최선’의 예방책이라는 마스크는 손바닥만한 크기로 사람들의 의식까지 바꾸는 위력을 발휘했다. 생존의 기로 앞에 여성, 남성은 없었다. 화장한 여성은 더더욱 없다. 사람만 있다. 가장 살기 힘든 이 시대가 가장 살 만한 시대로 나아가는 방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 사회를 이분화하는 성별 논란에서도 우리에게 손바닥만한 배려가 필요할 뿐이다.
마스크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멸에 있다. 마스크 없는 삶, 곧 우리의 당연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시적인 부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성별의 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도 같다. 저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 다른 한쪽에 추를 올려 무게를 실어야 한다. 배를 운전할 때도 그렇다더라. 직진하려면 바람의 방향에 맞춰 역방향으로 키를 돌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짊어지운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나자. 화장하는 아침이 아닌 시집을 읽고 든든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아침. 시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일 하며 아이 기저귀도 챙기는 ‘내조 잘하는’ 원더우먼 엄마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는 슈퍼우먼 엄마. 그래도 여자는 예뻐야지, 엄마는 가정적이어야지! 저 자리가 내 자린데. 억울한 차별이 아니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 모두 당연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일시적인 역방향이다.
통찰의 요소는 중상 또는 중 정도로 평가할 수 있고, 주목도는 중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마스크로 인해 자유로워지고 해방된 지점에 대한 얘기인데 다소간 예상할 수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하는 요소가 아주 강한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수준보다는 나은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설명조의 분위기나 톤이 강해지므로 조금 더 인상적이고 함축적으로 읽힐 수 있도록 글을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 30.
명동역에 내려 개찰구를 나오면 달콤하고 고소한 커스타드 크림이 가득한 델리만쥬 냄새가 나를 유혹한다. 세 입이면 질릴 걸 알기에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등뒤에서 들리는 내 이름 석자에 뒤를 돌아보면 활짝 웃고있는 친구가 보인다. “립스틱 새로 산거야? 잘 어울리네.” 나란히 팔짱을 끼고 가을 바람에 맞춰 걷다가 돈까스 거리 앞에서는 고약한 은행 열매를 피해 발을 살금거린다. 가족과 연인들 사이에 끼어 케이블카를 타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함께 한다. 서울 빌딩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웃고,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나눠먹다가 웃고, 벤치에 앉아 몇 마디 소곤거리다가 웃는다.
이제 델리만쥬 냄새는 멀리서 잘 맡아지지 않고 코를 찌르는 은행 냄새도 잊혀져 간다. 후각의 상실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 대신 마스크가 자리잡았고 새로 산 립스틱은 발랐는지 안 발랐는지도 알 수 없다. 시각의 상실이다. 입을 덮고 있는 마스크 탓에 소곤거리는 친구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아 “잘 안들려!”를 몇 번이고 외친다. 청각의 상실이다. 감각의 상실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우리를 덮쳤다.
코로나 이전 사람들에겐 이벤트가 중요했다. 페스티벌, 여행, 연극, 모임, 엠티, 전시회… 사람들의 소셜 미디어는 이런 이벤트들로 채워졌고 달력 속 별표를 친 날들처럼 이벤트들은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버티는 원동력이자 세계를 확장시키는 경험으로 여겨졌다. 달력에 친 별표가 얼마나 많고 큰 지가 행복의 척도였다. 하지만 바이러스와 마스크가 불러온 상실의 시대에서 이벤트의 부재에 주목했던 사람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에는 겨울 냄새를 못 맡아봤네” 지나가듯 말하는 친구의 말에 잊고 있던 단어가 생각났다. 매년 낙엽이 지고 건조한 바람에 한기가 돌 때면 SNS에는 ‘겨울 냄새’가 난다는 글이 우후죽순 올라왔다. 일상은 감각으로 이뤄진다. 쉽게 인지하지 못 하지만 루틴 속에서 매일 느끼는 오감이 하루의 기분을 결정하고 일상을 이룬다. 항상 존재할 줄 알았던 감각이 사라지면서 달라진 일상은 사람들에게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는 큰 상실감을 남겼다.
잃어야만 깨닫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스크를 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돌아와도 이벤트를 찾던 사람들의 세상과 감각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들의 세상은 분명히 다르다. 행복의 기준도 그를 추구하는 방법도 달라질 것이다. 되찾을 그 새로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행복하길 바란다.
통찰의 측면과 주목도의 측면에서 모두 중 또는 중상 정도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글입니다. 두 요소 모두에서 한 단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글을 쓰기 위한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1문단과 2문단을 읽을 때 경쾌하게 잘 읽히고 문장들도 주목도가 높은 편입니다. 전반부에서 차별성이 있어보이던 글이 후반부로 갈수록 평범해지고 있고, 마지막 문단에서는 더 평범해지고 마지막 문장의 마무리는 어색하기까지 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글이 더 날카롭고 더 벼려지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감각’이 이 글의 키워드이므로 그 키워드에 대한 생각이 더 깊이있게 전개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전반부의 느낌이 후반부까지도 이어지도록 써야 합니다.
# 31.
170cm 100kg의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나쵸는 움직일 때마다 볼록 나온 배로 어딘가로 굴러갈 것만 같다. 부풀어오른 풍선과 같은 몸뚱아리와 같이 동글동글한 그의 인상을 보면 누구나 동네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푸근한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나쵸는 수도원에서 직접 세운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선량한 수도승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마냥 순박할 것만 같은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으니. 밤만 되면 그는 신비주의로 무장한 푸른 복면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었다. 푸른 복면으로 수도승의 모습을 철저히 가리고 링 위에 레슬러로 선 지 어언 23년. 링 위에서 온갖 곡예를 부리며 얻은 상처가 들킬 때마다 그는 마치 줄타기를 하는 듯한 떨림을 느끼기도 하였다. 수도원장은 ‘오늘도 한바탕 했군’ 한숨을 푹 쉬며 요리를 담당하는 수도승 나쵸가 언제쯤이면 능숙해질까하고는 매일 넘어가곤 했다. 이제 수도승과 레슬러의 사이를 오가는 것은 나쵸에게 일상이 되었으며 제법 익숙한 일이 되었다. 나쵸가 레슬러의 세계에 입문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을 친아버지처럼 따르는 고아들을 못 본 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레슬링에서 져도 돈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힐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점차 레슬링에 대한 열정은 그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끓어오르는 듯했다. 찬란했던 이중 생활도 잠시, 마스크를 벗기는 것이 금기시된 레슬링 세계에서 동료의 배신으로 나쵸의 복면은 찢겼다. 나쵸가 링 위에서 복면을 벗고 관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세르지오 구티에레스 신부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나쵸 리브레>의 내용이다. 여기서 리브레(Libre)는 스페인어로 ‘자유’라는 의미이다. 주인공은 마스크를 씀으로써 수도자라는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마스크는 일면 얼굴을 가리는 특성으로 인해 ‘억압과 은닉’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개성’과 ‘정체성’을 중시하는 프랑스나 미국에서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시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혹은 아랍권 국가에서 여성들이 쓰는 히잡 또한 여성의 신체 일부만을 노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리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쵸 리브레>에서 볼 수 있듯이, 마스크는 ‘억압과 은닉’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유’를 의미할 수 있는 양면적인 것이다. 할로윈에 코스튬을 즐기며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달콤한 일탈의 시간을 맛보듯이 어쩌면 ‘코시국(코로나 시국)’의 마스크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같은 것을 요구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화장을 할 것’,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밝은 미소로 손님을 응대할 것’…. 마스크는 화장을 해야 할 의무도, 무례한 손님에게도 애써 밝은 미소로 응대해야 할 이유도 우리에게서 덜어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통찰의 요소는 중상, 주목도는 중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통찰의 측면에서는 “마스크가 억압과 은닉 뿐만 아니라 자유를 의미할 수 있는 양면적인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에게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같은 것을 요구했으므로 코로나 시국에서는 일종의 달콤한 일탈의 시간, 다시말해서 일종의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 까지가 중심맥락인데 이 중심맥락의 생각을 더 전개하고 깊이있게 하면 통찰의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 첫 케이스 나쵸의 사례를 조금 줄여서 콤팩트하게 만들어주고 후반부 내용을 더 늘리는 방식의 구성 면에서의 변화가 필요해보입니다. 문장을 조금 더 인상적이고 함축적으로 써야 하고, 기억에 남는 표현도 고려해서 쓰면 좋겠습니다.
# 32.
1.
“어디있어? 당장 나오라 그래!”
수십가지 목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럽던 사무실의 공기가 일순간에 멈췄다.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이들은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봤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남자는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고는 분노 가득찬 고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가 소리칠 때마다 그의 얼굴에 패인 주름들이, 머리 위에 수놓인 흰 머리들이 아우성쳤다. 50대 중반은 되어보이는 그는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한 명의 여자, 아니 우리들을. “김미영 어디있어. 우리 애가 죽었다고.”
2.
그의 딸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늦게 가진 아이라 다소 불편한 몸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금지옥엽 귀하게 키웠다. 성인이 된 딸은 기특하게도 부모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했다. 서툰 표현들이었지만 그와 아내는 이제까지의 고생을 되돌려받는 듯 행복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로 엄청 좋은 걸 준비했다는 딸의 말을 되뇌이며 철근 조립에 몰두했다. “더워 뒤져불겠는데 뭐가 그래 좋아서 실실 쪼개노. 과장이 니 부른다. 가봐라.” 기석의 말에 돌아보니 과장이 잠깐 와보라 손짓한다.
급하게 집으로 향한 그는 아파트 화단에 누워있는 자신의 딸을 보았다. 딸의 머리는 충격에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만큼 으스러져있었다. 자신과 딸을 둘러싼 수십개의 하얀 마스크들 위로 동정과 애도라는 탈을 쓴 관음의 눈빛들이 번쩍였다. 그는 안전모를 벗어 딸의 얼굴을 덮었다. 선홍빛 가운데 놓인 하얀 손에는 딸애의 폰이 쥐어져 있었다. 성인이 된 기념으로 딸에게 처음 선물한 폰이었다. ‘김미영’. 아이의 손 안에서 화면이 켜졌다. 전화벨이 세번 울리고 꺼진다. 이상했다. 딸애에게 미영이라는 친구는 없었다. 그는 폰을 집어 들어 김미영과 딸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남겨진 단 두통의 메시지. 7월 31일 ‘김미영팀장입니다. 고객님은 최저 이율로 3000만원까지 대출 가능하십니다. 30분 이내 입금 완료. 전화 상담 가능’, 8월 31일 ‘비용 납부 오늘까지입니다. 전화 받으세요.’
3.
사무실에 가득 울리는 그의 오열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하얀 마스크들과 그 위로 건조하게 깜빡이는 눈들만 그의 아우성에 대답할 뿐이었다. 누군가 적막을 깼다. “김미영팀장입니다. 20살이시죠?” 옆 자리 언니의 목소리였다. 언니가 전화를 들고 다시 업무를 시작하자, 31명의 미영은 일제히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김미영팀장입니다.” 김미영들의 떼지은 출현에 그는 괴성을 질렀다. 그의 딸을 죽인 것은 어떤 김미영이었을까. 32명의 김미영의 목소리들과 그의 울부짖음은 뒤섞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김지영’. 내 책상 위에 놓인 명찰을 뒤집었다. 나는 전화기를 든다. ‘김미영팀장입니다.’
제시어와의 연관성이 직관적으로 잘 파악되지 않는 글입니다. 하얀 마스크들이 동정과 애도라는 탈을 쓰고 관음의 눈빛을 보이는 대목이 있고, 32명의 김미영들이 모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눈만 깜박이는 대목이 나오는데 개별의 개성과 특성, 정체성이 배제되거나 생략된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이 보내는 가해, 동정, 애도, 관음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심맥락이 조금 더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플롯을 정교하게 짜줄 필요가 있고, 10명이 읽었을 때 7~8명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쓰는 게 필요합니다. 스토리의 개연성과 핍진성 측면에서 보면 글의 소재나 전개가 극단적인 데 비해서 개연성과 핍진성은 그렇게 높지 못하므로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글에 집중하거나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강합니다. 지적 장애인 딸이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의 필연성도 낮아보입니다. 개연성과 핍진성을 더 높여야 하고, 중심맥락을 어떻게 플롯에 잘 반영하고 녹일지에 대한 연습도 더 필요해 보입니다.
# 33.
순애의 아버지는 일회용이었다. 살가운 말은 할 줄 몰랐지만 꼭 한 번씩은 투박한 목소리로 딸의 건강을 묻던 아버지. 부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뢰가 얽혀있었다. 가정의 뿌리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 손이 다 으스러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인스턴트식품을 찍어내던 낡은 쇳덩이는 그의 손조차 비정하게 찍어내 버렸다. 아버지는 그가 삼십 년 헌신한 곳으로부터 낡은 기계와 함께,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그 날, 무너져 내리는 뿌리를 보며 순애는 일회용의 굴레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저 삼백 원짜리 마스크처럼, 그들은 쉽게 대체되는 일회용의 굴레의 삶을 살았다. 이 굴레를 쥐고 태어난 순애는 하루라도 빨리 이 당연한 삶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곧장 자신이 꿈꾸던 큐레이터 준비를 하였다. 쉽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몇 세기가 지나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그림. 그 속에 섞여서 그녀 자신도 변하지 않는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순애의 이름 앞에는 하나 둘, 그녀를 가리키는 스펙들이 붙었지만, 아직도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일회용 삶의 무게였다. 작은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했고, 시험을 보고 나서도 경력을 쌓아야 했고, 경력을 쌓기 위해서는 유학을 다녀와야 했다. 순애가 교수에게 사정을 말씀드려 겨우 기회를 얻은 자리는 미술관 안내데스크 자리였다. 발버둥 칠수록 그녀의 삶은 일회용에 더욱 가까워졌다.
손을 잃은 아버지는 변함없이 무뚝뚝했다. 그리고 여전히 서른 살 먹은 딸이 어린아이인 것처럼 걱정의 말을 건넸다. 순애는 아버지 눈가의 깊어진 주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던 거대한 뿌리가 볼품없이 삭아가는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가족들에게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른, 겁이 많아진 순애는 슬쩍 플랜 B를 만들었다. 여전히 그녀는 발버둥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선 집값이 올랐다느니 하는데, 그녀는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무심했다.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던 그녀는 시험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미술관에서 일을 오래하면 그림을 관리하는 부서로 옮겨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해외파 출신 큐레이터의 등장과 함께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힘겹게 일회용의 굴레를 탈피하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 끝에는 잔뜩 불어난 몸만 남았다. 최저시급으로 사온 인스턴트식품, 그녀는 아버지 손을 찍어낸 인스턴트를 먹으며 미래를 꿈꿨었다.
순애가 바라는 것은 그다지 큰 욕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사히 뿌리내리고 싶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꿈이 점점 멀어지면서, 그녀는 스스로의 몸이 불어나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몸은 더욱더 무거워져 저절로 뿌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얹힌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이었다. 그리고 손쉽게 갈아 끼워지는 부속품이었다.
순애의 안내데스크 자리는 곧 비워졌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순애로 대체됐다. 어린 순애는 쓸모를 다하면, 마치 일회용 마스크를 갈아 끼듯 또 다른 순애로 대체될 것이다. 80점, 94점, 99점… 이름 대신 스펙으로 불리어지는 그들은 일회용 인간이다. 한때나마 만 오천 원, 이만 원을 꿈꾸던 그들은 삼백 원에 자신을 내다 팔아도 팔리지 않는 사회를 뒤엉켜 살아간다. 부유하는 사람들, 아무렇게나 버려진 마스크들이 거리마다 넘쳐나고 있다. 쓰레기통 위 덕지덕지 쌓여 있는 마스크, 발자국이 선명한 마스크가 바닥에 나뒹군다.
통찰과 주목도의 수준이 높은, 잘 쓴 글입니다. 마스크에서 일회용이라는 속성을 끄집어내어서 전개한 글은 다른 글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므로 아이디어의 출발점에 눈길이 가는 점도 있습니다.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일회용 삶의 속성을 지닌 ‘가난’을 대물림하는 이야기인데 개연성과 핍진성도 높은 편이이서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 34.
사형 집행 전, 교도관은 사형수의 얼굴에 용수나 복면을 씌우고 교수대로 끌고 들어간다. 사형수에게 용수를 씌우는 이유는 그가 절명하며 짓는 마지막 눈빛과 얼굴을 가려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죽음에 직면한 사형수의 얼굴을 직시하는 교도관의 죄책감과 심리적 고통을 덜어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사형수의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사형수와 교도관 모두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언뜻 보면 ‘인간적인’ 장치로서의 복면은, 그 이면에 ‘비인간성’을 담고 있다.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한 인격체의 정체성을 지워 대상을 인간과 먼 개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언캐니 밸리’ 이론에서 로봇이 인간에 가까운 모습일수록 호감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대상이 자신과 흡사하지 않을수록 호감도가 낮아지거나 아예 적대적일 수 있게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수의 얼굴이 가려졌을 때, 즉 인간이 아닌 ‘얼굴 없는 자’가 되었을 때 그에 대한 폭력의 심적 허들은 더욱 낮아진다. 심리학자 짐바르도는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인간 밖의 영역에 놓는 ‘비인간화’는 그들에 대한 이성적·도덕적 판단을 중지시킨다고 한다. 이런 조건에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네가 남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로 변질된다.
권력은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것을 넘어, 특정 집단에 낙인을 찍는 비인간화를 통해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선전 영화와 포스터 제작으로 같은 인류인 유대인을 해충이나 쥐 등의 하등동물로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홀로코스트는 자국민들에게 유대인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비인간화 작업을 거친 뒤에서야 실행될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백인 폭도들이 흑인을 린치한 많은 사건도 흑인들의 비인간화로 인해 반인도적인 범죄로 주목받지 않았다. 이렇듯, 개개인의 정체성이 익명의 집단으로 축소되었을 때 폭력은 정당성을 얻고 재생산된다.
비인간화는 역사책에만 존재하는 예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비인간화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지난해 여름 자유를 울부짖었던 홍콩 시민 브라이언 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시위대가 폭도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자신의 얼굴, 즉 축소화될 수 없는 정체성을 드러냈다. 홍콩 경찰의 강경한 진압 속에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시민들을 폭도로 낙인찍는 비인간화에 저항했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을 익명의 개체들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 하나하나를 인간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인간화의 폭력을 멈추고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즉 그의 인격체 자체가 상대에게 윤리적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진다고 했다. 이런 윤리적 호소에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본연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비인간화의 폭력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을 가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 모두가 얼굴 없는 자로 살아가는 요즘, 우리가 더더욱 마스크 너머 서로의 인간성을 바라봐야만 하는 이유다.
통찰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점이 장점입니다. 주목도는 중상 또는 중 정도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문장을 조금 더 함축적으로, 인상적으로, 경쾌하게 쓰는 연습을 더 한다면 주목도의 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듯한데 지금 쓴 글은 전체적으로 설명조의 딱딱한 문체여서, 작문 에세이 글에서 추구해야 할 문장의 특성이 잘 살아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 35.
‘헤어지자고? 자기가 어떻게 먼저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예진은 마시던 맥주캔을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반동으로 테이블 여기저기 맥주가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녀의 눈에 젖은 소매나 눅눅해진 새우깡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8년을 만난 남자친구였다. 그가 어제 이별을 고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예진은 씩씩대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TV 옆 어제 아무렇게나 던져둔 선물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GUCCI. ‘내 딴에는 큰 맘 먹고 산 선물이었는데...’ 예진의 눈에 잠시 분노는 사라지고 허탈함만이 남았다.
어쩌면 그녀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부턴가 부쩍 그녀와 있을 때 말수가 줄었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대답 대신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오빠 뉴스 봤어? 코로나22 치료제 나온다는 거.”
“어. 봤어.”
“근데 나는 못 믿겠어. 아니 안 믿어. 코로나19 때도 그랬고 코로나21 때도 그랬잖아?”
“...”
“치료제 만들면 뭐해? 매번 치료제라고 나온 것들 임상실험에서만 효과 있지 실제 사람들한테는 효과가 미미하잖아. 바이러스는 계속 변이하고. 이제 변이 주기도 점점 빨라져.”
“...”
“안 그래, 오빠?”
“... 응. 뭐 이번엔 성공할 수도 있지.”
“오빠 민정이 알지? 며칠 전에 민정이 만났는데 뭔가 달라진 거 같아서 물어봤더니 마스크라인 필러 맞았대. 확실히 마스크 썼을 때 광대라인이 예쁘더라. 나도 한 번 맞아볼까 봐. 요즘 연말이라고 할인 많이 한다던데.”
“아, 그래?”
은근슬쩍 애정을 떠보는 말에도, ‘안 해도 예뻐’라는 8년 간 맞춰온 정답 같은 한 마디를 그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변화를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2022년과 작별할 준비를 마친 듯, TV에서는 신나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살면서 자신이 목격할 수 있는 2가 가장 많은 년도에 20대의 마지막을 보낸다며 그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 어제의 자신을 떠올렸다. 수화기 너머 그는 애정으로 느껴질 타박 한마디 없이 빨리 준비하고 나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서운했지만 특별한 날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볼멘소리 없이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다가 예진은 깜빡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3년짼데 아직도 익숙해지질 않네. 마스크 쓰는 거.’ 예진은 매번 변화에 적응이 느렸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참 삐꺽거린다고 느꼈다. ‘세상이 조금만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어.’ 그녀는 항상 생각했다. 1층을 누른 버튼을 취소하고 다시 집에 올라가 마스크 살균기에서 노란색 캐릭터 마스크를 꺼냈다. 지하철에서 아무도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쯤 소셜커머스에서 9,900원에 구입했던 향균마스크다. 알 수 없는 기관을 언급하며 향균 99.9% 인증을 받았다는 조악한 상품설명페이지는 그녀에게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종종걸음으로 집 앞 카페에 도착했다. 그는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어색한 침묵 사이로 그가 휘젓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렸다. 잠시 후 그가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예진아.” 이유는 더 이상 네게서 매력을 느낄 수 없다는 흔한 이별 레퍼토리였다. 그렇게 예진이 준비한 선물은 원래 가려던 주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선물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어제를 회상하던 예진은 무언가 다른 색의 불빛을 느껴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선 빨간 자막으로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속보> 코로나22 치료제 개발 성공··· 99.9% 완치’. 예진은 선물 상자를 열었다. 환불 불가 조건으로 아울렛에서 할인가로 구매한 시즌 지난 마스크·스트랩 세트다. 몇 개월 전쯤 그가 지나가는 말로 갖고 싶다고 얘기했던. 핸드폰에서 알람이 여러 번 연달아 울린다. 인스타에 들어가니 벌써 하나의 유행이 생겼는지 너도 나도 각자의 마스크를 찍어 올리며 태그를 단다. #BYE코로나 #BYE2022. 얼굴 없이 마스크만 올라온 사진인데도 누구의 게시물인지 알 것만 같다.
예진은 그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자신이 이 구찌 마스크처럼 시즌오프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적응하지 못하고 삐걱거렸던 것은 녹슬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자리가 차버린 공간에 나를 끼워 넣으려 했기 때문이란 걸. 바랜 관계를 놓지 못하고, 개성을 잃은 자신을 흐름 속에 가리려했다. 예진은 인스타에 구찌 마스크를 찍어서 올렸다. 태그는 #BYE마스크.
완결성 있는 하나의 이야기이긴 한데 작문이 추구하는 요소 가운데 어떤 점에 더 강조를 두고 글을 계획했는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 글입니다. 글을 계획할 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겠다는 걸 목표로 삼으면 보통 이야기 줄거리에만 신경을 쓰고 그 이야기가 어떤 효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게 계산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효과적인 작문을 쓰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글을 쓰기 전에 작문이 추구하는 3가지 요소 가운데 어떤 점을 메인으로 추구할지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이고 계산적인 설계도가 필요하고 그렇게 설계도를 완성도 있게 작성한 뒤에 글을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 36.
여느 날과 다름없는 고등학교 점심시간의 급식실, 나는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 신나게 수다를 떨며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밥을 입 안에서 우물우물 씹던 중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풉’. 급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려 보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다. 내 입안에서 친구의 얼굴 위로 옮겨가 덕지덕지 붙어버린 밥알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한 친구의 표정…나는 연신 “미안해, 미안해”를 외치며 허둥지둥 휴지를 집어 올렸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는지 친구는 실소에 이어 크게 웃기 시작했고 나도 그 웃음에 못 이겨 함께 호탕하게 웃었다. 민망한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해준 친구에게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었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풍경을 학교에서 볼 수 있을까. 최근 기사들 속에서 본 중고등학교의 급식실, 그리고 학급의 각 자리 자리마다 책상 위 삼 면을 두른 투명 아크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스크에 이어 아크릴 가림판까지…방역을 위한 각 학교의 눈물겨운 노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가 더는 ‘학교’가 아니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화를 위한 존재가치가 큰 기관인 학교가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만 같다. 현재 고등학생인 동생의 말에 의하면 같은 반 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친구들의 얼굴은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같은 반이 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말이다.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추억, 급식실에서의 추억, 이제는 다 옛날얘기다.
일본의 한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는 정상적인 인간이 가진 모습의 일부는 바로 체액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마스크 착용 이후, 예년보다 감기 환자가 줄었다는 통계는 우리가 그간 서로의 타액에 늘 노출되어 왔다는 걸 알려 준다. 마스크 착용 이후 우리는 바이러스로부터는 물론 타인의 불필요한 관심으로부터도 보호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을 알 기회를 잃게 되었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체액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만큼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런 인간과 교류할 때 불완전한 나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된다. 현실 속 내 존재를 깨달을 때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온전해질 수 있다.
통찰과 주목도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 글인데 두 요소 모두 평범한 수준입니다. 예상 가능한 범주이고 사례들도 평범한 편입니다. 통찰의 요소로 보면 마스크 때문에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을 알 기회를 잃게 됐다는 것인데 자신의 체액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정상적인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나 기준으로 보는 대목은 조금 부적절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조금 과장됐거나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문장을 전반적으로 더 인상적이고 함축적으로 쓰도록 해야 합니다.
# 37.
‘강남역 7번 출구로 나오십시오’ 나는 실시간으로 도착하는 위치 문자를 확인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수많은 인파와 휘황찬란한 간판들. 익숙하게 다녔던 곳이 오늘만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 목적지는 이 넓은 거리가 아니었으니까. ‘왼쪽으로 돌아 1km를 걸은 뒤 오른쪽으로 꺾으세요.’ 끊임없이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은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반납하고 어두운 천으로 눈을 가렸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는 정제된 공기가 느껴졌다. 한 남자가 천을 풀어 내 눈을 뜨게 했다. 이곳이었다. 나를 남들과 구별 지어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 맑아 보이는 눈빛의 그가 말했다.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 발로 이곳을 찾게 된 이유를 어디서부터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남들과 같은 것에 질려버린 사람이었다. 유명 호텔 뷔페의 직원. 모두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옷. 앞머리는 깐 채로 볼륨을 올려야 했고, 리본 없는 깔끔한 머리망에 흑채를 뿌렸다. 유니폼은 포인트 없는 검정색 상하의가 전부였다. 고객에게 방해되지 않는,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던 우리를 구분하는 유일한 수단은 얼굴이었다. 그조차도 흔하게만 생긴 내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아까 예쁘게 생기신 분이 이거 갖다주셨는데” 고객은 우리를 늘 특징으로 불렀고, 나는 항상 ‘저기 서있던 분’에 불과했다. 몇 년을 안내한 VIP고객이 나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막 들어온 예쁜 신입을 두 번만에 알아본 날, 이 빌어먹을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잃어버린 내 모습을 찾고 싶었다. 퇴사한 다음 날, 성형외과로 향했다. 그간 모아온 돈을 전부 써버렸다.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금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커진 눈, 오똑한 코, 날렵한 턱선… 회복기가 지나고 고대하던 새로운 호텔로의 출근을 앞둔 무렵, 갑작스러운 팬데믹이 덮쳤다. 모두 똑같은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그간 우리를 처절하게 갈라온 외모의 구분선이 사라졌다. 돋보이기 위한 눈화장은 되려 과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화장을 최소화하는 시대에 역행한다나 뭐라나… 드디어 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는데 ‘저기 마스크 쓰신 분’이 된 처지라니.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내 모습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팬데믹이 장기화되며, 국내 모든 방송과 영화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스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점차 이목구비의 요밀조밀함이 아닌, 보이는 것에 주목했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마스크 사이에서도 강렬함을 뿜어내는 ‘눈빛’. 피차 꾸민 티가 나는 서클렌즈 같은 화려함보다는 내면의 진실이 묻어나오는 눈동자. 그때쯤 호텔 VIP 고객이 흘리는 말을 듣게 됐다. 이번에 대박난 드라마의 주연배우가 ‘눈빛 성형’을 했다는 것. 새로이 생긴 불법 시술을 통해 톱 반열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꽤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그의 수식어가 된 ‘기억에 남는 눈빛’이 탐이 났다. 나는 그가 애인과 호텔에 방문하는 날에 맞춰 몰래 접근을 했다. 내게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들을 전부 폭로해 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서는 시술 연락처를 얻어냈다.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했다. 며칠 동안 각막에 약물을 투입하여 눈동자를 성형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원하는 테마에 맞춘 무늬필터를 이식하는 방법. 실명할 확률은 50대 50. 성공해도 평생 필터를 청소해주는 시술을 달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두려워하기엔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억울한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내게는 훨씬 더 컸다. 첩보 작전처럼 비밀스럽게 도착한 수술대에 눕자 마취가 시작됐다. ‘나는 성공할 거야, 달라질 거야. 돋보일 거야…’ 남들보다 앞서 가지게 될 나만의 무기를 상상하며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몇 년 후,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를 집었다. ‘부작용 제로 시술법 개발. 빛나는 당신을 눈빛으로 표현하세요. 쁘띠 눈빛 성형샵.’ 나는 주위를 살폈다. 거리를 지나는 이들의 눈빛이 전부 나와 비슷해 보였다. 조만간 또 큰돈을 쓰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연예인의 목소리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통찰의 요소는 보통의 수준이고, 주목도는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글입니다. 주목도를 상급으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고, 통찰의 평범성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다시쓰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쓴 글의 플롯은 얼핏 입체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구도는 비슷하고 정도만 더해가면서 반복되는 방식이어서 단순한 플롯이고 예상 가능한 전개나 결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된 것은 중심맥락이 간단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38.
마스크는 세상과 숨 사이의 벽이다. 이 벽은 안전을 명분으로 세워졌다. 벽 뒤에서 마음껏 편히 숨쉬기란 쉽지 않다. 벽은 숨의 표정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은행이 떨어지고 길에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던 5년 전 가을, 할머니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침대를 갖게 되었다. 옆집 할머니와의 말다툼이 옆집 할머니의 주먹으로 이어졌고, 할머니는 그 충격 이후 점점 기억이 옅어졌다. 약을 먹었는지를 까먹었고, 가스 불끄기를 깜빡했다. 곧 할머니는 밥을 먹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요일이 쓰인 약통을 사던 아버지는 타이머가 달린 가스레인지 전원 조절기와 가정용 CCTV까지 설치해야 했다. 가스레인지가 켜지지는 않았는지, 문은 잘 잠겼는지, 약 통은 비었는지 아버지는 매일 핸드폰 화면을 수시로 확인했다. 새로 구매한 가정용 CCTV는 통화 기능도 있었다. 회사에서도, 운동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아버지는 할머니의 일과를 계속 확인하며 챙겼다.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을 가정용 CCTV가 채워주었다. 아버지는 자꾸 깜빡하는 할머니에게 답답한 듯 언성을 높이다가도 옆에서 직접 챙기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화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도 했다.
그 가을,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침대를 마련해주었다. 할머니는 홀로 지내던 집에서 짐을 챙겨 크고 사람이 많은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할머니는 처음으로 침대를 갖게 되었다. 침대만이 그곳이 할머니가 지내는 곳임을 표시해주었다. 그곳에는 전문 요양사들이 있었다. 약도, 밥도, 씻는 것까지도 모두 챙겨주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가정용 CCTV에 몰두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매일 퇴근길을 1시간 돌아 할머니를 보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난 겨울,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부터 6.25 피난 시절 밥상을 차리던 이야기까지 생생한 과거를 읊었다. 아버지는 너무 들어 지겹다는 듯 자리만 조용히 쓸고 닦았다. 지나가는 요양사들에게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가 휴지를 쓰레기통이 아닌 침대 끄트머리에 숨기자 아버지는 화를 내었다. “그렇게 하면 요양사들이 싫어한다, 어머니에게 나쁘게 대할 수도 있다.”며 큰 소리를 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후회의 숨을 내뱉었다. 뉴스에서 요양사들의 노인 학대를 많이 접해 걱정이 된다고 했다. 마음을 놓고자 한 선택이지만 마음은 놓아지지 않은 듯 했다. 어쩔 수 없지만 마치 고려장과 같은 자책감이 든다고 긴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그 뒤로도 매일 긴 퇴근을 반복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자 면회 시 마스크는 필수였다. 아버지는 두꺼운 마스크를 끼고 긴 퇴근 길에 나섰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도 할머니는 아버지가 왔다는 것에 신나 아버지를 낳은 이야기와 6.25 피난 시절 밥상을 차리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코로나19로 면회가 금지되자 아버지는 매주 요양원 1층에 간식거리와 새로 산 옷을 맡겨두었다. 할머니를 만나지 못해도 아버지의 긴 퇴근은 계속되었다.
마스크는 세상과 숨 사이의 벽이다. 아버지에게 가정용 CCTV와 요양원은 마스크와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라는 아버지의 세상과 자책의 숨 사이에 있는. 안전을 명분으로 세웠지만 그 뒤에서 결코 편하지 않다. 아버지는 벽 뒤에서 홀로 자책감을 맞고 있었다. 벽은 아버지가 뱉는 자책의 숨이 할머니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가려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스크를 단단히 눌렀다. 더 이상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잘 쓴 글입니다. 통찰의 요소는 평범하거나 평범한 수준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인데, 주목도와 공감/감동의 요소가 평균 이상으로 높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글에 집중할 수 있고, 여운이 남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장되지 않고 차분하고 절제된 문장의 톤이나 흐름도 읽은 이가 아버지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