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문학의 꽃, 시혼의 중심
공 영 해(시조인)
이 글은 시조에 대한 필자 나름의 견해와 창작에 대한 소견을 쓴 만필임을 밝힌다.
시조는 시조詩調가 아니라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인 시조時調임을 안다. ‘시時’는, 시간적 개념어로,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 사회의 생활과 문화의 옷을 벗지 말라는 암묵적 지시이다. ‘조調’는, 가락으로 드러나는 율격, 음악성을 말한다. 문학작품은 어떠한 경우로든 당대의 사회성 내지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시대를 외면한 작품은 아무리 순수 서정을 노래란 작품이라 할지라도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시조인(윤재근 교수는,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하듯 시조를 창작하는 사람을 ‘시조인’이라 함)들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건강한 보편적 정서를 노래할 의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조를 자유시의 하위 개념으로 알고 있다. 시조는 시의 하위 개념일 수 없다. 시조는 천 년 한국문학사에서 탄생한 민족 고유의 자랑스러운 문학이다. 시가 본디 외래 장르임에도 보편적 정서 전달이 자유롭다는 그 하나로 근대 이후 한국의 문단을 장악해 오지 않았는가. 지난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시조’를 시, 소설, 수필, 평론과 함께 문학의 정의에 포함하도록 <문학진흥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된 것은 사필귀정. 시조는 민족 문학의 주체이며 시와 동등한 위상임을 확인한다. 시조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미력이나마 시조 발전을 위한 모색과 창의적 정신으로 창작에 임하고 있다. 시조는 시조여야 하고 시여서는 안 된다. 시조는 형식에 제한이 있어 제재 선택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제재와 형식적 제약은 무관하다. 이는 시조인이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무변광대한 우주와 종교적 철학적 사상과 사유의 세계, 만유의 근본 문제, 급변하는 사회, 정보량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 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는 사회 - 산업사회, 지식정보화사회의 노사, 공해, 교통, 환경 문제 등 시조는 다 담아낼 수 있다.
형식은 방법일 뿐 제약이 아니다. 소재와 주제는 글로벌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형식을 탓할 것이 아니라 무능을 탓할 일이다. 문학성이 낮은 창작은 지양하여야 한다. 언어의 비속성과 사고의 천박성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해양 우주, 세계 도처의 빈곤 질병, 기아 등,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노래하는 작품까지 시조인은 얼마든지 정제된 언어로 당당히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시조는 3장 6구의 가락을 알면 스스로 가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생의 반을 ‘좋은 국어 선생’으로 살았다. 시와 소설 수필 희곡 등 장르의 호오를 떠나 있다가 내가 장르를 선택해야 할 때 어느 순간 시조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시조는 자유시보다 독자에게 대중적 호응도가 낮고 창작하기도 더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시조가 풍기는 고아한 품격과 군더더기 없는 음보 단위의 정련한 가락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말과 가락이 주는 정형의 틀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고 시조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격과 미적 세계에 젖어 들게 된다. 가락에 익숙해지자 버릇이던 몸에 익은 산문적 진술은 자연스럽게 정제된 율을 타고 있었다. 소설 한 권 분량의 세계를 단시조로 담아내는 쾌감이라니, 자유시가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의 절제와 형식이 주는 음악성이 시조미학의 자랑임을 어찌 잊으랴.
시조 창작에 대한 나의 현재 관심사는 삶의 문제이다. 나는 작품의 소재를 주로 꽃에서 얻는다. 꽃은 종에 따라 동일한 수의 꽃잎과 모양을 가진다. 꽃잎은 형식이요 색깔과 향기는 내용 아니겠는가. 꽃이 미의 완전체, 우주의 중심이라면 시조 또한 문학의 꽃, 시혼의 중심이겠다. 내가 시조를 창작하는 작업은 새로운 꽃을 찾아가는 일이다. 이러한 나의 작업은 주로 새벽에 이루어진다.
발표된 3편의 작품을 살피며 시조 창작의 방법론을 대신한다. 2 편은 꽃을, 1편은 들나물을 오브제로 한 작품이다. 배열은 장별 배행을 따르며 가끔 단시조의 경우, 이미지나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 구별 배행을 하거나 작의에 맞게 적절히 행 가름을 한다. 문장부호는 감상에 방해가 되므로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다. 단시조 <쯧 쯧 쯧>을 본다. ‘꽃마리’라는 작은 야생화를 매개로 조손간의 사랑을 보여주려 한다. 이미지 전달을 위해 행 가름과 지시적 기능을 가진 문장부호를 쓰고 있다. “눈빛”을 통해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상황 설정은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변두리인의 삶. 누추하지 않도록 초점을 꽃에 둔다.
<꽃 한때>를 본다. 절정의 복숭아 꽃밭이 배경. 도화원桃花園을 옛 사람들은 도교적 이상향이라 노래했지만 작품 속의 배경은 시각이 촉박한 노동의 현장이다. 과일 농사를 짓는 농사꾼은 양질의 과일을 생산을 위해 적뢰摘蕾, 적화摘花, 적과摘果 작업을 실기치 않아야 한다. 노모를 모시고 사는 50대 농촌 노총각의 바쁜 일손을 생각한다. 화산댁은 중심인물, 경험 많은 철저한 경영자이다. “꽃값”은 노동의 대가. “수밀도 굵은 단물”이다. “수밀도”는 노동의 결과물이며 소비자에 대한 약속이다. “활짝 핀 만 평 밭”이 복숭아밭임에랴. 셋째 수는 꽃따기 작업이 단순 작업이 아님을 화산댁의 말을 슬쩍 비틀어 “벌”을 ‘벌罰’로, “꽃값”을 ‘사람 값’으로 읽혀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종장에서 독자들 스스로 ‘꽃 한때’에 담긴 보편적 농법과 인간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피고 지는 꽃이라지만 의미 없는 꽃은 없다. 적화한다 하여 남은 꽃들이 다 단물이 많고 굵은 ‘수밀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의 적과를 거쳐 ‘수밀도’는 익게 된다. 우리는 오늘도 도원桃園을 오르내리는 화산댁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 직방을 웃고 마네>는 들나물인 ‘벼룩나물’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 소환이다. 춥고 배고픈 유년기의 겨울은 길었다. 손은 왜 그리 트던지. 갈라 튼 손등의 상처는 벼룩이 씹다 간 듯 따가웠다. 오줌에 손 담그면 낫는다는 비방도 헛일이었다. 춘궁기를 이겨내기 위해 들나물이라도 배불리 먹이려는 어머니, 비쩍 마른 어린것에게 벼룩나물 쌈을 싸 주며 “직방”이라 둘러댄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자 손등의 상처는 절로 낫는 것을. 마흔 살이 넘어서야 내 아이의 튼 손을 보며 애틋한 어머니의 사랑을 ‘벼룩나물’로 만나본다.
시조가 어려워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시조를 어렵게 쓰려 하지 않는다. 난해한 시조는 쓰지 않기로 한다. 낯설게 하기가 매혹적일 때가 있다. 이런 기법이나 기교보다는 시조 창작의 근본인 치열한 작가정신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애매성도 지나치면 외면당한다.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꽃이 있는 시조의 길은 즐겁다. 잘 읽히며 감동을 주는 시조가 대접 받는 세상, 시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K-팝이나 트로트 팬처럼 열광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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