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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기행문(천산북로: 돈황-하밀-선선-트르판-우루무치)
몇 년 전부터 벼르던 실크로드로 향했다
실크로드의 길고긴 대장정중 천산북로의 일부를 9일 일정에 오지라는 이유로 여행패키지를 이용하여 13일 저녁 8시 50분 대한항공으로 출발 우루무치에 도착하니 01시15분경(우리보다 1시간 빠르다)
호텔에 도착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낯설은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첫날 일정이 시작된다
우루무치는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위구르어처럼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이고 산허리 밑으로 카자흐족의 유목민들의 목장들이 펼쳐져 있다. 유목민들의 거주지인 파오라는 둥근천막에 들어가 그들이 주로 마시는 마유차와 여러 가지 열매들을 맛보고 초원의 언덕에서 말도
몰아본다
오후에는 시내 가운데 있는 붉은 바위위에 조성된 홍산공원과 인민공원 등 시내를 둘러본후 저녁식사후 돈황으로 가기위해 우루무치역으로 나갔다
신도시답게 넓은 대합실에는 몸보다 큰 보따리를 앞에 두고 기차를 기다리는 현지인들이
여기저기 의자 위에 누워 있다. 팔 물건을 사가지고 가는 상인들인 것 같다.
저녁 7시 50분 출발하는 특급열차의 침대칸에 몸을 맡긴다. 한방에 4개씩 있는 침대칸은 대부분 관광객이 타고 다른 좌석 칸에는 내국인들이 큰 짐을 싣고 탄다.
오른쪽으로 머리에 흰눈을 인 천산산맥과 나란히 기차는 달리고 해가 지면서 창문을 따갑게 때린다. 해가 9시가 넘어야 진다고 하니 한참은 밖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4명이 각자 자기소개를 한다. 세사람 모두 여행 매니아로 다른 대륙을 모두 가보았다고 하니 부럽기 그지없다. 실크로드를 오지라고 미루다가 오게 되었다고 하며 지나온 여행 얘기들이 너무나도 재미있다.
일몰을 본지 얼마 안 되어 달이 뒤 따라 오며 달무리를 만든다. 사막의 벌판을 달리는 기차에서 달과 함께 누워 가는 기분이 아주 낭만스럽다. 트루판에서 정차하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른다. 천산산맥도 멀리 사라지고 기차는 아득한 사막을 달리고 누워서 잠을 청해 보지만 모두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니 가지고 간 소주 한잔씩을 마시며 어울려 얘기꽃도 피우면서 자다 깨다 하니 날이 밝고 8시가 넘어 12시간의 기차여행이 끝났다.
유원역에 도착 마중나온 버스를 타고 잠깐 이동하여 아침을 대하니 우루무치에서 먹던 음식에 비해 형편이 없다. 누군가가 고추장을 내놓는다. 그런데로 밥에 비비고 화근이라는 중국빵까지 먹고나니 그런데로 배가 부르다.
고비사막위에 직선으로 뚫린 도로를 달린다. 돈황까지 130km를 달려야 한단다
오른쪽으로 간간히 보이는 검은산은 석탄광산이라고 하고 왼편으로 보이는 들은 그저 황량한 자갈사막에 낙타풀만 띄엄띄엄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나무가 좀 있었으나 주민들이 무두 베어다 연료로 썼다고 한다. 휴게소를 찿자니 허허벌판 사막 가운데 내려 버스를 사이에 두고 남자 여자 나누어 볼일을 보곤 한다. 2시간 넘게 달려 드디어 푸른숲에 우거진 돈황에
도착한다
돈황 !!! 실크로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도시다.
고비사막 안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인구는 18만 주생산은 목화와 간간히 포도과수원이 있다. 1년 강수량 35ml, 돈황호텔에 도착 잠깐의 휴식과 점심식사후 명사산으로 향한다
모래를 밟을때 나는 소리가 울린다고 하여 붙여진 명사산 입구에서 선그라스에 목까지 수건으로 감고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막바람이 날아가게 분다.
타클라마칸 사막 끝자락에 우뚝 솟아있는 명사산은 길이가 40km 폭이20km로 높이는 200-250m. 바람에 의해 산의 모양이 수시로 바뀐다고 한다.
낙타에서 내려 모래산을 하나 돌아가니 모래 바람속에 월아천이 몸을 드러낸다.
천년동안이나 마르지 않은 신비의 월아천과 수명을 함께하는 절내를 돌아보니 지금은 수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그 모래 바람속에서 산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져도 월아천만은 끄떡없이 남아 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장엄한 모래능선이 강하게 몰아치는 파도를 연상케도 한다. 모래산 하나를 올라가보기 위해 발을 띄어보나 푹푹 빠지고 무지하게 힘이 든다. 정상에 올랐으나 날아가게 몰아붙이는 모래 바람에 멀리 경치도 못보고 엉금거리며 발길을 돌려 내려오다가 모래썰매를 타니 눈깜짝 할 사이에 미끄러져 내린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돈황시내를 둘러보며 재래시장등을 둘러보니 누린내나는 양고기 일색이다.
셋째날의 일정은 아침 일찍 양관 박물관으로 향한다.
돈황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진 양관은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갈때 통과 도장을 받았다고 한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장군의 동상과 1500년전의 생활을 볼수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고 말을 타고 1Km 떨어진 봉화대까지 나가 멀리 서역쪽을 바라보나 온통 자갈 사막만이 황량하다
돌아오는 길의 돈황 근처의 돈황고성에 들른다
돈황고성은 1987년 일본이 “돈황” 이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 전성기의 돈황을 재현한 세트로 마지막 장면에 모든 성이 불타는 것으로 끝내려 했으나 중국정부가 불탄 재를 모두 일본으로 가지고 가라는 방해로 성을 그대로 두고 작은 세트를 다시 만들어 영화를 마무리 했다고 하며 지금은 관광지로서 중국에 돈을 벌어주고 있으니 일본의 당혹했음을 고소해하며
중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본다. 우리도 작년엔가 방영했던 “해신”을 이곳에서 촬영했었다는 고성측의 사진자료를 보고 더 새삼스런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막고굴로 향했다. 돈황의 남동쪽 명사산 동쪽끝에 1.8km의 절벽에 1000여개의 석굴이 있으며 현재는 492굴이 발굴되었고 벽화면적 45,000㎡에 달하고 2,415존의 불상은 각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는데 미술사상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막고굴은 내가 실크로드에 오고 싶어 했던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1600년 이상이나 척박한 사막에 진주처럼 살아있어 198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중국의3대 석굴의 하나이다. 기원전 인도 불교가 전해지면서 366년 낙준 이라는 승려에 의해 창시되어 북위, 서위. 북주. 수. 당5대와 송. 원에 이르는 13세기까지 만들어진 석굴이다.
15년전까지 200여개 굴을 개방하였으나 지금은 10여개만이 개방되고 나머지는 보존을 위해 폐쇄했다고 한다. 일부동굴은 연구원들의 연구를 위한 모사를 위해서만 들어갈수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통행증을 가진분이 있다고 한다.
돈황연구회측은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로 가이드를 해주고 있으며 한족으로 돈황연구회 연구원인 이신 님이 우리와 관련된 부분은 특히 더 정성스럽게 설명을 해주었으며 약간 서툴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한국말과 약간의 사투리도 구사함에 너무나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모든 석굴은 알루미늄 문에 자물통이 달려 있어 연구원이 열쇠로 열고 들어가 옛날에 쓰던 빨간 랜턴을 비춰가며 설명을 하다보니 전체적인 그림을 볼수 없어 아쉽다. 카메라는 입구에서 압수되어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둘러본 순서대로 정리해본다
328호 굴은 석가의 청․ 장․ 노년을 나타내는 불상과 바닥의 연꽃문양이 인상적인 서하시대 것으로 가장 아름답게 보존되었으며 스님의 사리탑도 있고 다음달 6월부터는 영구히 폐쇄시킬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가 운이 좋은 것 같다.
16호 석굴은 홍비안 스님의 공덕을 빌었던 곳으로 천장에 봉황, 용의 벽화가 선명한 서하시대의 작품이고 16호안에 있는 17호 석굴은 3만권의 책이 발견되어 도서관이라 불리고 신라의 고승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이라고 하며 1908년 프랑스의 폴에 의해 3분2가 도굴되어 유출되었다고 한다.
427호에는 송 시대의 것으로 비천상과 그당시 촛불을 켰던 흔적인 촛농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428호는 규모가 가장 크고 북주시대의 양식으로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까지 적혀있는 것을 볼수 있었고 전라의 비천상이 선명하게 이곳에만 남았다고 한다.
453호는 가장 작은 석굴로 불상이 앉아 있던 자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이는 문화혁명당시 홍위병들이 떼어버렸다고 한다. 451호는 불상이나 벽화를 모두 도굴해가고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며 96호는 35m의 제일 큰 불상이 있는 당나라 초기의 작품으로 여러사진에서 보았던 막고굴 7층 탑이 바로 이 석굴의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중화민국때 목조탑으로 머리위까지 덮듯이 만들어 놓은것이다
130호에는 두 번째 큰 불상이 있으며 172, 173호를 지나 174호에는 인도풍의 불상이
148호 석가의 와불상은 당나라때 것이고 뒤의 72명의 제자들의 불상은 청 시대에 약간의 보수가 되었다고 한다 .
266-279호는 제일 오래된 북양시대의 것이며 270,279호는 영원히 밀봉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꼭 보여주고 싶다며 개방이 안된 237호로 안내를 하니 티벳이 돈황을 다스릴무렵 주변 나라의 사절들이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신라의 왕자도 있다며 자세히 설명해준다. 이렇게 2시간 반을 남들보다 특별하게 관람을 하게 되는 행운을 갖을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석굴은 1-2년이내 모두 폐쇄할 계획을 논의중에 있다고 하니 다시한번 볼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아쉬운 마음을 DVD구입으로 대신하며 발길을 돌린다.
돈황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유원역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열차를 타고 되돌아 가다 3시간여 만에 신강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에 자리잡은 하밀에 도착하니 새벽1시가 넘어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하밀은 인구10만으로 위구르족이 많아 이슬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가장 전성기인 하미왕 7세의 왕릉 내부는 사원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옆에는 하미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으로 1668년에 건립된 것이며 평소에는 예배를 하지 않고 있으며 10.10일 구르방제에는 하밀의 회교도 수만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장관을 볼수 있다고 한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람소리에 의해 마귀의 소리가 난다는 마귀성을 둘러보기 위해 다시 사막으로 달리다 보니 멀리 바다가 보이고 배가 떠다니는 것이 보이니 바로 신기루라고 한다. 옛날 사막을 지나는 상인들은 처음에는 강이나 바다를 보고 다음은 오아시스의 나무, 마지막 오아시스의 도시를 경험했다고 한다.
마귀성에 도착 모래와 돌이 굳어 만들어진 특이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어찌 보면 미국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하는 계곡이다. 높은곳에 올라 보니 멀리 우리 서해의 썰물때 물빠진 갯펄같은 지대도 있고, 끝이 보이지 않은 지평선이 나를 움츠려들게 한다.
선선을 향해 또다시 사막을 달리니 저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보이다가 사라지곤 한다.
사막을 달리다 보니 유전 시추봉이 자주 보인다. 사막밑에 무진장한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있다고 한다. 땅위는 별 쓸모없는 사막이지만 지하의 무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니 부럽기도 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산야를 생각해보며 우리에게도 조금만이라도 나누어 주시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시추봉은 개인이 아닌 모두 국가 소유라고 하며 한번 움직일때마다 1200만원정도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3시간정도 달려 선선에 도착한다 . 돈황이나 하밀에 비해 사회주의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세계에서 9번째 크다는 쿠모타크사막을 찿으니 지금까지는 다른 초코랫빛 모래사막이다. 명사산이 웅장하고 남성스럽다면 이곳은 여성처럼 부드럽고 잔잔함을 느낄수 있다.
해는 중천에 떠있으나 6시가 넘었지만 트루판 입구에 있는 토욕계곡을 가기 위해 부지런히 달린다. 저 멀리 붉게 보이는 산이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의 얘기가 서린 화염산이라고 한다 멀리서 볼때 꼭 불타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토욕계곡은 회교도들이 그들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자치지역이라고 하며 계곡안에 있는 불교의 석굴을 종교를 떠나 문화재로 간직하며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리다가 화염산을 거치면서 황톳물로 변한 계곡물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뉜 석굴은 모두 99개이나 지금은 3개의 굴만 개방하고 있다. 마을의 조그맣고 앳된 안내인을 따라 나무계단으로 엮어놓은 벼랑을 따라 들어가니 어둠속에 핸드폰 불을 비추며 설명을 한다. 내가 미리 준비했던 등산용 작은 랜턴으로 벽화를 비춰주고 우리의 가이드에 의해 듣는 박식한 설명이 아주 즐겁다. 41호는 산호초를 이용한 물감으로 그렸으나 지금은 검은색으로 퇴색이 되었다고 하며 많은 부분의 벽화가 유럽의 탐험가들에 의해 도굴되었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42호는 트루판에서 가장 값진 석굴이라 하며 보리수 나무밑에 바싹마른몸의 석가가 도를 닦는 벽화와 주변으로 49개의 나무가 그려져 있고 석가를 비추는 불광은 마니교 스타일로 불교 와 마니교가 혼합된 그림이라고 한다. 38호 석굴 역시 거의 도굴되어 파손이 심하니 몹시 안타깝다. 어두워지는 계곡을 내려오자니 그 흙탕물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며 놀고 있다. 약간은 안쓰러운 마음도 들지만 행복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음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환하게 웃어준다. 12시가 다 되어 트르판 도착
트루판은 낮은땅이라는 뜻이며 인구는 50만 위구르족이 95%이상 이었으나 한족의 이주정책으로 지금은 한족이 많이 늘어 70%가 위구르족이며 강수량 년20ml, 증발량은 3500ml 이며 여름기온은 아주 높아 45℃를 오르고 1964년에는 54℃ 까지 올랐었다고 한다.
너무 더워 모기도 없다고 한다.
트루판 첫날
한나라의 국문태가 세운 고창국의 도시터인 고창고성을 찿았다.
화염산 기슭에 위치하며 대부분의 유적지는 허물어지고 거의 터만 남았다고 할수 있다. 축조할 당시만해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마른풀을 섞어서 지었으나 왕국이 멸한후 농민들이 비료로 쓰기 위해 성벽을 허물었다고 하니 더욱 애처롭다고 하겠다.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불교사원만이 15m 정도의 높이이며 성전체의 면적은 220만㎡ 이었다고 하며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갈 때 들렸다가 1개월간 불교를 설파했는데 공주가 사모하여 국문태가 훗날 이곳에 와서 3년만 설법을 해줄 것을 약속하고 인도로 떠난후 다시 왔을때는 이미 패망한 뒤였다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실크로드시대의 당나라와 고창국 귀족의 무덤양식을 보여주는 휴식터라는 뜻의 아스타나고분군에서는 무덤내에 그사람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고 죽어 남자는 세겹천으로 여자는 5겹으로 싸서 장사지낸다 하는데 천이 낡아 검은 몸이 그대로 드러난 미이라를 볼수있었다.
계속하여 화염산을 찿으니 워낙 크기에 산맥이라 불러도 할만할 것 같다 길이가 100km 폭이2km 최고봉은 895m라고 한다.
화염산 자락에 있는 중국의5대 석불의 하나인 백자극리천불동(보즈커리커)을 찿았을때 비가 오기 시작한다 후두둑 빗방울에 우리는 스스로를 귀한 손님이라 부른다. 연간 20ml의 비가 지금 내릴 수 있는냐며 고스란히 맞아준다. 보즈커리커는(천불동)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며 남북조 시대부터 원나라때까지 축조된 83개석굴중 보존된 것은 40여개이며 우리가 볼수 있었던 것은 7-8개다
명대이후 이슬람에 의해 훼손되고 20, 21호는 독일인이 탈취해갔고 27호는 일본에서 뜯어가 한국에 보관했다가 미처 챙기지 못하여 4점이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하며 31, 33호는 영국의 스타인이 38호는 일본과 독일인이 뜯어가고 대부분의 석굴에는 그자리에 벽화사진만 남아있거나 위치만 희미하게 남아 있어 근대 중국 격동의 시대가 안타깝기도 하다.
트루판 2일째
오늘의 시작은 교하고성으로 시작한다
트루판의 볼거리중 으뜸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지하오허꾸청(교하고성)
기원전 1세기에는 고창고성과 함께 투루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14C 망했다고한다.
이름그대로 두개의 작은강 사이의 벼랑위에 세워져 있으며 총면적은 43만㎡이며 특이한 점은 성을 벽돌로 쌓아서 올린게 아니라 지하로 파내려 가면서 축조한 탓에 줄무늬로 된 지층표시가 있고 이러한 이유로 고창고성보다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지금도 강으로 연결된 지하수로가 있으며 돌을 던지니 물소리가 풍덩 한다. 한쪽 터에서는 200구의 어린이 무덤이 발견되어 전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린이의 무덤을 따로 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민가와 관가가 옛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잘 닦여진 길을 걷다보면 따가운 사막의 햇볕에 눈도 뜰수 없고 건조한 기후에 입술은 마르지만 형언할수 없는 성내의 울림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발걸음을 뒤로한다.
점심후 찾아간곳은 이슬람 양식의 1779년 투루판의 지방군주 쑤레이만에 의해 아버지의 공과 집안의 세습왕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소공탑(액민탑) 으로 트루판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다. 건륭황제때 트루판의 수령이면서 종교지도자인 액민화탈을 세습왕으로 인정한것에 대해 아들이 건립한 것이다. 환루에 올라서 보니 근교주위가 모두 보이고 멀리 하나씩 있는 사원은 평소에 기도하는 곳이고 10.10 구르방제 때는 이곳에 트루판 회교도들이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트루판 외곽을 돌다보니 특이한 것이 가로수가 뽕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양잠업은 전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뽕나무 열매는 검은데 이곳의 뽕나무 열매 오디는 검은것과 흰색 두가지가 있는데 흰 오디가 더 달고 맛이 있다. 길가는 떨어진 오디가 밟혀 지저분하다.
만리장성 , 경하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대공사중 하나인 칸얼정을 찿았다. 한나라때 부터 시작되었지만 청나라때 임칙서 장군이 서민들을 동원해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물을 지하수로를 통해 끌어들여 트루판에만 1610개의 수로와 총길이가 5500km로 가장깊은곳 154m 낮은곳은 2.2m 의 지하수로를 완성해서 지금도 이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관광을 위해 지하수로 일부를 개방하여 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수 있도록 보여준다. 칸얼정의 역사는 중국의 한나라로터 시작되어 터어키, 아프가니스탄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트루판의 또하나 세계에서 가장 당도가 높은 포도 산지라는 것이다. 1백여종의 포도가 있으며 8월말 경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포도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수확한 포도는 천산산맥의 산중턱에서 흑벽돌로 쌓은 건조실에서 6개월이상 건조시킨다고 한다.
우루무치에서 열차로 12시간 달려 돈황으로 가서 버스와 기차로 되돌아오면서 오아시스도시를 차례로 들러 실크로드 유적지를 모두 보고 트루판에서 2시간 반을 달려 다시 우루무치로 왔다. 우루무치는 신강위구르자치구역의 성도로 220만 인구에 국제공항에는 유일하게 우리의 대한항공이 들어오고 있으며 일본관광객이 인천을 경유해 들어오는 경우가 있고 그 외 북경, 상해, 서안을 통해 들어온다고 한다.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듯 56개의 소수민족에게 전통 즉 문화적 관습과 종교적 신앙을 지켜나가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으며 민족간의 화합을 위해 한족의 소수민족지역으로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하며 신강에는 위구르족, 카자흐족등 여러민족이 있으나 대부분이 위구르족으로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것같다.
시내로 들어서자 바로 신강박물관을 찿아 소수민족들의 삶을 볼 수 있는 민족박물관과 유적지박물관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알려주는 혁명박물관, 건조한 사막에서 발견된 그대로를 볼수 있는 미이라관까지 모두 관람하고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첫날 묵었던 호텔로 향한다.
9시경 호텔앞 거리로 나가니 야시장이 서는 곳인가 수도 없이 많은 좌판이 벌어진다.
먹거리장을 찿아드니 대부분 위그르인들이 양고기와 보지 못했던 생소한 음식을 만드느라 거리가 온통 매캐한 연기로 가득하다.
몇몇이 함께 맥주 몇병에 양꼬치구이, 껍질째 볶은 호두, 밀가루 부침에 야채 고기등을 듬뿍싸말은 것 등을 안주삼아 먹어본다. 양고기꼬치는 소금과 향신료로 범벅이나 그런데로 먹을 만하다.
20일 우루무치 마지막날
늦은 아침을 먹고 10시에 천산천지로 향한다.
1시간 이상 달려 천산천지로 오르는 도로는 간간히 양떼들이 도로를 점거하여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또 말들의 행진도 있어 뒤를 따라 갈때가 많으나 운전기사는 짜증 한번 안내고 오히려 우리들이 답답해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2인승 리프트를 타니 밑으로 등산로도 보이고 한대지방 특유의 울창한 침엽수림이 장관이다. 바로 밑에서 내려 다시 여성들이 운전하는 전기로 가는 미니 코끼리 열차들을 타고 천지로 오른다.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다 빙하가 녹은 푸른 호수와 저 멀리 만녈설의 우루무치에서 가장높은 박격달봉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백두산의 천지보다 규모는 작은 것 같으나 뒷배경인 천산산맥의 만년설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서안을 경유 난주, 카슈카르, 라싸, 시가체까지 천산 남로쪽의 실크로드를 찿으리라 기대하며 이 여행을 마쳤다.
첫댓글 돈황강수량이35ml라구요? 사막이있어서인가요? 놀랐읍니다.서역으로나가는 양관과서역으로나갈려면 도장을받는다는것이인상적입니다.역시 돈황하면 막고굴이떠오르지요? 사진에서많이봤읍니다.여기갈려면 예비지식을 가지고가면좋겠다는생각이듭니다.9일내내 돌아다니는일정으로만 채워져있는데 피곤했겠읍니다. 잘읽었읍니다/
좋습니다, 다음에 내가 나갈때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