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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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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사회/사회구조 |
요약:계층간의 이해관계 대립을 비롯한 사회의 구조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각종 사회문제를 둘러싸고 이해관계 집단이 문제해결 및 그들의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일으키는 운동을 가리키는 사회학용어.
이는 전근대사회에서도 싹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일정한 이념을 갖춘 항구적인 조직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 성립 이후부터이다. 산업사회에서 야기된 제반 모순에 저항하여 사회개량 내지 사회개조를 도모하려는 근대적 사회운동은 서구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전개된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선진국의 사회적 모순이 후진국의 희생 위에서 해소됨에 따라, 사회운동은 국제적 계급대립구조 및 민족간의 이해관계 대립을 둘러싸고 더욱 확대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내적 모순과 외세침략이 자아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발전하였다.
근대적 사회운동이 현존하는 산업사회질서 및 그 기본이념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에 입각한 대중운동인만큼, 그것은 단순히 사회생활의 특정 측면에만 관련된 운동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전분야에 걸친 운동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운동형태로서 사회운동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은 경제운동·정치운동·사상운동·문화운동 등으로 크게 구분되며, 구체적으로는 노동운동·사상운동·협동조합운동·학생운동·여성운동·반제반전운동(反帝反戰運動)·인권운동·정당활동 등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그런데 산업사회가 고도로 발달될수록 이들 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것은 노동운동이다.
이는 산업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인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노동조합운동·협동조합운동·노동자정당운동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언제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형적으로 발전된 나라에서의 사회운동은 노동운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를 경험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사회운동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일어난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에서는 외세침략에 저항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실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이 사회운동을 주도할 만큼 성숙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언급한 각종 운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특히 학생운동·종교운동 등 지식인이 주도하는 운동이 앞장서기도 한다.
또한, 사회운동은 각 나라들의 고유한 상황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순조롭게 자생적 자본주의화를 이룩한 영국의 경우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민주화의 정도가 높기 때문에, 자연히 사회운동도 민주적인 성격을 띨 수 있었다. 한편, 선진국을 따라가기 위해 의식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어야 했던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 부국강병이나 보호무역과 같은 국가주의를 내세워 사회운동을 억압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 밖의 여러 후진국가들의 경우에는 선진국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식민지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사회운동은 한편으로는 민족독립투쟁적 성격을 띠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정자에 의하여 억압당하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운동의 조건은 역사적으로 보나 현시점에서 보나 결코 좋은 것은 못 된다. 정치적으로 민주화 정도가 낮고, 경제적으로 아직 낮은 발전단계이며, 사회적으로 신분제적 잔재가 남아 있어 온전한 의미의 계약관계가 정착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합리성보다는 정서나 인정관계가 앞서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일제강점기 및 대미(對美)의존시대의 사회운동은 극도로 억압된 상태하에서 매우 첨예화된 성격을 띠고 있었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과정에서의 사회운동도 고도성장과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억압되었다. 결국,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인 사회안정을 위한 사회운동의 기반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사회운동의 역사는 전통사회 해체기·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통사회 해체기에는 전통적 사회질서의 붕괴와 세계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 따른 사회적 제반 모순에 저항하여 맹아적 형태의 사회운동이 일어났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반일구국투쟁이 사회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의 잔재가 온존된 채 미국의 원조와 관련하여 생겨난 사회적 모순 및 1960년대 이후의 대외의존적 경제성장과 대외정세불안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중엽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내적으로 봉건지배층의 압정이 강화되었고, 대외적으로 구미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침략이 감행됨으로써 민족주권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봉건지배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독립을 효과적으로 지키는 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봉건사회를 타도하고 외세침략에 반대하여 국민의 권리와 민족주권을 옹호하려는 광범위한 민중의 사회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구미의 침략세력과 청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여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14년간이나 계속되었고, 인도에서는 1857년부터 1859년에 걸쳐 영국군 소속의 인도 토민병에 의하여 영국지배에 반대하는 세포이(Sepoy)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지배하의 인도네시아와 스페인 지배하의 필리핀에서도 일어났고,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조선 초기는 고려 말의 문란한 토지제도가 개혁되어 농민생활이 종전보다 향상되었고, 조선왕조는 이를 기반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토지공유제가 문란해지면서 토지가 관료귀족의 수중에 집중되어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고, 외침·내란·학정으로 농민생활은 더욱 더 악화되어 기민현상(飢民現象)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에 의한 농촌의 황폐화는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탈시켜 유민화(流民化)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적 혼란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사회상태하에서 러시아와 구미열강이 일제히 밀어닥쳐 왔고, 이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근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지배층은 근대조선으로의 출발을 감당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주주권을 수호하는 데도 무기력하였다.
조선에 접근한 구미열강은 사회적 불안을 틈타 종교(천주교)와 상품을 통하여 조선 내부로의 침투를 도모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직접적 무력침공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정기(1865∼1873)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침략을 관민이 일치단결해서 격퇴시켰는데, 이는 민중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켜 장차 사회운동으로서의 민족운동을 싹트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1876년 일제에 의하여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무방비상태로 개국하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세의 침략은 더해가서 조선은 일제를 비롯한 구미열강들간의 세력각축장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하여 농민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침략해 오는 열강과의 사이에 일어난 여러 사건을 빌미로 강요된 배상금이 약 80만원에 이르고, 내외채도 165만 8000원(당시 국가세입은 749만원)에 달하였는데, 이는 전부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거기에다가 당시 탐관오리에 의한 수탈과 더불어 그들의 매관매직에 따른 매관비 회수도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에 들어와 봉건지배의 가혹한 수탈에 반항하는 농민봉기를 유발시켰는데,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과 1862년 임술민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거의 매년 어느 지방에서나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을 행동지침으로 하여 전봉준(全琫準)의 지도 아래 국내개혁과 외세축출을 위하여 일어난 농민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전까지의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산발적이었던 민란세력을 이미 농촌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동학교문조직을 통하여 보다 조직적인 민중세력으로 규합하여 발전시킨 집단행동적인 사건이었다.
이 운동은 조선사회체계의 재구성을 보다 직접적이며 급진적으로 구현하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집강소가 내건 개혁안은 유교적 전통질서를 넘어서는 근대적인 인권의식과 참여의식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와 신·구형 지주의 억압을 해체시키면서 봉건적 신분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지주·전호제를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즉, 지주적 토지소유를 해체시켜 농민적 토지소유로의 발전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의 정치권력은 이러한 민중의 흐름을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무능력했다. 그리하여 진보적·민주적·민족적 감수성을 불어넣고 민중적 자주의식을 한껏 솟구치게 한 이 운동은 보수적·관권적 세력과 외세에 의해 진압, 거세당하고 말았다.
한편, 청일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획득한 일제는 개화당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하는 등 세력확산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민비를 중심으로 친러파가 등장하면서 정국은 또 다시 열강의 세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결국, 일·러의 각축 사이에서 정부는 자주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동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러의 틈바구니에서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을 중심으로 자주적 개혁과 독립을 목표로 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만민공동회를 열어 정부의 매국적 태도를 공격하고 그 결의문을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독립협회운동은 운동주체의 계급적 성격상 민중의 힘에 의하기보다는 국왕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민중적 참여를 실천하지 못하였고, 더 나아가 보수지배층의 간계와 정부의 탄압으로 운동의 추진세력이 흩어지고 깨어져 1898년 말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그를 지지한 대중의 사회운동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자유·민권·독립을 표방한 최초의 조직적인 사회운동이었다.
한편, 독립협회운동이 좌절된 시기에 동학농민군의 잔존세력이 의병투쟁에 합류하기도 하고, 또는 그에서 떨어져 나와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 등을 구성하여 구국안민책을 내세우고 투쟁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사회사상은 민중을 대변하는 동학사상 외에도 사대부의 사상으로서 유학에 뿌리를 둔 위정척사사상과 실학에 뿌리를 둔 개화사상이 있었다.
위정척사사상은 봉건제도의 재건을 목표로 하여 농촌을 중심으로 대중과 결합되어 의병투쟁으로까지 전개되었고, 개화사상은 문명개화를 목표로 하여 도시를 중심으로 대중과 결합되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반일의병과 애국계몽, 이 두 노선은 사상적 장벽 때문에 하나로 합류될 수 없었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일제치하에서 두 노선 사이의 상호침투와 투쟁형태의 상호접근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합류되어 갔다.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계기를 획득한 일본은 국권회복·반일운동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탄압하면서 1910년 8월 우리 나라를 강점하였다. 그 뒤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35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목적은 상품시장 확보, 원료·식량 공급지 조성, 대륙침략을 위한 경제적·군사적 기지구축에 있었다.
결국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형적인 식민지경제구조로 편성되었다. 그 결과 한국민의 생활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춘궁민·토막민·화전민의 존재를 통해 입증된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일본의 침략에 맞선 항일독립운동은 각계각층에서 전개되었고, 또한 날로 심화되었다. 3·1운동 이전 비교적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운동형태를 취하였으나,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운동이 점차 조직화된 운동형태로 발전되었다.
특히, 일제의 대륙침략기인 1930년대 이후부터는 각종 사회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지하운동으로 전환되고 급진사상운동과 연계를 맺으면서 질적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중 사형을 포함한 군율(軍律)을 한국 전역에 적용시키고, 군의 시위하에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민의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항일운동은 더욱 빈발하였다. 우선, 궁정 및 정부 내부에서의 반대를 비롯하여, 유생의 반일운동, 문명개화운동 등이 일어난다.
① 무장항일의병: 정부 고관들과 유생들은 모두 유교질서 내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들이 취한 항거형태는 각기 상이하였다. 정부 고관들 가운데 일부는 국왕에 조약폐기를 상소하고 자결하는 등의 소극적인 반대형태를 취하였던 데 반해, 유생들은 폭력 등의 형태로 훨씬 적극적으로 항거하였다.
국권 상실의 과정이 진행되는 때 직접적이며 가장 격렬히 일본에 항거, 투쟁한 민족세력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운동이었다.
1905년에 일어선 의병은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곧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도로 쉽게 퍼져갔으며, 1907년에는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의 강제해산이 강행되자 이에 반발한 군중과 군인들이 의병투쟁에 합류하였다.
이후에 전개되는 의병운동에는 유생이나 해산을 거부한 군인뿐 아니라 농민·시민·학생·관리 등 광범위한 층이 참가하였고, 특히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이 이끈 부대는 국권상실 이후까지 계속 싸웠다. 이들의 의병봉기의 계기는 각기 다르지만, 반일을 목표로 한 무장투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의병은 일본인과 일진회 회원 등의 대일협력자를 살상하는 한편, 일본군 및 일본군용시설을 파괴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의하면, 1907년 8월에서 1911년 6월까지 의병과 일본군 수비대·헌병·경찰이 충돌한 횟수는 2,852회였고, 의병수는 불확실한 통계로도 약 14만 1818명이나 되었다.
일본군대의 현대식 무기와는 겨룰 수 없었던 의병은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철저히 진압되고, 잔여 투쟁세력은 나라를 떠나 북상하여 그 투쟁무대를 만주지방으로 옮기고 말았다.
비록, 의병투쟁이 1908년을 정점으로 수그러지고 말았지만, 한국민의 민족적 연대감을 강화시켰고, 시베리아·간도 등지로 이주한 무장세력은 그 뒤 오랫동안 광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② 애국문화계몽운동: 국권상실에 대한 비통한 생각은 이른바 근대적 교육 및 산업발달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문화계몽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국권상실의 원인을 국력이 보잘것없이 쇠미했던 탓이라고 규정하고,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실력배양과 인재양성이 급선무라고 인식한 이들이 전개한 대중운동이었다.
의병투쟁이 무력으로 일본과 정면충돌하는 국권회복운동인 데 반하여, 애국문화계몽운동은 언론·교육·출판 등의 활동을 통하여 민중의 애국정신 함양과 국력배양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는 운동이었다.
이 둘은 그 지도세력면에 있어서도 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데, 애국계몽운동의 지도계층은 의병투쟁의 경우와 같이 유생 출신이 아니라 주로 기독교도와 민족자본가 층이었다.
1905년을 계기로 국정개혁과 민권신장을 요구하던 독립협회운동과 맥을 같이 한 대한자강회가 1906년 윤치호 등에 의해 결성되는 것을 비롯하여, 봉건제에 반대하여 입헌정치를 표방한 헌정연구회가 설립되고, 이어 신민회·흥사단·서우학회·한북흥학회·기호학회·호남학회·면학회 등 각종 계몽문화단체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이들은 『대한매일신보』·『조양보』·『대한민보』 등의 신문이나 『서우』·『자강회보』·『한반도』 등의 기관지를 통해 계몽선전에 힘씀으로써 매국적 어용단체인 일진회 등과 대항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국의 역사연구와 교육이 애국정신을 배양하는 것으로 보아 『대한역사』·『동국근사(東國近史)』·『대한지지(大韓地誌)』·『을지문덕전』·『이순신전』 등을 출판하였다.
애국계몽단체들은 공통적으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내세웠는데, 그 운동형태는 광범하며 다양하였다. 교육운동, 출판운동, 민족어를 확립하려는 국문운동,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여권운동, 자주독립 촉진을 위한 국채보상운동 등이 주된 활동내용이었다.
자주적 개화를 실현하기 위해 봉건적 유교교육 대신에 신교육실시가 불가피하다는 신교육운동은 개화운동 중에서도 일찍부터 제기된 문제였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이 세계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던 개화운동은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개화를 세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 중 정치적·경제적 개화는 주체적·객관적 제반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룰 수 없었지만, 교육적 개화는 급속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민권적·민족적 정치투쟁이 관권의 탄압을 받아 무산되자, 흩어진 민족운동세력은 여전히 제도적 통로로 열려 있던 교육이라는 비정치운동영역에 자체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곧 구국교육으로 이어졌다. 즉, 민간 주도로 설립된 사립학교는 1910년 일본에 강점된 이후에도 황민화, 즉 동화교육에 대한 저항거점이 되었다. 조선통감부는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을 보안법·신문지법·사립학교령·출판법 등으로 억압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거사가 있은 뒤 그의 동생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에 세울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조달공작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안 일본 관헌은 안악우체국 습격사건을 날조하여, 1910년 김구(金九)를 비롯한 160인을 붙잡아 사건화하고 안명근을 무기징역에 처하였다.
또한, 안악사건을 전초로 하여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함으로써, 신민회 600여 명을 체포하고 이 중 윤치호 등 105인을 유죄판결하였다. 이것이 세칭 신민회의 ‘105인사건’이었다.
신민회는 애국계몽운동단체 가운데 유일한 비밀결사단체이며, 또 정치운동과 무장저항운동을 함께 추진하던 민족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른바 ‘105인사건’은 꽤나 서툰 하등경찰수법이기는 하지만, 문화계몽운동의 막강한 세력을 의식한 데서 빚어진 것이었다.
현직 육군대신 데라우치 대장이 조선총독을 겸임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강점 이후 일제지배의 특징은 종전의 군사적 지배를 강화하여 제도화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한민족을 완전한 군사적 지배하에 두고 헌병을 앞세워 식민지정책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식민지경영의 기초공작의 하나로서 2,000여 만엔의 예산을 투입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인 사법상의 권리로서 토지소유권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토지는 왕실·궁원·관청·서원·양반 등에 속하였는데, 그들은 토지에서 수확만을 취하고 관리는 마름에게 맡기고 있었고, 사실상의 토지경작자는 노비 또는 무권리의 상민이었다.
당시 토지소유를 증명하는 문서나 기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면적단위나 토지경계도 모호하였다. 더구나, 문중이나 마을의 공동소유지가 많았는데 이럴 경우에는 소유자를 찾아내기조차 어려웠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일제는 사실상의 경작자인 농민이 점유했던 토지의 상당 부분을 국유지로 편입시켰고, 나중에 그것을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지주에 염가로 불하하였다. 또, 일부 토지를 귀족과 관료의 소유지로 확정함으로써 그들에게 마을소작료를 보증해 주어 친일세력을 키워나갔다.
한편, 농지보다도 소유권이 더 명백하지 않은 많은 임야를 국유화하여 일본인에게 대여한 뒤 다시 그들에게 불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으로 많은 토지 및 임야가 넘어갔다.
그 반면,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생활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되거나 도시의 토막민 또는 산속의 화전민이 되었고, 일본·만주·시베리아 등지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일본은 1910년 12월 「회사령」을 공포하여, 한국에서 회사를 설립하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은 민족기업의 성장을 저지함과 동시에 일본자본의 진출을 도모하고자 취해진 폭정이었다.
더욱이 1910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공립보통학교교육에서는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한글교육을 제한하는 대신 수신(修身)과 일본어를 강제로 가르치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해외로 망명한 한국인들은 그곳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우며 신문을 만드는 등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북간도·만주일대 등이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이들 지역에서는 비교적 조직적인 무장항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는 특히 시베리아에 있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고자 출병하였지만, 1918년 8월 완전히 패전하고 만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쌀소동이라는 민중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한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나 도시빈민은 높은 물가로 인해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할 때, 밖으로는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였고, 안으로는 민주주의사상이 팽배하였는데, 이러한 내외정세의 변화가 자극이 되어 도야마현(富山縣)에서 시작된 쌀소동은 급속히 전국에 파급되었다.
그 결과 데라우치 내각이 붕괴되고, 일본은 노동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은 재일조선인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아울러 국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던 사회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는 민족적 요구를 일체 금지하여 억압하였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하였지만, 이것은 오히려 한국인의 저항을 더욱 키워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토지조사사업의 완료와 함께 이러한 저항의식이 폭발하여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펼쳐진 것이다.
재일한국인 유학생은 1909년 동경(東京)에서 대한흥학회를 결성하고 일제강점에 반대하는 등 민족운동의 담당자로서 활약하였다. 쌀소동이 일어날 무렵, 일본에는 약 800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는데, 1918년 말부터는 그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1919년 2월 8일 최팔용(崔八鏞)의 지도 아래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약 200명이 참가한 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운동의 산파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유학생들은 영·미가 일제의 한국강점을 솔선하여 승인한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요구하였으며, 이 정당한 요구에 일제가 불응할 때는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비록, 이 대회는 일제관헌의 탄압을 받고 지도부는 붙잡혔지만, 집회와 체포에 대한 항의는 계속되었고, 동경에 있던 약 600여명의 유학생 가운데 절반이 귀국하여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월 2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당했던 고종이 일본인 의사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국민의 고종에 대한 애도는 곧바로 망국에 대한 슬픔, 일제에 대한 저항감,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전이되어 고종의 장례식인 3월 3일을 앞두고 3·1운동으로 폭발되었다.
3·1운동은 독립을 요구하는 전국적 규모의 항일운동인 동시에 공화주의 민족운동으로, 당시의 사회구조가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 국내적 요인을 살펴보면,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식민지적 불평등의 정치·사회 체제는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착취민족과 피압박민족간에 대립되는 이해관계 및 그에 기초한 갈등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한 각종 개혁 등의 조처로 사실상 소수 친일적 이권집단을 제외한 민족 전체가 정치적 무기력, 경제적 궁핍, 문화적 차별 등 착취와 수탈을 공통적으로 경험하였으며, 또한 외세에 대한 저항과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를 일깨워 온 민중적 사회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적 찬탈과정은 민족적 저항의식을 더욱 키워갔다.
한편, 국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과 식민지적 차별대우에 대한 항의와 쟁의 등의 움직임은 국내에 한층 긴장을 야기시켰다. 그런가 하면, 국외에서는 중국의 신해혁명, 소련의 사회주의혁명 등 제1차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와 식민지문제해결에 대한 민족자결론이 한민족에게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제반 요인이 기반이 되어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공공장소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의 취지에 대한 연설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그리고 시위하는 등의 집합적 표현을 통해 민족독립에의 염원과 의지를 다짐한 것으로서 일종의 정치적 광장으로 동원된 형태의 운동이다.
이러한 형태의 초기운동과정에 있어서,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사회세력은 손병희(孫秉熙)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 및 기독교·불교 등의 종교계 지도자였으며, 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학생들이 주도세력으로 부가되었다.
대표 33인과 그 운동세력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 선언문은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독립이 민족의 염원임을 천명하고, 조선독립이 세계평화에 중요한 계기임을 강조하여 일제가 물러갈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선언문의 서명자 33인이 3·1운동의 산파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여도는 매우 큰 것이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제국주의의 생리는 스스로 물러나 타민족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선언과 같은 도덕적 낭만에 빠져 그것에 의해 식민지 지배가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약소민족의 불굴의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윌슨(Wilson,J.W.)의 민족자결선언이 자기 기만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미국이 자신의 식민지인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의 민족자결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였던 것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운동의 초기과정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배포하고 시위를 주동해 온 천도교도·기독교도 및 학생세력이 계속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나, 3·1운동의 사회적 토대는 재빨리 확대되어 운동의 주된 구성세력이 교도 밖으로까지 확산·확대되었다.
즉, 종교단체라는 기존 조직의 대표와 이러한 조직에 연결된 사회세력으로부터 소단위조직체성원인 노동자집단으로 뻗어나가 조직력의 정도가 낮은 소상인과 농촌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대해 나갔다.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기반의 확대는 다양한 계층의 참여라는 범위확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행위양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강령의 기본이 되는 비폭력적 방법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시위군중을 끌어모으고 기반이 확대됨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그 주된 원인은 일본 관헌의 무절제한 탄압과 잔인한 폭력행위로 인하여, 더 이상의 비폭력평화시위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3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운동발생건수는 3,200여 건, 검거자 수는 1만 525인에 이르렀고, 판명된 사망자 수는 7,907명으로 실제로는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부상자 수는 1만 5961명이나 되었다.
한편, 검거된 자들의 종교별 구성을 살펴보면, 물론 무종교자가 가장 많지만 천도교와 기독교의 비중이 커서, 종교가 3·1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직업별 구성을 살펴보면 농업이 압도적으로 많고, 기타 교사·학생·상공·어업이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로써 3·1운동의 주력층이 농민임을 알 수 있다.
피검거자의 연령분포를 보면 30세 이하와 30∼50세의 비중이 같아 청장년층이 큰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식민지국가에서와는 달리 우리의 경우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자본의 활동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완전식민지체제하에서 민족자본이 형성, 발전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반침략뿐 아니라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들어 민족운동의 질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3·1운동은 자체의 민족적 역량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운동이었다. 또한,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이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한 왕조적인 것인 반면, 3·1운동은 반봉건 및 민주화를 목표로 한 민중적인 운동이었다.
이처럼 운동의 형태 및 그 목표에 있어서 질적 전환을 가져와, 3·1운동 이후 민족독립운동이 소작쟁의·노동쟁의·학생운동·공산주의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3·1운동은 독립운동이었으므로 당연히 정부수립이 계획되었다. 처음은 서울과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상해의 세 곳에서 각기 따로 정부수립이 계획되었는데, 근대화의 기치 아래 모두 공화주의운동으로 추진되었다.
운동의 결과, 비록 독립을 되찾지 못하여 한반도 안에 공화주의국가를 수립하지는 못하였지만,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의를 토대로 구성된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 여타 독립운동단체가 이에 통합, 동조하여 자연스럽게 공화주의정부로서 탄생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8·15광복까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구로서 법통을 이어왔다. 그러나 한때 미국의 힘을 빌려 민족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던 임시정부의 계획이 좌절되자, 분열을 겪기도 하였으며, 그 뒤 김구(金九)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 한편, 1920년 상해 고려공산당이 조직됨으로써 민족독립운동은 공산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의 한계를 깨닫고, 통치방침을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경찰제도·교육제도 및 행정제도 분야에서 약간의 개혁이 추진되었으며, 지금까지 전면적으로 금지되던 한글 신문·잡지의 발행이나, 집회·결사도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나마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타 잡지 등이 우리말로 발간될 수 있었고, 조선노동공제회를 비롯한 사회단체도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의 큰 저항에 부닥쳐 민족말살정책과 식민지수탈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데서 비롯된 기만적 회유책에 불과하였다. 우리 민족을 원천적으로 말살, 동화하려는 일제의 군사적 무단지배의 근본의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3·1운동으로 악화된 국제여론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된 문화통치는 오히려 종전보다 한층 더 심화된 한민족의 예속화정책이었다.
문화통치 정책하에서 우리 민족을 더욱 궁핍하게 만든 것은 1920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제의 국가자본을 한국의 농업부문에 투입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그 증대분을 자국으로 반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 계획이 실시되자, 반봉건적인 고율소작제도하에 왜곡된 상품경제가 농촌에 투입됨으로써, 결국 일본으로의 쌀수출은 증대되었지만 많은 빈농과 이농이 산출되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우리 민중의 긴박한 상황을 악용하여 일제는 일본에로의 도항정책을 조절하면서 일본자본이 필요로 하는 값싼 노동력을 수시로 공급하여 공업화정책을 손쉽게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1920년대는 일제의 회유물인 문화정치와 사회주의사상의 유입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좌우익간의 이데올로기적인 분열이었으며, 이것은 실천적인 면에서 두 형태의 시행착오로 점철되었다.
그 하나는 무장투쟁방식인데, 이는 3·1독립선언의 이상주의와 안이성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운동형태의 본류는 의병의 계보를 이어 일찍이 1910년대부터 만주·시베리아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항쟁을 전개한 조선항일독립군에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1920년경에 정점에 달하였는데, 1920∼1925년 사이에 무려 3,929회나 일본군과 싸웠다. 무장항쟁을 통한 운동방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회주의운동 등의 흐름 속에 수렴되었다.
다른 하나는 3·1운동의 성과로서 확대된 국내 합법운동의 영역을 이용한 문화운동이다. 문화운동은 대중에 밀착하여 다각적인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새로 창간된 민족지인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을 통한 계몽선전운동·농촌계몽운동·민립대학 설립운동 및 민족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물산장려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운동을 조직, 주도하기 위하여 조선노동공제회 등 각종 사회단체가 출현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1927년에는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화통치 이후 실질적인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에 소작쟁의나 노동쟁의가 빈발하였다. 농민운동은 처음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소작인부 내지 조선노농총동맹 산하에서 전개되었지만,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으로부터 분리되어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됨으로써 농민운동은 한층 더 앙양되었다. 특히, 1927년 말 전라북도 옥구군 소재 일본인 농장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는 유명하다.
또한, 1929년 한국노동운동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1926년 4월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하였는데, 그의 장례일인 6월 10일 서울·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6·10만세사건으로 일컬어지는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학생들도 식민지교육에 반대하여 동맹단체를 만드는 등 민족독립운동의 대열에 가담하였다. 특히, 1929년 11월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모욕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다음해 4월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는 등 일제의 탄압이 날로 가중되는 가운데, 조선공산당은 분파에 의한 분열로 1928년 8월에 해산되었고, 신간회도 결국 1931년 해산되고 말았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일본에도 파급되어 수출의 격감, 기업도산, 공황의 농촌 침투, 노동쟁의·소작쟁의 등으로 일본경제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공황은 자연히 우리나라와 중국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공황에 의한 타격과 손실을 우리나라에 대한 수탈강화로 충당하려는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 때문에 한국근로자의 생활핍박은 매우 심각하였다.
1930년 가을 농산물 가격은 전년의 거의 절반으로 폭락한 데 반해, 소작료·조세·수리조합비 등은 오히려 인상되었다. 더욱이 화학비료를 비롯한 공산물 가격과 농산물의 협상가격차는 농민의 몰락을 촉진시켜, 그 결과 부재지주가 증가하였고, 자작 겸 소작이 감소하였으며, 소작과 화전민이 격증하는 한편, 일부 지주에의 토지집중이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근로자도 실업·임금인하 등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몰락한 적지않은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일제는 이들 조선농민과 중국농민을 대립시켜, 1931년 7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조작함으로써 만주침략의 구실을 삼았으며, 뒤이어 1931년 9월 18일 중국군이 류타오거우[柳條溝]에서 만철선로를 폭파했다는 트집을 잡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은 중국에서 만주와 몽고를 분리시켜 일제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서,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날 무렵부터 일본자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공업화정책이 추진되었다. 일찍이 1920년의 「회사령」 철폐 이후 일본자본의 진출은 증가하였지만 그것은 주로 농업이나 상업에 투자되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후 일본자본은 광공업부문으로 급속히 진출하였다. 이는 공황의 타격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자본의 요구와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군수공업과 관련한 금속공업과 화학공업을 일으키는 동시에, 직접·간접으로 병기생산에 소용되는 지하자원개발을 도모하였다. 이와 같은 파행적 공업화의 결과로 비록 공장노동자 수는 증가하였으나, 이들은 민족차별적 노동정책하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수탈당하였다. 이에 따라 소작쟁의와 더불어 노동쟁의가 급격히 늘어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동만주일대와 간도를 중심으로 무장항일투쟁이 새로이 앙양되고 있었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은 구미열강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강력한 반대에 봉착하게 되었고, 특히 미국과의 대립으로 인하여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일제는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또다시 민족말살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식민지수탈정책을 강화시켰다.
일제는 한국인을 ‘충량한 신민’으로서의 식민지 노예로 만드는 것이 학교교육의 목적임을 명백히 하고, 이른바 황민화라는 구호 밑에서 신사참배, 1면 1신사 설치, ‘황국신민의 맹세’ 등을 제정하여 식민지정책을 강행하였다. 이어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한편, 1938년 3월 새로운 「조선교육령 」이 공포되어 우리 역사는 물론이요, 우리말 교육이 금지되었다.
더욱이, 1936년 『동아일보』의 무기정간을 비롯하여, 그들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는 한국인 언론기관과 문화단체는 가차없이 탄압받았다. 한글을 말살하고 민족문화운동을 뿌리 뽑으려 하였던 일제는 1942년 10월 순수학술단체로서 『한글대사전』을 편찬하던 조선어학회 회원 다수를 검거하는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제2차세계대전이 본격화하자, 그들은 공출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쌀 등 식량과 각종 농산물을 공출시킨 데다가, 절의 종이나 가정의 식기에 이르기까지 금속제품은 모두 탈취해 갔다.
나아가 일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1938년부터 시행해 오던 지원병제도를 1943년 징병제도로 바꾸고, 1944년 1년간에 20만 6517인을 징집하여 패망할 때까지 각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강제노무동원제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노무자·군속, 심지어 위안부로 강제연행하였다. 1944년까지 일본·사할린·남양군도에 강제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는 44만 4306인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저항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그칠 줄 몰랐다. 국내에 있어서 표면화된 항일운동만도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살사건, 1937년의 수양동우회사건, 1942년의 조선어학회사건, 1945년의 부민관투탄사건(府民館投彈事件) 등이 있었고, 그 밖에 학도병·징병의 거부와 탈출,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거부, 노동자들의 태업·도주 등의 항일활동이 지속되었다.
사회주의운동의 기수였던 조선공산당 및 신간회는 해산되었지만, 증가되는 노동자와 빈곤화된 농민을 기반으로 공산주의운동이 지속되었고, 농민운동·노동운동을 비롯한 모든 비합법적인 사회운동은 좌경화·지하화되었다. 그리고 황민화교육과 군국주의 훈련에 반대하는 학생들도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만주나 중국대륙에서는 일본군국주의자와 그 밀정에 대한 테러, 만주사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중공의용군에의 참가 등을 비롯하여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만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동만항일유격대·남만항일유격대 등에 의한 항일유격전이 빈발하였으며, 조국광복회 등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중연합전선의 형성을 주장하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중국군과 함께 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그 밖에 중국의 지원을 얻어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 1942년 김두봉(金枓奉)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독립의용군의 항일투쟁이 있었다.
또한, 미국의 하와이에서도 1941년 해외한족대회가 열려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의 지원, 독립자금 모금 등을 결의하였다.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 등이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해외독립운동단체와 연락을 취하면서 광복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민족의 줄기찬 항일독립투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광복의 직접적 계기는 1943년 ‘카이로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공약했던 연합군의 승리에 따라 일제가 붕괴된 데 있다. 외세에 의한 광복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동시에 국토분단과 외세개입에 의한 종속화라는 부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녔던 우리의 광복은 곧 이어 1945년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국토분단이라는 새로운 비극을 낳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여운형·김구 등이 암살당하고,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고 지리산공비토벌 작전 등이 감행되어 사회를 더욱 혼란시켰다. 더욱이, 일제의 잔재세력이 온존하여 6·25전쟁 이후 1950년대 전후복구를 위한 미국의 무상원조와 결탁함으로써, 막대한 부정을 저질러 사회를 극도로 부패시켰다.
미군정하에서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됨으로써 민족주의정당·혁신당·공산당 등 각종 성격을 띤 정치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이때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李承晩)이 돌아왔는데, 이들은 미소 양대세력을 업고 공산주의운동 아니면 반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모든 사회단체들도 적색계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민족계의 대한독립촉성노동연맹(대한노총)처럼 공산주의단체 아니면 반공단체로 분열,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학생·노동자·농민·여성 등이 참여하는 사회단체와 그 운동도 각기 좌우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미소세력을 배제하고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이른바 민족자주화세력이 설 땅이 없었다. 그 결과 장차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합법화될 수 있었던 민족진영의 사회운동은 반공투쟁적 성격은 강하였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운동이 정부지원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부와의 내적 연계 및 야합이 문제시되었고, 그로 인하여 각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운동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큰 한계를 지녔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전통은 공산주의세력이 완전히 일소된 정부수립 후에 사회운동을 정상화시키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꾸준히 커가는 대중을 대변하지 못하고 유리되어 감에 따라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대한노동총연맹의 어용화에 반대하여 1959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가 노동운동의 정상화라는 기치 아래 조직된 바 있다.
한편, 정부수립 후 미국원조와 관련된 부정부패가 극도로 자행되었고, 이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나, 그것은 극히 미약하며 또한 지속적이지도 못하여 정권에 의해 묵살되고 억압당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하에서 극도에 달한 부정부패는 마침내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하여 4·19혁명을 초래하였다. 4·19혁명은 반침략·반봉건이라는 3·1운동의 정신이 광복 후에도 여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4·19 이후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된 장면(張勉)의 민주당 정부는 당내 파벌투쟁, 그가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실패, 어려워지는 국민생활, 남북교류를 내세우는 민중운동 등에 몰려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무너졌다.
5·16군사정권은 반공의 기치 아래 사회당·통일당과 『민족일보』 등을 없애고 통일논의자들을 극형에 처하는 등 혁명세력을 일소함과 동시에 조국근대화를 앞세워 대외의존적인 수출을 통한 중상주의정책을 취하였다.
그리고는 1960년대의 고도성장 위에서 1970년대에는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표방하여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추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유신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고도성장과 중화학공업화과정에서 대외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그 내적 모순은 날로 가중되었다. 저임금·저곡가를 바탕으로 한 중상주의적 개발정책은 심각한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제기시켰으나, 이를 대변할만한 정치세력조차 없는 상황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극도로 억압되었다. 물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소임을 다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회운동의 중추세력이 되어야 할 노동조합조직 등이 미약해짐에 따라, 이를 대신하여 학생·지식인·종교인·재야인사 등이 앞장서게 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농민회·가톨릭농민회·가톨릭노동청년회·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등이 결성되었다.
사회운동이 정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의 정당한 요구가 공개되지 못하고 불평불만으로 누적되는 상황에서 학생·지식인·종교인과 재야인사들은 사회의 저변층과 서로 연합하여 대외의존성 탈피, 민주화, 복지지향적인 안정·성장 등을 내세워 극한투쟁까지도 감행하였다.
특히, 학생운동은 학내문제와 아울러 반탁운동, 4·19혁명,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와 같이 중대한 민족적 과제가 시련에 처할 때마다 이에 대한 발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회운동이 양성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는 가운데, YH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부마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일어나 급기야는 10·26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정국이 바뀌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의 국가주의시대에 일어난 사회운동은 한편으로 억압된 상태하에서 어용화된 합법적인 조직활동으로 전개되고, 다른 한편으로 대중을 대변하는 비합법적인 비조직활동으로 전개되는 이중구조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산업화에 따른 모순에서 일어나는 근대적 사회운동이 정상화되지 못한다면, 산업사회의 모순은 가일층 심화되어 순조로운 산업사회의 운영이 불가능하므로 사회운동의 올바른 진로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12·12사태 및 1980년 민주화의 봄에 대한 억압을 통해 제5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 집권과정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과 권위적 지배체제에 대한 전국민적 거부감은 사회운동의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즉 집권과정에서의 폭력성은 사회운동세력과 집권세력간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고 이는 체제전복운동으로 나아가도록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이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점, 노동운동의 무력화 정책 강화는 반미(反美)의 구호와 계급의식적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사회운동은 체제의 직접적인 전복을 운동의 목표로 하였고 학생운동이 전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새롭게 등장한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은 정권의 전복을 목표로 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 주목할만한 현상은 학생 및 지식인들이 대량으로 노동자 및 민중들과 연대를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이미 1970년대의 야학운동이나 현장투신활동에서 시도되었던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대량 현장투신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노동운동이나 여타 사회운동이 스스로의 조직화 능력을 갖지 못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은 이념에 있어서 계급적 시각과 민족주의적 시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는데 특징이 있다. 과거의 민족주의가 단지 민족통일과 국내의 반통일, 분단세력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지니고 있었음에 반해 1980년대 사회운동은 반외세, 즉 반미의 구호를 내걸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 및 중간 계층의 확대, 중간층 중심의 탈물질적 가치의 확산 등의 상황 속에서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 및 권위적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6월 민주화투쟁은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 민주화를 쟁취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과거의 사회운동과 달리 중간 계급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6월 투쟁에 이어진 7, 8월 노동자 대투쟁기간 동안 3,000여 건이 넘는 쟁의가 전국의 사업장에서 발생하였고, 당시 사용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 명의 37%인 122만 명이 쟁의에 참가하였다. 노동자대투쟁은 단순한 임금투쟁이 아니라 6월항쟁에서 나타난 정치적 민주화, 사회의 민주화로 전화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어쨌든 1987년을 기점으로 사회운동은 계급연합적 사회운동과 자유화 및 민주화를 통한 시민사회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990년대에 들어서는 환경운동, 여성운동, 반핵운동, 인권운동, 소비자운동 등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더불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와 연대,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전국 규모의 운동단체가 결성되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1987년 이전의 사회운동이 학생과 종교 등을 핵심세력으로 하여 하향적인 방식의 체제변동적인 사회운동이었다면 1987년 이후의 사회운동은 다양한 영역과 집단이 상호연대하고 지식인 집단이 촉매역할을 하여 사회를 밑으로부터 형성해 가는 풀뿌리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한 다부문화, 다세력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신사회운동은 개인의 자율성 보장, 권리찾기, 삶의 질 향상, 생활양식의 다양성 등 사회문화적 목표를 추구하는 풀뿌리, 네트워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은 강력하며 권위적인 중앙집권적 국가의 전통, 남북분단구조, 연고주의 및 지역주의에 따른 시민사회운동의 분열과 비합리성, 복지국가의 기반 취약, 시민운동의 하부구조 및 풀뿌리 운동의 저하, 지역중심의 사회운동 부재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더구나 시민 사회운동의 정치지향성은 김대중 정권 이후에 정체성 위기를 맞이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따라서 외형적인 시민사회단체의 증가와 성장에도 불구하고 내적 성숙을 통한 사회적 세력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운동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앞을 헤아려보면서, 현시점에서 사회운동이 나아가야 할 당위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할 때, 그 결론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민주적 사회운동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후진국 내셔널리즘(민족주의)과 관련시키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내셔널리즘이란 근대국민국가의 성립·유지·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적 의식·이상·행동 등의 총체를 말한다. 네이션(nation)이 국가·국민·민족으로 해석되듯이, 내셔널리즘은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로 해석됨으로써,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복잡성을 드러내고 있다.
서구시민혁명 내지 본원적 축적기의 민족주의는 국가를 내세우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였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절대주의를 취하고, 경제적으로 중상주의를 취하여 외부에 대한 내부적 힘의 통일과 결집을 도모한다.
반면에,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서구민족주의는 국민을 내세워 자기완성을 도모하려는 국민주의적 민족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였다. 여기에서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산업주의를 표방하여 대내적인 힘의 협동을 도모한다. 이러한 서구민주주의의 대외적 확대는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한편,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은 나라들의 민족적 민족주의는 식민지화를 반대하는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이것은 밖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면서 안으로는 낡은 세력과 체제를 물리쳐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피지배적 지위로 인해 민족의식이 급진적이고 치열하며, 민족주의적 내용을 강하게 띤 저항적·민족적 민족주의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을 거쳐 3·1운동, 8·15광복, 1950년대까지의 민족주의를 저항적·민족적·민족주의의 시기로 본다면, 1960년대 이후는 수출·건설을 내세우는 중상주의적·절대주의적인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시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6·29 민주화선언 후 민족주의와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국민주의적 민족주의로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의 자기완성이야말로 민족주의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권위주의, 관주도경제, 적대적 국가안전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후진자본주의 질서를 민족주의 시장경제, 평화적인 국가안정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선진자본주의 질서로 바꾸는 것이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물론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며, 근대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민주화·산업화를 지향해야 하는 민족적 과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분화된 각 계급의 이익보다 외세를 몰아내어야 한다는 민족의 이익이 우선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각 계층의 이익도모를 목표로 하면서도 민족이익이라는 공동목표 앞에서 공동전선을 폄으로써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민족투쟁적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식민지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운동이 미소 양대세력의 개입하에서 추진되었다. 4·19혁명을 거쳐 1960년대 이후의 국가적 민족주의의 산업화과정에서는 급속한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 개발독재와 대외의존적인 수출·건설을 앞세우며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지만, 그 반면에 수많은 사회적 모순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의 누적은 급기야 10·26사태로 표면화되었는데, 이것이 나름대로의 의의를 가지기 위하여서는 국가적 민족주의를 국민적 민족주의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
국민적 민족주의는 민중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여론에 따라 정치가 운영되는 국가를 세우려는 민주화 노력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과제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산업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간접(의회)에다 직접(참여)을 가미하여 내실을 기한 민주정치를 그 내용으로 하며, 후자는 복지지향적 산업화를 내용으로 한다. 또한, 국민적 민족주의는 국제화시대나 세계화시대에 대처하여 세계화의 논리에 따른 개방화에 의한 국제협력으로 국익을 도모하면서 그것의 역기능이 생겨나지 않도록 한국의 논리를 살려 세계의 논리와 조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사회운동도 국민적민족주의의 일환으로서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에 배치되는 독소인 사회적 모순을 배제하는 운동으로서, 그리고 세계화에 대응한 선진자본주의 질서 확립과 그에서 파생되는 모순 시정의 운동으로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사회운동의 형태는 외세침략기의 저항적 사회운동으로부터 경제근대화기의 근대적 사회운동으로 전환된 것처럼, 경제가 보다 발전, 성숙함에 따라 정상화된 민주적 사회운동으로 진일보해야 할 것이다.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체제를 살리는 안전판이다. 만일, 사회운동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모순과 각계각층의 불평불만이 누적되어, 결국에는 체제붕괴의 터전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정상화된다면, 변화와 개혁 속에서 장기적으로는 안정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영국·미국 등을 비롯한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오늘날의 산업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사회운동의 정상화로 사회적 모순을 해소해 나간 데에 있었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은 자립적인 발전에의 의지를 확고히 하면서도 선진국의 귀중한 경험을 충분히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