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바위공원 제4관에는 박동진 명창이 갓을 쓰고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판소리 “변강쇠 타령”을 완창하는 모습의 석상앞에 관광객들은 발길을 멈춘다. “제비 몰러 나간다”“우리것은 소중한 것이여”쿵~떡하는 목소리와 함께 판소리 “흥보가”의 구성진 대목이 흥을 돋군다. 1992년 한 제약회사 광고에 출현해 호탕한 목소리로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인간 문화재 박동진 명창이 2003년7월8일 충남 공주 “판소리 전수관”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87세 특유의 입담과 해학으로 80세가 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다 국악 대중화에 앞장섰던 명창은 “토막소리”위주이던 판소리계에 “완창”이라는 새 바람을 일으킨 한국 판소리의 대들보였다. 1916년 충남 공주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박 명창은 대전 중학교 시절 우연히 당대의 명창이던 이화중선 이동백 등이 출연한 공연을 본후 본인의 말을 빌면 “눈깔이 홀랑 뒤집히는”희열을 접하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춘향가의 대가 정정렬을 찾아 계룡산을 오르고 수궁가의 유성준을 찾아 경주를 찾아 헤맸으며 동편제 판소리 명창 송만갑에게 소리를 전수 받았다. 하지만 그는 판소리계에서 분류되는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은 창조적 개혁자였다. 약관의 나이에 각 계보의 스승으로부터 소리를 전수 받은 박 명창은 20대 후반 무절제한 생활로 목소리를 잃고 만다. 제 소리를 찾기위해 홀로 토굴에 들어가 생쌀을 씹어먹으며 40여일동안 소리만 질러댔더니 얼굴과 몸이 퉁퉁부어 올랐고 “소리독에는 똥물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부친이 가져온 삭은 똥물을 마시고 부기를 뺏다는 일화는 국악계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토굴생활 백일을 꼬박 채우고도 목소리를 찾지 못한 그는 이후 국극단을 따라 다니며 소리 공부에 전념했고 6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직하여 본격적인 판소리에 정진해 마침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게 됐다. 68년 쉰이 넘은 나이로 일생일대의 실험인 “흥보가”완창에 도전한 박 명창은 “말도 안된다”는 국악관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장 다섯시간 반에 걸친 완창 무대를 훌륭히 소화해 냈다. 이후 그는 72년까지 심청가,수궁가,적벽가,춘향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을 차례로 완창했고 당시 잊혀져 가던 판소리는 후배들에게 이어지며 새로운 예술장르로 거듭났다. 73년 “적벽가”로 인간문화재에 오른 후에도 끊임없이 무대에 올라 해학과 재담 때로는 음담패설과 욕설을 섞어가며 대중을 휘어잡던 그는 98년 고향 공주에 “판소리 전수관”을 열어 후학 양성에 매진하던중 눈을 감았으니 본인의 바람처럼 평생 소리꾼으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박 명창 타계 다음날인 7월9일 문화예술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큰바위공원설립자 정근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