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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SF의 명작이 나왔네요~
여러분께 추천해 드립니다!!!
<토토의 천국>(1991), <제8요일>(1996)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 개인의 기억을 다룬 SF 드라마.
3명의 자녀를 둔 보통 사람 네모 노바디는 어느 날 120살 먹은 노인이 되어 2029년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를 지배하는 유일한 질문, 나는 과연 원하던 대로 살았는가? (2010년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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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dsss님의 리뷰입니다]
천천히 얽히고 섥힌 자신의 인생들을 살려보는데
태어나기 전 아기들은 모든걸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망각의 천사가 실수로 지나쳐버리는바람에 미래를 기억하고있다.
기억은 과거의 단어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미래는 이미 기억되고 있는 상태이기때문에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슈퍼에 가는 것 처럼. 공간 차원에서 이동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간 상의 차원에서도 이동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이 일방적인 종속변인이아니라 독립 변인인 것이다.
아이는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엄마와 아빠를 선택한다.
순간의 선택을 돌리기도 하면서 각각의 인생들을 바라보게된다.
우리 세상을 보이는데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차원은 세 개가 있다. 3차원
x축 y축 z축으로 통용되는 점 선 면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적인 개념의 차원이다.
이 각각의 길이차원들은 독립적인 변인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경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정해진 규칙대로 진행되게 만들어진.. 아니 그렇다고 정해놓은
일방적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으로 정해진 시간이..
또한 독립적인 하나의 차원변수라면?
더 깊이있게 물리학적으로 지식이 닿진 않지만.
아인슈타인 이 후 시간에 대한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분명히 시간은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간 또한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를 수 있고 변할 수 있다.
으깬 감자와 섞은 소스를 분리할 수 있고. 물이 거꾸로 솟아오르고
죽었던 사람이 깨어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시간을 평등하게 만들어버리면서
다른 외부 조건의 충족 없이 엔트로피법칙에서 자유로워진 시간을
SF적인 재미있는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영화이다.
우주의 역사를 관찰하면서, 그리고 인류 삶의 경험을 통해
인류가 찾아왔던 경이로운 세상의 규칙들.
이런 것들을 한 번 훑어주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얼마나 흥미로운가? 평행이론? 블랙홀? 화이트홀?
어디까지가 끝이고.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3차원. 시간차원외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차원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쓰고 있는 것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의 선택 또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것 처럼.
힘을 주면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바람을 불면 바람이 불리는 것 처럼.
시간이 가는 것처럼.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방향이며,
모두가 정답인 것이다.
정말 이 세상은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마실 때 쓰는 컵 하나 조차도 가공되서 나오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규칙을 발견하고 정하고. 우리 식탁위에까지 오른 것이다.
우리삶은 이 경이를 즐기면서 살기에도 부족하다.
Life is Wonder-Full ! !
우리는 20초마다 문이 열리는지 모른다.
규칙을 찾기 전까지는 날개를 퍼덕여야 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 규칙도 사실인진 모른다. 또 다른 규칙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새로운 규칙을 찾으려 달리고있다.
간만에 SF의 명작이 나왔네요~
여러분께 추천해 드립니다!!!
<토토의 천국>(1991), <제8요일>(1996)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 개인의 기억을 다룬 SF 드라마.
3명의 자녀를 둔 보통 사람 네모 노바디는 어느 날 120살 먹은 노인이 되어 2029년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를 지배하는 유일한 질문, 나는 과연 원하던 대로 살았는가? (2010년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루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회한과 후회가 많은 사람이란 種에게 널리 읽히는 시다. 이 영화가 시작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 같다. 그렇다면 한번 다시 해보자는 거다. 그러면 과연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살펴보자는 이야기다. 감독이 이야기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자못 궁금해지는데 일단 감독의 제안에는 귀가 솔깃해 진다.
이런 영화를 보노라면 확실히 영화라는 매체만이 효과적으로 묘사해낼 수 있는 특별한 분야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아니면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분야를 선택하는 영화감독은 문학이나 기타의 원작을 각색하여 작품의 소재로 삼는 감독에 비해 영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깊이, 그리고 예술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독창성 면에서 더욱 출중한 사람이다. 이 영화를 보면 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면 <미스터 노바디> 같은 작품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구성해낼 수 있었을까...라는 강한 의문이 든다. 재해석도 창조적일 수 있겠지만 분명히 독창성에도 서로 다른 품격과 지위가 있을 것이다.
(아래의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미도 뜻도 없이 다만 영화감상을 방해하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118살 노인은 아마도 주인공이 써내려가던 SF소설의 연장선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다. 118살 노인은 자신의 나이를 34살이라고 하며 영화는 그 무렵(34) 니모의 시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동차가 강물로 추락하는 사건에서 그는 아마 숨을 거두었을 거다. 영화에서 40대 50대 60대... 니모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무언가 오해로 니모는 총을 이마에 맞고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시체의 이마는 깨끗했다. 하긴 이 부분은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다. 어떻든 주인공 니모는 34살 이상을 살지 못했다. 118살의 니모 노바디는 다른 차원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니모와 니모 노바디로 나뉘는데 니모는 실존의 니모이고 니모 노바디는 니모가 쓰던 SF소설에서 연장된 니모의 자아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에서 자아를 동면시킨 니모는 118살 무렵에 니모 노바디로 깨어나 과거의 자아를 회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안타까운 사건과 사연들은 다른 방향으로 리플레이가 되는데 자동차가 추락하여 물속에 갇혀 가라앉는 장면은 리플레이가 없다. 노인이 후반부에 발언하듯 이 모든 이야기는 어떤 과자를 먹을까 동전을 쥐고 고민하던 어린 소년, 혹은 엄마를 따라갈까 아빠에게 남을까 고민하던 그 시절 어린 아이의 곤란한 선택의 기로에서 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엄마냐 아빠냐를 고민해야만 했던 그 시절 부터 니모의 자아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뛰어가며 뒤를 돌아보는 니모 영화는 주인공의 소설과 실제의 사건들이 교차로 묘사되며 실제의 사건 조차 주인공의 후회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는 관계로 영화의 흐름을 종잡기가 쉽지 않다. 엄마를 따라간 니모와 아빠와 남은 니모, 엄마를 따라간 니모가 만나는 여자친구는 안나, 아빠와 남은 니모가 만나는 여자는 앨리스, 앨리스가 찬 니모가 만나는 여자는 진, 그리고 오토바이 사고로 계속 병상에 누워 있는 니모도 있다. 118세의 니모 노바디가 죽기 전에 부른 이름은 안나였다. 안나는 엄마와 남은 니모의 여자 친구 이름이다. 그리고 SF소설은 오토바이 사고로 병상에 누워있거나 앨리스와 살고 있던 니모의 소설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니모의 자아들을 상호 배타적이거나 독립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니모와 안나는 SF소설과 현실에서 초면으로 인사하는 사이로도 나오고 서로 운전하다가 모르고 얼핏 스치는 사이로도 나온다. 어느 순간 분리된 니모의 자아들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어느 니모가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라거나 그러한 분별을 유지한다면 이 영화의 이해에 별 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별로 뒤돌아보지 않거나 미래에 대한 야무진 청사진에 대한 걱정 혹은 불안으로 울고 웃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현실은 지금 보다 훨씬 간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적으로 그런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동시에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드러내는 데엔 영화에서와 같이 가능한 변수에 따른 사건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전개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다. 현실적으로 시간은 절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이다. 바쁜 시간, 아쉬운 시간은 빨리 가고 지루한 시간, 괴로운 시간은 더디 간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이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시간은 뒤로 갔을 뿐만 아니라 순간에 따라 빨리 가기도 했고 멈추었으며 때로는 더디 가기도 했다. 아울러 인간에게 시간은 거리 혹은 속박이며 무거운 심리적인 멍에이기도하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가 10일 공개한 나선은하'NGC4911'의 사진. 이 은하는 9900만 광년거리에 있으며 1만1000개 은하가 모인 '머리털자리 은하단(Coma cluster)'에 위치해 있다. 나사는 노출시간을 길게 한 다음 허블우주망원경을 통해 촬영했다고 밝혔다. 9900만 광년은 시간이기도 하고 거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의 관념으로 실체가 잡히지 않는 거리다. 언젠가 인간의 관념으로 이 거리의 실체가 윤곽을 드러내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저 빛은 이미 9900만년 전에 광속으로 퍼져 우주에 뿌려진 시간의 자취일 뿐이다. |
시간의 절대적인 구속에서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탈피해 보자는 즐거운 실험이 이 영화의 목적이다.
처음 영화의 시작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하나의 실험이다. 겉으론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비트는 실험이다. 그래야 여러 삶을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험의 와중에 우리는 시간이 사람을 상대로 얼마나 장난질을 하는가, 혹은 사람이 시간에 얼마나 잘 놀아나는가를 알게 되었다. 상대적인 시간을 절대적으로 고정시켜 끊임없이 현재의 물결로 흐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다른 동물들은 할 수 없는 일이며 오직 사람만이 흐르는 물을 고인 물로 만들어 썪게 만든다. 인간의 마음이 자신만의 고립된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가 혼란스러웠다면 당신은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니모의 모습이 가장 좋았는지,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 보니 어떤 모습이 가장 보기 좋았으며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어느 삶이 가장 근사했는가?무엇이 달라졌는가? 배우자가 달라지기도 했고, 직업이 달라지기도 했다. 배우자에 따라 아이들이 달라졌으며 수영장이 딸린 집에 살거나 없는 집에 살기도 했다. 직업이 달라졌어도 주인공의 시간이나 천체, 우주, 물리학에 대한 관심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사는 방식 뿐 아니라 죽는 방식도 달라졌다. 지금 시점에서 인간 수명의 잠정적 최고치라고 볼 수 있는 118세를 기록하고 숨을 거둔 노인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비명횡사다. 총을 맞고 죽은 니모, 강물에 빠져 죽은 니모도 있다. 빅 크런치가 시작되어 우주에서 폭발사고로 죽은 니모도 있네. 니모 노바디 외에는 제대로(?) 죽은 사람이 없다.
어느 것이 가장 좋았는가?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이런 질문이 부질 없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의 선택은 서로 다른 가능성과 접촉하여 다양한 파장을 만들어 낼 뿐이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쁘다는 것과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내 생각에는 별로 크지 않았다. 다른 길을 갔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우리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실제 보다 더 크게 아쉬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음악(http://cyo_nya.blog.me/60112609102)이 찬란했다. 살아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축복이다. 이 영화에는 주옥같은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이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전 유니콘과 함께 나오는 모습, 아이들의 인중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자레드 레토(Jared Leto)가 젊거나 늙은 니모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나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준 영화 감독의 이름은 자코 반 도마엘(Jaco Van Dormael)이다. <토토의 천국, 1991>, <제8요일, 1996>의 감독이다. 부감 쇼트[high angle shot]는 이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관찰자적 시각을 확보하기 위한 촬영방식인데 감독은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많은 부감 쇼트를 사용했다. 그의 부감 쇼트는 전능하다기 보다 친근하며 다정한 느낌을 주어 좋았다. 감독의 부감 쇼트에는 인간에 대한 애틋한 그의 시선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제8요일>이후 13년 만의 작품이다. 내가 별 다섯 개를 준 영화는 이제껏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영화를 스스로 발견한 나 자신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 영화에서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은 삶의 곳곳에서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선택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 혹은 성찰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당신이 가고 있는 지금 그 길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도를 넘치는 후회로 현재를 놓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나직히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다가 갈 것이고 그 여러 방식이 우리가 바라던 것과 조금 다를 지라도 그렇게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지금을 긍정할 수 없다는 과거 혹은 미래의 그 대단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있다. 시간이 거꾸로 가든 앞으로 가든 그것이 우리와 그렇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당신이 늘 절대적, 고정적으로 여기는 당신의 존재, 혹은 시간이 사실은 가변으로 둘러싸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일러주는 듯 했다.
인류의 무궁한 반성과 정진을 촉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