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성당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이 그림에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 부각되어 표현되어 있다. 성부의 영광이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가운데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성자 그리스도께 내려오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을 구원하실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성화해설: 정웅모 신부).
생명의 말씀
알곡과 쭉정이
하느님께서 창조한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입니다. 몸매를 가꾸거나 건강 때문에 체중을 줄이려는 이들에게는 조금 언짢게 들리겠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물론 저울 위에 올라서면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무거움이란 ‘사람의 소중함’의 무게입니다. 한 사람의 소중함은 우주의 무게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무겁다 하지 않던가요!
거창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압니다. 그래도 굳이 그 이유를 대자면, 우리 교회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기 때문에,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에 사람의 소중함의 무게는 세상 만물 그 어느 것보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다한 것보다 무겁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처음부터 그 속이 꽉 들어찬 ‘알곡’인 셈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이 소중함의 무게를 감히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려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무게를 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며 ‘죄’입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게를 달고,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고 또 무게를 달고, 성이 다르다고 또 무게를 답니다. 어떤 것들은 사람이 일부러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저울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명한 저울 가운데 하나가 ‘자유경쟁’입니다. 자유도 좋은 것이고, 경쟁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무제한을 의미하거나, 경쟁이 사생결단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한경쟁시대’라는 그럴듯한 말을 온 세상에 퍼뜨림으로써, 모든 이를 싸움터로 내몰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서 사람의 소중함을 시장에 내다놓고 사고파는 그런 상품 정도로 만듭니다. 교육도 시장의 상품이고, 노동도 시장의 상품이고, 하다못해 땅도 시장의 상품이 됩니다.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려면 좋은 상품, 질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경쟁’이라 미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로 포장하여 아무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무제한의 사생결단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그들은 ‘알곡’이라 하는데, 흔히 ‘경쟁력을 갖춘 사람’으로 칭송합니다. 그리고 이 무자비한 투쟁에서 쓰러진 사람을 그들은 ‘쭉정이’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라고 혀를 찹니다. 그렇게 사람의 소중함은 계량화되어 그 무게에 따라 일렬로 줄을 세웁니다. 그렇게 사람은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예수님의 몫을 대신하려 합니다. 한참 뒤에 서 있는 사람을 쭉정이로 만들고, 자신들은 알곡 행세를 합니다. 물론 그들의 저울에 따르면, 오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조차 하찮고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에 불과하겠지요. 태어난 출신 배경도 그다지 대단치 않고, 자란 환경이 귀족적인 것도아니고, 더더욱 지도자들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십자가에서 조롱을 받으며 돌아가셨으니까요...
오늘 복음말씀은 그 예수님이(결코 쭉정이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요구합니다. 알곡과 쭉정이,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이입니까? 알곡이 되고 싶습니까? 알곡은 그들의 장단에 춤추지 않으며, 그 대신 예수님의 장단을 맞춥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신수동성당 주임
말씀의 이삭
노인과 바다 - 주님 세례를 통해 돌아본 내 삶의 지향
한낮의 태양이 좋았는지 잠을 자고 난 노인은 만족스럽게 보였다. / 오래된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배 한 척이 그의 집 전부다. / 누구나 그런 노인의 삶을 동경하며, 자신 또한 그렇게 살고 싶어 했다. / 그는 늘 독백처럼 노래했다. / 약간의 빵과 포도주만 있어도 만족한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어부라고. / 그래서 넘치도록 잡히는 고기를 몇 마리만 남기고 늘 다시 놓아주었다. / 그러던 그의 배가 어느 늦은 여름날 새벽, 첫 여명과 함께 가라앉았다. / 단 한 번 만선으로 귀향하려 했던 그가 너무나 많은 물고기를 배에 실었던 것이다. / 영원의 숨결 같은 시간을 함께 향유했던 노인과 바다에게 이별은 있을 수 없다. /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깊은 곳에서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리라.
독일 가수 니꼴이 불렀던 이 노래 「노인과 바다」는, 부를 때마다 하느님과 사람의 실존을 생각하게 해준다. 단 한 번의 욕망이 이승의 삶을 앗아갔지만, 늘 바다와 함께 하고 싶었던 그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안식이 되어준다는 내용은, 내 삶의 지향을 그대로 표현해 준 것이다. 노래와 이야기 나눔을 통해 거의 매일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참을 묘사하고 있는 내 삶도, 현실적인 욕심과 집착이 늘 발목을 잡아 날지 못하게 하지만 결코 두렵지 않다. 좋은 곳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까지 늘 그분은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믿음, 이른바 임마누엘 신앙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청하기 전부터 이미 나와 함께 해 주시는 분. 내가 떠나가도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 분. 내가 굳이 애를 써 억지로 사랑하지 않아도 한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 또한 삶의 모든 순간을 그분과 함께하고 싶다. 죄를 짓는 동안에도 그분을 기억하고 싶고, 죄를 지은 후에도 그분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런 그분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세례를 받으려고 요르단 강가에 서 계시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무런 죄도 없는 하느님이 죄지은 사람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신다. 사람들의 죄를 탓하거나 죄를 짓지 못하게 가로막지 않으시고, 날마다 죄짓고 사는 사람들안에 스며들어 함께 계신다. 무얼 해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하러 오셨다는 이 아가페(무조건적이고 무상이며 무한한)적 사랑은, 위의 노래에 담긴 것과 같은 영감을 통한 원초적 체험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나 또한 죄를 안고서도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되는 그런 지향을 간직하고 싶다. 끝내 욕심을 버리지는못했지만, 늘 함께 했던 바다에 안
겨 영원한 안식을 얻어 누리는 저노인처럼.
김정식 로제리오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가수
오늘(1월10일)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 사건 이후 예수님의 공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례주년으로 성탄 시기는 오늘로 끝나고 내일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
1월18일(월)~25일(월)은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주간에 특별히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