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30
(3.1 운동)
3.1 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이자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 선언에 자극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 운동으로
그 결집력은 기독교에서 나왔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정치, 경제,
산업전반에 걸친 일제의 수탈계획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량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전락했으며
한일합방 이 후 종교계에서도
극심한 회유와 탄압을 받았다.
일례로 1913년에는 의료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개업하는 것이 어렵도록 만들었고
1915년에는 모든 종교를 정권 통제하에
두도록 했으며 그런 여러 압박과
고통속에 1919년 고종황제의 사망은
한국 민족에게 충격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파리강화 회의에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자극제가 된 가운데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도 3월 1일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민과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3.1 독립운동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와같은 시위앞에 일본은 당황하여
헌병과 수많은 경찰, 서울 주둔의 보병과
기병까지 동원하여 평화적인 시위자들에게
무차별 발포하고 체포된 자들에게는
온갖 고문을 가했다.
특히 가장 피해를 입은것은 3.1 운동의
중심세력이라고 지목을 받은
기독교인들과 교회였다.
강서 사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은
일제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기독교회를 탄압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이다.
아리타 일본 중위와 일본군 30여명이
제암리 교회 교인들을 교회에 모으고
문을 잠근 후 집중사격을 가해
모두 살해한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한때 비정치화를 표방하면서
정치적인 개입을 의도적으로 삼가던
선교사들마저도 일제의 만행과 핍박 당하는 교회를
지켜보면서 더이상 침묵할 수 없어
억압받는 한국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수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 한국교회 참상을
사진으로 찍어 일본의 폭정과 야만을
세계에 알렸으며 숭실전문 학교 교수
모의리 선교사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한 학생들을 자기집에 보호해 주고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외국의 선교본부에 보내 이 일로 평양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3.1운동에 대해 동정적인 자세를 갖고
직, 간접적로 협력한 선교사들이 많았다.
3. 1운동을 살펴 볼 때
첫째, 비록 실패하였지만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독립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큰가를 전 국민과
전 세계에 보여 주었으며
독립의 의지와 민족의 저항이
얼마나 범국민적이고 뿌리깊은 것인가를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둘째, 신분과 직업, 종교를 떠나
민족이 하나란 민족 공동체성을 느끼게 했으며
셋째, 이와같은 고난과 박해를 통해
오히려 기독교가 더욱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될수 있었다.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3.1 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들이 민중의 신망을 받는
이들이었으며 그들이 보여 주었던
독립의지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정신적인 감동을 주었고 겨레와
함께하는 교회, 민족의 고통을 나누는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교회에 대한
긍적적인 생각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