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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72 | 도올 김용옥 기고, 반대 VS 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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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기고, 반대 VS 찬성
교원평가제 강행을 둘러싸고 정부(교육인적자원부)와 교원단체(전교조, 교총 등)의 갈등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학부모단체들도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 순천대 석좌교수가 교권의 존엄성은 유교적 가치의 핵심이라면서 이를 깨뜨리는 교원평가제 실시를 적극 반대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반대 VS 찬성’ 입장의 글을 둘씩 모았습니다. 먼저 도올 김용옥 [특별기고] 전문입니다.
이 땅의 스승들이여, 들으시오! 교권은 존엄, 평가대상 될 수 없다 [특별기고] 도올 김용옥 "교원평가는 우리 사회 기층 도덕의 파괴"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광풍노도처럼 대지를 쓸어버릴지, 떠도는 낙엽을 휘감으며 소리없이 스러질는지, 그 전망이 불투명한 채 회오리바람은 우리의 심연(心淵)에 파문을 던지며 떠돌고 있다.
그 바람에 휘감긴 자들은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또 자신의 판단의 이중성 때문에 수치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자신의 투지에 대한 정확한 의미부여를 보류한 채 방황키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우리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확고한 가치판단이 결여된 탓이다.
그 가치판단의 보편타당성을 운운하기 전에 그 가치판단을 밑받침하는 자신의 주체적 체험의 절박성과 정당성에 대한 당당한 외침이 없는 것이다. 외칠 수 있으려면 철두철미한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티끌 하나라도 전 우주의 거울에 비춰볼 수 있는 전체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해방 후 우리의 교육은 교사들에게 이러한 인식의 바탕을 마련해주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요즈음 세간(世間)의 모든 쇄사에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말이 들릴 리도 없고, 들릴 수도 없고, 들려야 할 까닭도 없는 세태가 스스로의 관성에 의하여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쇄사에 대한 잡언(雜言)이 대간(大幹)을 휘어잡을 까닭이 없으니 나 도올은 방관 속에 흘러가는 역사를 방치할 뿐이다.
유교윤리의 핵심, 교권의 존엄성
그러나 '교원평가제'라는 이 한마디에 대해서만은 나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한 회갑의 생애 동안 교육자로서 일관된 가치관을 유지해왔다. 내가 이 땅의 후학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일순간도 떠난 삶을 산 적이 없다. 나는 교육에 관한 한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해왔다. 그러한 삶의 역정의 축적이 나에게 던져준 강인한 신념을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모든 스승들과 공유코자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칼 맑스(Karl Marx. 1818∼83)는 정치·법률·문화 등 상부구조라 부르는 사회적 의식형태의 토대에는 물질적 생산력과 생산관계라고 하는 하부구조가 있으며, 그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도식을 역사발전 법칙으로 표방하였다. 이러한 경제사관적 교조주의나 경제결정론과는 아랑곳없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오히려 인간의 경제적 행위의 토대에는 지배적인 정신적 가치가 있다는 종교사회학적 주장을 폈다. 서구적 자본주의의 성공의 배면에는 프로테스탄트윤리라고 하는 정신적 가치가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상부구조니 하부구조니 하는 따위의 말은 원래 건축용어에서 온 것인데 지상으로 드러난 건축의 외관만을 보아서는 그 건축의 구조를 제대로 알 수 없으며, 반드시 지하에 숨어있는 토대를 알아야만 그 건물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일면적 타당성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인간사회의 네트웤이라고 하는 것은 건물처럼 상하로 완벽하게 이분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하가 상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도식도 유치한 발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하부구조가 물질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고 정신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다. 상하의 이원론이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모두 화엄(華嚴)철학의 원융(圓融)한 관계론을 망각한 지난 20세기의 유치한 발상들이다. 그런데 베버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형성에 실패한 동양의 유교적 윤리를 그 반증의 예로서 상술하였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난 오늘날, 발전된 사회학·역사학·인류학의 제반성과가 입증하는 것은 유교윤리(Confucian ethics)야말로 아시아적 자본주의 성취의 핵을 이루는 정신가치라는 것이다. 유교윤리는 자본주의 정신과 근원적으로 상치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세계(Lebenswelt)를 침식하면서 발생시키는 비인간적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합리적인 규범윤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유교윤리의 핵심에는 바로 '교권의 존엄성'(the Dignity of Teacher's Right)이 자리잡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단언컨대 교원평가제란 넌센스요, 어불성설이요, 망국의 근원이다. 그것은 관료주의의 안일한 타성이 빚어낸 소치일 뿐이며,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라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시대에서 과연 우리 조선문명이 지닐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역사의 키를 장악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부표하게 될 것이다.
동그라미 색칠식 수량적 직접평가는 아니된다
첫째, '교원평가'라는 것이 가능하면 좋겠는데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객관화될 수 있는 수량적·계량적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교사라는 인격체는 그러한 방식으로 평가될 수도 없고, 평가되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의 사상가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인정>(人政. 사람의 정치. 1860년작)이라는 저술에서 이미 측인(測人. 사람을 헤아림)의 방법으로 '감평(鑑枰)'이라는 계량화된 점수표를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방법의 한계를 절절이 논구하고 있다.
현재 대학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교수평가 설문지만 하더라도 하등의 의미가 없다. 우선 학생들이 설문지에 진지하게 응하질 않는다. 진지하기에는 너무도 그 설문의 내용이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 평가가 반드시 교수의 정신세계에 대한 공정한 기준이라고 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한 교수의 점수가 예외없이 60점 이하로 나온다면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한 80점에서 100점 사이의 경우 그 사이에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참으로 구차스럽고 추저분한 것이다. 내 체험으로 말하자면, 요즈음 대학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95점 이상의 점수를 따는 교수가 85점 정도의 평가를 받는 교수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
오히려 낮은 점수를 받는 교수가 더 무게있고 더 진실하고 더 실력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식의 경쟁체제는 교수에게 '인기영합'이라는 부담을 주며, 교수방법의 다양성을 말살시키며, 자기가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식게 만들며, 또 교수 동료들 사이에서 불필요한 심기를 조장시킨다.
내가 다닌 하바드대학에서도, 물론 학기초에 모든 강의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는 책자가 발간된다. 그런데 그것은 학생회에서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만드는 것이며, 그 강의를 가장 잘 이해한 학생이 수강소감을 문장으로 써서 타인의 수강신청자료로 활용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무지막지하게 획일적인 동그라미색칠 식의 수량적 직접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강의의 장·단점이 인간적이고 격조높은 언어로 잘 기술되어 있다. 교육이란 교육자나 피교육자나 자율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그 자율의 인격적 관계를 타율적 기준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무리 일시적 긍정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구원한 부정효과에 비한다면 너무도 사소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판사의 판결보다 더 권위 보장받아야
나 도올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나의 사상의 자유와 학생들의 배움의 자율과 교권의 불가침의 권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대학강단을 떠났다. 나는 그 뒤로 교수로서의 나의 권위를 한치도 양보한 적이 없다. 도산서원이라는 배움터는 기본적으로 퇴계를 흠모하는 학생들이 그의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모여들어 형성된 장(場)이다. 도산서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이퇴계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는 학생으로부터 평가되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대학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의의 권유를 받는다. 그때마다 내가 내거는 조건은 나의 강의에 대한 일체의 제도적·수량적 평가가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강의의 주재자요 신(神)이다. 그러한 프라이드가 없이 강의를 한다는 것은 비굴이요 아첨이요 굴종이요 생계수단으로의 하락이다. 최근에도 중앙대학교에서 이러한 조건으로 내 강의를 설강하여 크게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교육은 다양한 가치의 함양인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너무도 지고한 교육철학과 존경받을 수 있는 실력과 자존의 바탕을 가지고 큰소리치는 것일 뿐 일반적 교사에 대한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깐 공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나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述而>)
여기 '세 사람'이라 함은 실제로 3명의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하고 같이 가도 그들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자의 집주(集注)에 "세 사람이 같이 간다 함은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이니, 나를 제외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하다는 뜻이 되니, 결국 두 사람 다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배움을 얻는 스승이라 함은 반드시 최선의 인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불선한 사람이라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선한 스승을 보고도 나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되니 그것 또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란 합리적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합리의 용인이나 비합리의 대비 속에서도 합리성의 추구가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잘난 선생이 있으면 못난 선생이 있게 마련이다. 또 못난 선생이 있기에 잘난 선생이 돋보이게 마련이다. 내가 학생들의 평가를 거부한다는 뜻은, 내가 실력있는 교수이기에 항시 학생들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대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봉사와 헌신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순간 이미 나는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으니,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끊임없는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다이내믹한 변증법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을 매학기 매강의마다 수량화되는 기준으로 즉각적으로 평가하여 고정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행일 뿐이다. 지금 한 학생의 의식세계 속에서 불만스럽게 보이는 선생의 세계가, 성장하고 난 20년 후에 지고한 교훈으로서 자리매김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근원적으로 일시점적·수량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피고나 원고가 판사의 판단을 평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평가에 의해 판사의 판단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다면 그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내가 생각키엔 스승의 가르침은 판사의 판결보다도 더 지엄한 권위를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공자의 수제자는 안회(顔回)였다. 매우 이지적이고 과묵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잘 돌아가고 수완이 좋은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공자가 자공을 독대했을 때 이와 같이 물었다: "너와 안회, 누가 더 나으냐?"(女與回也孰愈?) 그러니까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이옵니다."(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래,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그래, 나와 너, 두 사람 모두 안회만 같지 못하다."(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여기에 스승인 공자의 정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제자만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훗날 안회는 공자를 평가하여 이와 같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어볼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우리나라 '스승의 노래' 가사의 출전이 된 이 안회의 말은 결국 사제지간의 호상겸손과 존경의 염을 표현한 것이며 유교적 덕성의 전범을 나타낸 것이다. 공자는 <술이>(述而)편에서 자신의 배움의 세계를 가리켜, "나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스승의 세계도 결코 일시에 잘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배움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교원평가'에 대한 학부형의 지지가 그러한 평가를 통하여 좀 저질스러운 교사를 솎아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기대는 근원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다. 아무리 평가를 많이 한다 해도 그것은 저질적 교사의 징계에까지 이르는 법적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가는 결국 교육의 장에 불필요한 잡음과 불신과 교육적 열의나 신바람의 냉각만을 초래할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헛지 랄'만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헛지 랄에 교육부공무원들의 번문욕례가 기생하고 이간질을 통한 원격조정의 계책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국력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원평가의 근원적 목적이 저질적 교사의 퇴출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원조직과 교육부 사이에서 어떤 법적·제도적 투쟁의 문제가 되어야 하며, 피교육 당사자인 학생이 연루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인격 대 인격의 도덕적 관계가 되어야 하며 계량가능한 지식전달의 효율로써 평가되는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초·중·고등교육의 주된 가치는 지식전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후 바른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바탕과 인격의 함양에 있는 것이다. 숙명여고의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며 조사해본 바로도,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들이 배우는 선생을 곧바로 평가한다는 문제에 대하여 도덕적 부당성이나 제자로서의 어색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요즈음의 어린 학생들은 어른보다도 더 어른스럽고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삼 숙지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학교 다니던 60년대만 하더라도 서양에서는 토론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동양에서는 권위주의적 주입식 교육이 주류라서 낙후되었다는 통론이 휩쓸었고 그래서 세미나적 교육방법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대만대학에 유학갔을 때 세계적 대석학이신 나의 스승 황 똥메이(方東美. 1899∼1977) 교수가 강의시간에 동양의 서원전통 교육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을 하시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서양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쓸데없는 질문이 많다. 그리고 학생의 질의가 타인의 학업을 방해할 때가 많다. 교수란 제한된 시간 내에 더 많은 학생에게 더 많은 학문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토론이란 강의 후에 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있는 성의를 다해 그 시간에 모든 학생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지혜를 짜야 한다. 명강의란 주입식교육 만큼 더 좋은 딴 방법이 없다. 주입식이라지만 학생들은 항상 교수를 평가하며, 선생이 전달하는 정보를 끊임없이 취사선택한다. 주입식이라 해서 생도들의 자율적 권한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생을 평가한다. 되돌아서면 학생들끼리 수군거리고, 별명으로 평가하고, 걸어가면서도 토론하고, 시험 보면서도 학습내용을 비판하고, 선생의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그것은 무언으로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전통으로 후배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리고 요즈음은 학생이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객관적으로 부당한 사례에 직면했을 때는 인터넷에 올리거나 다양한 게시판을 통해 사회화시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정보가 일방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웤이 형성되어 있는 나라다. 따라서 교원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토론식이니 주입식이니 하는 것도, 교육방법의 효율성과 다양성에 관한 문제일 뿐이며,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훌륭한 부모들이야말로 침묵하는 대중
넷째, 교원평가제에 관하여 학부형들은 모두 찬성하고 있고 교사들만이 저항하고 있다는 여론은 근원적으로 매스컴의 정보조작에 의한 호도된 인상일 수가 있다. 학교교육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부모일수록 학교교육을 망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자녀를 3명이나 키웠지만 자녀들의 문제로 학교에 가본 적은 한번도 없다. 참으로 훌륭하게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훌륭한 자신의 사회적 삶에 열중하여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의 모범을 보이지, 학교교육에 일일이 참견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부모일수록 학교교육의 자율적 특성을 신뢰하며,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훌륭한 부모들이야말로 침묵하는 대중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설치는 부모들의 참여를 바람직하게 생각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유한(有閒) 족속이 될 삶의 여가가 없다. "학부형들 모두 찬성-교사들 모두 반대"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교원평가제에 관한 논의를 밥그릇싸움이나 이권싸움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원평가제에 관한 교사들의 반대의 근원적 모티브에는 참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우리는 믿어주어야 한다. 2천여 년의 유교전통을 지닌 우리나라의 교육자의 양심과 양식이 아직 그런 수준에까지 변질되어 있지는 않다.
다섯째, 여태까지 우리가 우려했던 중고등교육의 부정한 실태는 근원적으로 교육제도의 문제이며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교사가 시간에 들어가도 학생들이 다 졸고 있었고, 또 교사가 그런 학생들을 질책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나 권한이 주어져 있질 않았다. 학생들이 저녁에 과외로 사교육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제도가 수능위주에서 내신성적 위주로 전환됨에 따라 그러한 현상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지금도 고교 2·3학년 반에 들어가면 학생들이 집중하지 않지만, 1학년 반에 들어가면 조는 학생도 없고 놀라운 집중력을 보일 뿐 아니라, 학생들이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편다. 학교 강의시간에 충실하는 길이 대학입시의 첩경이라는 생각이 생도들에게 편재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조차 촌음을 아껴 예습·복습을 하며 점심시간에도 영어독해책을 놓고 씨름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선생의 눈에는 오랜만에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다. 이와 같이 제도적 변화가 학습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이지 학생과 교사의 도덕적 심성의 우열의 문제가 그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원평가제를 강행하려는 자들의 발상의 근저에는 수능위주에서 내신위주로 전환됨에 따라 교원자질의 향상이 교육계의 주된 테마가 되어야 하므로 교원을 채찍질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우선 타이밍이 나쁘다. 최소한 내신위주의 긍정적 변화를 2·3년이라도 지켜본 후에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문제지 지금 당장 교원평가제를 도입하여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졸속한 발상이요, 하릴없는 공무원들의 생색내기 작전에 불과한 것이다.
노자의 말에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라는 말이 있다. 자꾸 뭘 쓸데없이 하려고 하면 더욱 그르칠 뿐이요, 자꾸 잡으려고 하면 더욱 놓치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쓸데없이 세금낭비 하느라고 보도블록을 뒤집는 짓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고 말 수가 있다. 교원평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사들의 충심의 협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분란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교원평가제는 수능위주가 내신위주로 전환하는 것과도 같은 그러한 제도적 변화와 동일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원평가제는 제도적 문제가 아닌 교권이라는 인격의 도덕성과 실력에 관한 문제이며 그것은 결코 단순한 제도적 장난으로 달성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다언삭궁'(多言數窮)!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진다는 뜻이다. 교원평가제를 운운한 공무원님들이시여! 이제 그만 입을 다무시는 것이 어떠하실런지요.
교권의 자기부정과 자기반성도 필요
여섯째, 제도의 문제가 거론된 김에 일갈을 가하자면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문제는 99%가 중고등학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대학입시제도의 여하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입시제도의 문제는 곧 대학교육의 전체체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대학의 서열화와 사회진출의 학벌패거리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에는 서울대학교라고 하는 암적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에 못들어갔다는 피해의식 하나로 평생을 그늘진 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서울대학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서울대학을 없애버린다는 것이 관악캠퍼스를 폭파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서울대학을 현금의 대학이 아닌 프로펫셔날 스쿨의 집단인 상위개념의 대학원대학으로 승격시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학병의 핵을 보다 창조적인 국가에너지로서 진화시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대학교를 대학원대학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머지 국립대학들을 현금의 서울대학교 수준의 국립대학으로 통폐합하면 우리나라 교육의 절반은 해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학교육 체제개선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다 수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히 묵살하고 있다.
왜냐? 우리나라의 모든 체제를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보이지 않게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암암리에 이러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황당한 무계지언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체제개선에 관한 정직한 논의가 없이 일선 교사들만 닦달치는 말엽적 논의는 벼룩 하나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홀랑 태워버리는 짓거리와 똑같다. 본(本)을 개선치 못할진대 말(末)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지어다. 군자는 무본(務本)이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일지니.
일곱째, 교원평가제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는 궁극적으로 교원의 자질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깔려있을 것이다. 자질이란 전공과목에 관한 학구적 실력과 도덕적 인격의 양면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결코 교원평가로서 이루어질 수가 없다. 평가가 자질을 향상시키지는 않는다.
일요일 저녁마다 KBS에서 방영하는 고교생들의 골든벨 퀴즈 프로를 나는 곧잘 보곤 한다. 그곳에서 항상 영어문제가 하나 출제되는데 출연한 고교의 영어선생이 나와 그 문제를 읽고 학생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내가 본 수십 번의 프로그램 중에서 영어발음이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씨부렁거리는 영어의 수준이 매우 천박한 회화수준에 그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학생들이 나와서 하는 쇼를 보거나, 그들의 조크를 보거나, 천편일률적인 몸짓이나 천박한 언행밖에는 없다. 그런 행동거지도 귀엽게 봐줄 수도 있으나 문제는 보다 고상하고 기발한,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아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웃김 패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처리가 대부분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학생들의 선생에 대한 평가나, 교사들 상호간의 평가, 학부모들의 평가로서 개선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어발음과 회화가 그 수준인 사람이 아무리 평가해도 달라질리 만무하다. 다시 말해서 교원양성의 교육과정과 선발과정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이는 교사들의 자질개선은 이루어질 길이 없다는 것이다.
더이상의 구체적 논의는 삼가겠지만 결국 우리사회 변화의 추세가 폐쇄 시스템(closed system)에서 오픈 시스템(open system)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언급하여 둔다. 오픈 시스템으로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고수해야 할 것은 교권의 존엄이지만, 나의 논의는 교권의 자기부정과 자기반성의 촉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학생에게 평가받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
여덟째, 교원평가제에 관한 나의 논의는 결국 우리사회의 미래모습에 대한 총체적 블루프린트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사상사적으로 말하면 근대성(Modernity)의 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근대성은 항상 합리성(Rationality)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우리사회가 지금 많은 좌절이나 인기없는 듯이 보이는 정치판세의 엎치락뒤치락 속에서도 꾸준히 합리성의 증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시스템의 복잡화, 권력의 분권화, 가치의 다변화와 더불어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합리성이라 함은 리(理)에 합당(合當)하다는 뜻인데, 이때 리가 반드시 서구에서 말하는 계량적 이성, 도구적 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리(理)는 정(情)적인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것이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퇴계·율곡의 모든 논의가 서구적 이성(Reason)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도덕적 주체의 총체적 책임의식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유교적 윤리라는 것도 협의의 언어중심적인 진위체계의 진리를 넘어서는 매우 총체적인 몸(Mom)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것이다. 나의 몸철학적 논의는 근대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서구인들이 근대를 초극하려는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과를 포괄하는 논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초월적 실체의 전제나, 개인의 자율적 가치의 묵살이 없이 어떻게 간주관적 공공세계에 규범윤리적 합의를 도출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서구인들이 근대성의 벼랑 끝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가 이미 우리 실존에 내재되어 있다는 우리 사회의 강점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민족의 교육을 효율성과 계량성의 장으로서만 오인하는 현금의 모든 교육계 동향은 깊게 반성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은 동질적 장의 연속체일 뿐이다. 학생이 결국 교사가 되며, 또 교사는 학생을 생산한다. 그러한 연속의 순환체계가 우리나라의 문화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의 장으로서 기업의 합리성의 증대는 당연한 추세이지만 그러한 기업의 합리성의 가치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식민지화시켜서는 아니 된다. 기업이 타국이 아닌 자국민의 생활세계까지 식민지화해 버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학의 운영이 모두 기업의 합리성과 경쟁성의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모두가 반성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기업의 장점의 근저에는 유교적 합리성의 성과가 자리잡고 있다. 교육에 대한 열정, 근면, 공검, 절약, 대의를 위한 헌신, 초월적 세계의 부정, 인간의 정감에 대한 배려, 재빠른 판단력, 예의바름 등등의 미덕이 기업을 구성하는 성원의 인격의 바탕이 되고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유수기업의 위용에 대한 과신 때문에 교육의 장마저 그러한 효율성과 계량성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러한 기업은 미래에 다시 탄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도덕적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교육은 백년대계의 장이다.
내가 하바드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나는 군사독재정권과 투쟁하며 캐나다에 망명하고 계시던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 목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우리나라 자유신학·해방신학의 근원이며, 간도 용정에서부터 규암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선생의 지도하에 민족정기를 키우신 장공 선생, 나는 한국신학대학에서 그로부터 동양사를 배웠다. 그때 장공 선생께서 나에게 건네주신 글씨가 있다.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백년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나를 심어 하나를 얻는 것은 곡식이다. 하나를 심어 열을 얻는 것은 나무다. 하나를 심어 백을 얻는 것은 사람이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百年之計, 莫如樹人. 一樹一穫者, 穀也; 一樹十穫者, 木也; 一樹百獲者, 人也.)
내가 학생에게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비굴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나는 가르치기를 포기하거나 죽음을 택할 것이다. 물론 교사들에게는 나와 같은 선택의 여지가 주어져 있지를 않다. 나의 학문, 나의 사상은 자유를 구가한다. 때로는 만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자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때로는 광인처럼 깔깔대고, 때로는 실연한 연인처럼 눈물을 흘려도 나의 학생들은 나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비상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획일적 잣대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에 관하여 심중한 절기라고 판단될 때마다 발언을 계속하여 왔다. 이미 20년 전에 중고생을 위하여 <철학강의>를 썼으며, 전교조가 최초로 구성될 때에도 교육자의 행위가치는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권면했으며, 네이스(NEIS)에 관해서도 치열하게 반대하였다.
나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다. 그것은 보수나 진보의 잣대로 평가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네이스투쟁을 통하여 학생들의 인권을 지켰다. 이제 우리 스승들! 이 땅의 40만 교사들은 일치단결하여 교원평가라는 저질적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 우리 스승들의 인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것은 스승들의 삶의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백년대계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외친다. 유교적 가치의 핵심은 교권의 존엄이요 지엄이다.
2005년 11월 14일 새벽 3시 20분 낙한재(駱閒齋)에서 탈고
반대 [1]
도올, 시대를 거스르는 궤변은 그만두시오 김용옥 기고 '교권은 존엄, 평가대상 될 수 없다'에 대한 반론 권오성(oskwon) 기자
도올 선생의 장문의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해괴한 궤변이라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다.
시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아는 자신의 지식으로 이 나라의 교육지표를 만들어내려는 것인지, 자신이 시대를 선도한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조차 하다.
또한 그의 논리는 자본주의와 유교논리라는 접목시키기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교원평가가 관료주의의 안일한 타성이 빚어낸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망상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세계화시대에 교육경쟁력을 강화하여야 하는 현 시점에서 그의 궤변은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그는 역사는 시대별로 그 유명을 달리하더라도 그 근원은 항상 효율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유교교육과 논리는 사회에 차별 질서를 심는 계급사회의 교육지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기존의 평가방법이 서툴다고 해서 앞으로는 절대로 교원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는 무언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교육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민주사회이다. 민주교육철학과 유교교육윤리가 같다고 보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 나라의 교육철학이 토대도 분명치 못하고 약하다고 해서 유교윤리로 그것을 대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교윤리는 지난 근대화의 시기에 동원형통치로 국민을 옭아매던 일제의 권위적 방법과 적절하게 연결된 방법론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통치구조에 적절하게 순작용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윤리가 교육의 위계화를 만들고, 차별화를 만들고, 고시제도를 만들고, 작금의 교육대란을 형성해온 것이 아니던가? 현재의 교육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그런 교육윤리와 현실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왕조시대에 유교윤리는 사회질서를 옭아매는데 순기능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민국(민주공화국)이 된 지 60년 세월에 유교윤리는 오히려 한국사회의 저발전을 유인한 비효율적인 교육윤리였음은 이미 인지되어 있는 바이다.
도올은 근대성은 항상 합리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의 한 방법으로서 합리성이 차용된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민국에서 유교윤리란 사실 설 땅이 없는 일이다. 민국에는 민국의 교육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민주교육이며, 실용주의 교육철학인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평가제도는 당연한 것이다. 기관평가도 필요한 일이고, 기관의 세포로서의 조직원에 대한 평가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평가를 거부한다는 것은 민국의 당위성을 간과하거나 부인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평가의 방법이 문제될 수는 있어도 평가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요, 비효율적인 일이며, 민국교육을 거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군다나 세계화의 시대에 교육경쟁력을 확보해야하는 현 시점에서 교원평가를 거부하며, 유교윤리를 고집하는 독단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게 되어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방법도, 교육기제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순리이고, 교육철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순리이다. 도올은 어찌 이것을 거부하려고 하는가.
민주공화국에서 유교논리를 펴는 도올의 언변은 망상을 논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수량적, 계량적 기준이 전부가 아님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기초가 아니던가. 미래를 향해가면서, 과거의 길이 이랬으므로 과거형으로 진행하자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김용옥은 지식인 김용옥이지, 김용옥이 대한민국의 교육대표가 아니며, 그의 주지식인 유교윤리가 대한민국의 교육지표가 되어야 할 일도 아니다.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자는 흥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말부터 되새겨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현대사회의 모든 순환논리는 평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헌데, 어찌 교육자만 평가를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대통령도 평가받고 장관도, 차관도 기업주도 평가받는 이 시점에 무슨 해괴한 언변이란 말인가. 학생도 교사를 평가할 수 있고, 학부모도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학부모들을 무슨 무지렁이로 알고 있는 것인가?
물론, 평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사를 해임하는 결정적인 사항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리고 한번의 평가로 해임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평가제도는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일이다. 그리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그것을 원한다는데, 철 지난 유교윤리를 들고 나서서 교원평가를 반대한다는 것은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도 시대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도올은 알아야 할 것이다. 권오성 기자는 국민주의를 주창한 정치학 박사로 국민정치협의회(www.onmadang.com) 대표입니다.
반대 [2]
인격적으로 정말 본 받을 것 없는 저질 학자이기는 하지만... 2005/11/16 오전 12:13:06 돌밀이(sisyphos927)
교원평가의 문제를 지적한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데. 그렇다고 교원 평가를 그렇게 막을 필요는 없지... 문제는 있겠지... 하지만 다 평가 받는 세상에 교원들만 빠지는 것은 자기네만 편하려는 이기심이 주 이유야... 지적한 문제들 극복하면서 할 수 있죠. 그리고 해야 됩니다... 선생님들 고충은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올시다. 전교조가 애초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처음에 염려햇던 것처럼 '노조'가 갖는 이기적 행태가 드러나고 있어요. 그리고 이해관계 조직인 노조가 되면 초심은 없어지고 집단이기심만 고양되지요. 지금 전교조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아졌어. 그리고 교원평가 문제에도 그런 동기가 지배적이야.
그런데 난 도올을 보면 괜히 내가 부끄럽다... 뭐, 비슷한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 교만과 소영웅주의와 폼생폼사와 궤변... 어휴... 한숨만 나온다. 알고 있는 게 많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정보를 많이 갖고 있음이 곧 올바른 판단과 지성 및 제대로 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는 척하느라고 전문가들이 볼 때는 너무 웃기게 헛소리를 하고 잘못된 정보를 발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역겹다... 문외한들은 말발로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해당 영역의 전문가들은 듣다 보면 구역질하는 경우가 참 많아... 하하.
그리고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제 멋대로 떠든다. 서울대를 '암적 존재'라고 하면서 지가 잠간 몸 담고 있던 하버드 얘기는 왜 하시나? 이 덜 떨어진 인간아, 서울대가 암적 존재면 하버드는 에이즈야... 당신이 서울대에 대해 갖고 있는 열등감과 자의식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너무 티내지마. 서울대가 일류대로 서 있고 그로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게 역사를 두고 가꿔온 중요한 대학다운 대학 중의 하나인데 그 대학을 두고 '암적 존재'로 정의한다면 우리 나라에 암적 존재 아닌 것이 어디 있겠나 이 양반아. 니가 존경한다는 노무현은 물론이고, 정부를 비롯한 온갖 제도가 다 암적 존재이지.
물론 그런 정의에 입각해 본다면 도올... 야 챙피하다... 당신이 무슨 호를 갖냐... 김용욕이는 최고의 암적 존재 아니겠어? 어이 암! 이제 그만 좀 떠들고 너 자신을 아세요. 배운 사람은 겸허할 때가 가장 많이 아는거야... 말 좀 함부로 하지 말고 아는 척만 안 해도 괜찮을터인데.
찬성 [1]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교원평가제도는 막아야 합니다. 2005/11/16 오전 12:46:40 발그미(ohmyjojo)
망국적 교원평가 도입을 막아내는 데 선생님의 일갈이 큰 힘 되리라 믿습니다. 이 나라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교육자들이 침묵의 벽으로부터 나오셔서 천박한 자본주의적 경쟁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나라를 망치려드는 교육부 관료들에게 따가운 일침을 가해주셔야 할 때입니다. 저 또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살아온지 16년에 접어들어 갑니다만, 교원평가가 도입된다면 차마 교육자로서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싸구려 지식장사꾼이 되거나 비굴한 생존을 위하여 좋은 평가를 구걸하는 사기꾼 일등 교사로 타락하거나, 스스로 부끄러워 교직을 내 버리고 차라리 정직한 밥벌이의 길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저는 교원평가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교교육을 황폐화시킬 것이 불보듯 뻔하며, 자존심있는 교사들이 교직을 떠나게 하고 지식장사꾼이나 출세지향적 비양심교사들의 이전투구식 경쟁장으로 만드는 매우 나쁜 장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교사이며 동시에 학부모입니다.
저 스스로도 이제껏 양심과 자존심 하나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며 삽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평가 받으면 물론 고맙고 감사하겠지만, 적어도 내 양심을 저버리며 아이들에게 학부모들에게 좋은 평가받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철학도 버린채 밥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교사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아이의 선생님이 또한 당당하지 못하고, 평가때문에 인기영합식 교육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내가 학교교육을 포기하는 길이 더 현명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원평가문제는 결코 교사들의 밥그릇 싸움이 아닙니다. 비록 문제있는 교사도 있고, 실력없는 교사도 있다보니 학부모들의 원성이 높아진 측면을 이해못하지 않지만, 그 해결책이 교원평가일수는 없습니다. 나 한 사람 교직을 떠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밥벌어먹고 살 길이 오직 선생뿐이겠습니까?
전교조 교사들만이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교육을 걱정하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교원평가의 진면목(학교를 황폐화시킬 핵폭풍같은 위력)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결코 교원평가제도를 도입하도록 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상식이 있는 학부모라면, 적어도 합리적 사고를 하는 지성인이라면 도올 선생님의 말씀에 일면 수긍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스컴의 마녀사냥식 보도로 교사들의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었는데, 도올 선생님의 교권의 존엄성에 대한 말씀에 다소간 위안을 받습니다.
찬성 [2]
이 나라 교육을 망치게 하려면 교원평가 하라! 2005/11/15 오후 12:56:25 천상천하(mahatma1)
1. <교원평가는 우리 교육을 망칠수도 있다>
일본은 망할 것이다,
안심하라!
왜냐고? 일본은 교원 평가로 인해 학생들인 도통 교사들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 전화하는 녀석, 거울보고 화장하는 여학생!
지금 이 나라의 학생들도 말이 아니다.
"선생님! 왜 그렇게 고집이 세요?'-선생님한테 부당한 부탁을 해서 안 들어 줄 때 하는 말 "선생님! 여기도 휴지 있어요-선생님이 휴지 줍고 있을 때 따라서 줍지는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휴지를 건네주면서 하는 말.
자신들의 범법 행위를 여럿이 짜고 다른 학생에게 덤테기 씌우지를 않나!
수업 시간에 떠들지 말라하면 '원래 제가 말이 많아요'하지 않나!
수업 시간에 자서 뭐라고 하면 인상을 북 쓰지 않나!
거짓말은 밥 먹듯이 하고--
사랑의 매를 들면 교육청에 신고한다고 협박(? )하지를 않나!
클럽활동 시간에 날씨가 더워서 선생님이 수박을 사다가 먹였다. 시간이 끝난 다음 수박 껍질을 치우라고 했더니 "선생님, 전 시간이 없는데요?" 한단다.
그 것도 반장이 말이다. 반장은 이제 선생님의 뜻보다 (학생들을 잘 이끌기 보다는) 학생들과 영합한다.
장난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한 수 더 뜬단다
그야말로 봉숭아 학당이란다
그러면 학부모들은 어떤가?
오로지 성적 성적만을 되 뇌인단다
성적만을 부르짖는 학부모가 교사가 공정한 평가를 했으나 자신의 자녀가 불리한 평가를 받으면 그 교사를 옳게 평가하겠는가?
자신들의 마음에 안들면 학교와서 행패를 부리지 않나?
이런 판국에 교원평가 해보라.
학생들이 교사들의 쓴 말을 달갑게 받아들이겠는가? 자신의 자녀가 불리하게 평가받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가만히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게 좋다고 적당히 학생들과 학부모의 비위나 맞추고 겉으로 열심히 가르치는 척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 교원평가하라!
제발 좀 하라. 일본은 고대하고 고대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도 일본처럼 교육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2. <교원 평가 실시하면 교육의 질은 향상된다고?>
어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대학교 때란다
두 명의 교수가 대비되더란다.
한 교수는 시간 내에 열심히 준비하여 열강을 하셨고 한 교수는 날 건달 같았단다. 자신은 수업도 별로 하지 않고 학생들한테 토론이나 시키고 그래서 속으로 '저게 무슨 교수냐?"고 했단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 열심히 가르친 교수의 수업은 별 도움이 안되고 그래도 학생들끼리 토론시키던 그 교수의 수업이 큰 도움이 되더란다.
학교 다닐 때와 졸업 후의 평가는 달라지더란다.
그렇다!
당장의 가시적인 교육 효과(성적 올리기)는 뭐니뭐니 해도 주입식 교육이 최고다.
학부모들이 무엇으로 평가하겠는가? 눈으로 보이는 성과는 역시 성적아니겠는가?
그런데 정말로 이 시대에서 필요한 교육이 주입식 교육인가?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 교육이 아니겠는가!
그래 누구 말대로 세계화시대에 있어 국제 경쟁력을 가지려면 필요한 것이 창의성인가? 암기력인가? 반문하면 답은 간단하다
창의성은 말살하고 암기성적 향상하는 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인가?
교원 평가를 실시하면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성적․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3. <학생들이 제대로 평가할 것이라고?>
제발 찬 물 먹고 속차리자!
인천의 어떤 시범학교에서의 실제 이야기란다
제일 먼저
외모를 본단다.
외모가 받쳐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단다. 외모가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단다.
두 번째로는
나이를 본단다.
특히 여학생들에게는 치명적이란다. 나이든 교사의 경륜과 지혜는 쓰레기 통에 처박히게 된다
셋째, (배제 예상되는 것은)
원리 원칙대로 하는 꼬장 꼬장한 선생님이 될 것이다.
**쓴 소리보다는 단 소리하는 교사를 선택할 것이다 이제 학생들에게 쓴 소리를 할 수 없게 된다. 쓴소리 없이 무슨 지도가 되겠는가?
성적에 모든 것을 거는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공정한 심사결과 불리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교사를 정당하게 평가하겠는가? 원칙과 공정성, 소신 있는 교사가 내몰리게 된다.
넷째, (예상되는 것은)
영상 세대인 학생들은 교사의 수업 내용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교사의 스타일을 보고 평가할 것이다.
좋은 옷을 입거나 좋은 자동차를 가진 교사는 멋진 선생으로 그렇지 못한 교사는 후줄근한 교사로 평가할 것이다.
다섯째,
수업 내용을 알차게 가르치는 교사보다는 내용은 없더라도 재미나게 가르치는 교사를 선호할 것이다. 이제 교사는 코미디언까지 되어야 한다. (내용도 갖추고 재미나게 수업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드물다)
여섯째,
교사들이 학생들의 평가 대상에서 벗어 나기위해 너도 나도 승진 대열에 더욱 합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수업에 연구에 열중하기 보다는 승진 점수에 필요한 연구에 치중할 것이다. -정말로 교원평가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교장 선출 보직제가 전제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원평가가 교원의 전문성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교수 평가제가 사립 대학교에서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모른단 말인가?
소위 실력 없는 교수를 퇴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신 있는 교수를 퇴출시키는 것으로 악용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최고 국립대란 서울대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사립학교에서야 무슨 말을 하랴!
교원평가를 찬성한 사립법인00의 속셈이 무엇이겠는가?
그래 그런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다.
4. <교육부와 국민이 정말로 할 일은?>
선생님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소신껏 교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①. 사립학교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여 사학비리를 막고 사학을 민주화시키고 정상화 시켜야 한다.
②. 교장 선출 보직제를 실시하여 교사들이 잿밥(승진)에 한 눈 팔지 않고 염불(교육)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③. 표준 수업 시수를 정하여 (법정 정원을 확보하여)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④. 고등학교까지의 무상 교육 실시, 학교 급식의 질을 높여야 한다.
⑤. 학벌 중심 사회가 타파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입시 위주 교육에서 탈피하도록 해야 한다)
5. <이렇게 하면서 교원평가 해야 한다>
사립학교법 개정! 표준 수업 시수 제정! 교장 선출 보직제 실시! 입시, 성적위주의 교육에서 탈피! 교사의 위상 존중!
이렇게 하면서 교원 평가 실시하면 악용될 소지가 없어진다.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악용될 소지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 교원평가를 실시하면
사립교사들은 더욱 노예화 되고
교사들은 더욱 노동강도가 심화되고
교장의 권력은 강화되고 학생들의 평가대상에서 벗어 나고자 교사들은 교육에 전념하기보다는 승진에 더욱열을 올리고
모든 평가기준은 오로지 단기적인 성과(성적)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입시와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입시, 성적 가지고 교사들을 쥐고 흔들 것이고 학생들의 교사들의 지도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교원평가를 실시한 일본에서처럼 학생들에 대해서 지도불능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나라의 교육은 붕괴하게 될 것이다.
이게 두려운 것이지 교원평가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퇴출돼야 할 부적격 교사는 교직 복무 심사위원회에서 결정하면 될 것이다
6. <부적격 교사 퇴출제도는 별도로 있습니다. 교원평가 제도를 잘못 알고 계십니다>
교직복무 심의위원회에서 부적격 교사 퇴출시킵니다.
제발 교원 평가 제도 반대가 부적격 교사 퇴출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
부적격 교사는 천번 만번 퇴출되어야지요. 부적격 교사 퇴출 찬성합니다.
교직 복무 심의 위원회의 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규칙 제 6 조(심의 사항)
1. 시험 문제 유출 및 성적조직 미성년자 대한 성폭력 범죄 금품 수수 학생에 대한 상습적인 신체적 폭력등으로 물의를 빚은 교원
2.정신적, 신체적 질환으로 직무수행이 현저히 곤란하여 문제가 되는 교원에 대한 교직 적격여부
3.기타 부적격 교원 처리와 관련하여 교육감이 부의하는 사항 교직복무 심의위원회에서 부적격 교사 퇴출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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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6 오전 8:11:44 from 68.XXX.113.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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