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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왜옥동네의 전설 원문보기 글쓴이: 고요
장편소설 왜옥동네의 전설 |
[제1부] 해방의 소란 |
제12회
중근이네 아버지 곽씨 (1)
1946년 시월
(1) 대구부 원대동 ◯◯◯◯번지, 황현준이 사는 왜옥동네는 꼭 같은 모양으로 지은 왜식 주택 이십여 가호로 이루어진 동네이다. 열한두 가호 씩 된 두 개의 단지를 좁다란 소방도로로써 분리하고 있었다. 한 단지는 다시 오륙 호 씩 두 줄로 서로 어깨와 등을 대고 있었다. 윤호네 집은 한 단지의 서쪽 끝에 있어서 서쪽으로는 담 너머 행길이다. 그리고 등을 대고 있는 뒷집은 약국집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국집은 뒷집이면서 절반쯤만 담을 공유한 옆집이기도 하다. 그 집은 다른 열 집과 구조가 다르다. 우선 집 전체의 넓이도 거의 두 배쯤 되었고 건물 자체도 살림집과 약국 건물이 이어진 두 채이다. 집채의 앞 마당는 텃밭을 가꾸었고, 대문쪽 곧 약국 옆의 마당은 좁았지만 테라스로 꾸며져 있다. 각 줄의 집들은 지그재그로 늘어서 있어서 한 집은 앞 마당이, 그 옆집은 뒷마당이 넓게 되어 있었다. 윤호네 집은 앞 마당이 넓었는데 안방 동쪽 창밖으로 보이는 집은 바로 옆집인 덕대네 집이 아니라 그 집 뒷마당인 텃밭 너머에 있는 그 다음집의 서쪽 벽을 볼 수 있다. 그 집은 앞 마당에 양계 계사로 채워져 있다. 그 집 앞을 지나가면 닭똥 냄새가 난다. 그 집엔 일제 때까지 방송국에서 일했으나 해방되고는 그만 두고 집에서 양계만 한다는 중늙은 내외가 산다. 자녀들은 다 어디서 살고 있는지 두 내외만 그 넓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할머니 되는 이는 문씨에게 옷 수선을 부탁하러 다녀갔지만 그와 대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다음 집은 덕대네 집처럼 앞마당이 없어서 대문과 현관이 바투 다가 있지만 드나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사는지 윤호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두 집은 늘 대문이 닫겨 있었다. 덕대의 어머니 안씨의 말로는 젊은 방송국 직원들 너댓이 합숙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도 고향이 이곳 대구 사람은 아닌 것이다. 윤호네 집과 같은 줄의 맨 동쪽 끝집이 ‘도라꾸 집’이라고 불리는 영자네 집이 있다. 영자네 집 바깥이 다오루 공장 바깥 공터인 ‘너른마당’이다. 한 단지 열한 집을 둘러싼 시멘블록 담은 하나의 낮은 성곽처럼 이어져 둘러 있었고 그 성곽 담장에는 집집마다 출입할 대문이 꼭 같은 모양으로 있었다. 소방도로와 두 단지 전체 곧 왜옥동네를 하나로 묶는 도로는 소방도로보다 약간 더 넓어서 오가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었다. 바닥은 비포장이었지만 자갈을 박아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단지 서쪽은 마을 사람들이 ‘행길’이라고 부르는, 팔달교에서 자갈마당 쪽으로 달리는 국도가 면해 있었고, 북쪽으로는 달구 국민학교에서 시민운동장 앞을 지나 대구역 뒤쪽으로 벋는 큰 도로가 있었다. 이 동네는 그 길을 사이로 하여 초등학교와 마주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까 팔달교에서 대구 시내로 달려온 국도가 초등학교와 왜옥동네 사이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대구역 뒤쪽과 자갈마당을 거쳐 서문시장 방면으로 달려가는 길이 되었다. 이 단지형 동네는 원래 방송국의 일본인 직원 사택 단지였지만, 해방이 되자 도 군정청에 ‘적산’으로 등록되었다. 불하된 주택은 방송국에 불하되지 않고 단위 집마다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그럼에도 이 단지를 형성한 주요 주민이 결국 방송국 직원들이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을 불하 순서에서 우선적으로 대우한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 동네의 구성원들은 서울말을 쓰는 가족이 적지 않은데다가 주택의 모양부터 왜옥이어서 주변 대구 토착 주민 동네에 대하여 이방지대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 주민은 대부분 그 집의 전 주인인 일본인 방송국 직원을 주인으로 모시던 조선인이 그 주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득권을 이용해서 우선적으로 불하된 것으로 보였다. 황현준이 이 주택을 불하받은 것은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서 방송국과 같은 언론인이라는 신분의 덕을 입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귀국해서 그때까지 거의 반년 남짓 황현준 가족은 초가로 된 대명동 처갓집의 좁디좁은 방 한 칸을 빌어 얹혀살고 있었다. 왜옥 단지가 있는 동네에서 행길을 끼고 서쪽으로 마주 보는 동네는 비산동이었다. 밋밋한 언덕이 오르막을 이루며 초가와 한식 기와집이 무질서하게 얽혀서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동네의 동쪽에, 동네에서는 ‘다오루 공장’이라고 부르는 ‘남선(南鮮)메리야스 공장’과 바로 이웃했다. 동네와 공장의 사이에 무슨 건물이 있었던 자리였는지 넒은 공터가 개방된 상태로 있었다. 학교 운동장의 반쯤은 되어 보이는 그런 너른 마당이었다. 바로 다오루 공장 직원들이 파업 시위하던 장소다. 학교와 왜옥 동네를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그 공장 정문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정문을 마주하여 길 건너편에 또 다른 직조 공장이 학교 옆에 있었다. ‘다오루 공장’과 대각선으로 마주한 자리에 방송국이 있었고, 방송국 동쪽으로 좀 떨어져서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직조공장과 방송국 사이로, 신작로에서 ㅗ 자 모양을 이루며, 농로로서는 넓은 길이 북으로 곧게 벋어 있었다. 그 길은 평소에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는 길인데 트럭 한 대가 일방통행으로 지나갈 만한 폭이었다. 그 길 양편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와 직조공장과 방송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 북쪽편 건물들 뒤로는 논밭이었던 것이다. 그 논밭은 침산까지 사뭇 펼쳐져 있었다. 침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는데 그 산 아래로 전형적인 시골 농촌 마을이 있었다. 침산동. 윤호네 집 앞 길을 끼고 마주 한 동네는 기와 한옥과 왜식 독립가옥이 뒤섞인 동네가 길 따라 상가를 이루고 있었다. 목욕탕도 그쪽에 있었다. 그 상가에는 쌀가게, 주전부리와 과실을 파는 점방, 목욕탕과 이발소와 작은 서점도 있었다. 그 서점은 문씨의 단골 책대본점이기도 했다. 황현준 가족은 해방되기 전해 연말 무렵 귀국했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올챙이 기자로 후쿠오카의 모지[門司] 지국에 특파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총각 시절 견습 딱지를 떼고 몇 달 동안은 말레이지아 전투지역에 종군기자로도 있었다. 사택은 도바다[戶畑]에 있었다. 결혼 사(四) 년째인 그들 부부와 어린 아들 윤호가 거기서 살았다. 당시 아내는 만삭이었다. 옥자(玉子)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현준은 큐슈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군수 공장과 군사 시설 등에 출입하면서 기사를 취재하고 있었다. |
첫댓글 장편 <왜옥동네의 전설>의 제1장 <왜옥동네에 부는 바람>은 이 작품을 따로 연재하고 있는 카페<왜옥동네의 전설>에서 11회분으로 재조정해서 올려 놓았으므로 여기서도 이에 맞추어 제2장 <중근이네 아버지 곽씨>는 12회부터 새로 올리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