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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닙니다.
정장복 목사(한일장신대 총장)
성찬성례전도 약식으로?
어느 평신도로부터 받은 질문이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초창기에는 성례전 주일이 되면 모두가 떡과 잔을 받으면서 주님의 몸과 보혈을 받은 감격에 젖었다고 한다. 또한 성례전 주일에는 많은 교인들이 몸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함으로써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교회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바로 성찬성례전의 참여자를 제한하는 문제였다. 교인들이 천명에 이르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출석교인이 천명을 넘어서자 제직들만 앞에 앉게 하여 성찬성례전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많은 교인들이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들 드리는데 선별된 사람들만 성찬성례전에 나아가 성물(聖物)을 받는다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목사님은 모두가 참여하게 되면 예배를 한 시간 내에 마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취한 방안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매우 충격적인 문제이다. 성찬성례전은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마땅히 참여해야 할 소중한 예전이다. 여기에는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나 직급의 차이가 존재할 수 없다. 진정 모두가 예수님의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와 자매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곳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차별을 둘 수가 없다.
집례자가 다음 세 가지의 사실만 마음에 두었어도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는, 성찬의 초대이다. 성찬성례전의 첫 순서는 주님의 몸과 보혈을 받게 되는 신성한 상에 세례교인들을 초청하는 선언이다. 이 초청은 목사의 판단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집례자로서 의무적으로 선언해야 하는 중요한 순서이다.
둘째는 각 교단마다 가지고 있는 예식서의 내용을 따르는 일이다. 그 내용에는 바로 위와 같은 문제들을 허용하지 않은 질문이 있다. 예를 들어 본 교단의 예식서(1987)에는 집례자가 떡과 잔을 나누어 준 후에 반드시 "다 받았는지 확인할 것"을 밝히고 있다.
셋째는, 세례교인의 의무와 권리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본 교단 헌법 정치편의 제3장 16조에는 "입교인 된 교인은 성찬 참례권과 공동의회 회원권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집례자가 이상의 세 가지 사실만 마음에 둔다면 이러한 기형적인 성찬성례전의 현장은 발생되지 않게 된다. 여기에 부언하고 싶은 것은 성례전을 함께 하는 예배 때의 설교 길이를 조금만 조절하면 예배시간은 지루함이 없이 더 큰 은혜를 받게 된다는 점을 집례자들은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예배하는 공동체에서 제직만 성찬성례전에 초청을 받고 남은 세례교인들은 구경만 하고 있는 예는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진풍경이 될 것이다.
예배 중에 목사의 생일잔치를?
설교를 하지 않는 주일은 평소에 메모해 놓은 제자들의 교회를 찾는다. 그곳을 찾아가 사랑하는 제자가 인도하는 예배를 함께 드리고 그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내게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물론 나에게 교육을 받은 그 목사는 날 반기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이 불청객이 순수하게 예배를 드리는 회중의 한사람이 아니라 그가 인도하는 예배 가운데서 발견된 잘못된 부분을 비롯하여 그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배운 대로 하지 않음을 지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친 교수로서 내 눈 앞에서 전개된 제자들의 오류를 그대로 묵과한다는 것은 교수로서 그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기에 나는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칭찬과 지적을 언제나 수반한 평가를 해주고 있다.
어느 주일이었다. 학생시절 내 강의에 남다른 열심을 보이면서 따르던 제자의 교회를 찾아갔다.
그것도 교회의 위치를 정확히 몰라서 헤매다가 겨우 예배시간에 맞추어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성격대로 성실하게 목회를 하여 개척교회의 모습을 벗어난 것을 보면서 나는 스승으로서 그의 노고를 치하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도 배운 데로 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뚜렷하여 마음이 흡족하였다.
설교가 끝난 후 광고시간이 되었다. 목사의 광고가 끝나자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 큰 생일케익이 설교단 밑에 들어왔다.
그리고 난데없이 우렁찬 오르간의 전주가 나오면서 모두가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의 생일 축하합니다.'하고서 온 회중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누구인가 목사의 머리에 고깔을 씌우자 목사는 케이크를 자른다. 그리고 목사는 그 모습으로 올라가서 축도를 하고 예배를 마친다.
참으로 해괴망측한 장면이었다. 우리 교단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가 그러한 연출을 한다는 것이 회중에게는 부끄럽고 하나님께는 죄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할 엄숙한 순간에 목사가 생일축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들의 변명은 교회가 작아 가족분위기의 교회이니까 친교 차원에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 있다는 어색한 해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예배를 진행하다가 이와 유사한 행위들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도 용납될 수 없다.
이럴 때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예배의 이론과 신학에 이렇게 어두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예배 가운데 평화의 입맞춤(Kiss of Peace)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이러한 순서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친 그들에게 주님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서로가 주님의 동일한 지체임을 강조하는 단순한 행위였다. 어떤 경우도 어느 사람이 예배 중에 영광과 축하를 받는 순서는 그리스도교 예배 역사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없다.
광고는 비예전적인 순서이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광고가 진행된다면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배의 본질을 벗어난 탈선들이 발생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그래서 우리교단의 '표준예식서'에서는 축도로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성도의 교제를 비롯한 각종 교회소식이나 새 신자 환영과 같은 광고를 하도록 규정한바 있다.
일천번제
세계 속의 수많은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눈은 예사롭지 않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앞서 갈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데 교회마다 갖추고 있는 예배당의 규모를 비롯하여 교회마다 열을 올리고 있는 선교의 열정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제정이 필요한 이러한 사역은 서구교회를 놀라게 하는 한국교회만의 큰 자랑이다.
이러한 거대한 기록이 있기 까지는 쓰고 싶고 사고 싶은 모든 인간적인 욕구를 억제해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우선을 두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그 희생정신은 고귀한 것이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바르지 않게 해석하면서까지 하나님께 예물을 봉헌하게 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문제이다. 그 중에 하나가 '일천번제 예물'이다.
이 단어에 대한 뜻을 어떤 교회에서는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경우를 본다. 일천번제라는 어휘는 천일동안 드려진 것도 아니고,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기브온에 있는 큰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일천 마리의 번제물을 단번에 드렸다는 말이다.(왕상 3:4)
이러한 혼돈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래 사용한 개역성경에서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는 번역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언어로 좀더 쉽게 번역한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을 가지고 본문을 읽으면 그 뜻은 아주 선명하게 된다.
공동번역--"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하나 있었는데 솔로몬은 늘 그리로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번제물을 천 마리나 바친 적이 있다."
표준새번역-- "기브온에 제일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므로, 왕은 늘 그 곳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이 그 때까지 그 제단에 바친 번제물은, 천 마리가 넘을 것이다."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예물을 일천 번 뿐만 아니라 2천 번 3천 번을 목표로 하고 드리는 것은 고귀한 믿음의 행위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의 내용과 같은 봉헌행위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장례 예식 때 집례자 복장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인구의 노령화이다. 이 노령화의 말에는 장수(長壽)라는 뜻이 있어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수반되는 많은 문제점이 적지 않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의 구성원들이 자연적으로 노령화되어 가는 문제이다.
서구의 교회처럼 한국교회도 젊은이들 보다는 노인들이 자리매김을 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질적으로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 가운데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 장례행사가 빈번함을 실토한다. 이때마다 늘 받게 되는 질문은 입관 발인 하관을 집례할 때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가운을 입으면 드림천(스톨)은 어떤 색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이러한 질문에 앞서서 우리의 기독교 예전에서 유의해야할 문제를 먼저 본다.
그것은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갖게 되는 예식은 주일예배와는 달리 그 나라의 문화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서구에서 도입된 장례문화를 가지고 우리의 것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이 토착문화를 정복하는 기독교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 문화를 변형시키는 것이 충돌을 피하면서도 뜻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불교와 유교가 지배해 온 우리의 문화에서 장례절차는 매우 엄숙하였고 진지하였다. 그리고 그 절차 또한 격식이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그 예식의 주관자들은 평상복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지 아니한다.
기독교 역시 장례의 예식에는 그 집례자가 가운을 입고 성직자로서 엄숙하게 장례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생명의 종말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게 함과 동시에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생존자들이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예식은 진지해야 하고 많은 교훈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럴 때 장례만을 위한 간편한 일상복을 입는 것보다는 목회자가 정중한 예복을 입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다. 그리고 이때 성직자의 가운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목에 두르는 드림천(스톨)의 색깔은 흰색을 사용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색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개신교에서는 교회력과 관계없이 흰색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흰색은 곧 부활을 상징하고 모든 색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 흰색은 흙으로 빚어진 인생이기에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알리기 때문이다.
기원과 기도는 다르다
예배시간에 평신도들의 참여가 이제는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제2 바티칸 공의회가 1965년 예배예전의 변혁을 결의한 이후부터는 천주교나 개신교 할 것 없이 평신도가 기도 또는 성경봉독의 순서를 맡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성직자의 독무대로 그동안 지속해 오던 예배의 전통에 큰 변화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기도를 맡은 이들의 기도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성경구절을 사용하는 관례이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부르기도 전에 먼저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거나 읽는다. 어떤 이는 전혀 성구를 외우거나 읽지 않고 기도를 한다. 어느 것이 예배 현장에서 적절한 기도의 형태인지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의 답을 위해 기도와 예배에 관한 문헌을 찾아보았지만 한국교회에서 흔히 보게 되는 기도 전에 성경구절을 한 두 절 읽거나 외우는 경우를 찾아 볼 길이 없다. 물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서구의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럴 때마다 의문은 더욱 짙어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관습은 어디서부터 유래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 어떤 문헌에서도 그 대답을 찾을 길이 없는 참으로 난해의 문제였다. 예배학 교수인 필자는 분명한 답을 찾지 못한 체 수년을 넘겨야 했던 고민된 문제였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답을 가르쳐 달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예배를 시작할 무렵에 그 대답이 나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목사가 예배를 시작하면서 드리는 예배의 부름과 기원에서 연유함을 알게 되었다. 목사가 예배 서두에 예배를 선언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배의 부름’을 한다. 이 순서는 하나님이 회중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어야 하기에 반드시 적절한 성경의 말씀으로 이 순서는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서 일반기도가 아닌 기원(invocation)을 한다.
회중들은 여기서 기원을 기도로 흔히들 잘못 이해한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언제나 목사가 드리는 예배 기도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각인된다. 그리고 그 형태는 예배시간에 드리는 기도의 모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기원은 인간의 간구가 전혀 없이 오직 허물 많은 무리들을 정결하게 하시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해달라는 아주 짧은 기원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목회자들에게 주고 싶다. ‘예배로 부름’의 순서 다음에 반주자나 찬양대가 아주 짤막한 응답 송을 한 후에 기원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럴 때 기도 전에 성경을 읽거나 외우는 이상한 관습은 곧 사라지게 되리라 본다.
설교와 간증은 다르다
설교인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어떤 이는 자신의 설교사역에 어려움을 주는 것을 외적인 것에 두고 있다. 설교를 성실히 듣지 않은 교인들이나 또는 열악한 환경을 든다. 그러나 설교의 세계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분석해보면 그 주범은 자신 안에 들어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을 말하고 싶은 유혹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과시에 흥미를 느낀다. 그 흥미의 표출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 물질로, 명예로, 권좌로 자신을 들어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설교자는 이러한 명목들을 소유하지 못하기에 언어로 자신을 들어내는데 익숙해진다. 설교자는 가장 많은 말을 구사하면서 살아야하는 사람이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자료가 그 만큼 풍부해야 한다. 그 자료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또는 삶의 경험이나 풍부한 생각을 가지고 저장된다.
설교자가 많은 지식을 습득하여 그것을 순수하게 전하고자 하는 진리와 접목했을 때 거기는 존경과 함께 경청의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풍부한 자료가 없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만을 나열 할 때는 그 설교는 객관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위력까지 멀리하게 된다.
한국교회 설교사역에서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경험담을 설교마다 들려주는 문제이다. 자신의 경험담이 바닥이 났을 때는 가정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그때마다 설교자의 가정과 생활은 노출되고 말씀의 품위는 식어져 간다. 어느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설교자가 자신과 가정, 그리고 목회하는 가운데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훨씬 생동감 있는 예화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설교자가 생생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줄 때 물론 실감이 난다. 사람이 사람 사는 이야기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감을 얻으려다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훨씬 많다. 무엇보다도 회중들이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바꾸어 설교자와 대화를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중은 어느 개인의 경험담을 듣거나 정치 분석을 듣기 위하여 그렇게도 소중한 시간을 내서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중요한 문제는 집으로 가는 길 생생한 설교자의 이야기는 살아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는 흔적이 없게 된다.
그러한 까닭에 설교자가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정 밖에서 예화를 찾는 데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진 설교만을 언제나 하게 된다. 이 습관이 짙어지면 설교자가 자신을 말하고 싶은 유혹에 계속 빠지게 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흔적을 감추고 설교자만이 위대한 존재로 등장한다.
무원고(無原稿) 설교가 가능한지요?
설교자 한분이 어느 날 이메일을 통하여 질문을 보내왔다. 자신은 설교를 오랫동안 계속하면서도 늘 부러워하는 대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어떤 설교자들이 원고 없이 설교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원고도 없이 내용이 좋은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설교사역에 한계를 느낀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설교를 착실하게 준비하는 편인데도 원고 없이는 설교를 조금도 진행할 수 없다는 고충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무원고'의 설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설교자의 가장 심각한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을 향하여 설교하지 못하고 원고를 향하여 설교를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얼굴을 맞바라보고 눈에서 눈으로 전해야 하는 메시지 전달의 기본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문제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원고를 그대로 읽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고개를 가끔 들기도 하지만 전혀 회중과의 시선교환을 못한 채 원고에 얽매어 설교를 진행한다. 이러한 경우 회중의 불만은 심각하다.
어느 교회에서는 후임목사를 구하는데 원하는 첫 조건은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이었다. 그 이유는 전임자가 설교를 시작하면 끝날 때 까지 회중을 한 번도 쳐다보는 일이 없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설교는 사람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가 TV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그들 앞에는 분명히 원고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원고와는 무관하게 시청자를 직접 쳐다보는 모습을 언제나 취한다. 거기서 시원스러운 뉴스의 전달은 이어진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를 하지만 그들은 모두 성실히 원고를 기록하고 그것을 수십 번이고 읽고 또 읽으면서 수정보완하고 그 메시지에 자신이 먼저 감화되면서, 그 설교가 자신의 몸에 완전히 배이게 한다. 이것을 설교학에서는 화육적 설교(Incantational Preaching)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무원고 설교는 없다. 정리된 원고를 10분의 1로 축약해서 설교단에 서서 원고에 매달리지 않은 모습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럴 때 진리는 훨씬 더 생명력을 수반하여 회중들의 가슴에 뿌려진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말에 동일한 말이라도 그 말이 사용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자칫 잘못하면 말의 본질이 흐려지거나 그 의미의 전달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공적인 언어의 사용은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별로 듣지 못했던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의 표현들이 이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해진 말들이 되었다. 자주 듣게 되는 이 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서신서에 나오는 전치사 '엔'이 우리말로 경우에 따라 '으로' 또는 '안에서'로 번역이 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주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으로'로 번역을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에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로 치유나 말씀의 대언자로 서서 예수님의 이름 또는 성령님의 이름을 빌려 그 권위로 말하는 현장에서는 '으로'로 번역을 했다. 그 실례로 사도행전에서 7회와 다른 곳에서 2회를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든다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행 3:6)나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행 9:27)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1백90여 곳에서는 이 전치사는 모두 '안에서'로 번역하였다. 주로 문안과 격려의 경우는 "예수님 안에서"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로 번역을 하였다. 영어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in'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말에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 이름의 권위와 위엄과 인격을 수반하는 의미의 용어이다. 예를 들어 공문서에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한다"고 했을 때 '주님을 대신하여' 또는 '주님의 이름을 빌어서'의 뜻이 된다. 이때마다 과연 나의 인사말이 주님을 대신한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단순한 생각의 표현이나 바램 까지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해야 하는 우리교회의 언어 표현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서도 인사나 개인적인 권면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 한국교회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별 관심을 갖지 아니한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기독교용어연구위원회'에서는 문안의 경우는 "주님 (주 예수님)안에서 문안드린다"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총회는 이를 채용한 바 있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결정이 총회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도 아직도 우리의 교회는 관습적으로 문안 인사나 환영의 언어나 개인적인 부탁까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감사하신 하나님?
'고마우신 하나님'이 어법에 적절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나눌 수 있는 대화의 파트너를 좋아한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이나 정중한 순간에는 누구나 자신의 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외국인들이 우리 언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의 계층이 많다는 점이다. 예삿말을 비롯하여 낮춤말과 높임말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많은 혼돈을 일으킨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할 때 그 대상이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이 아는 높임말을 최대한 사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도자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적절한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높임말을 사용하면 자칫 실수를 범하기 쉽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감사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 경우를 본다. 기도하는 이의 의도는 알고 있지만 그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말에 '감사'와 '고마움'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고마움'은 순수 우리말이며 '감사'는 그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를 한자로 표기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감사'는 주로 명사와 동사로 사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감사의 생활'이나 '감사하다'라는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에는 매우 어색하다.
예를 들면, '그분은 지극히 고마우신 분이다'라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그 분은 감사하신 분이다'라는 표현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만일 기도하는 이가 주체라면 '감사하신'은 자신의 말에 대한 존대를 나타내는 모순이 발생한다. 만일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일 경우에도 그 또한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감사하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고마우신 하나님'이 적절한 표현이다. 이와 같이 높임말을 사용하다가 실수를 범하는 예가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이러한 실수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부터 익혀온 언어를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일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바른 언어는 생활화 된다. 그러나 최근 우리 주변에서는 언어 사용에 실수를 범하는 사람을 보고서도 바로 잡아주고자 하는 노력이나 충고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옛 어른들은 잘못된 언어나 인격의 모순을 볼 때 마다 거침없이 지적하여 바른 말과 바른 인격을 형성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는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나 기도나 대화 속에서 바른 언어구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녀 이름으로 헌금 드려도 되나요?
어느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매우 짧은 것이었지만 우리의 종교 문화가 한국 교회의 예배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사례였다. 내용인 즉, 어느 집사님이 예배 시간에 예물(헌금)을 드리는데 전혀 교회를 나오지 않는데 자녀들의 이름으로 종종 드린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종교 문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불교에서는 자식의 이름으로 부모들이 시주를 하고 복을 비는 것은 평범한 하나의 절차이다. 오히려 이러한 예전 행위는 날이 갈수록 심하게 권장되고 있는 현실로 보인다. 입시 때마다 몰려든 학부모들의 손길에는 이러한 시주가 가득함을 종종 보게 된다.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도 이러한 사상은 있었다. 특별히 종교 개혁기에 면죄부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까지도 그 이름으로 돈을 바치면서 면죄를 요청할 수 있었던 제도가 종교 개혁가들의 심한 도전을 받게 된 것 중의 하나였다.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올바른 진리의 수호를 위해 이러한 제도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교회는 예수님의 대속의 진리를 재외하고는 어떤 경우도 인간을 통한 대리 행위는 있을 수 없다. 부모를 위한 자식의 희생이나 자식을 위한 부모의 어떤 희생도 효과가 발생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까지도 금할 정도였다.
이러한 교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이기에 교회에 전혀 출석을 하지 않는 자녀의 이름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예배 안에서 드리는 예물은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는 감사와 희생의 봉헌이다. 어떤 경우에도 불교로부터 스며든 종교 행위를 합리화 할 수는 없다. 물론 자식의 구원과 보호를 위한 부모의 심정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배 가운데서 타종교의 모습을 모방할 수는 없다. 자식이나 부모를 비롯하여 나 아닌 타인의 구원이나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는 있으나 예배의 현장에서 그들의 이름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성숙한 교회로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서 있는 우리 한국교회인데 눈을 뜨고 깊숙이 살펴보면 아직도 불교의 냄새가 짙은 사연들을 종종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바른 정신과 내용을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누구나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들이 종종 발생된다. 신령과 진리 안에서 바르게 드려져야 할 우리의 예배이기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방 종교의 관습을 결코 따를 수는 없다.
"자녀 이름으로 드리는 헌금 문제없다"
[기독공보를 읽고] 그것이 아닙니다에 대한 이견
한국기독공보 2005년 5월 7일자 16면에 게재된 정장복 총장서리(한일장신대)의 '그것이 아닙니다. - 자녀 이름으로 헌금 드려도 되나요?'의 글을 읽고서 느낀 점을 적어본다. 이 글에서 정 총장서리는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며, 자식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불교문화와 종교개혁기의 면죄부를 예를 들어 설명을 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헌금은 자기 이름이든 믿지 않는 자녀 이름이든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헌금하는 교인이 불교문화와 면죄부를 생각하고 헌금을 드렸겠는가?
오직 자녀가 예수를 잘 믿고 잘 되라고 했을 것이다. 헌금을 받고 안 받고의 결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목회자들은 믿지 않는 자녀들의 이름으로 헌금하는 것에 대해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헌금을 하지 말라고 하면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런 분을 위해 더욱 기도해주고 위로하고 도와야 한다. 믿지 않는 자녀가 있어도 낙심치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대로 기도하면서 헌금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했다. 기도와 예물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가 될 줄로 믿는다.
형님, 그 기도는 무효인데요!
어느 주일이었다. 교단은 다르지만 동향 출신으로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목사님과는 일찍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인지라 반가운 마음으로 그 분의 설교와 기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이 축도 전에 목회기도를 간절하게 드리는데 매우 감동적이었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삶의 현장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나 역경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기도였다. 그 분은 일찍부터 유명한 부흥사이시기에 그 억양이나 영력의 표현 등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앞에 나타나 "형님! 저 왔습니다."라고 반갑게 인사하자 그 분은 뜻밖의 손님이라면서 나의 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목양실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형님! 축도 전에 드리는 그 기도는 영력이 차고 넘치는 기도였습니다."
"아우! 우리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순서일세. 어떤 교인들은 설교보다 그 기도를 받기위해 열심히 교회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한다네."
"저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형님! 죄송하지만 그 기도는 무효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농담치고는 너무 지나친 듯하네."
"농담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어 드려야 합니다."
"아우! 그 기도 다음에 바로 축도를 하였는데 그러면 안 되는가?"
"축도는 기도의 끝말로 장식될 수 없습니다. 축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 내려주심을 선포하는 강복선언입니다. 축도를 그렇게 사용하심은 잘못되었습니다. 기도 끝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며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면서 순수하게 성경대로 축도를 하시면 됩니다.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그 때 그분은 나의 손을 덥석 잡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우! 방문을 하실 바에는 1년 전에 오시어 나의 잘못을 고쳐주시지 않고 왜 이제야 오시었는가? 나 다음 주일에 은퇴한다네. 참으로 아쉽네."
축도 전에 목회기도를 간절하게 드리는 목사님들은 한번쯤 생각해 볼 대화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고 축도는 순수하게 삽입된 수식어들이 없이 성경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신경 눈 감고 해야 하나요?
주일 예배 순서에 신앙고백은 주로 사도신경을 가지고 고백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두 가지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도신경이 역사적으로 어디서부터 형성, 유래 되었는지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사도신경도 눈을 감고 외워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순수한 신앙고백이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인'사도전승'은 3세기 초에 기록된 문헌으로서 기독교의 예배와 성례전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사도신경은 수세자가 세례를 받기 전에 동의해야 했던 신앙의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형성되었다.
집례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수세자: 예, 믿습니다.
집례자: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라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수세자: 예, 믿습니다.
집례자: 성령과 성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수세자: 예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이상과 같이 세례를 받기 직전에 신앙을 확인하는 절차에 나타난 신앙고백이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명문화시킨 니케아 신경은 기도와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지금도 루터교나 성공회를 비롯하여 많은 외국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때 눈을 뜨고 외우거나 읽는다.
그러나 한국에 19세기 복음을 전한 퓨리탄의 후예들은 이러한 신앙고백도 기도처럼 눈을 감고 고백하도록 한국교회에 훈련을 시켰다. 기도와 동일한 어감과 문맥으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그동안 기도처럼 여겨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감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눈을 감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만을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 앞에 나의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고 다짐하는 기도의 심성을 갖춘 의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눈을 뜨고 허공을 향한 고백보다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눈을 감고 엄숙히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으로 간주한다면 눈을 감고 경건히 고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나 어려움이 없으리라 본다.
내 뜻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의 기도에 대한 열심은 외국의 어느 나라 교회에서도 볼 수 없는 특유한 부분이다. 이러한 기도의 함성이 우리의 교회와 민족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심성과 내용과 형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분석을 해볼 적마다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한반도는 오랜 역사와 함께 무속신앙의 바탕위에 불교와 유교가 뿌리를 내린 나라이다. 이러한 바탕에 상륙한 우리의 그리스도교는 독자적인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땅의 종교적 심성과 그 토양의 영향의 지배를 심하게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기도 내용과 형태가 타종교와 너무 비슷하다. 기도의 대상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만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초대교회의 목회지침서였던 '디다케-열두 사도의 교훈'에서는 매일 아침 정오 저녁으로 3번씩 정기적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면서 기도의 내용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초대교회는 기도의 본질을 지키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형태는 나의 모든 요구를 하나님이 수용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무례한 요구를 펼치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예수님의 기도 내용과 모습을 복음서에서 읽게 된다. 그것은 십자가의 수난을 목전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뚝뚝 떨치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의 멍에를 멀리 해 달라고 애원하던 기도의 모습이다. 견딜 수 없는 치욕과 채찍과 십자가의 고통을 익히 아신 주님의 기도는 어느 누구 어느 사연보다 가장 절박했던 기도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긴박한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한마디를 하시고 기도를 끝맺으셨다. 주님의 이러한 기도는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기도의 중요한 모형이다. 우리 역시 원하는 사연을 다 아뢸 수 있다. 애절하게 울부짖을 수 있다. 함성을 지르며 절박한 응답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셨던 기도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기도를 드릴 때 마다 다음의 한마디는 꼭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만을 보고 사는 모자란 인간입니다. 비록 이 죄인이 원하는 바는 간절하오나 내 뜻과 욕구대로 마옵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예배드릴 때 청바지는 안되나요?
어느 목회목사가 보내온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 청년부의 여대생이 예배와 복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자신이 즐겨 입은 청바지를 착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지를 물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청바지를 쳐다보는 목사는 매우 괴로웠다는 말이다. 이유인즉 무릎을 비롯하여 허벅지 부분까지 구멍이 나서 속살이 이곳저곳에 보이고 있었기에 매우 난처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필자가 보았던 한 실례가 있다. 주중에 주유소에서 본 한 대학생의 하의는 팬티보다 더 짧아 참으로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주일에 예배당에서 정장을 하고 예배에 나타난 그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어제 주유소에서 본 그 대학생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난 서슴없이 어제의 옷과 오늘의 정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가 정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오직 예배와 파티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그때 다시 한 번 그의 예배와 관계된 단정한 복장에 새롭게 감탄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예배는 우리의 외형적인 것보다 내적인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다시 강조한다. 외적인 것에 치중하느라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그 본질을 상실하는 일들은 절대 엄금이다. 그러나 흐트러진 마음 또는 예배의 존엄성을 모르고 자신의 외형적인 모습에 무관심한 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한번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지나친 화려한 복장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청바지는 활동미와 야성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패션이다. 젊은이들이 이러한 복장을 하고서 예배에 찾아오는 문제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 바탕에 옷이란 때와 장소를 가려서 입어야 한다는 기본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잠옷은 잠잘 때를 위하고 체육복은 운동시간에 즐겨 입는다는 기본 상식을 갖추어야 한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를 찾을 때 어떤 복장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대답은 자명하다. 지존자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에 자신이 입고 나서야 할 의복에 모두가 기본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상식은 청소년에 국한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해당된 문제이다. 나의 제일 좋은 마음과 준비와 정신, 그리고 외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하나님을 찾아 예배하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이 상식이 갖추어진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정성이 깃들어 있는 교회이다.
한국의 문화는 제사 날에 새 옷을 가족이 착용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명절에 새 옷을 자녀들에게 입히려고 어머니가 애를 쓰셨던 모습을 회상해 본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 문화이다. 서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예배하는 마음과 자세와 외형의 가꿈이 우리에게는 반만년의 역사 속에 생성되어 왔다. 이 땅에 사정없이 밀려든 서구의 물결이라는 거센 해일에 모두를 다 빼앗겨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준비에 정성을 다했던 이 부분만은 빼앗기고 싶지 않다. 이유는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예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례 받기 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나요?
80년대까지만 해도 좀처럼 듣기 어려웠던 질문들이 종종 들려온다. 그 내용은 주일예배에서 성찬성례전을 하는데 그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에 대한 문제이다. 그 자격을 세례교인으로 제한하고 있는 기존교회의 규정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그 제도를 완전히 외면하고 성찬성례전의 참여자격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교회의 기존질서 속에서 살아온 교인들과 그것을 모르고 살아온 교인들 사이에 상충된 이해가 이어진다는 문제이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등장된 것보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다. 비록 기독교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로 분리되어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 예배의 축인 말씀과 성례전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에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칼빈과 같은 개혁가는 예배에 말씀과 성찬성례전을 축으로 했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를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으로 분류하여 드렸다. 예배의 전반부에서 있게 된 말씀의 예전에서는 누구나 그 자리에 와서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의 성찬성례전에서는 세례를 받지 않는 초신자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고 세례교인들만 남아 기독교 예배의 핵심인 성찬성례전에 참여하게 하였다. 초대교회의 목회지침서로 불리는 '디다케-열두사도의 교훈'에 의하면 세례는 주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다 바칠 각오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그 준비도 매우 철저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아야 했고 이들이 주님의 몸과 보혈을 받을 때는 남다른 감회와 감격이 서려있었다. 이러한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가 지켜야 할 예배의 핵심이며 소중한 전통으로 이어져왔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으로서 예배의 필수적인 사항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교리로서 정착되었고 우리의 한국교회에도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는 매우 소중한 성례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오랜 종교문화 속에서 물든 이방종교의 오염을 벗어나야 세례를 받을 수 있기에 학습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 6개월이 지나야 세례를 받도록 한바 있다.
그러나 최근에 1900년 초기에 발생한 오순절 계열의 교회에서 이러한 과정이 없이 아무나 성찬성례전에 참여하게 하는 모습들이 확산되면서 거기에 호감을 갖는 목회자가 종종 보인다. 이것은 분명히 기존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손상을 입은 현상이다. 비록 성경에 세례교인만이 이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성구가 없더라도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결의를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참여했던 성찬성례전이 그 역사성을 상실하면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가 무너지는 무서운 손실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마음에 두어야 한다.
회중은 이런 설교를 싫어한다
어느 날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교회에는 두 분의 장로님들이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희생적으로 봉사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설교가 끝나고 그 교회 목회자와 두 분의 장로님과 함께 하루를 보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기도하던 중에 서로 화해를 하게 되는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장로님이 마지막으로 자기 목사님께 한 마디 하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마디를 합니다. 목사님! 제발 당회나 제직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교에서는 삼가주세요.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섭섭했던 일들도 설교에서는 언급하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충고를 한 장로님은 목사님의 손을 꼭 쥐면서 "목사님! 죄송해요. 목사님을 정말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두 눈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설교와 성례는 목사에게 맡겨진 고유한 임무이며 책임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설교시간에 손을 들어 질문을 하거나 비판을 할 수 없다. 좋든 싫든 예배를 마칠 때까지 거기에 앉아 있어야 한다. 목사는 이때 자신의 설교 앞에 모두가 수긍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일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렇다. 설교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해석해주고 삶의 자리에서 그 말씀을 현장화 시켜주는 상식선에 도달했을 때, 교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설교를 목회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는 심한 거부감을 갖는다.
여기서 설교자의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몇 마디가 있다. 설교는 목회의 현장에서 뺨맞고 화풀이하는 무대가 아니다. 설교자가 어딘가에서 혹독한 모멸, 수모와 억울함을 당했더라도 설교에서는 그러한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당회나 제직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좌절을 경험했더라도 설교에서는 그러한 사연이 언급될 수 없다. 설교자가 철없는 교인들로부터 극심한 창피를 당했더라도 그러한 흔적을 설교에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목회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설교학의 '제1원칙'이다.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교인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교육을 시키겠다는 발상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 지금까지 설교를 목회의 방편으로 삼은 설교자가 목회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 이러한 설교자는 갈등과 불협화음을 더 강화시키다가 결국 결별이라는 슬픈 종말을 가져올 뿐이다.
설교 전, 꼭 기도해야 하나요?
어느 날이었다. 남달리 설교 사역에 성실성을 보여 많은 교인들이 좋아하는 어느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찬양대의 찬양이 끝난 다음, 설교단에 선 목사가 기도를 드리지 않고 바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예배 후에 목양실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면서 설교 전에 기도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하였다. "제가 알기로는 설교 전의 기도는 타 교단에서는 하지만 우리 교단에서는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는 깜짝 놀랄 대답이었다.
설교 전 기도는 어느 특정 교단에서만 강조되는 일이 아니다. 설교 전에 설교자가 드리는 기도는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이다. 설교단에 서기까지 설교자는 성령님의 손에 붙잡힌 도구이다. 설교자는 순수한 도구로서 본문의 선택부터 석의와 구체적인 적용의 단계, 그리고 모든 설교의 자료까지 수집하였기에 성령님께서 이 단에 친히 오셔서 말씀의 밝은 빛을 발하여 달라는 기도이다. 설교자 자신을 순수한 도구로 삼으시사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시켜 주시고 회중들의 가슴에 필요한 말씀을 성령님이 친히 심어달라는 기도이다. 그래서 이 기도를 'Prayer of illumination'이라고 한다.
칼빈은 이 기도를 매우 비중 있게 생각하였다. 말씀 중심의 신학을 소유한 그였기에 이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부터 성령님의 강한 손길에 그 과정과 결과를 맡겨야 한다는 깊은 신앙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많은 설교자들은 이 기도의 필요성에 동감한다. 실질적으로 준비한 설교의 모든 것을 성령님의 손에 맡기고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 설교를 할 수 있다. 여기 미국의 장로교 예식서에 나타난 설교 전 기도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해 주옵소서.
우리를 잠잠케 하옵시고 주님의 말씀만이 들려지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뜻만을 순종케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설교는 아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특별한 사역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공인된 기관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며, 그리고 세속의 직업을 일체 갖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교자는 성령님의 손에 붙잡힌 순수한 도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할 때마다 성령님의 역사를 구함은 절대적인 요건이다.
축도가 좀 다르네요?
최근 들어 가장 빈번하게 받는 질문은 축도에 관한 문제이다. 내용인즉, 지금까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바울의 축도에다가 설교자의 수식어가 실린 축도만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민수기 6장 24~26절의 문장을 사용하는 축도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매우 좋으나 처음으로 듣는 축도라서 생소함이 있는가 하면 혹시나 목사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학 교육이 얼마나 빈약하고 폐쇄적이었는지를 다시 느끼게 된다.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타난 아론의 축도는 개신교 예배의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이어진 축도이다. 이 축도는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아론,곧 제사장들이 회중들에게 축도를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을 직접 가르쳐 준 매우 소중한 축도의 형태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주역들인 루터나 칼빈은 로마 가톨릭이 사용해온 바울의 축도보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이 아론의 축도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개혁가들이 남긴 예배순서에는 예배의 맨 마지막 순서로서 이 축도를 사용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소수의 교회와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이 축도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 여행을 하면서 그들의 교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종종 묻는 질문은 왜 그들의 축도는 우리의 축도와 다른지를 묻는 일이 지금도 많다. 유럽에 있는 루터교를 비롯하여 많은 개혁교회들이 아론의 축도를 일체의 수식어를 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문장 그대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가 맨 먼저 이 축도를 공식화 한 바 있다. 우리 총회에서는 칼빈을 비롯한 개혁가들이 사용했고 지금도 전 세계의 개신교회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 아론의 축도를 사용하도록 한 바 있다. 바로 그 내용이 1997년 제 82회 총회에서 통과한 표준예식서에 실려 있다.
좀 더 깊이 우리가 행한 축도를 살펴보면 성경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축도 역시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그러나 축도하는 목사가 주어가 되어있는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아론의 축도 역시 인간의 빌고 원하는 축원의 내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이 명실 공히 주어가 되어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는 말씀이다. 그 본문을 여기에 다시 옮겨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예수? 예수님
각각 다른 종교들이 싸움 없이 더불어 사는 나라는 흔치 않다.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전쟁과 폭력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종교 간의 갈등이 숨겨져 있다. 종교학자들이 우리나라의 민족과 종교를 살펴본 뒤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종교가 이 좁은 공간에서 이토록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혹자는 남을 공격할 줄 모르는 우리 민족의 고운 심성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5월에 접어들어 길거리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볼 때마다 왠지 심기가 불편하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석가탄일을 알리는 현수막과 청사초롱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이 땅의 불교인들과 사회에서 거의 모두가 석가탄일을 최근에 와서는 "부처님 오신 날"로 부르고 있다. 그 석가의 탄일을 부르는 이름에는 최선의 존대어가 표시되어 있기에 깊은 관심이 간다.
이에 반해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대상인 성자 하나님을 '예수님'이라 부르지 않고 '예수'라고만 흔히들 부르고 있다. 이 습관은 "예수님 탄생"이 아니라 "예수 탄생"이라고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의 언어문화는 신앙의 대상을 부를 때 '님'자를 언제나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예수님 오신 날에는 '님'자를 철저히 떼고 불러야하는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우리도 '예수'를 예수님이라 부르면서 그의 오심도 '예수님 탄생'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거기에 대하여 같은 성직자를 부르는데도 불교와 기독교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언론 매체들은 불교의 성직자에게는 '님'자를 붙여 '스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직자에게는 '님'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목사','신부'로 통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불교의 성직자는 '중' 또는 '승려'가 객관적으로 불러주어야 할 호칭으로 알고 있다. 우리말 사전에 '스님'은 중이 그 스승을 일컫는 말로서 사승(師僧)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불교의 승려는 '스님'이라 불러야 타당한 것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더욱이 신문이나 방송이 이러한 오류를 범할 때는 참으로 난감한 느낌을 갖게 된다.
혹시 불교의 승려가 도덕적인 차원이 높거나 그들의 종교가 기독교보다 우월하다면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이러한 표현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하겠다. 이러한 표현들이 어느 특정 집단에서 발생된 것이라 보지 말고 우리 스스로 언어의 정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사도신경 눈 감고 해야 하나요?
주일 예배 순서에 신앙고백은 주로 사도신경을 가지고 고백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두 가지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도신경이 역사적으로 어디서부터 형성, 유래 되었는가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사도신경도 눈을 감고 외워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순수한 신앙고백이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인'사도전승'은 3세기 초에 기록된 문헌으로서 기독교의 예배와 성례전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사도신경은 수세자가 세례를 받기 전에 동의해야 했던 신앙의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형성되었다.
집례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수세자: 예, 믿습니다.
집례자: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라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수세자: 예, 믿습니다.
집례자: 성령과 성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수세자: 예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이상과 같이 세례를 받기 직전에 신앙을 확인하는 절차에 나타난 신앙고백이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명문화시킨 니케아 신경은 기도와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지금도 루터교나 성공회를 비롯하여 많은 외국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때 눈을 뜨고 외우거나 읽는다.
그러나 한국에 19세기 복음을 전한 퓨리턴의 후예들은 이러한 신앙고백도 기도처럼 눈을 감고 고백하도록 한국교회에 훈련을 시켰다. 기도와 동일한 어감과 문맥으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그동안 기도처럼 여겨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감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눈을 감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만을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 앞에 나의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고 다짐하는 기도의 심성을 갖춘 의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눈을 뜨고 허공을 향한 고백보다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눈을 감고 엄숙히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으로 간주한다면 눈을 감고 경건히 고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나 어려움이 없으리라 본다.
빌립 집사처럼 세례 줄 수 없나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빌립이 세례 베푸는 행위를 근거로 평신도들도 세례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인이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빌립 집사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하나의 실제사건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교회 내에서 있어온 것들이다. 한때는 이러한 주장이 성직에 대한 도전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평신도들의 이러한 주장이 타당성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당시의 집사와 오늘의 집사는 그 임무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당시의 사도들이 구제와 봉사까지 맡아 진행하다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전담하는 사역의 주역들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보살피는 일들은 신앙의 본이 되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집사라는 직분을 맡겼다.
둘째는, 스데반은 설교자로 빌립은 전도자로 세운 것처럼 일곱 집사들은 사도들이 안수하여 세운 성직의 수임자들이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사도들을 따르면서 충분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신학교 같은 제도적인 교육기관이 없었던 때 그들은 사도들을 수행하면서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필요한 훈련을 철저히 받았던 준 사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을 사도들처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로서 인정을 받았고 사도들이 맡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실력의 사람들이었다.
종교 개혁기에는 만인 제사장을 부르짖던 개혁가들도 교회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 된 곳이라는 정의를 내리면서 이 임무는 목사에게만 국한시키게 되었다. 이것은 사도 시대부터 이어진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최근에는 교회 안에 셀이라는 핵분열과 같은 교회의 구조개편을 시도하는 교회에서 셀마다 평신도 지도자를 목자로 두고 그들이 성례전까지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직자의 임무를 대행하는 기현상까지 보인다.
혹자는 성직자가 부족한 외국의 천주교회에서는 신부가 평신도를 임명하여 성례를 위탁하여 일정지역에 보내는 일들이 있음을 보면서 평신도의 성례전 집행을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마다 가지고 있는 헌법에서는 평신도가 성례전을 행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이 성경과 신학에 입각하여 세운 헌법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축하행사도 예배인가요?
많은 목회자들이 갈등을 겪다 못해 질문을 보내온다. 예배행위가 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각종 행사도 예배라고 이름 하는데 과연 적절한 것인지를 묻는다. 예를 들어 창립기념예배를 비롯하여 회갑예배에 이르기까지 많은 행사들이 교회에서 있게 되는데 이럴 때 목회자는 늘 갈등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런 행사에서는 주로 사람을 위한 순서들이 많은데 이것이 과연 예배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학위취득 축하나 창립예배에서 수고한 사람들을 위한 축사나 표창이나 꽃다발 증정과 같은 순서 등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본다. 지난 역사를 밝히는 경과보고를 비롯하여 땀 흘려 노력한 사람들의 칭찬받을 사연들을 소개하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필요한 순서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순서들이 예배라는 이름 아래 진행될 수 있는지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면 누구나 혼돈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예배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교회의 각종 행사 현장에서는 인간이 영광을 받는 행위로 가득한 순서를 가지고 예배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축도를 함으로 그 예배를 마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문제의 해결은 이미 본 교단의 표준 예식서에서 밝힌바 있다. 그 대안은 간단하다. 교회의 각종 행사는 1부와 2부로 분류된다. 1부에서는 예배를 드린다. 여기서는 비예전적인 어떤 순서도 가미하지 않고 축도까지 순수한 감사의 예배로 드린다. 그리고 2부에서는 예식이라는 이름으로 그 행사에 관계된 모든 순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축사나 공로패 증정이나 경과보고 등의 모든 순서를 2부에서 진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1부의 감사예배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정중함이 있고, 2부에서는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순서를 자유롭게 가지며 부담 없이 그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예배라는 말을 아주 많이 남발하고 있다. 주일 낮 예배를 비롯하여 아기 돌 행사까지 모두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생각 없이 지금껏 진행해온 우리 예배는 그 열심은 대단하지만 내용의 구성에는 문제가 많다. 이제부터라도 각종 행사 때마다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순수한 예배를 드리자. 그리고 나서 예배하는 무리들이 함께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잔치의 분위기를 갖추고 뜨거운 박수와 노래를 부르자. 이럴 때 우리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성도의 교제를 즐겁게 나눌 수 있으리라 본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배와 집회의 차이점을 알고 싶다
어느 분의 질문이다. 예전에는 예배는 예배답게 드리고, 신앙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가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집회처럼 여겨지는 것이 몹시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와 예배의 확실한 정의를 내려달라는 부탁이다.
사실 최근에 교회마다 예배와 집회라는 이름은 구분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거의 획을 긋지 못할 정도로 혼돈상태에 빠져있다. 사전에서는 예배란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집회는 여러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우리 한국교회의 집회의 대표적인 경우는 때를 따라 교회마다 교인들의 신앙과 지적인 향상을 위하여 개최했던 부흥사경회 등이었다. 그 집회들이 일시적인 것이었기에 수요 기도회나 철야 기도회 등을 통하여 집회에서 받은 은혜의 지속적인 효과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일 예배는 이러한 집회적인 성격을 벗어나 순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이 있어야 함을 당연시하였다.
실질적으로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집회와 예배를 구분한다면 그 차이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먼저 집회는 사람 중심이다. 모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알아야 할 것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데 주안점을 둔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를 시도하는 설교가 그 중심이 되어있다. 이때의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함이 당연하나 인간 삶의 현장에서 발생된 각종 간증과 예화도 가미된다.
그러나 예배는 다르다. 사람들이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모인다는 사실에는 동질성이 있지만 그 모임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사전적인 의미대로 하나님만을 향한 의식의 행위이다. 이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무리들이 하나님만을 향하여 경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의식이 전부여야 한다. 예배 가운데서 주시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뵙고 불순종의 죄를 참회하고 예배자의 모든 것을 드리는 봉헌의 행위가 있게 된다. 예배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최선을 다한다. 바로 이것이 예배이다.
많은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집회의 형태로 탈바꿈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하고 그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면서 내 교회에 머물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진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얼마나 진지하게 드리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총회는 21세기의 문전에 들어서면서 미래지향적인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 헌법의 예배 모범을 비롯하여 기독교 용어 바로잡기에 이르기까지 타교단이 하지 못한 일들을 과감하게 진행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재정비는 그동안 생각 없이 사용하던 교회 생활의 용어를 바로잡는데 큰 몫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용어연구위원회의 결정사항은 일반 언론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낸 바 있다.
바로잡은 용어 가운데 하나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 내용은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비롯하여 계시록에 천사의 행위를 서술한 곳까지 10회나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상의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살아계신'이라는 표현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여기서 초점을 둔 문제는 '살아계신'이 아니고 '지금도'라는 표현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지금도 살아계셔서", "지금도 살아계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조금만 음미해보면 모순이 많은 말이다.
예를 들어본다. 집안의 어른을 찾아가 그분에게 "지금도 살아계신가요?", "지금도 살아계셔서 가사를 돌보시나요?", 또는 "지금까지 살아계셔서 참 좋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얼마나 큰 결례를 범하는 일인가? 이러한 말의 내면에는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살아계시군요"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니면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으신 분"이란 뜻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고 타종교처럼 인간으로 와서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다른 신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의 원천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인 줄로 안다. 그러나 그 뜻을 표현하는 언어는 정확해야 한다.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님 앞에 수식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시한부 인격체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시적인 인간이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표기하는 데 모자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더욱 아름답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다음은 본 교단 기독교용어연구위원회에서 결의한 내용으로서 한번쯤 새겨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영원히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
재림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없는데요?
어느 목회자가 보내온 사연이다. 내용이 매우 이채롭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설교를 통하여 자주 듣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최근에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 분은 그 때의 메시지가 자신의 신앙을 깨우는 참 좋은 메시지였음을 회고하면서 그러한 메시지를 회복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메시지는 어느 절기에 선포해야 가장 적절한지 질문하였다.
이 질문은 간단히 넘길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로 언제나 수난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바로 이어져 우리 교회의 초창기는 그들의 압제와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긴박하게 호소해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6.25 한국전쟁과 기형적인 정권의 변화 그리고 기근과 가난 속에서 이 땅 위의 삶이 실로 고단하였다. 이때마다 교회에서는 영원한 평안이 약속되어 있는 주님의 세계를 추구하는 삶을 갈망하였다. 거기에는 자연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게 되었고 그 재림을 위한 준비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여기에는 현실세계의 외면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주님을 언제나 맞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의 형태임에 틀림이 없다. 이 종말론적인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으로 깨끗한 삶을 지속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초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최근,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주님! 어서 오십시오'의 마라나타의 신앙보다는 '주님!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정을 취하고 살만한데 지금 오시는 것보다는 조금 있다 오시면 합니다'의 심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연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듯하다. 그리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망각하는 신앙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대풍조에 설교 메시지가 편승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불현듯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강조하지 않은 것은 설교자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다. 교인들의 흥미유무를 가리지 않고 설교자는 재림의 메시지도 선포해야 한다. 그 시기는 어느 주일도 좋다. 그러나 교회력을 활용하는 목회자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지금의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강조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기를 가리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마음과 삶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은 설교자의 필수적인 소임이다.
교회에서 행하는 성인식
예배 아닌 예식으로 진행해야
우리 개신교에서 성년식을 할 수 있는지? 성년식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성년식은 주일예배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왔다.
성인식이란 성년식(成年式)과 같은 말로써 역사적으로 이 의식은 성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통과 의례이다. 우리 문화권에서도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15~20세의 남자에게는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로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예식을 행하였고, 여자의 경우에는 쪽을 져서 올리고 비녀를 꽂는 의식을 행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1985년 이후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해 만19세 이상의 청소년들을 성년으로 규정하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회당에서 아버지 또는 랍비들이 성년에 이른 남아에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과 역사를 들려주면 아들은 몇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이를 회상하고 암기하면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사명을 다짐한다.
이와 비슷한 전통은 동ㆍ서방 교회에서 말하는 7성례 중의 하나인 견진성사가 있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이 견진성사는 성례로 여기지 아니하나 천주교에서는 세례와 성찬 성례전과 함께 매우 중요한 성례로 여기고 있다. 이 성례는 '분별력을 가질 나이'에 이르는 남녀에게 베푸는데 그 기본 의미는 세례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심화시키는데 둔다고 밝히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확인, 그리스도와의 결합, 성령님의 역사 아래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용기와 행동과 신앙, 그리고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굳은 결합 등이 강조된다. 이 성사는 매우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 주교(主敎)가 베푸는 것이 보통이며, 주교가 안수하고 십자가의 표지를 그으며, 성유(聖油)를 이마에 바른다.
개신교에서 이와 비슷한 의례는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15세가 되었을 때 신앙고백을 새롭게 받고 교리문답을 하는 입교식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중요성의 강조는 천주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 교단의 예식서에 있는 성인식은 위에서 본 견진성사나 입교식과는 달리 우리의 문화권과 맥을 함께하는 성년(표준예식서 280쪽)이라는 예식이 있다. 여기서 내놓은 지침은 만 20세의 남녀에게 신앙으로 마음의 결단을 새롭게 하고 독립된 성인으로 출발할 각오를 하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별히 성인이 된 자신의 삶을 주께 맡기면서 소망의 설계를 하도록 강조하면서 그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 순서 적절한 찬송과 기도 그리고 앞의 의미를 담은 설교를 강조하는 것이 전부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러한 경축례는 예배의 행위로 진행될 수 없고 오직 특정한 시간에 하나의 예식으로 진행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예식도 의미가 함축된 순서들을 갖춤으로 본인의 생애에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공보)
첫댓글 장신대서 정장복 교수님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그때가 생각나네요. 이 내용이 책으로 나와 있지요...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