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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너이새끼화이팅
연의에서의 노숙은 촉과 오나라의 사이에서
촉오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오나라의 책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심삼국지에서의 노숙은 제갈량과 주유의 기싸움 사이에 끼어
상당히 곤란을 겪는 인물이고 삼국을 통합하여 보는 뛰어난 직관력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오나라에서의 노숙의 위치는 주유,육손에 못지않았다고 합니다.
소설 삼국지에서 저평가된 대표적인 인물이 노숙인데
제대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임회군 동성현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재물이 풍부하여 주변에 넉넉한 인심을 배풀어 신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노숙은 임회군 동성현에서 172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자경(子敬)이다. 노숙은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과 함께 집단을 이루어 병법을 연마하였는데 원술(袁術)이 노숙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자신의 휘하에서 봉직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노숙은 원술에게서 곧 떠나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주유(周瑜)찾아가 의탁하였다. 주유의 소개로 손권을 만나 그의 책사(策士)가 되었다. 조조(曹操)의 침략에 대비하여 제갈량(諸葛亮)을 만나고 유비(劉備)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208년 조조가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오나라 대신들이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주유와 함께 싸울것을 주장하였다. 오나라 군대의 총참모가 되어 적벽에서 조조군(曹操軍)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하였다. 주유가 36세에 갑자기 병사하자 오나라 군대의 도독이 되었다. 동맹관계 였던 촉(蜀)의 유비가 형주땅을 반환하지 않자 오(吳)와 촉(蜀)의 동맹이 깨어지고 국경에서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노숙은 관우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노숙은 죽을때까지 촉나라와 동맹하여 조조를 견제한다는 전략을 고수하였다. 그가 217년 46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오나라와 촉나라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와 함께 살았다.[1] 집안이 부유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하고 인재들과 교제를 쌓아 고을의 환심을 샀다.[1]
주유(周瑜)가 거소장(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 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를 쌓았다.[1]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100여명의 소년들을 이끌고 주유가 있는 거소로 갔다.[1] 주유가 거소장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자 함께했으나, 마침 조모가 죽어 고향 동성현으로 돌아갔다.[1] 친교가 있던 유엽(劉曄)이 편지를 보내 함께 정보(鄭寶)를 따르기를 권하였다.[1] 마침 노숙은 장사를 마치고 곡아에 있었는데, 유엽의 말에 따라 북쪽으로 가려 했다.[1] 주유는 노숙의 어머니를 오군으로 모셔 왔었고, 노숙이 정황을 말하자 주유는 자신의 주군 손권을 선양하여 후한 왕실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여 노숙을 만류했고, 노숙은 주유의 설득을 받아들였다.[1] 주유가 노숙을 손권에게 추천했다.[1]
208년 조조(曹操)가 하북의 원소(袁紹)와 관도대전에서 싸워 이기고, 하북을 평정한 기세로 유종(劉琮)의 형주마저 점령하니 조조는 마침내 강동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손권의 신하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여 오나라의 평화를 지키자고 주장하였으나, 노숙은 홀로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형주를 점령, 조조와 항전하자고 주장하였다. 노숙은 당양으로 가서 유비와 동맹을 맺고, 주유의 활약으로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대패한다. 210년 주유를 이어 강동의 군권을 거느리게 되었다. 217년 여몽(呂蒙)을 후임으로 선정하고 병사하였다. 노숙은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를 건의하였으며, 사람됨이 온화하였다.
200년 : 노숙의 임관
산월평정 시작
203년 : 황조격파(★)
205년 : 상요토벌(하제)
206년 : 반림토벌(육손)
마둔, 보둔 정벌(주유)
황조의 시상공격
207년 : 1차황조정벌(★)
208년 : 2차황조정벌(황조 사망,★)
적벽대전(☆)
209년 : 남군정벌(★)
강하토벌(★)
211년 : 낭치의 난(하제)
213년 : 1차 유수대치(★)
팽재, 이옥, 왕해의 난(하제)
214년 : 환성정벌 (☆)
손,유의 형주분쟁 - 익양대치(☆)
215년 : 1차합비전투(★)
216년 : 우돌의 난(하제, 육손)
217년 : 2차 유수대치 - 봄에 보낸 두통의 편지(★)
노숙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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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 거리*
[촉과 오나라의 중재자 노숙]
노숙은 상당히 담략이 크고 탁월한 손권의 참모로서 < 연의 > 적벽대전편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 연의 >의 저자 나관중의 일관된 시선은 주유와 노숙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담겨 있다. 특히, 노숙은 친유비 정책의 표방으로 가장 곤욕을 치루었는데, 나관중은 그의 외교노선이 시종일관 유비와 제갈량에게 이용만 당한 무익한 것인냥 왜곡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숙은 흔히 '소심하고 지략이 부족한 인물'로 비춰지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건대, < 정사 >와 < 연의 >의 차별성이 심각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노숙이며, 실질적으로 유비의 입장에서 노숙의 외교노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숙은 다른 의미로 접근해야 한다.
1. 손권 - 유비 연합의 구상, 그 의미 - 본질은 주유와 동일
주유가 2자 구도론을 구상한 반면, 노숙은 일반 삼분에 입각하여 유비에 대한 관계설정에서 주유와는 뚜렷한 시각차를 보여준다. 그래서 흔히 각론상 차이점이 뚜렷하다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흔히 노숙의 친유비 노선에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대개 이러한 오해는 "유비의 삼분론과 노숙의 그것이 가진 방법론적 공감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러한 의혹은 노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출발한다. 노숙은 단 한 번도 오나라를 중심에 두지 않고 삼분론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외노선에 있어서 주유와 엇박자가 났기 때문에 이것이 자주 어긋났고, 그 때마다 노선을 자주 변개한 데 따른 결과였을 뿐인 것이다.
일찍이 말했듯이, 제갈량이 설파한 '삼분'의 이론은 당대 학자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던 의식이었다. 특히, 반 조조 진영에서는 대체로 이러한 관점의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하북을 점령함에 따라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삼분'이란 반드시 3개 세력의 분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대체로 중소세력의 연대를 통해 강대한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노숙 역시 그러한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제갈량과 연합의 필요성에서는 공감대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기에 노숙이 유비와의 연대를 추진했고 양측의 외교적 동맹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관점에 있어서 노숙과 유비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유비는 형주를 매개로, 유비를 오에 궁극적으로 포함하는 연합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의 형주지배에, 주유와 달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은 그 한 사례로 보여진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창업주로부터 2대 후계자인 손권이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유비를 제어할 수 있을까? 주유의 시각과 노숙의 그것이 엄밀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주유가 일찍이 '유비의 동오 소환과 관우/장비/조운/제갈량의 오군 편입'을 요청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노숙은 이러한 극단적 수단이 불러올 폐단을 염려하고 있었다. 유비는 효웅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극한의 수단으로 제어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노숙의 '삼분론'은 '형주 할양을 전제로 통제권을 갖는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남형주에 대한 유비의 점령권을 인정하는 대신, 북형주의 조조와 맞서게 함으로써 국력을 소진시킨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구상은 적벽대전 초 '육전 유비, 수전 손권'의 역할분담론에도 담겨 있었다. 수상전을 바탕으로 서진, 공백지인 남형주를 제압하는 동안 조조 - 유비의 남북 대립구도를 형성, 힘을 소진시킨다 - 그러나 주유가 성급하게 북형주 강릉 쟁탈에 힘을 소진함으로써 이 구상이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이 때문에 노숙은 남형주를 점령한 유비의 세력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방법을 수정하여 유비의 형주목 인정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2. 노숙의 '삼분론'은 결국 주유와 동일 - 노숙 '삼분론'의 진실
그렇지만 형주 지배 인정이 궁극적인 손권 - 유비간 동맹의 본질을 훼손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유비와 달리, 손권은 단 한 번도 유비를 동등한 수준의 '동맹'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오나라의 입장에서 '소유권'은 이미 적벽대전을 주도한 오나라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유비에게는 조차한 것일 뿐 완전 할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노숙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비가 익주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을 때 "익주 점령 후 반환"을 전제로 계속 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물론 반환시점과 방법에 대한 양측의 이견은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분란의 소지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유비가 내부자의 도움으로 익주의 유장을 제압하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다. 왜 예기치 못했다는 것인가? - 이것은 주유가 파구까지 진격했다가 실현하지 못했을 만큼, 익주의 지리적 험난함과 배외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비가 예상밖으로 익주 별가종사 장송의 내응을 받아 손쉽게 익주에 입성한데 이어, 3년 후 제갈량이 재차 구원군을 인솔, 낙성과 면죽을 잇따라 격파하고 성도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익주의 점령으로 유비의 영토는 광대해졌고 오와 대등한 국력을 보유하게 되어 제어가 어려워졌다. 이에 노숙의 태도도 180도로 달라진다. 상수를 경계로 국경선을 일시 분할한 후에도 양측의 갈등은 높아졌고, 노숙 또한 이러한 정책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 연의 >의 기록을 봐도, 당시 노숙이 사망한 후 오나라의 형주공략을 주도할 때 반대한 인물은 제갈근 뿐이다. 그만큼 오나라의 내부 형편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추정컨대, 이러한 분위기는 그 이전이라고 해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즉, 노숙의 생전에도 유비의 익형 점령으로 반유비 감정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전략적 제휴를 꿈꾸던 노숙의 입지가 좁아졌으며, 노숙 역시 이미 이 시점에서는 전략적 제휴가 어렵다는 점을 공감했을 것이다. < 연의 >의 육구 회담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노숙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렸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노숙이 조기 실각하지 않은 것은 유비와의 불필요한 대립을 막는데 그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며, 그만큼 오나라에서 노숙이 끼친 공로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비와의 외교노선으로 시종일관 노숙이 어려움에 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노숙의 역할을 작게 보아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사실 손권과 유비 양측에게 있어서 노숙의 역할은 '파국'을 막는 최후의 보루이자 중요한 외교적 창구였다. 이 때문에 노숙의 생전에는 양측이 갈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유비를 끌어들여 조조를 제압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손권과 유비 양측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보여진다. 이 때문에 나는 노숙도 마땅히 오나라의 영웅으로 손색이 없다고 본다. 노숙이 아니었다면 적벽대전의 신화가 창조될 수 있었겠는가 - 노숙의 행보에서 삼국지의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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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의 배짱]
유표가 죽자, 노숙은 손권에게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형초땅은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며, 강물의 흐름은 북쪽으로 흘러내리고, 밖으로는 장강과 한수를 두르고 있고, 안으로는 험준한 산이나 구릉이 있으며 견고한 성이 있고, 기름진 평야는 만리나 되고, 관리와 백성들은 풍부합니다. 만일 이곳을 차지하여, 소유한다면, 이것은 제왕의 자본이 될것입니다. 지금 유표는 죽었고, 그의 두아들은 평소화목하지 못했고, 군대안의 장수들은 각각 두패로 나뉘어져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개다가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수 없었습니다. 만일 유비가 그들과 똑같이 된다면, 마땅히 어루만져 안정되게 하고, 동맹을 맺어야만 하지만, 만일 그들 사이가 벌지고 어그러진다면, 마땅히 새로 계획하여, 대사를 완성할것입니다. 저는 명을 받들어, 유표의 두아들에게로 가서 조문하고, 어울러 그군대안에서 실권을 지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유비에게 유표의 부하들을 어루만져 같은 마음 한뜻으로 함께 조조에게 대행하도록 설득하기를 바랍니다.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명을 다를것입니다. 만일 성공한다면, 천하도 평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즉시 가지 않는다면, 아마 조조가 먼저 기회를 잡게 될것입니다. " 손권은 즉시 노숙을 보내 가도록 했다. 노숙은 하구에 도착하여, 조조가 벌써 형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갔다. 노숙이 남군까지왔을때. 유표의 아들 유종은 이미 조조에게 투항했고, 유비는 두려운 나머지, 급히 달아나 장강을 건너려 했다, 노숙은 유비를 직접 나가서 맞이하려고, 당양현 장판까지 갔다.-오서 <노숙전>
요약:형주땅은 좋지만 유표의 아들들이 갈러서 있으니 조조가 줏어먹기 전에 유비를 구심점삼아 형주세력을 유지시키자.
문제는 이건 엄연히 적대국의 후계구도를 간섭하는 것이라 점. 사실 유표와 손권세력은 손견대부터 다투고 있었고, 사이가 매우 안좋은 편인데 웬 적대국 사신이 와서 이래라 저래라하면 듣지 않는게 원칙이 아닌지...
애초에 유종의 후원자 채씨일가는 유비와 사이가 매우 안좋기에 따를 이유가 없는데 외부인 노숙이 이걸 알리가..
역시 노숙은 호걸에 가까운 문인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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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서 보는 노숙]
1. 노숙은 그는 태어나면서 부유했으며,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집안에는 재산이 있어 부유했으며, 천성이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이당시 천하가 혼란스러웠으므로, 노숙은 집안일에는 종사하지 않고, 재물을 대량 풀고 농토를 공개적으로 팔아서,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인사들과 사귀는 데 힘썼다. 때문에 고향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많이 얻게 되었다.
(매력입니다. 부자노숙,,, 부럽다, 태어날때부터 부유했대)
2. 주유의 거소가 장이되자. 수백명을 데리고, 일부로 노숙을 방문해 자금과 식량을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곳간 두곳에 쌀이 각각 3천곡씩 있었다.노숙은 즉시 한곳간을 털어서, 주유에게 주었다. 주유는 노숙이 비범한 인물이란걸 한눈에 알았다. 그래서 서로 친한교분을 맺고, 춘추시대의 공손교와 계찰같은 두터운 친구관계를 맺었다.
(유명한 주유의 3천곡갈취,ㅋㅋㅋㅋ 그걸 또 뜯겨주고 주유랑 친구먹습니다)
3. 원술은 노숙의 명성을 듣고, 곧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노숙은 원술이 기강도 없고, 함께 공업을 세우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곧 노약자를 데리고 민첩하고 용감한 청년 1백명을 인솔해 남쪽으로 거소현까지 가서 주유에게 투항했다. 주유가 동쪽으로 장강을 건널때, 그를 따라 동행하다가 곡아현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렀다. 마침 노숙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므로,동성현으로 돌아와 안장시켰다. (원술을 버리고 주유를 따라갑니다)
4. 노숙은 체구가 사내답고 훌륭하였으며, 젊어서부터 장사의 절의를 갖고 있었고, 기략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천하가 어지러워졌으므로, 격검과 기사를 공부하였고, 젊은이들을 모아 먹고 입는 것을 돌보아주고, 남방의 산중에 왕래하며 사냥을 하고, 은밀히 이들을 편성하여 무술을 가르치고, 군세를 조련하였다. 가문의 어른들이 말하였다. [노씨 가문은 대를 거듭하면서 쇠퇴하여졌는데, 이렇듯 기백이 우리들과는 다른 아이가 태어났구나!]
(헐 노숙의 무력일화입니다. 젊어서 장사의 절의, 격검-기사-사냥-무슬가르치기 뭐 이정도면 무력이 50대는 아닌데요?ㅋㅋ)
5. 군웅들이 차례로 일어서며 중주(중원을 말하는 듯)가 혼란하게 되자, 노숙이 가족들에게 물었다. [중국은 기강이 해이해져, 도적들이 광란하고 있소. 회수, 사수유역은 자손을 남겨둘 곳이 못되오. 강동은 만 리에 걸쳐 기름진 땅을 품고 있고, 백성들은 풍요하고 군세는 강성하다고 들었소. 피난할 장소로 충분하다 여기오. 함께 낙토로 피하여, 시세의 변화를 지켜보지 않겠소?] 그의 가족은 모두 그 말에 따랐다. (전략적 안목이 보입니다.ㅋㅋㅋㅋ)
6. 주의 관청에서 기마무사들이 쫓아왔으므로, 노숙은 이동 속도를 늦추고 군세를 정돈하여 영격의 태세를 취하며 그들(추적자들)에게 고하였다. [경들은 장부이니 천하의 정세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오늘날, 천하에는 병란이 일어났으니, 공적이 있더라도 이를 포상받지 못하고, (우리를) 추적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우리를 쫓는 것인가!] 또 스스로 방패를 세우고는 활을 당겨 이를 쏘니, 화살이 전부 방패를 관통하였다. 기마무사들은 노숙의 말에 감동하였고, 또한 그를 제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스스로 물러났다.
(뭐야 노숙. 왜... 내가 아는 노숙하고 다른노숙인가...)
7. 노숙은 장강을 건너서 손책을 만나러 갔으니, 손책 쪽에서도 그를 훌륭한 인물이라 여겼다.
유자양은 노숙과 친한친구이다. 그는 노숙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지금 천하의 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났으니, 그대의 자질과 재능은 특히 오늘날 이용해야만 하오. 급히 돌아와서 노모를 맞이하고 동성현에서 체류하지 말도록 하시오. 최근 정보라는 자가 거소(소호)에서 1만여명을 모았소. 그가 차지한 땅은 비옥하고 풍요로워 여강 일대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에게 의지하러 가고 있소. 하물며 우리같은 무리는 어떻겠소. 그형세를 보니, 선비를 대량 모이게 할수있소. 때를 잃을수 없소. 그대는 신속히 가시오.노숙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조모를 안정시킨후, 곡아현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노숙은 북쪽으로 가려고 했다. 마침 주유는 노숙의 모친을 오군으로 이주시켜 놓았었다. 노숙은 그 상황을 주유에게 구체적으로 말했다. 당시 손책은 이미 죽고 손권이 여전히 오군에 있었다. 주유가 노숙에게 말했다.
(유엽이 노숙을 꼬십니다)
8. "옛날 마원은 광무 황제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정세는 군주가 신하를 선택할수 있을뿐만 아니라.신하도 군주를 선택해야 합니다'라고 했소. 지금주인(손권)은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선비를 존중하며 특이한 재능이 있는자를 등용하고 있소. 게다가 나는 이전의 철인들의 비밀스런, 의론에서 천명을 이어 유씨를 대신할 자는 반드시 동남쪽에서 흥기한다고 들었는데... 형세의 변화를 추측해 보면 지금은 한가의 운수가 다한때므로, 오의 군주가 나라를 창립하여 천명에 부합할수 있소. 이는 봉황의 날개에 붙어 - 영주를 섬겨 공명을 세운다는 의미 - 달릴때인 것이오.우리가 지금 중용한다면, 그대는 유자양의 의견에 개의할 필요가 없소."
노숙은 주유의 말을 따랐다, 주유는 노숙을 추천하면서, 재능은 이시대를 보좌해야 하고,응당 노숙같은 인재를 널리 구하여, 공업을 이루어야 하므로, 그를 떠나게 할수는 없다고 했다.
(주유가 다시 꼬셔서 넘어가는 노숙)
9. 빈객들이 물러날때. 노숙 역시 인사하고 나가려고 하였는데...손권은 유독 노숙만을 데리고 돌아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은밀히 의논하여 말했다. "현재 한왕실은 기울고 위험한 상태이며, 천하 사방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처럼 소란하오. 나는 아버지와 형이 남긴 기업을 계승하여, 제환공과 진문공의 공업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소.그대는 몸을 굽혀 공손하게 나에게 왔는데, 어떻게 보좌할것이오.?"
노숙이 대답했다. "옛날 한고제가 마음을 다하여 초의 의제를 존중하여 섬기려고 했으나, 원하는 대로 얻을수없었던 것은 항우가 해롭게 했기때문입니다. 오늘의 조조는 옛날의 항우와 같습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환공과 문공처럼 될수 있겠습니까 ?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왕실은 다시 일어날수 없고, 조조는 신속하게 제거되지 않습니다. 장군을 위한 계획은 오직 강동을 차지하고 천하의 변화를 살피는 것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이와 같으면, 또 의혹을 초래하지 않을것입니다. 무엇때문이겠습니까? 북방에는 진실로 힘써야 할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힘써야 할일이 많을 때를 이용해 황조는 소멸시키고, 나아가 유표를 공격해 장강유역을 차지하여, 자기 소유로 만든연후에 제왕이라고 칭하고, 천하통일을 꾀하는것,이것이 한고제의 사업이었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지금은 한쪽으로만 힘을 다하여, 한왕실을 보좌하기를 바랄 뿐이오. 그대가 방금 한 말을 내가 미치는 바가 아니오."
(노숙의 전략적안목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손권은 참 정이 많은 인물이군요)
10. 장소는 노숙이 겸손하지 않고, 불만스러워 한다고 비난하고,나이가 어리고 거칠어서 임용할수 없다고 몇차례 헐었다.
손권은 이에 개의치 않고 노숙을 더욱 귀중하게 여겼으며, 노숙의 모친에게 옷과 휘장,생활용품을 내려서 과거처럼 부유해지게 했다.
(장소는 노숙을 왜싫어할까요)
11. 유표가 죽자, 노숙은 손권에게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형초땅은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며, 강물의 흐름은 북쪽으로 흘러내리고, 밖으로는 장강과 한수를 두르고 있고, 안으로는 험준한 산이나 구릉이 있으며 견고한 성이 있고, 기름진 평야는 만리나 되고, 관리와 백성들은 풍부합니다. 만일 이곳을 차지하여, 소유한다면, 이것은 제왕의 자본이 될것입니다. 지금 유표는 죽었고, 그의 두아들은 평소화목하지 못했고, 군대안의 장수들은 각각 두패로 나뉘어져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개다가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수 없었습니다. 만일 유비가 그들과 똑같이 된다면, 마땅히 어루만져 안정되게 하고, 동맹을 맺어야만 하지만, 만일 그들 사이가 벌지고 어그러진다면, 마땅히 새로 계획하여, 대사를 완성할것입니다. 저는 명을 받들어, 유표의 두아들에게로 가서 조문하고, 어울러 그군대안에서 실권을 지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유비에게 유표의 부하들을 어루만져 같은 마음 한뜻으로 함께 조조에게 대행하도록 설득하기를 바랍니다.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명을 다를것입니다. 만일 성공한다면, 천하도 평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즉시 가지 않는다면, 아마 조조가 먼저 기회를 잡게 될것입니다. " 손권은 즉시 노숙을 보내 가도록 했다. 노숙은 하구에 도착하여, 조조가 벌써 형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갔다. 노숙이 남군까지왔을때. 유표의 아들 유종은 이미 조조에게 투항했고, 유비는 두려운 나머지, 급히 달아나 장강을 건너려 했다, 노숙은 유비를 직접 나가서 맞이하려고, 당양현 장판까지 갔다.
그는 유비를 만나 손권의 뜻을전하고, 아울러 강동이 강대하고, 견고함을 설명했다. 그리고 유비에게 손권과 힘을 합치도록 권유했다. 유비는 매우 기뻐했다. 당시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왔었는데...노숙은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제갈근)의 친구요"
곧 우호관계를 맺었다. 유비는 하구에 도착하자 마자. 제갈량을 사자로 삼아, 손권에게 보냈다. 노숙 역시돌아가 복명했다.
(드디어 유비와 노숙의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외교관 노숙)
12. 마침 손권은 조조가 강동으로 침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장수들과 상의를 하였는데...모두 손권에게 조조를 맞아 항복하라고 했다. 그러나 노숙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손권이 일어나 옷을 갈아 입으려고 하자. 노숙은 그뒤를 따라 처마 아래에까지 갔다. 손권은 그의 마음을 알았으므로, 노숙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대는 무엇을 하려하오 ?"노숙이 대답하여, 말했다.
"사람들의 의견을 자세히 살펴보니, 전적으로장군을 잘못되게 만들려고 하고있습니다. 그들과는 대사를 도모할 가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 지금 재가 조조를 맞이한다면, 조조는 당연히 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인물평가를 하여, "하조공사"의 직책보다. 낮게는 하지 않을 것이며,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관리나 병사를시종으로 따르게 하며, 인사들과 교제하고, 관직에 있는, 해가 쌓이면, 주나군을 잃지나 않을 것입니다.장군께서 조조를 맞이한다면,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습니까? 원컨데 큰 계획을 일찍이 정하여, 사람들의 의견을 쓰지 마십시요"손권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사람들이 견지한 의견은 나의 소망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었소.오늘 그대가 원대한 계획을 분명하게 밝힌것은 나와 생각이 일치하오.이것은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내려준 것이오."
(전쟁을 촉구합니다. 노숙의 지력도 업)
13. 당시 주유는 사자의 임무를 받고, 파양으로 갔는데 노숙은 쫓아가서 주유를 불러 돌아오도록 했다. 손권은 주유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노숙을 찬군교위로 임명하여, 주유가 전략을 새울때 돕도록 했다. 조조가 싸움에서 패하고 달아나자 노숙은 즉시돌아왔다. 손권은 장수들에게 노숙을 영접하도록 정중하게 요청했다. 노숙이 궁전으로 돌아와 손권을 알현하려고 하자, 손권은 일어나 그에게 예의를 나타내고, 곧 이렇게 말했다. "자경 내가 안장을 짚고 말에서 내려맞았다면, 그대의 공을 충분히 빛낼수 있지 않았겠소 ?"노숙은 작은 걸음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말을 듣고, 놀라지 않는자가 없었다. 노숙은 자리에 앉은후, 천천히 채찍을 들고 말했다."원하는 것은 존귀한 군주의 위엄과 덕망이 천하에 더해져, 구주를 통일하여, 제왕의 사업을 완수하고, 다시 특별한 수레로서, 현명한 인사들을 부르고 저를 부르신다면, 비로서 빛날뿐입니다. "손권은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며 웃었다. 후에 유비가 경구로 와서 손권을 알현하고, 주를 관할하기를 청했을때. 오직 노숙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유했다. 조조는 손권이 토지를 유비에게 이용하도록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마침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붓을 땅에 떨어뜨렸다.
(조조가 붓을 떨어뜨렸다는게 가장 중요한내용....은 아니고 노숙의 주전론이 중요한 내용이죠.ㅎㅎ)
14. [한진춘추] - 여범은 유비를 묶어두도록 권하였으나, 노숙이 말하였다. [안될 일입니다. 장군은 신무명세인 분이시라고는 하나, 조공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경지이며, (우리 군이) 형주에 주둔한 직후인지라 은총신의는 아직 널리 퍼져있지 않습니다. 유비에게 이를 빌려주어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조조의 적을 늘리는 한편, 우리측의 친구를 만드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손권은 곧 이를 받아들였다.
(노숙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자고 하는군요. 유비로써는 노숙만한애가 없네요)
15. 주유는 질병이 위독해지자.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지금 천하에는 사건이 많고, 전쟁이 끊이지 않으니, 이것은 재가 밤낮으로 걱정하는 바입니다.원컨데 군주께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근심한 연후에 즐거운 생활을 누리십시요. 현재 조조와의 적이고, 유비는 가까이 공안에 있으며, 변방지역과 가까이 있고, 백성들은 아직 귀의하지 않았으니, 응당 훌륭한 장수를 얻어서 진무시켜야만 합니다. 노숙은 지혜와 지략이 있어, 이일을 맡기에 충분하니, 저를 대신하도록 해주십시요. 제가 죽은 그 당일이라도 해도 걱정할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주유는 노숙을 추천하고...)
16. 즉시 노숙을 분무교위로 임명하고, 주유를 대신해 병사들을 다스리게 했다. 주유의 병사4천명과 봉읍 네현도 노숙에게 예속시켰다. 손권은 정보에게 남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노숙은 처음에는 강릉에 주둔하였고, 후에 내려와서 육구에 주둡했다. 그가 다스린 곳은 위엄과 은혜가 크게 시행되었으므로, 수하의 사람들은 1만여명으로 증가했다. 그는 한창태수,편장군으로 제수되었다.
(뭔가 노숙 일을 되게 잘하네요)
17. 19년(214년)노숙은 손권을 따라 환성을 격파시키고, 횡강장군으로 전임되었다. 이 이전에 익주목 유장의 기강이 쇠퇴해지고, 느슨해졌으므로, 주유와 감녕은 나란히 손권에게 촉을 취하도록 권했다.
이후에 유비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장을 병탄하려고 도모하며, 관우를 남겨 지키도록 했다. 손권이 말했다. " 교활하게 포로가 감히 속이다니 "관우는 노숙이 경계를 인접하고 있게 되자.자주 의심이 있었으므로 경계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그들을 진무시켰다. 그러나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장사,영릉,계양의 반환을 요구했다. 유비는 이요청을 거절했다.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취하도록 했다, 유비는 이소식을 듣고, 직접 공안으로 돌아와서 관우를 파견해 세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익양대치...)
18. 노숙은 익양에서 관우와 서로 대항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차례 질책하여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것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익주를 얻었으면서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있던 어떤 한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뿐.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 (이건 연의에서는 주창이 말합니다)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유비는 상수를 경계로 하여 나누었으며, 쌍방의 군대는 대결을 끝냈다.
(노숙의 사자후, 뭔가 무서워요 벽력같은 소리래.)
19.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이써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치 않으면 아니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관우가 말하기를 [오림의 전역에서는 좌장군(유비)은 군중에 몸을 두시고, 주무실 때에도 갑주를 풀지 않으셨으며, 협력하여 위를 격파하였던 것이오. 어찌 우리가 고생한 것을 무로 돌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길 수 있겠으며, 족하(노숙)는 무슨 연유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오?]라 하였다. 노숙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지 않소. 본시 장판에서 예주(유비)를 살펴보았을 때, 예주의 군세는 일교(한 부대)를 이룰만한 병력에도 차지 않았고, 계략과 사려는 이미 다하였으며 전의도 기세도 모두 무너진 상태로, 멀리서부터 도망쳐 숨고자 생각할 뿐으로, 도저히 그것(위군을 격파하여 형주를 손에 넣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소. 주상은 예주가 몸을 둘 곳조차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토지나 휘하의 힘을 보태주시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며, 그가 세력을 돌볼 수 있도록 비호를 더하여 그 곤란을 구제하셨소. 헌데도 예주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은의에 등을 돌리고 호의를 져버렸소. 지금 이미 서쪽의 주(익주)를 (스스로 몸을 기댈 곳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주의 땅까지 차지하려 하다니. 이는 범부라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행위로, 어찌 군주란 자가 할 바이겠소! 내 듣기로는 탐욕을 따라 움직이며 의를 버리는 것은 필시 재난을 불러오는 것이라 하였소. 그대는 중임을 맡았음에도 분수를 모르면서 도리를 지키거나 의를 받들어 보필치도 못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군세를 의지하여 힘을 겨루고자 하나, 부곡(군대)이 이미 흐트러졌음에도 어찌 겨루어 이길거라 생각하오?] 관우는 이에 답하지 못했다.
(설전 패배 [관우는 경증을 입었습니다])
20. 노숙은 46세 건안 22년 (217)에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그를 위해 애도를 했으며, 또 장례식에 참가 했다. 제갈량 또한 그를 위해 애도했다.손권은 제위에 올라 단에 올라갔을때. 공경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 노자경을 일찍이 내가 제위에 오를 것을 말했는데...그는 형세의 변화에 밝았다고 할수있소."
(손권의 멘트)
21. 노숙의 사람됨은 근엄하여 겉을 꾸미는 거나 하지 않았고, 공사에 걸쳐서 검약에 힘썼고, 저속한 취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군세를 통솔하는 때에도 이를 잘 정돈하여, 금령은 반드시 시행되게 하였고, 진중에서도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담론에 뛰어났고, 문장 솜씨도 뛰어났으며, 사려는 원대하여 다른이의 배나 되는 총명함을 갖고 있었다. 주유 이후의 세대에서는 노숙이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완벽주의 참모 노숙의 사람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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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노숙과 실제 노숙의 차이점]
나관중의 붓 아래 표현된 노숙은 온화하고 우아하며, 충성스럽고 솔직하고, 덕성스러운 기풍이 다분하다. 그러나 솔직함이 너무 지나쳐 심지어 좀 멍청할 정도이다.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제갈량과 주유는 여러 차례 불꽃 튀는 지혜 다툼을 벌인다. 중간에 처한 노숙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진위와 허실을 분별하지 못한 채 단지 두 사람 사이의 눈앞에 나타난 모순을 평정하는 중재인 역할만 한다.
제갈량이 풀 배로 10만 개의 화살을 얻으려고 할 때, 제갈량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그의 계책이 뭔지 몰랐으며 제갈량이 배 안으로 불러들여도 무슨 뜻으로 불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제갈량이 캄캄한 안개 속에서 병사들에게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게 하니, 놀란 노숙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조군의 공격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조조가 채화(蔡和)와 채중(蔡中)을 동오에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케 하고, 주유는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이 두 사람을 역이용하여 거짓 소식을 전하게 할 때도 제갈량은 이미 그것을 간파했으나 노숙은 뒤늦게야 겨우 깨닫는다.
주유가 고육계(苦肉計)로 황개를 매질할 때도 제갈량이 알려주어서야 깨닫는다. 수차에 걸쳐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도 노숙은 제갈량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종종 제갈량에게 대책 없이 설득만 당한다. 두 번째 형주를 돌려주기를 요구했을 때는 제갈량이 서천을 뺏으면 형주를 다시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문서를 써 주자 노숙은 어쩔 도리 없이 그대로 따른다. 세 번째 형주를 요구했을 때도 유비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그대로 계속 빌려주는 요구를 승낙하고 만다.
이처럼 노숙은 참으로 멍청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들은 모두가 사서에는 없는 것들이고, 멍청이 노숙이란 형상도 역사적 기재와 부합되지 않는다. 결국 나관중이 제갈량의 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허구화한 것들이다.
역사상의 노숙은 조금도 멍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 식견이 높고 재능이 걸출한 총명한 인물이었다. 『삼국지ㆍ노숙전』 배주에서 인용한 『오서(吳書)』에는, ‘노숙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숙하며, ······ 군사를 잘 다스리고, 금령은 반드시 행하고, ······ 또 담론을 잘 하고, 문장에도 뛰어나고, 생각이 깊고 넓고 원대했으며, 현명함이 다른 이들 보다 뛰어났다. 주유가 죽은 후로는 노숙이 최고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노숙은 조조의 100만 대군이 국경까지 밀어닥치는 위급한 상황 아래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다수의 의견을 힘써 물리치고 조조에게 대항하기를 끝까지 견지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 유비를 찾아가 함께 조조에게 맞서자는 동맹을 맺었으며, 특히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자는 차원 높은 주장을 하였으니, 이는 조조에게 있어서 강력한 적을 하나 더 첨가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땅바닥에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한다. 그래서 주유는 죽음을 앞에 두고 손권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노숙은 지모와 책략이 임무를 맡기에 충분하니, 바라건대 저를 대신해 중용하소서.”라 하였다. 노숙은 주유의 뒤를 이어 동오의 대도독이 되었고 강동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활약을 했다.
송나라 사람 공평중(孔平仲)은 「자염장군(紫髥將軍)」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노씨네 무서운 아이 계책에 가장 뛰어나고 魯家狂兒策最長,
이끌고 조화롭게 한 자로는 주랑이 있었네 倡而和者有周郎.
여기서 ‘노씨네 무서운 아이’란 바로 노숙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상의 노숙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모사꾼이고 장령이며, 손꼽아 셀 수 있는 극소수의 영웅호걸 중 한 명이었다. 나관중이 비록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조조를 막자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 노숙의 일을 서술했다 할지라도, 소설 속 곳곳에서 주유와 제갈량에 비해 한참 낮은 위치로 깎아내렸을 뿐만 아니라, 멍청한 모습을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독자들 뇌리에 남은 노숙은 귀여울 정도로 멍청하고 우스울 정도로 어리석은 정직하고 무던한 형상이 되었다. 예술적 형상으로서의 노숙이란 인물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존재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상 재간 있는 군 통수자로서의 노숙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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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노숙]
* 천하삼분의 계책
한왕조가 거의 붕괴됨에 따라서 수 많은 군주들이 등장해 난세의 시작을 알립니다. 동탁과 여포, 명문 원가의 원소와 원술,
중원의 패자 조조 등등 많은 군주들이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점차 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요.
중원을 통일한 조조도 헌제를 옹립하여 세력을 쥐었지만 사실 중국전역을 지배하려고 했던 생각은 여타 군주들과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양양근처의 작은 마을의 잠자고 있던 용인 제갈량을 이들과 달리 생각이 달랐던거 같습니다. 삼고초려로 유비를 모시게 되면서
제갈량은 단번에 한왕조를 부흥시키는 것보다는 천하를 삼분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취하여 통일과 한조 부흥의 발판으로
삼으라고 유비에게 권합니다. 이는 제갈량의 책사로서 첫 데뷔작으로 빠른 정세판단 능력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조조가
원소를 관도에서 이기고 하북과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맞는 적절한 시운과 그 수하의 수많은 책사들과
용장들이 있어 여기에 당장 맞서 싸울 수는 없고 강동의 손권도 3대에 걸쳐 이뤄놓은 풍요로운 물자와 국력이 있어 이를 바로
쳐부술수는 없고 도움을 청할 수는 있다고 유비에게 말하게 됩니다. 이에 유표과 유장 즉 형주와 익주는 그들만으로는 난세를
헤쳐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두 곳을 취하여 발판으로 삼으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허나 이와 같은 생각을 7년전에 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손오의 명사 노숙입니다. 당시 노숙의 주장은 제갈량과 약간 달리 천하이분지계를 주장해서 손권에게 어떻게 난세를 헤쳐나가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손권과 노숙의 독대 당시 노숙은 손권에게 몇가지를 주장하게 됩니다. 일단 이 강동을 확실히 수중에 넣어 국력을 굳건히 하고 한왕조의 부흥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지금 당장 조조를 칠 수 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유표를 공격하여 양자강 유역을 손에 넣어 훗날 조조와 자웅을 겨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당시 유비는 북쪽에서 여기저기 치어 다녔기 때문에 노숙으로서는 그다지 위협거리가 안될 것이라고
판단 된듯 합니다.
아무튼 공명이나 자경이나 약간 견해는 달랐지만 국세정세를 빠르게 판단하여 자신의 주군에게 헌책했던 사실은 대단한 지모와
판단력이 없었다면 주장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 빠른 판단과 정보능력
공명과 자경에게는 이런 능력이 순전히 천재적인 두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발빠른 차도 신문도 없었던 시대입니다. 누구보다도 빠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정보전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명의 경우 수경선생의 수하에 있었으며 이 후 사원이나 문직 등 형주에서의 명사들과
교류가 많았고 또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발빠른 정보를 획득하는데 이점이 있었고 또한 그가 살던곳인 양양은
장강의 한수와 잇닿아 있어 상류로 가면 오두미교의 장로의 한중 하류로 가면 장강와의 맞지점인 하구이며, 북쪽 육로로 가면
낙양이고 남쪽으로 가면 강릉 그리고 북동쪽은 조조의 허창입니다. 이 때문에 당시 교통의 요충지였던 양양에서 각지에 흘러들어온 정보의 양은 엄청났던 것입니다.
자경의 경우에도 기록에 따르면 타고난 자산가였던 자경은 "재산을 나눠 소년들을 규합했다" 라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무리들을 만들어 주재했고 그가 살던곳도 경포선의 연한 교통로 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 정보전에서도 둘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천재적인 두뇌는 그들로 하여금 빠른 판단력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주군에게 좀더 유리한 이점을 주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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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에 대한 반박에 대한 정리]
0.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연의상에서, 노숙의 외교정책이란 바로 ‘친유정책’이라는 말과 같다. 말 그대로 ‘유’비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친유’라는 정책을 선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 이름도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오국은 주전파와 항복파로 나뉘고, 주전파였던 노숙이 유표의 상(喪)을 빌미로 유비를 찾아온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노숙의 선택을 그의 실수로 여기고 그를 비판한다. 그러나 난 그들과 상반되는 주장을 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반박하고, 어느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Ⅰ. 왜 유비였나? ⇒그럼 누굴 해?
‘왜 하필이면 땅도 적고 병사도 적은 유비를 택했는가?’라며 반박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묻겠다. ‘그럼 누굴 해?’
생각해보자. 당시, 조조와 손권을 제외하고, 자기의 세력을 갖고 있는 인물은 누구누구인가? 원소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된지 오래고, 유표는 땅속에 묻혀 그 아들과 부하라는 녀석들은 조조에게 항복해버렸다. 서부의 유장, 장로, 마등같은 경우 마등을 제외하면 조조와 별 감정 없는 사람들이며, 그마저도 너무 멀다.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세력과 동맹을 맺는다 하여, 당장의 위험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사섭과 공손공? 즐.
그나마 손권이 손을 잡을 만한 사람은 유비뿐이었다. 병력은 적지만, 유비의 부하들은 모두 수많은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이었고, 유표의 장남인 유기를 포함하여 유표의 옛 부하들도 일부 포함된 상태였다. 그리고 제의를 거절할 리도 없었다. 그럼 다른 선택은 없지 않겠는가?
Ⅱ. 도움이 됐나? ⇒도움이 됐다.
적벽 대전에서 유비군이 한 일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랬다. 적벽 대전에서 화계를 걸고 조조군을 궤멸시킨 것은 모두 오군이고, 유비군은 적당히 구경이나 하다가 조조가 도망칠때 길목을 막아 도망치는 것들만 처리했을 뿐이다.(그나마도 조조를 놓쳤다)
그러나 그것만을 보고 유비군이 한 일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것과 같다. 애초에 유비군은 숫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전력에 큰 보탬은 안된다.(수상전이다 보니) 그러나 전쟁을 병사만으로 하는가? 유비군이 적벽에서 한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니, 그를 이루어낸 사람은 바로 ‘제갈량’ 한 사람이다.
제갈량이 이루어낸 것 중 첫 번째는 바로 ‘설득’이다. 이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전쟁도 못하고 항복할 뻔 했다.
당시 항복을 내세운 사람들을 보자면, 그 필두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장소고, 그 다음이 장굉과 고옹, 그리고 오국의 수많은 문관과 모사들이다. 그러나 주전론자들은 노숙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장들. 무장들이 혈기로 맞선다 해도 논자들의 말빨을 이길 수는 없다. 그대로 가다가는 오 전체의 분위기가 항복 쪽으로 기울게 뻔했다.
그러나 노숙은 제갈량을 데려옴으로써 장소를 비롯한 수많은 논자들을 말로써 누르고,(참고로, 연의에 나오는 ‘정덕추’란 사람은 바로 정병이다.) 중립이었던 주유와 손권을 설득시켜 ‘항복’이란 얘기가 나올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야말로 최고의 공적이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동남풍’이다. 주유는 멀쩡한 황개를 반죽음으로 만들면서까지 사항계와 화계를 준비시켜 놓았는데, 정작 중요한 동남풍이 불어오질 않았다. 동남풍이란 남동에서 북서로 부는 바람이니, 그 바람이 불지 않으면 북서 방향에 늘어서 있는 조조군에게 화계로 큰 피해를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제단을 세우고 삼일 밤낮으로 제사를 올리며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사람이 바로 제갈량이다. 물론 제갈량의 능력이 아니라 기후상 해마다 동남풍이 부는 날이 어쩌고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이며, 더구나 그 ‘쌩쑈’는 ‘하늘도 우리를 돕는다’는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는 효과를 낳았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손권군이 적벽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는 제갈량의, 그리고 그가 소속되어 있는 유비군의 공이며, 유비와의 협력을 이끌어낸 노숙의 공이다.
Ⅲ. 그래서 결과는? ⇒결과가 나쁜가?
노숙의 선택을 비판하는 자들의 주장에 가장 큰 힘을 실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기야, 적벽 대전을 기점으로 유비는 형주를 얻고 손권은 그다지 얻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자면, 그것이 그리 나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에는 좀 다른 방식으로 주장을 펴보겠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83만이라는 대군을 잃었으나, 그 후에도 관중을 정벌하러 가는 등 조조군 전체에 있어 그렇게 큰 타격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오를 다시 노릴 수 있었다. 적벽의 승리야 사항계, 연환계, 화계 등 여러 기가 막히는 계략들을 복합한 결과였지만, 그 계략이 다음에 또 먹히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다음 전투에서는 이기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혼자서는 말이다.
본래 유비와 동맹을 맺은 것은 둘의 힘을 합쳐 조조를 견제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손권 뿐 아니라 유비도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가정하여 주유가 형주와 익주를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손권으로 인해 세력 확장의 길이 막힌 유비는 더 이상 동맹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넓어진 영토로 병사들을 분산시켜 수비해야 하기 때문에 조조가 예전처럼 다시 쳐들어올 경우 오히려 막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동맹인 유비의 세력을 키워 동맹 본래의 취지를 넓히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즉, 손권 자신의 이익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 동맹인 유비를 키워준다는 의도에 어느 정도 부합함으로써 결국 손해보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단, 주유의 죽음은 ‘변수’이자 ‘불운’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Ⅳ. 마치며.
결국 유비는 익주까지 얻어 자신의 기반을 쌓는데 성공했고, 손권은 관우를 죽이기 전까지 촉과의 동맹을 지속시켰다. 관우의 죽음이야 손권 쪽에서 보면 순전히 관우의 잘못이며, 약속을 지키지 않은 유비의 잘못이므로, 동맹을 깬 책임이 손권 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비가 순순히 형주를 반환하였다면, 어찌 뭇 사람들이 노숙을 탓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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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에서 본 노숙의 형주대여론]
노숙은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오나라의 문관인데요
오나라의 주유와 더불어 최고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검소하고
부하들과 백성들을 많이 아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급하고 불같은 주유의 성격에 노숙마저 없었다면 오는 강동의 대업을 이룰수 없었겠죠.
연의에서의 저평가된 모습으로 인해
게임에서도 그렇게 높은 지력을 나타내주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아쉽습니다.
노숙의 식견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제갈량보다 뛰어나다고 봅니다.
노숙이 빨리 죽지 않았더라면 형주를 쉽게 오나라가 침범안했을 것이고
그 후의 이릉전투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을텐데 .
암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인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