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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장그녀
회사에 출근을 하니 분위기가 어두워 보인다. 어제 오후에 정정으로 작업이 2시간동안이나 중단 되었단다. 동수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열한시가 넘어 동수가 김해를 갔다 온 후 그때서야 사장이 출근을 했다. 사장은 어제의 분위기와 달리 직원들의 인사를 상냥하게 받으며 기분이 좋아 보인다.
직원들은 ‘사장이 돈 봉투라도 주웠나?’ 하면서 소곤거린다. 어째든 사장의 기분이 좋으니 회사의 분위기는 자연히 살아난다. 우선 미스 권이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 안팎을 누빈다.
동수는 창고에서 자재를 내어오다 사무실을 나오고 있는 사장과 마주쳤다.
“김동수 씨! 요즘 아주 열심히 하네.”
“감사합니다.“
“총각이랬지? 사귀는 사람 없어?”
“아! 예 없습니다.“
“그래? 뜻밖이네 잘생긴 얼굴하곤.”
“......“
“숫자 계산은 잘해?”
“조금은요.“
“그래 알았어요. 열심히 일해.”
‘예!“
동수는 정문을 나가고 있는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다보았다. 어쩜 복도 많은 사람이라 생각도 해보았지만 또 한편으론 떳떳한 정실부인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젊음과 부를 바꾼 게 아닌가 싶어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하였다.
퇴근시간이 되자 생산부의 속칭 가야 팀 여직원들이 동수더러 술 먹으려 같이 가잔다. 할일이 있다고 빼 보지만 여자들을 당할 수 없어 어정쩡한 모습으로 따라나섰다. 버스를 몇 정류장 타고서 가야시장 근처에서 내렸다. 가야시장 부근은 서면을 벗어나 사상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주변엔 많은 직물곡장들이 있고 산언덕엔 판자 집들이 즐비하여 서민들이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다.
시장안쪽 동동주 집이다. 벌써 파전과 서대구이 안주에 막걸리 세통이 들어왔다. 사십대 아줌마 한명에 삼십대 두 명, 아가씨 두 명으로 동수까지 모두 여섯 명이다. 당연히 동수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대상이다. 나이는 몇이냐? 고향은 어디냐? 에 이어 사귀는 사람은 있느냐? 등 여러 가지 신상 질문을 다한다. 정말 못하는 말이 없다. 각오는 하고 왔었지만 정말 혼자 감당하려니 장난이 아닌 것 같다.
“동수총각! 참 잘생겼다. 안 그래?”
“그러네. 누가 마누라가 될 건지 부럽다.“
“아줌마! 못 하는 소리가 없어요.”
“사실인데 뭘 그래. 내가 애들만 없으면 대시해보고 싶건만. 애들 있어도 받아 줄래?”
“언니! 언니도 아가씨들도 많은 데 주책이야.“
“그래 맞아 나 정도면 몰라도. 적어도 3삼십대 정도는 되어야지.”
“아줌마들 왜 그래요. 동수 씨 부끄럽게.“
“뭐 어때 남녀 간에 나이차가 무슨 문제고. 서로 좋으면 그만이지.”
“언니 정말 언젠가 일내겠네. 말하는 것 보니까.“
“자! 술이나 마십시다. 술집에 왔으면 술을 마셔야지 내말이 틀리는 가 주인장에게 물어보세요.”
“맞다. 연애하고 싶은 사람들은 조용히 따로 나가라.“
“여기 짝 없는 사람은 동수 씨뿐 이네 니들 아가씨들도 애인 다 있다 아니가. 하긴 총각도 애인 있는지 모르지.”
“아줌마는 우리가 애인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남의 혼사길 막을 일 있나. 알지도 못하면서...”
“김양아! 너 저번에 그 남자는 누군데 그럼.“
“아줌마! 그 사람 우리 사촌 오빠라니까. 자꾸 남의 말을 안 믿고...”
“그 소리 이젠 그만 합시다. 자 예쁜 아줌마 잔 받으세요.“
달착지근한 막걸리 잔이 여인들의 수다를 안주하여 여러 차례 돌고 돌았다. 모두가 많이 취기가 돌았다. 다른 집에 이차를 가자는 둥, 여기에서 더 먹자는 둥 저마다 자기주장을 내 세웠다. 그러나 남은 술을 다 비우고 집으로 헤어지자는 이야기로 결론을 내렸다. 술이 취하면 남녀가 따로 없다. 남을 욕하는 것, 세상을 비난 하는 것, 상대방의 의사를 방해하는 것 등 술의 순기능도 많지만 꼴 볼견도 많은 것이었다.
아홉시 반경에서야 술집을 나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서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으나 미스 김은 가야역 건너편 산동네에 집이 있단다. 산복도로엔 버스가 없어 한참동안 걸어서 가야 한단다.
“동수총각! 김양 좀 바래다줘. 마음에 들면 데이트도 하고.”
“그래요. 집이 멀다. 다른 땐 일찍 가면 괜찮은 데 지금은 혼자가기 좀 그렇다. 술도 먹었고...”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냥 가세요.“
“야! 여자 혼자 술 먹고 가면걸 알면 남자들이 집작 댄다. 바래다 달라고 그래.”
“그래 동수 씨 미안한데 좀 그래 주라.”
“알았어요. 다들 잘 가요. 내일 봐요. 갑시다. 미스 김.“
동수는 아가씨와 단둘이 걸어가다 보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쑥스러웠다. 그러나 무작정 걷는 것도 어색하여 말을 먼저 꺼냈다.
“집이 아직 멀었었어요?”
“네! 한 이십분쯤 더 가야해요. 한자 갈 테니 이젠 가세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 올해 나이가? 저는 스물넷인데...”
“저요? 스물 두 살이에요.“
“아! 그럼 내가 두 살 많네. 가족은요?”
“고향에 있어요. 부모님하고 동생 둘.“
“아 그래요. 난 가족이 없어요.”
“그러세요...“
“자취하세요?”
“예! 고향언니하고 둘이서 방 얻어서 생활해요.”
“직장생활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 동생들 공부시키려면 힘들긴 하지만...”
“그럴 땐 난 딸린 가족 없어서 편하네요.“
‘마음이야 그렇겠어요. 아무튼 고마워요.“
차가 다닐만한 하천 옆 도로를 한참동안 따라 올라가 다시 왼편으로 굽어지는 골목을 몇 차례 지나가니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
가끔씩 희미한 보안등 아래 몇 차례 사내들이 지나치는 모습이 보였다. 밤늦은 시각에 여자가 혼자 걷기엔 다소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길 위에 있는 서너 칸 정도 됨직한 집을 가리키며 그곳이 그녀가 세 들어 사는 집이라 하였다.
“바래다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요. 잘 들어가고 앞으로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이야기해요. 오빠처럼 생각하고...”
“그래도...”
“마음 부담 안 가져도 되요. 나 사귀는 사람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주고...“
“예! 그럴게요.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요. 그럼 서로 편하지. 그럼 갈께.”
“잘 가세요. 고마워요.“
그녀를 바래다주고 골목길을 내려오는 동수의 마음은 매우 뿌듯했다. 자신이 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오후에 노동청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주인집에서 서로 간에 만나서 이야기를 좀 더 하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동수는 일단 조금 알아보고 퇴근시간 전에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사실 동수로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전혀 아는바가 없었고 어떤 방법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동수는 시청으로 찾아가 볼까도 생각했었지만 바쁜 시간에 서로가 번거로울 것 같았고 실제 이런 사항은 격어 본 사람이 제일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우선 관리부장에게 문의를 해보기로 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 경험도 많고 아는 루트도 있으리라 여겨졌다.
“동수 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실 그럴 땐 괘씸해서 끝까지 소송이라도 해서 마지막 일원까지 라도 다 받고 싶은데 법과 현실은 틀린 거라. 소송이라도 가면 몇 년씩 기다려야 하고 또 변호사 비용들어야지 서로 손해인기라.”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가만있자 내가 지금 전화를 해보지 뭐.”
“고맙습니다. 잘 되면 술 크게 한번 살게요.“
“술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은 어째든 유리한 방법을 찾아야지.”
“예!“
관리부장은 사무실에서 어디엔가 한참도안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동수를 사무실 밖으로 불렀다.
“내 아는 변호사인데. 사실 상담료를 줘야 하는 건데. 공짜로 물어 봤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건 꼭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판단은 동수 네가 직접 해야 된다. 마음이 안내키면 다른데 알아보던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응! 이야기가 전번 사장 때 것은 인계․인수가 제대로 되었으니 백 퍼센트 다 달라고 하고, 지금 사장 때 것은 장사도 잘 안된다고 하니 조금 봐 주는척하고 절반씩 서로 양보하자고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네. 내가 생각해도 그게 괜찮을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차피 소송까지 가면 비용도 들 것이고...”
“부장님! 감사합니다. 저도 다 받고 싶지만 그 집에 장사가 예전만큼 안 되어서 마음은 조금 불편해요 사실은.”
“그래! 모든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맙습니다.”
동수는 관리부장의 이야기를 듣고 노동청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그들이 원하면 만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다음 주 월요일 오후에 만나도록 시간을 잡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동수가 입사한지 열흘이 지났다. 오늘은 일곱 시에 근무를 동수에 대한 입사환영회를 한다고 하였다. 동수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환영회를 열어준다는데 대하여 회사에 고마움을 느꼈다.
동수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하였다. 사장은 오전에는 보이지 않더니 오후에야 나와서 결재를 하고 곧바로 어디론가 살졌다. 그래도 저녁에는 참석을 할 예정이라고 총무과장이 전했다.
회식장소는 회사에서 백여 미터쯤 떨어진 갈비탕집이다. 평소 회사에서 이 식당을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특별히 오늘은 다른 손님들을 받지 않고 동수네 회사 직원들만 식사를 하게 된단다.
야근을 하는 십여 명을 제외한 삼십여 명이 모였다. 관리부장님의 사회로 사장님의 인사와 동수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한다. 동수는 미리 준비한 인사말이 없어서 그저 아는 것도 별로 없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하였다.
처음부터 관리부장은 술에 관한 것은 모르는 게 없는 듯하였고, 생산부장은 술을 거의 안하였다. 그런데 사장은 저녁에는 집엘 다녀왔는지 낯에 입었던 옷과 다르게 간편한 복장으로 참석을 하였는데 술도 잘 마시고 사람들을 대하는 게 보통솜씨가 아니다. 회사 안에서는 사장으로서의 지위를 제대로 발휘 하였지만 밖에서는 그저 평범한 여인처럼 행동을 하였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관리부장과 생산부장에겐 오빠, 생산직 아줌마들에겐 언니라고 부르며 직접 술을 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술을 마실 땐 격이 없이 지내고 회사 안에서는 지킬 것은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수를 불러 세웠다.
“어이! 김동수 넌 나보다 나이 한참 어리지? 이리 와서 내 술 한잔 받고 한 잔 따라봐.”
“예! 사장님.“
“덩치는 큰데 아직 덜 여문 것 같네.”
“예?“
“아직 사회물이 덜 든 것 같다고.”
“아 예!’
“순진하기는...집이 어디야?”
‘예 저 지금은 남부민동에 방을 얻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요. 부장님들 잘 모시고.”
“알겠습니다.“
동수는 사장의 술잔을 받아 마시고 관리부장과 생산부장에게도 술잔을 권했다. 총무과장은 원래 술을 입에 못 댄다고 했다. 미스 권이 다가와 사람차별 하느냐며 술을 권하고 자기에게도 따라 달란다.
야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따로 싸서 보내고 식탁을 돌려 자리를 정리하여 노래도 불렀다. 흥이 난 몇몇 아줌마들은 덩실덩실 춤을 쳐댄다. 아무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음식점에서 나오며 사장은 자기는 서대신동이라며 가다가 내려줄테니 동수더러 자기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한사코 사양을 하였지만 그것도 옆자리에 타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옆자리에 탔다.
사장의 운전기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사장을 태운 차가 신암을 거쳐 교통부를 빠져나오자 순간 동수는 어깨가 묵직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사장이 잠이 들어 자신의 어깨에다 얼굴을 묻은 것이었다. 동수는 몹시도 당황했다. 어깨를 뺄 수도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사가 자꾸만 백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다보는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사장 쪽으로 밀어보기도 하지만 이미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울어져 버린 그녀의 머리는 자꾸만 동수를 향하여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거울속의 기사의 눈과 동수의 눈이 마주쳤다. 기사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동수가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므로 동수의 불편함을 덜어주려는 듯하다.
부산진역에 이르자 차선을 넓어진다. 차는 속력을 내어 달린다. 사장의 어깨는 여전히 동수의 어깨를 압박하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삼차 선으로 달리던 택시가 앞차가 막히자 이차 선으로 급하게 끼어들었다.
‘끼익’ 하고 사장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일차 선으로 이동했다. 다음순간 사장의 상체가 왼쪽으로 쏠리면서 그녀의 상반신이 동수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앗!’ 동수는 기겁을 하며 그녀의 몸을 막았으나 그 과정에서 오른 손이 엉겁결에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말았다.
“앗! 뭐야.“
사장도 잠결에 자신의 몸 쏠림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순간 동수의 오른 손이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손 기사! 왜 이래?”
“사장님! 택시가 갑자기 끼어들어서요. 죄송합니다.“
“알았어. 동수 씨는 괜찮아?”
“아 예〜 에! 사 사장님!“
“놀랐어? 사람이 떨기는.”
그러면서 그녀는 동수가 보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리며 옷매무새를 갖춘다. 순간 사장의 커다란 두 개의 젓 무덤이 동수의 눈앞에서 출렁거린다.
일요일 오전이다. 동수가 오늘 이사를 하는 날이다. 마침 경수도 같이 자기 누님 집으로 들어간다고 아침부터 짐을 챙긴다.
두 사람의 짐이래야 낡아빠진 취사도구와 옷가지뿐이다. 그래도 손에다 들고 갈수는 없어 동수는 용달차를 한 대 불렀다. 경수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문현동으로 향했다. 지저분하다며 연희는 먼저 번에 쓰던 슬리퍼며, 취사도구를 새로 구입하여 가지고 와있었다. 가지런히 집안을 정리․정돈하고 나니 마치 신혼집 같아 보였다.
동수는 마음먹고 텔레비전도 새 것으로 하나 샀다. 결혼을 하면 새로 사려고 했어나 당장 없어서 미리 당겨 산다고 연희에게 농담조로 이야기를 하였다. 연희는 다른 것도 모두 장만하고 나면 몸만 와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분이 상쾌하였다.
“동수 씨! 이사 기념으로 우리 외식할까? 아니면 고기 사다 구워먹을까?”
“힘들게 사오기는. 그냥 식당에 가자.”
“아니야. 잠깐 동수 씨랑 식당에 가면 우리 둘만 안을 수 있는 분위기 있는 곳이 없겠지?”
“나야 집에서 먹으면 좋지만 자기는 안 귀찮아?”
“응! 그런데 고기는 동수 씨가 사와야 돼.”
“알았습니다. 사모님! 분부대로 하지요.“
“총각 쓸 만하네. 말을 잘 들어서..호호.”
“재미있으세요?“
“으 응 재미있네. 빨리 갔다 오게 총각. 김치도 좀 사고 상치도 있으면 사고. 잊어버리지 말고.”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럼 다녀옵지요.“
동수는 집을 나섰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걸까? 사장처럼 값비싼 옷차림과 커다란 자가용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이.
동수가 사온 돼지삼겹살과 상치와 김치를 함께 싸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초여름의 햇빛과 더불어 부두 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들의 입주를 축복해 주고 있다. 새로 산 텔레비전을 보면서 동수의 가슴속은 어느새 구속받던 과거를 지나 이 세상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안락하고 행복한 미래로의 긴 여행을 떠나고 있다.
동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친척 할아버지는 동수에게 좀 더 일찍 일어나지 않고 꼭 깨우기를 바란다며 회초리를 들고 야단을 치신다. 동수는 다신 안 그러겠노라고 손바닥을 비비며 쏜살같이 소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황소는 한가로이 들판에서 풀을 뜯고 동수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본다. 먼 하늘엔 하얀 구름이 돗 단배 되어 흘러가고 동수는 그 구름을 따라 끝없이 너른 공간을 뒤 쫒아 간다. 먼 뒤 발치에서 친척할아버지의 고래고래 고함소리가 동수의 귓전을 스쳐가지만 이젠 동수의 마음을 잡지는 못했다.
동수가 달려간 곳은 정원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있고, 그 가운데에는 금붕어와 이름 모를 희귀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연못이 있는 집. 고급 양탄자가 깔린 거설 벽난로 옆에는 동수가 양주를 마시고 있고 2층 침실에서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살며시 미소를 띠며 다가오는 연희의 손에는 〈무한한 행복〉이라는 금으로 만든 글자가 들려있다. 그러나 동수가 그 글자를 잡아들려고 애를 써도 도무지 잡히지 않는 다. 동수는 상체를 굽혀 그 것을 잡으려고 할 순간 동수는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동수 씨!’
연희가 부르는 소리에 동수는 잠을 깨었다. 점심때 소주를 곁들여 마신 탓에 그만 잠이 들고 만 것이었다. 시계는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다.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동수 씨! 저녁 해서 먹자. 너무 곤하게 자서 안 깨웠다.”
“알았다. 아 좋았는데...“
“뭐가?”
“그런 게 있다.“
“꿈속에 예쁜 아가씨라도 보았나.”
“응 데이트 하다가 꿈 깨졌다.“
“아이 구! 아까워라. 어쩌나 깨워서.”
“혼 좀 나야지.“
연희가 끊인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를 썰어 넣은 김치찌개 맛은 일품이었다. 연희도 은근히 요리솜씨가 괜찮은 편이다.
동수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연희는 동수더러 밥 많이 먹는다고 놀렸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건강하고 또한 자기가 지어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동수가 고마웠다.
시원한 바람을 씌우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있는 광경을 동수의 방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불빛이 어두워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의 형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수는 점심때 먹다 남은 것과 새로 한 병의 소주를 다 먹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연희의 모습이 낮잠 속에서 보았던 화려한 저택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보이다 어느새 회사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차안에서 자신의 가슴에 쓰러져 내리던 사장의 요염한 자태로 보인다. 그러다가는 가야동 뒷골목으로 올라가는 청순가련한 생산부 미스 김의 모습으로 바뀐다.
동수의 마음은 그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다. 꿈속에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그 허상처럼 기회를 놓치면 떠나버릴 것 같은 마음이 자구만 들었다.
순간 동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연희는 영문도 없이 갑자기 다가오는 동수를 피하려 해보지만 자신의 몸도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동수는 어느새 연희를 앉고 자리에 눕힌다. 지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행동이 사고를 앞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수는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연희를 안았다. 연희는 그 무엇에 감전된 듯이 자의력을 가지지 못한다.
연희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동수는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잘 못되면 어쩌려고...〉라는 미세한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어차피 그들은 달리는 열차를 세우기에는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동수는 출근을 하여 연희네 가계로 전화를 하였다. 집이 가까워 근처까지 바라다 주웠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다행이 연희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전화를 끊기 전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요즘 들어 사장이 동수를 찾는 횟수가 늘어났다. 일상적인 업무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사적인 심부름도 자주 시키곤 한다. 동수더러는 여러 가지 일을 배워서 관리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동수로서는 사무실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사장이 시키는 일이지만 때로는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로 옷을 샀다가 줄 일이 없어졌다면서 그 것도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동수에게 가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동수는 사장이 왜 저럴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해를 하기가 어려웠다. 인물 아름답고, 부유하고, 나이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혹시나 자시에게 관심을... 그러나 어불성설일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생각 안하더라도 동수와는 열여덟 이라는 나이차가 나지 않는가?
퇴근길에 연희네 가계 옆으로 갔다. 저녁을 같이 먹고 서면으로 향했다. 11시가 되어서야 극장을 나왔다. 시간이 늦어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 근처까지 바라다 주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을 하여 자재공급 등 바쁜 일을 마치고 오후에 조퇴를 신청했다. 퇴직금 문제로 노동청사무소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부장은 그냥 갔다 오라고 하였지만 원칙대로 조퇴를 신청했다. 노동청사무소 민원실에 도착하니 주인 내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아저씨와는 서로가 아는 체를 했지만 아주머니는 여전히 화난 표정이다.
담당직원이 먼저 그 동안의 조사내용을 설명하고 오늘 조정이 되지 않으면 자신의 손을 떠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여 좋은 방향으로 결론을 맺자고 하였다.
먼저 주인아저씨더러 어떻게 처리를 했으면 하느냐고 물었다.
“저희들은 조정해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요즘은 장사가 안 돼서 매우 어렵습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러면 김동수 씨는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예! 저는 먼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저의 임금에 관한 사항입니다. 다른 거래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는 다르게 임금은 제가 그만큼 수고한 대가이므로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들어 알고 있으나 그런데..”
“그걸 다 받겠다고. 그럼 우릴 뭐하려.”
“아주머니 기다려 보세요. 김동수 씨 이야기 다 안 끝났잖아요. 김동수 씨 더 이야기 하실 거죠?”
“예! 그래서 저의 생각은 먼저 번 주인아저씨의 퇴직금은 다 주셔야 하고요. 지금 사장님 때의 퇴직금과 봉급은 경기가 안 좋다고 하니까 제가 절반만 받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의 양보는 못합니다.”
“좋습니다. 조 성덕 씨!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실은 김동수 씨가 많이 양보 하신 겁니다. 받아드리실래요. 아니면?”
“받아 드리겠습니다. 여보! 당신 생각은?“
“말을 그렇게 하는 데 별수 없잖아요.”
“그럼 그렇게 조정조서를 작성합니다. 잠시 기다리셨다가 도장 찍고 가세요.”
담당공무원은 조정조서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타이프를 열심히 치고 있다. 동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나와 계단입구에 서서 창밖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어느 새 따라 왔는지 주인아저씨가 뒤에 서 있었다.
“동수야!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아니 예요. 저도 여유가 있으면 좀 더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네 사정 잘 안다. 너도 홀 홀 단신 인데.”
“아주머니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그기도 사리는 알지. 요즘 장사가 워낙 안 되니까...”
“미안 합니다. 좋은 인연을 두고 나왔어야 하는데.“
“아니다. 집사람이 성격이 그래서...지내고 보면 속마음은 또 다른 면도 있는데. 나도 어떤 때는 마음이 많이 상해...”
주인아저씨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가 다 탈 때까지 두 사람은 별로 말이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저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젠 가 보자. 서류 다 됐겠다.“
“그러세요. 앞서 가세요.”
아저씨와 동수는 민원실로 돌아왔다. 담당직원과 아주머니가 앉아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 이리 오세요. 각자 한부씩 받으시고 읽어 보시고 이의가 없으시면 도장을 찍으시고 그리고 신분증 좀 주세요. 복사를 해야 하니까.”
동수는 담당직원이 내미는 서류를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내용은 동수가 말한 대로 모두 기록이 되었다. 담당직원에게 도장을 찍어 넘겨주는 동수의 심정은 조금 착잡하였으나 관리부장의 말대로 더 이상 옥신각신하며 처리를 미루면 서로가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고 소송까지 가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니 어쩌면 잘 처리가 끝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소를 나오며 동수는 그래도 두 내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 동수는 노동청사무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가게 주인으로부터 돈이 입금되었는데 계산을 해보니 전번에 동수가 제출했던 서류에 의한 내용대로인데 문제가 없으면 동수의 통장으로 다시 입금시켜 줄 테니까 확인을 하고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하거나 사무소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동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선 입금을 시켜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통장에 입금된 돈을 확인해 보니 제법 많았다. 거의 일 년 치는 안 되어도 칠팔 개월 치의 봉급에 가까웠다.
여름으로 접어들자 동수네 회사는 근무환경이 매우 나빠졌다. 공장주변이 저지대라 습기가 많이 차는데다가 모가가 많이 생겨서 대낮인데도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정도까지 되었다. 특히 야근을 하는 직원들에게는 모기가 달라붙어 일을 하는 도중 모기를 쫒느라고 야단들이다. 동수네 사장은 요즘 무엇을 하는지 관리부장에게 일을 거의 다 맡겨두고 얼굴을 보기가 힘든 지경이다. 어쩌다 출근을 하였다가도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서는 황급히 어디론가 나가버리곤 하였다. 그래서 관리부장이 실질적인 회사 운영을 하는데 재료공급이나 판매 선이 변동이 없어 회사경영은 별로 어려움이 없이 진행되었다. 언젠가 술좌석에서 관리부장은 사장에게 남편 외에 다른 남자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였지만 아무도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고 말았다.
연희의 가계에도 여름철엔 일감이 줄어들어 아침 늦게 서야 출근을 하거나 출근을 해서도 일찍 퇴근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서 연희는 동수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먼저 와서 반찬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칠월이 다가는 어느 날 동수는 회사에서 연희의 전화를 받았다.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마치는 대로 집으로 곧장 오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회사를 마치기가 바쁘게 집으로 달려가니 연희가 방안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어 동수 씨! 큰일 났어.”
“뭔데 그래? 응.“
“나 임신 이래.”
“뭐? 병원 가봤어?“
“응! 이 개월 이래. 어쩜 좋아!”
“어머님도 아셔?“
“모르지 오늘 병원에 갔다 왔으니까.”
“난...그냥 가지면 좋겠어. 가을쯤에나 식 올리고.“
“그래도 남들이 알면...”
“남들이 뭐 중요해. 우리가 결정하면 되지.“
“엄마한테 뭐라고 하나...”
“나하고 같이 말씀드리자. 우리 그렇게 어린 나이 아니다.“
”몰라! 난 어째야 할지.“
동수는 연희를 껴안았다. 어차피 한번은 격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젠 비로소 이 여인이 자신의 사람이 되고 거기에서 또 다른 분신이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하니 매우 감격스러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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