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달현(達峴)이라 불리우는 달령(達嶺)고개은 북구 송정동 송정저수지에서 강동동 달곡마을까지 넘어가는 4km 남짓한 무룡산 기슭에 있는 고개이다.
왜군은 울산 서생포에 거점 기지를 발판으로 하여 수시로 병선을 타고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왔다. 그것은 군량 조달이라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해로를 거쳐 경주로 직통하는 교통로 확보에 있었다. 왜군은 동해안을 거쳐 동대산맥만 넘는다면 울산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경주로 들어 갈 수 있기에 북구 강동의 해안선에 진입하여 대방천(大方川)을 따라 무룡산을 넘어 곧장 경주로 쳐들어 갈 심산이였다. 따라서 달령고개는 경주와 울산간을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던 것이다.
달령전투는 선조25년(1592) 5월 19일 이언춘(李彦春) 장군이 왜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이언춘 장군은 왜군이 달령에 진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곧 이상립, 이시량 장군을 보내 정탐을 하고 그 세가 막강한 것을 알았다. 이언춘 장군은 보병(步兵)과 기병(驥兵)을 점호하고 선언하기를
왜노가 성격이 급하여 수전(水戰)은 능해도 산전(山戰)은 능치 못하며 또한 적진이 있는 곳이 산은 높고 골은 깊으니 위에서 갑자기 메우고 아래에서 습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 의병군의 장점인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승산이 높다고 의병군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는 곧 편대를 짜서 이상립에게는 110명으로 우대(右隊)를, 이시량에게는 12명으로 좌대(左隊)를 거느려 각기 고개 좌우에 매복시키고 이언춘은 108명을 직접 이끌고 산마루턱에 올라 진을 쳤다. 따라서 450여명의 의병군은 3隊로 배치가 완료되자 북을 치는 것을 신호로 일시에 적을 포위하며 활을 쏘면서 고함을 지러댔다.
왜병은 의병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동요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의병군의 기습 공격은 크게 성공하여 왜군이 스스로 밟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달령전투는 자주 있었다. 이를테면 선조 26(1593) 2월 12일 김홍위(金弘偉), 김응생(金應生) 등이 역전삼일(力戰三日)한 전투를 비롯 선조 27년(1594) 4월 19일에 달령 진군 중 왜군의 급습을 받기도 하였다.
선조 28년(1595) 2월 18일에 있었던 달령 전투는 김응하(金應河) 의병군이 왜적을 크게 물리친 전투였다. 김응하는 달령으로 진(陳)을 옮겼다. 달골에서 무룡산 계곡을 따라 호계로 넘어가는 달현은 완만하지만 게곡도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밤 왜군은 대방천을 따라 고개를 넘으려고 올라왔다. 의병군은 대기하고 있다 6~7合 전투를 벌렸다. 김응생(金應生)은 의병군을 끌고 미리 많은 돌을 준비해 둔 고개위로 작전상 후퇴하였다. 그것을 헤아릴 길 없는 왜적은 곧 뒤따라 추격하였다. 적이 다다르자 돌과 강노(强弩)를 퍼부어 댔다. 적병 사상자가 12명이나 되었다. 적은 많은 타격을 받고 그 밤에 동해 바닷가로 후퇴하고 말았다.
김응하 의병군은 이튿날 새벽 군진을 백련암(白蓮岩)으로 옮겼다. 백련암은 무룡산 서쪽편 한 봉우리는 오봉산(五峰山)이라 하는데 이산 서편으로 뻗은 곳이 솟아난 바위가 바로 백련암이다. 이곳은 울산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군사 전략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중 백련암이 기록상 자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때 울산 의병장 김흡(金洽), 윤홍명(尹弘鳴)이 군사를 끌고와 합진하다.
왜적이 태화강을 메우고 쳐들어와 10여合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같이 달령(達嶺)을 두고 왜군과 의병군 사이에 자주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자료참조>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최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