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 2010년 12월25일(토)-26일(일)
가는 곳:
(첫째날) 오전 맑음 / 오후 눈발 날림
07:30시 서울 교대역 앞에서 출발 -> 13:00시 점심식사 (병영 설성 식당) -> 강진 하멜기념관 -> (월남사 -> 녹차밭 -> 무위사) -> 해남 녹우당 -> 저녁식사 (해남천일식당) -> 숙소 (두륜산 온천랜드)
(둘째날) 오전 맑음 / 오후 눈발 날림
07:20시 아침식사 -> 진도 (남도석성, 운림산방, 용장산성, 벽파진) -> 13:40시 점심식사 (진도 통나무집) -> 울돌목과 진도대교 -> 15:00 진도 출발
* 월남사, 보성차밭, 무위사는 원래 답사 예정지가 아니었으나 하멜 기념관에 일찍 도착하는 바램에 시간 여유가 있어 생긴 보너스 답사지이다. *^^*
하멜 기념관 앞 정원에 세워진 하멜표류기의 주인공 하멜과 화란의 상징 풍차
화란인 하멜은 화란(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는 도중 표류하여 1653년부터 1666년까지 13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살게 되었고, 그 가운데 7년 동안 병영터(군대 주둔지)가 있던 강진군 병영면에서 살게 된다. 이 이유로 최근 강진군에서 병영성 터에 '하멜 기념관'을 만들었다. (하멜 조각상에서 왼손에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 쓴 하멜 보고서이다.)
동상을 지나 하멜 기념관이 있다.
하멜 기념관 옆 돌 담장은 네덜란드식 담장 쌓기로 쌓은 것이다.
마치 책꽂이에 꼽은 책처럼 가지런히 돌맹이를 쌓아 올렸는데 한 줄은 돌맹이를 오른쪽 방향으로 45도 정도 기울여 쌓았고 그 윗줄은 다시 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45도 정도 기울여 돌맹이를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돌맹이가 지그 재그로 쌓였다.
하멜 기념관 입구에 추모의 글이 타일에 적혀 있다.
하멜이 쓴 표류기의 원 제목은 '하멜 보고서'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난파됐던 배의 서기로 근무했다고 한다. 하멜은 7명의 동료와 함께 조선을 극적으로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다음 본국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조선에 억류된 13년간의 임금을 회사(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이 하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정말 장사술로 유명한 네덜란드인 답다. ^^ 아래는 하멜 보고서의 복사본이다.
17세기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요 교역품은 청나라에서 생산된 청화백자였다. 19세기가 될 때까지 유럽은 1300도 정도의 고열을 만들 수 있는 가마 기술이 없어 청나라로부터 비싼 값에 청화 백자를 수입하였다.
1653년 8월16일 (효종 4년) 일본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는데 선원 64명 중에서 36명이 생존했다. 하멜 일행은 제주에서 한양으로 호송되어 2년간 억류 생활을 한 다음, 1657년 전라도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그 때까지 일행 중 14명이 죽고, 살아 남은 22명은 1663년 여수, 남원, 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하멜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으로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면서 억류 생활을 이어 갔다.
네덜란드의 상징, 나막신.
강진군은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몇종류의 전시물을 기증받아 이곳에 전시하고 있다.
이 대포는 하멜 당시에 범선에 실어 사용했던 네덜란드 대포이다. 물론 이것은 복제품이다.
하멜 기념관 옆에 자그만한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여러가지 크기의 네덜란드 나막신을 팔고 있었다.
하멜 기념관에서 바라본 맞은편 병영 석성
이곳 병영은 해안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형 지형이다.
남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쌓은 일종의 읍성이다.
하멜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인근 설성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로 그 유명한 돼지불고기를 맛나게 먹었다.
첫댓글 대리만족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