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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10인의 바이올리니스트
1. 야샤 하이페츠(1902∼1987)
하이페츠. 푸르트벵글러, 호로비츠 등과 함께 한 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전설로 남은 그는 누구인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겐, 아니 모든 연주가들에게 있어 그의 이름은 ‘강박관념’이라는 단어에 다름아니다. 그의 연주는 한마디로 인류 역사상 겨우 몇몇만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절하리만치 철저한 테크닉으로 악보 속의 모든 음표를 하나 빠뜨림없이 영롱하게 악보 밖으로 뿜어내는 정교함. 폭넓은 표현과 탁월한 균형감각. 작곡가의 무의식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통찰력. 강력한 운궁과 강렬한 비브라토. 자유자재의 템포 조절력. 그리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 ‘신이 빚은 바이올리니트’로 통할 만큼 완벽한 그의 연주를 접하고 나면 ‘보통 연주가’들은 피터 셰퍼가 문학 속에 살려낸 ‘살리에리’라는 캐릭터를 뼈저리게 이해하게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완벽성이 전적으로 천재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러시아의 빌나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바이올린을 손에 잡았다. 이후로 전개된 83년간의 사투. 그 과정에서 그는 ‘완벽의 문’을 두드린 몇 안되는 인간으로, ‘승자’라기보다는 ‘초인’으로 남게 된 것이다.
6세 때 처음 공개 연주회를 가진 그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9세때 레오폴드 아우어 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가 아우어에게 배운 것은 얼마되지 않지만 만일 그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전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이페츠 자신도 살아 생전에 인정한 바였다.
2년 뒤인 1912년,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 무대에서 그는 전설의 시작을 세상에 공표했다. 이듬해 라이프치히에서 브루흐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그를 본 당대 최고의 거장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을 박살내고 싶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이어졌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서 천재를 과시하던 그는 혁명전야의 위기감이 감돌던 1917년, 공교롭게도 시베리아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역사는 1917년 10월 27일의 하이페츠의 카네기홀 데뷔무대를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11월 7일. 결국 하이페츠는 그대로 미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가 혁명의 와중에 정당한 활동영역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미국에 도착한 후 하이페츠는 1년 동안 뉴욕에서만 30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그가 발산하는 비르투오시티에 노출된 청중들은 하이페츠란 이름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치명적인 조건반사를 경험했다. 19세 되던 1920년, 런던 데뷔 연주회를 본 버나드 쇼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제발 잠들기 전, 기도 대신 아무 곡이나 서툴게 연주하라.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신처럼 완벽하게 연주하다간 자칫 하느님의 시기로 요절할지도 모른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20대에 이미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그는 192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40년에는 비버리 힐스에 평생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사이 그는 “우리는 모든 것을 하이페츠에게 빚졌다”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바이올린 연주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의 존재 이후 그동안 ‘19세기의 것’이던 연주 스타일은 ‘20세기의 것’으로 변했다. 많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그저 그의 존재로 인해 다친 것도 사실이다. 1940년대와 50년대를 통해 절정에 이른 연주를 들려준 그는 1960년대 들어서는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점점 연주를 줄인 그는 1972년, 마지막 공개 연주회를 갖고 은퇴했다. 1987년, 정말 매일 밤 일부러 엉터리 연주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수한 그는 비로서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RCA에서 내놓은 65장의 방대한 하이페츠 전집은 1917년부터 72년 마지막 연주회 실황까지 하이페츠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협주곡과 실내악, 소품 등을 망라하는 전집으로 최근에는 낱장으로도 발매되었다.
2.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
다비드오이스트라흐는 살아 생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이페츠에 버금가는 ‘2인자’이기만 했을까. 지난 96년 3월호 ‘객석’의 집중탐구기사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계’를 보면, 음반부분에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을 역시 평론가와 칼럼니스트의 투표로 선정한 것을 볼 수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으로는 샤를르 뮌슈 지휘, 하이페츠 연주의 것(보스턴 심포니, rca)이 선정되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오이스트라흐(클뤼탕스-프랑스 국립방송향, emi)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도 역시 하이페츠의 연주(라이너-시카고 심포니, rca)가 오이스트라흐(오먼디-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cbs)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하이페츠가 아닌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콘드라신-필하모니아, emi)가 명반으로 선정되었고, 오이스트라흐(클렘페러-프랑스 국립방송향)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 모두는 다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음반들이지만 오이스트라흐는 불행히도 어느 하나에서건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엔 협주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선 아직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만한 것을 찾아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오이스트라흐는 하이페츠같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그 연주의 완숙도 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이페츠의 연주는 ‘너무 완벽해 차갑다’는 평을 자주 들었으나 오이스트라흐는 그 반대로 ‘따뜻한 인간미가 넘친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위에서 말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도 하이페츠의 것을 ‘불타는 빙산’에 비유한다면 오이스트라흐의 것은 ‘얼음기둥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는 금빛 물고기’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는 내향적·사념적이고 절제미가 돋보이며, 폭넓은 레가토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이페츠의 연주 특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지만 모든 면에서 하이페츠에 뒤지는 오이스트라흐의 변호를 위해 누군가 지어내준 것은 절대 아니다. 음악은 언제나 치열하고 숨가쁘게 몰아붙여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스트라흐의 미덕은 나름대로 장점을 발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오데사 태생의 오이스트라흐는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아니었다. 어린시절 오데사 음악원의 또 다른 명교수 스톨리알스키에게 배운 그는 아우어파와는 다른 러시아 바이올린 인맥을 형성했다. 물론 테크닉은 하이페츠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수준이었다.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 2위, 1937년 이자이 국제 콩쿠르 우승 등으로 구소련 밖으로 알려졌고, 길렐스의 경우와 비슷하게 구소련이 정책적으로 서구에 소개하는 연주가로 지목되어 많은 혜택을 누렸다.
레프 오보린과 리히테르와의 2중주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 활동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져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만년에는 지휘대에도 서는 모습을 보였으나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교육분야에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크레머와 올레그 카간 등이 그가 길러낸 제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는 그의 아들.
3. 아르투르 그뤼미오(1921∼1986)
그뤼미오는 정통 프랑코-벨기에 악파 계보의 큰 줄기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는 인물이다. 벨기에에서 태어났고, 일찍부터 천재의 기질을 보여 12세의 나이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알프레드 뒤부아를 만났는데, 그는 역시 벨기에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의 제자였다. 1936년 파리로 가 조르주 에네스쿠에게 배웠는데, 그도 또한 이자이의 제자였다. 이자이는 비외탕의 제자였다. 여기까지가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주류를 이루는 사제 관계다.
비외탕-이자이-에네스쿠 세 사람은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다. 미리 말하자면, 그뤼미오에게 배운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적자는 오귀스탱 뒤메이다. 지극히 상업화된 20세기 후반까지 이렇게 정확히 한줄기로 이어지는 악파나 인맥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네들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이야말로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뤼미오가 유난히 하이페츠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그뤼미오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22세 되던 1943년에야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그리고 바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이어졌고,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949년 스승 뒤부아가 세상을 떠나자 브뤼셀 왕립음악원은 그 뒤를 이을 교수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로 그뤼미오를 지목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아직 20대였다. 그로부터 세상을 떠난 86년까지, 그뤼미오는 전통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50년대 들어 클라라 하스킬과 듀오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의 음악 스타일은 너무나 완벽히 들어맞았다. 이 두 사람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의 연주(필립스)는 이 분야에서는 전설적인 명연으로 남았다.
물론 낭만주의 협주곡들을 녹음해 남기기도 했지만 그뤼미오의 연주는 후기 바로크에서 고전주의에 걸친 레퍼토리, 그것도 특히 실내악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뤼미오의 연주들은 조금 빠른 듯한 템포설정 속에서 유려함과 우아함을 빚어내는 세련미를 발하는 것이다. 거기에 균형감과 양식감이 잘 갖추어진 느낌을 주는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낭만에서 현대를 거치며 무르익은 연주법을 제대로 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부각되고 있는 원전 연주가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런 특징은 더욱 명확히 살아날 것이다. 이들에 비한다면 훨씬 강건하고 명확하며 거추장스런 장식들을 배제한 것으로, 듣는 이들에게 곁가지보다는 구조적 핵심에 치중하게 한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의 경우(필립스), 그뤼미오의 연주는 바흐적이라기 보다 훨씬 모차르트적이다. 텔레만의 12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환상곡(필립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 바로크적이라기보다 고전적인 취향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더 듣기 편하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일뿐이다.
4.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
‘크라이슬러’라 하면 왠지 ‘아주 옛날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크라이슬러 작곡의 ‘사랑의 기쁨’이나 ‘사랑의 슬픔’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분위기 있는 소품들이라 그가 도무지 20세기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명히 19세기에 26년을 살았고, 20세기에 61년을 살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의 선천적인 ‘빈 기질’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신동이던 그는 7세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최연소 입학해 헬메스베르거에게 바이올린을, 브루크너에게 이론을 배웠다. 10세 때 파리 음악원으로 옮겨 마사르에게 바이올린을, 들리브에게 작곡을 배운 그는 12세의 나이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이듬해 미국 순회 공연을 갖고 돌아와 그로부터 약 10년간은 의학을 공부하고, 군 복무도 하느라 음악과 잠시 멀어졌다. 1898년 빈 필에 입단했고, 이듬해 니키쉬 지휘의 빈 필과 협연해 성공을 거둔 후, 50년 가까이 당대 최고의 스타 연주가의 지위를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다 부상당하기도 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자 치를 떨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교통사고로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는 불행을 당했다. 하지만 1947년 카네기홀 은퇴 연주회로 무대에서 물러날 때까지 성실히 연주에 임했다.
그의 스타일은 지금 들어보면 너무나 고풍스런 것이다. 이미 1백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탓이다. 그의 가장 기교적인 작품에 쓰인 어려운 기교들도 사라사테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과정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크라이슬러가 하이페츠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12년이다. 당시 함께 자리했던 짐발리스트는 크라이슬러의 농담이 진담이 되어 ‘하이페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전쟁중에 부상당하면서도 연주가로 살아남았다. 이는 크라이슬러도 젊은 시절 만만찮은 기교파였음을 증명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무대 위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1947년 은퇴한 후로도 따뜻한 인품으로 친근감을 주는 명사로서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19세기 빈 풍의 전인적 인간형으로 교양인이자 신사였다는 점은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소품일지언정 작곡을 했다는 것도 하이페츠에 대한 열등감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패였을 것이다.
5. 예후디 메뉴인(1916∼ )
메뉴인은 미국이 유럽으로 수출한 음악가로서는 초유의 인물이다. 뉴욕에서 유태인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7세 때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8세 때 독주회를 가진 당대의 대표적인 ‘신동’이었다.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영재교육’을 위해 9세의 나이로 에네스쿠 밑에서 배우기 위해 파리로 유학했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그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의 ‘신동’들에게 보내는 반응보다 더욱 열광적인 것이었다 전한다.
이러한 ‘신동 신드롬‘은 물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완벽한 기교와 성숙한 음악적 표현력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메뉴인의 유년기의 신체 성장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다는 점이다. 10세 때도 아직 ‘꼬마’로밖에 안 보였고, 10대 중반까지도 귀공자의 이미지를 간직했던 그다.
1932년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녹음했다. 그리고 그는 인기절정에서 20대를 맞이했다. 그의 ‘신동 신드롬’은 약효가 떨어져 갔고 1940년대 초반에는 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500회 이상의 전시 위문공연과 첫 아내와의 결별 등이 겹치며 메뉴인은 심각한 상태까지 갔으나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프리마 돈나 다이아나와의 재혼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전후 푸르트벵글러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인연으로 그는 다시 솔리스트로서도 정상을 찾아갔다. 당시의 녹음인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emi)은 명반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는 바이올린에 머무르지 못했다. ‘신동시대’ 이후 그의 연주는 다른 대가급 연주가들과 비교해 약간 낮은 수준에서 연주 평균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메뉴인 자신도 이를 자각한 듯 자꾸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리려 했고, 한때 그는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됐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지나친 자학이었고, 때이른 포기였다. 그가 바이올리니스트로 남긴 레코딩 유산만도 엄청난 것이었고, 하이페츠도 이미 한물가기 시작한 입장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는 순도 높은 스타일로 해석의 깊이와 힘을 느끼게 하는 연주를 들려주었었다. 지휘 분야에서 확실한 돌파구를 찾으려던 그는 점차 지휘 횟수를 늘려갔으나 이 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젊은 음악가들과의 교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는, 타고난 음악교사로서의 자질을 살리며 돌파구를 찾았다. 1963년에 메뉴인 음악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세계의 민속음악을 서구의 청중들에게 전하는 물꼬를 튼 것도 그였다. 시타르의 달인, 라비 샹카르의 인도음악에 탐닉한 나머지 그는 요가수행법을 배웠다. 82년의 베를린 필 1백주년 기념 연주회의 지휘대에 선 그는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요가 지휘’를 선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 타계한 재즈 바이올린계의 명인, 스테판 그라펠리와의 공동작업에 의한 레코딩 역시 선구적 크로스오버로 기록됐다.
메뉴인은 최근에는 로열 필하모닉의 명예지휘자로서 세계에 음악을 전파하는 ‘음악전도사’로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95년 가을 내한했을 당시 지휘자로서의 모습을 선보이기도 한 그다.
6. 헨릭 셰링(1918∼1988)
셰링의 연주를 보면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웬만한 연주가들이 공들여 연주할 것을 그는 전혀 어렵지 않게, 마치 부담없이 연습이라도 하는 양 연주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음악은 경탄스러울 만큼 견고하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감정의 커다란 기복없이, 평탄하고 덤덤하게 끌고 나가는 듯하면서도 전체의 구도는 완벽하게 잡혀 있다.
감정과 기교의 조절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 탄탄한 안정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 항상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도 전체의 구도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시각을 지닌 것이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셰링은 수업기에 후베르만과 칼 플레쉬, 그리고 자크 티보로부터 직접 배우거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모두 위대한 교육자들로 이름 높았던 이들이다. 이들 셋의 장점을 모두 흡수해 내면에 동화시키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이끌어내는 노력도, 시간도 충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당시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멕시코에서 가르치며 한동안 화려함 따위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정진했기 때문이다.
1956년 연주여행중이던 루빈슈타인이 그를 보고 당장에 자신의 실내악 파트너로 삼았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베토벤과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rca)은 완성도 높은 귀중한 자료다. 그리고 루빈슈타인은 셰링을 세계 각지에 헌신적으로 소개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연주의 완성도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가 언제 그렇게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깊었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하잘것없는 콩쿠르 입상 경력 하나 없고, 초절기교를 드날리던 젊은 시절도 없었으며, 변변한 레코딩 하나 없었다.
최근에 아를레키노 레이블을 통해 소개되는 그의 젊은 시절 녹음들은 협주곡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가 실은 남 못지않은 연주력의 소유자였고,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균형감과 남다른 조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이렇게 세계에 소개되어 나가자 그의 연주는 높은 평가를 얻게 된다. 특히 음반을 통할 경우 그의 안정감있고 정확하며 전체적인 흔들림없는 연주는 더욱 빛나게 된다. 또한 초절기교를 요하는 곡들과는 거리가 먼,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아주 드문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그의 이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명반은 뭐니뭐니 해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다.
7.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밀슈타인의 고향은 러시아의 오데사다. 바로 위에서 소개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20세기 초의 위대한 음악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두 사람 외에 길렐스와 체르카스키, 코간 정도라면 이?대한 이견은 없을 것이다.
밀슈타인도 오이스트라흐와 마찬가지로 오데사 음악원에서 스톨리알스키에게 사사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우어에게 배우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세 살 위인 하이페츠가 이미 와서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머문 것은 잠깐일 뿐이다. 하이페츠는 혁명 전에 러시아를 빠져나갔고, 밀슈타인은 혁명 이후에도 남게 되었다.
1920년경 호로비츠를 만났다. 호로비츠가 그의 공연을 보러 찾아왔던 것이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켜나갔다. 1925년, 둘은 함께 묶여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첼로의 피아티고르스키도 합류했다.
밀슈타인이 서방으로 망명해 연주활동을 시작할 당시 하이페츠는 이미 자리를 확고히 잡고 센세이션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태양과 같은 그의 강렬한 빛에 엘만, 후베르만, 시게티, 티보, 부쉬 등의 1등성들조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로인 크라이슬러와 신성인 메뉴인만이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하물며 밀슈타인 같은 햇병아리 바이올리니스트야 두말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기교로서 하이페츠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밀슈타인이 유일했다.
1929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미국 데뷔공연을 가진 후 이듬해 미국에 귀화했다. 미국에서 그는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다. 파가니니뿐만 아니라 바흐의 전문가로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교와 음악성을 모두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인식변화였다. 그리고 점점 파가니니의 이미지는 엷어져 가고 바흐만이 남게 되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는 두 번의 녹음이 있는데, 그중 나중에 한 70년대 것이 원숙미가 돋보인다.
밀슈타인은 20세기 초, 러시아가 낳은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위대한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연주했고 또 살아남았다. 물론 슈라 체르카스키가 조금 더 오래 연주, 생존했지만 그는 연주활동에 기복이 심했고, 밀슈타인보다 6년이나 연하였다. 밀슈타인도 체르카스키도 세상을 떠난 지금,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전설로 남은 것이다.
8. 아이작 스턴(1920∼ )
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영화 ‘샤인’에서는 어린 헬프갓에게 미국행을 제안하는 스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음악계에 이른바 ‘유태 마피아의 대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스턴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좋은 예다. 그는 연주여행으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도 그곳에 정착한 유태인들 중에 가능성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핀커스 주커만이나 슐로모 민츠 등은 그가 키운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다.
스턴은 1920년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첫돌 전에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미국땅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1세 때 데뷔연주회를 가졌고, 1937년에 뉴욕에 데뷔했으며, 43년에 카네기 홀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땅에서 자라나 거기서 성공하고 또 그곳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연주가라면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 남을 정도로 드물었던 시기에 그는 탁월한 재능을 자랑하며 당당히 ‘미국 연주가’가 되었다. 비근한 예를 찾으라면 아마 번스타인 외엔 찾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또 드물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가 미국 음악계에 가진 영향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번스타인도 역시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스턴과는 ‘팔이 안으로 굽는 사이’였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는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예를 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유태인으로서 구소련에 억류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펠츠만을 빼내오기 위해 스턴은 당시 대통령 영부인에게 로비를 펴 구소련의 서기장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한다. 두 나라의 국가간 중대사가 수도 없이 많았을 당시, 사람 하나를 부탁한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하고 힘든 일이었을까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스턴은 대통령을 통하면 일이 더욱 힘들어질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스턴의 연주도 번스타인만큼이나 미국적인 것이었다. 외향적으로 분출하는 남성적이고 힘찬 것으로 낙관이 넘치고 확신에 찬 것이었지만, 기교에 치중하는 면이 강하고 깊은 맛이 좀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지금의 이차크 펄만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실내악에 치중했다. 물론 젊은 시절에도 유진 이스토민, 레너드 로즈와 함께 피아노 3중주로 곧잘 어울렸던 스턴이지만 최근 20년내에 그의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은 찾아보기 힘든 점으로 보아 어느 정도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 한 시도로서 비쳐지기도 한다.
9. 지노 프란체스카티 (1905∼1991)
지노 프란체스카티는 최근까지 생존했으나 연주활동을 중단한 지는 오래되어 과거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느낌을 풍긴다.
1962년 2월 2일자 ‘타임’지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5인으로 하이페츠, 프란체스카티, 오이스트라흐, 스턴, 밀슈타인을 선정해 발표했었다. 이렇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란체스카티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선정된 프랑스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었으므로 이탈리아계 바이올리니스트를 대표해 선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파가니니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는 시보리에게 배웠으므로 현대에 이어져 내려온 거의 유일한 ‘파가니니파’ 연주가다. 이러한 경력이 그를 파가니니의 전문 연주가, 또는 철저한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식케 한 면도 없지 않다. 그의 파가니니 연주는 물론 뛰어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파가니니’나 ‘초절적 기교’에 한정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부모의 영향으로 3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았고, 5세 때부터 공개연주를 가졌던 그는 13세 때인 1918년, 마르세이유에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1924년 파리로 가 라벨을 만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인연이 되었다. 프란체스카티는 이 인연으로 라벨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닐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별로 많지 않은 라벨 스페셜리스트 중에는 따라서 프란체스카티의 이름이 꼭 들어간다.
1939년, 뉴욕 필과 역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해 미국 데뷔를 기록했다. 이 연주회로 미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프란체스카티는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떠나 미국을 주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는 또 다른 라벨 스페셜리스트, 피아니스트 로베르트 카자드쉬를 만났다. 이 둘의 앙상블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묘한 것으로 정평이 나기도 했다. 음반으로는 발터 지휘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4번(소니), 카자드쉬와 함께한 베토벤 소나타 5번, 9번(소니) 등이 유명하다.
10. 기돈 크레머 (1947∼ )
크레머.어떻게보면 ‘기괴하다’고까지 표현할 만한 용모를 지니고 있으며,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식되고 있는 그가 ‘파가니니의 환생’으로 불리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로 연주의 재창조성을 탐구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로서 보여지는 연주는 아무 생각 없이 현란한 기교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 작곡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그 결과에 의한 작품의 연주, 그리고 숨겨진 작곡가들을 소개하고 부활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현대 음악 레코딩만 하더라도 슈니트케, 구바이둘리나·아르보 페르트·루이지 노노·필립 글래스 등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크레머가 이번에 무엇을 연주하였는가, 크레머의 해석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세계 음악계의 작은 사건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피아졸라’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1947년 라트비아 공화국의 리가에서 태어난 크레머의 외할아버지는 독일에서 활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칼 브루크너였고, 양친 또한 모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모계로는 독일, 부계로는 스웨덴 계통의 피를 어어받은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다. 1965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본다렌코에게 배웠다. 67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3위, 69년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고, 같은 해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그의 파가니니적인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7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75년에 서방에 데뷔한 이후, 76년에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브람스의 협주곡을, 78년에는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과 번스타인의 ‘세레나드’를, 79년에는 마젤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녹음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하다가 1980년에 급기야 당시의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81년에 로켄하우스 음악제를 창설했다.
로켄하우스는 원래 헝가리 국경에 접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로, 그 마을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로켄하우스 성에서 매년 7월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실내악 페스티벌인 이 음악제는 현대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연주가들이 모여 이어지고 있다. 로켄하우스의 멤버들은 연주 여행도 행했고, 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들렀었다. 92년부터는 이 음악제의 명칭이 크레머의 이름을 따서 ‘크레메라타 무지카’로 바뀌었다.
그의 여태까지의 음반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들라면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로 더 유명해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한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2번의 음반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 아파나시에프와의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도 주목 할만 하다.
20세기 바이올린을 풍미한 현의 마법사들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남기고 간 업적과 그들의 연주 스타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실로 방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선 20세기 초에 영향을 미친 바이올린 악파들을 중심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물론 오늘날 바이올린의 계보나 악파를 논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는 위대한 바이올린의 스승을 중심으로 한 바이올린 악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그 이후에도 몇몇 악파들의 특성들은 바이올린 주법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으므로, 20세기 바이올린계의 흐름을 악파별로 조명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바이올린 악파는 대개 프랑코-벨기에 악파, 독일 악파, 이탈리아 악파, 러시아 악파, 그리고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으로 나누지만, 독일 악파와 이탈리아 악파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일찍 쇠퇴했으므로 프랑코-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체코 및 동구권 악파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랑베르 마사르가 있다. 마사르는 기질적으로 심약한 사람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아주 훌륭해 크라이슬러·비에니아프스키·사라사테·마르시크 등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냈다. 마사르의 제자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구사해 우아하고 달콤한 음색을 만들어낸 현대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마사르의 다른 제자인 마르시크는 20세기 초반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칼 플레쉬·자크 티보·조르주 에네스쿠 등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마르시크의 제자 칼 플레쉬는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바이올린 주법을 가장 충실히 계승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주법의 과학적인 연구자로, 바이올린 테크닉에 대한 책을 발간해 바이올린 기술의 총체적인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매우 합리적으로 기술적인 훈련을 하는 방법을 제시해 가장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바이올린 주법을 확립시켰다고 평가된다.
프랑코-벨기에 악파 중에서도 벨기에 쪽의 중심 인물로 꼽을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외젠느 이자이다. 그는 밀도있는 비브라토를 구사했고, 여러 가지 변칙적인 주법을 고안해내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법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벨기에에 이자이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자크 티보가 있었다. 티보의 연주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바로 ‘우아함’일 것이다. 그의 톤은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부드럽고 정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 악파는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지만 20세기 바이올린 연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드 아우어는 러시아 악파의 시조로 야샤 하이페츠·토샤 샤이델·에디 브라운·막스 로젠·미샤 엘만·나탄 밀슈타인·예프렘 짐발리스트·텔마 기븐 등의 쟁쟁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러시안 보우 그립, 즉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을 좀더 감싸쥐어서 활을 현에 더 밀착시켜 소리낼 수 있게 하는 특수한 방법을 개발해 러시아 악파만의 탄력있고 긴장된 음색을 만들어냈다. 하이페츠는 이러한 아우어의 주법을 충실히 계승해 활의 압력에 치중하는 보잉과 그 특유의 강렬한 비브라토, 그리고 완벽하고 화려한 테크닉으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이페츠와는 대조적으로, 밀슈타인은 단정하고 지적인 연주 스타일을 고집했으며, 엘만은 긴장감있는 임펄스 비브라토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관능적인 음색을 만들어냈다. 짐발리스트는 하이페츠의 기술적 완벽성과 엘만의 뛰어난 톤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내면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에서도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것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오타카 세프치크의 체계적인 테크닉 훈련법에 힘입은 바 크다. 세프치크의 교수법은 손과 활의 민첩성을 기르기 위해 단계적인 훈련을 유도하는 것으로, 이 훈련법을 계승한 세프치크의 제자 얀 쿠벨릭은 ‘파가니니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기술적 완벽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세프치크의 기계적인 훈련법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윤기없는 연주를 들려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전반의 거장들
1920년대 중반은 크라이슬러·엘만·하이페츠로 대표되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신동 예후디 메뉴인은 10대의 나이에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연주로 음악계를 경악시키면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선두주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떤 특정 악파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고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로 폴란드계 유태인인 브로니슬라브 후베르만과 헝가리 태생의 요제프 시게티가 활발한 연주 활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라는 20세기 최대의 비르투오소가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또 다른 악파의 위대한 스승 표트르 스톨리알스키의 제자로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특징을 두루 갖춘 쉬프팅 방법과 아우어식의 보잉, 연주 자세로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음색을 만들어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역시 러시아 출신의 레오니드 코간은 선배격인 오이스트라흐와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 비브라토를 억제한 견고한 톤으로 반낭만적이고 금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계승자로 여겨지는 아르투르 그뤼미오는 ‘티보의 재래’라는 평가를 받는 벨기에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 모차르트의 연주에 특히 뛰어나다. 프랑스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남성적인 톤과 놀라운 음악성을 지닌 지네트 느뵈가 있으며, 그밖에도 관능적인 음색과 우아함을 겸비한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바이올린 연주 기술에 있어서 상당히 보수적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신중한 음악적 접근 태도에 기인한다. 이러한 독일 전통의 계승자로서 아돌프 부쉬·게오르크 쿨렌캄프·볼프강 슈나이더한·시몬 골드베르크가 있다. 그러나 세프치크의 제자였던 오스트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에리카 모리니는 당대 연주가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개성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시기에는 체코 및 동구권에서 특히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탄생했다. 체코 악파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지는 요제프 수크는 실내악 연주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으며, 폴란드 출신의 헨릭 셰링은 바흐 연주의 정통파 해석으로 명성을 쌓았다. 요즈음 다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이다 헨델은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느뵈와 함께 플레쉬의 제자였다. 그는 레코딩을 기피하는 연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최근 73세의 나이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음색은 그다지 풍부하지는 않지만 따뜻하면서도 강인하고 표현력이 넘친다.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실내악에 능했고, 지휘자이기도 했던 샨도르 베그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가 있다. 그밖에도 루마니아 출신의 롤라 보베스코는 6세 때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고, 12세에 파리음악원을 수석 졸업한 천재 소녀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밖에도 스위스의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이탈리아의 조콘다 데비토, 그리고 달콤한 음색을 지닌 알프레드 캄폴리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20세기 후반의 경향
20세기 후반의 바이올린계는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들이 독점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 전통을 계승한 20세기의 위대한 스승 이반 갈라미언은 러시아파와 프랑스파의 장점들을 흡수해 매우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주법 체계를 만들어냈으며, 고정된 원칙을 내세우기보다는 연주자 개인의 특수성을 살려 개발하는 교수법으로 유명했다. 그의 교수법은 실로 혁명적이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탄생했다. 그들 중 선두주자는 역시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일 것이다. 그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부자유스럽지만 놀랄 만큼 유려한 음색과 완벽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비르투오소이다. 그와 더불어 갈라미언의 제자로 정경화·김영욱·강동석·핀커스 주커만·제이미 라레도, 그리고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깝게 요절한 마이클 레빈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 이유 중 하나로 핀커스 주커만과 슐로모 민츠 등의 인재들을 발굴해낸 아이작 스턴의 영향력이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스턴은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지구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한 대표적인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 그의 연주 스타일은 정확하고 형식적인 균형미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 뛰어난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빛나는 테크닉과 날카로운 감성의 소유자로 20세기 음악에 뛰어났던 이브리 기틀리스가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고음악을 원래 악기로 연주하는 원전 연주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도 점차 늘어났다. 바로크 바이올린의 명수 쿠이켄 3형제 중 둘째인 지기스발트 쿠이켄은 대표적인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레코드에서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 태생 유태인이며, 갈라미언과 막스 로스탈의 제자인 세르지우 루카는 고악기와 현대 악기를 두루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밖에 네덜란드 출신의 얍 슈뢰더, 루시 반 달, 그리고 독일의 베르너 크로칭거, 오스트리아의 알리스 아르농쿠르, 영국의 모니카 허젯·앤드류 맨즈, 이탈리아의 파비오 비온디 등의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20세기 후반은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강세를 보였으나,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 중 뛰어난 테크닉과 독특한 음악 해석으로 많은 음악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기돈 크레머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제자인 크레머는 다채로운 음향과 미묘한 음영을 주는 섬세한 주법으로 현대 바이올린 주법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밖에도 러시아에는 이고르 오이스트라흐·타티아나 그린덴코·올레그 카간·보리스 벨킨·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 등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20세기 후반, 유럽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꾸준히 좋은 연주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우선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피에르 아모얄과 장 자크 캉토로프, 그리고 크리스티앙 페라스, 오귀스탱 뒤메이 등이 세련된 연주를 들려준다. 그밖에 이탈리아에는 파가니니에 비교되는 빛나는 테크니션 살바토레 아카르도와 우토 우기, 펠릭스 아요, 독일에는 비올라 연주자이기도 한 토마스 체트마이어가 있다.
21세기를 지향하는 젊은 거장들
20세기의 황혼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 21세기를 밝혀줄 바이올린의 거장들은 과연 누구일까? 우선 카라얀의 눈에 띄어 급격히 성장했던 안네 소피 무터가 있을 것이다. 이미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터는 특유의 탄력있는 리듬과 긴장감 있는 음색에 점차 음악적 풍부함을 더하고 있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무터와 함께 게르만계 바이올리니스트의 맥을 잇고 있는 프랑크 페터 침머만은 밝고 따뜻하며 섬세한 음색과 신중함을 갖춘 성실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러시아에도 21세기를 이끌어갈 젊고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있다. 무터와 함께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는 나무랄 데 없는 테크닉을 보여주며, 차세대의 대표 주자 막심 벤게로프와 바딤 레핀은 왕성한 연주 활동과 레코딩을 통해 대담하고 독특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미국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조슈아 벨과 길 샤함이 돋보이며, 동양계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일본의 미도리와 우리나라의 장영주가 21세기를 이끌어갈 젊은 거장들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