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고백하자면 교향곡 2번의 음반을 구매하는 데에 있어서는, 말러의 다른 번호의 교향곡들과는 달리 제게 망설임이나 갈등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안동림 교수님의 "이 한장의 명반" 에서 처음 이 음반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제게 있어서 교향곡 2번은 정말로 '이 한장의 음반' 만이 있을 뿐이니까요.
오토 클렘페러의 "부활"이 저의 유일무이한 선택이 된 데에는, 그 무엇보다도 지휘자인 클렘페러의 기구한 인생 역정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말러의 두 번째 교향곡에 붙어있는 부제인 "부활"은, 클렘페러의 오뚜기와도 같은 칠전팔기의 인생을 단 한마디로 축약시켜 표현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입니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나락에 빠졌다가 문자 그대로 '부활'한 것이 도대체 몇 차례에 달하는 것인지.......
클렘페러는 말러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지휘자였습니다. 말러의 조수였던 브루노 발터와 비슷하게, 그 역시 20대의 젊은 시절 당시 독일계 지휘자의 대가로 이름을 떨치던 말러의 후원에 힘입어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온화한 성격의 발터와는 달리, 그는 무뚝뚝한데다가 황소 저리가라할 정도의 고집쟁이였고, 그로 인해 온갖 시련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는 지휘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던 프라하 도이치 오페라에서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쫓겨났고, 이후 말러의 추천으로 자리잡게 된 함부르크 오페라에서는 소프라노 가수와의 염문으로 인해 또 다시 추방당했습니다. 그 후 클렘페러는 계속해서 가는 곳마다 쫓겨나거나 혹은 소속된 음악 단체가 망해버리는 등, 불운을 뒤에 달고 다니는 지휘자였지요.
1935년에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한 클렘페러가 미국에서 간신히 LA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등에서 겨우 재기의 기회를 잡으려는 차에, 운명은 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1939년 그는 뇌종양 판정을 받고는 수술대에 눕게 되었고, 수술의 후유증인 반신 마비 증상으로 인해 폐인이 되고야 맙니다. 공장에 다니면서 푼돈을 근근이 벌어온 딸 로테의 헌신이 아니었더라면 클렘페러의 인생은 거기서 사실상 막을 내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947년 유럽으로 돌아가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재기에 성공함으로서, 클렘페러는 다시 한번 부활하게 됩니다. 게다가 1951년부터는 EMI의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후원을 얻어, 스튜디오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숱한 명반들을 남기게 되지요.
하지만 또 다시 불운이 클렘페러를 덮치고야 말았습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허리에 심한 부상을 입게 된 것이지요. 때문에 한동안 앉아서 지휘봉을 휘둘러야 했던 그는, '돈 조반니' 공연 중에 벌떡 일어났다는 기적같은 일화를 남기면서 또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클렘페러는 파이프 담배를 문 채 잠이 들었다가 전신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고혈압으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만, 그 때마다 새로이 재기에 성공하여 사람들을 경탄시켰습니다. 그가 오랜동안 벌여왔던 운명과의 투쟁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한 패배를 맛보게 된 것은 1973년에 이르러서였지요.
이처럼 클렘페러는 오로지 음악에 대한 의지와 열정 만으로 숱한 고난과 시련을 헤쳐나온 지휘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이 1961~1962년의 "부활"이, "부활"을 대표하는 명반으로 손꼽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겠지요. 지휘자가 지니고 있는 너무나도 독일적인 결연하고도 강고한 의지와 거대한 음악적 스케일이 시종일관 이 음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1악장과 5악장에서 그려지는 투쟁과 패배와 부활의 대하 드라마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입니다.
음반 자체도 CD로 처음 등장하였을 때의 빈약하기 짝이 없던 형편없는 음질이, EMI GROC 시리즈로 재출반되면서 art 리마스터링 덕분에 LP 시절의 명망을 다시 회복하였다는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클렘페러의 "부활"은 모든 면에 있어서 교향곡 2번의 부제에 걸맞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명반'이라는 칭호를 바칠 수 밖에 없는 음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