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인봉에서 활기 받고 나발봉에서 나발 불고
-고대 통일산악회, 6월 공주 태화산 등산기
무더운 날이었지요. 온도계의 눈금이 섭씨 30도 위로 치솟는다는 뉴스를 들은 6월 30일 아침, 어디 덥거든 더워봐라, 통일 산악꾼들이 이까짓 더위에 겁먹을 약골들인 줄 아느냐 하는 결기로 집을 나섰지요. 그렇지만, 대형버스를 대절해 놓았는데 참여자가 너무 적으면 어쩌지 하는 일말의 불안도 들었습니다.
파르티잔 부대장이나 다름없는 등반대장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 정상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해야 하는데, 정작 용감하게 돌격할 병사가 없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집결장소인 서초 구민회관 앞에 가서 기다리니, 하나둘 반가운 얼굴들이 나타났습니다.
출발시간은 9시, 버스에 오른 총인원은 25명.
그런 대로 출석률이 괜찮았지요. 게다가 교우회보에 실린 알림 기사를 보고 처음 나온 신입이 있어서, 더 반가웠습니다. 성동구 성수동에 사는 조성수(법학과 72학번) 교우입니다. 경남 밀양 태생으로 기골이 헌걸찬 모습에 등산 경험도 풍부한데, 현재 고충처리위원회에 재직중이더군요.
“돌아와 광복 세상을 보니 꿈만 같구나”
충남 공주의 마곡사(痲谷寺)라면, 들어본 적 있겠지요? 마곡사는 신라 선덕왕 12년(서기 64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재건한 사찰입니다. 조계종 제6교구 본찰인 큰 가람입니다. 이번 산행은 이 마곡사를 둘러싸고 있는 태화산(泰和山)을 오르는 것입니다.
태화산은 활인봉(活人峰. 423m)과 나발봉(417m)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진 아담한 흙산이지요. 태화산 일대는 무성산, 국사봉 등 산줄기가 겹쳐 태극 모양을 이룬 특이한 지형으로 그 태극의 자궁 안쪽에 마곡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절로 지맥의 생기를 받는 승지입니다. 왜 이름이 해인사나 법주사처럼 그럴 듯하지 않고, 하필 대마초나 마약을 연상시키는 마곡사냐고 묻는 사람도 있잖을까 싶네요.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옛날 이 절 큰스님이 워낙 훌륭해서 설법을 들으려는 신도가 삼밭에 삼이 빼곡히 솟듯이 쭉쭉 몰려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마곡사 경내로 흘러드는 마곡천 변에 마가 많이 자라서 그렇게 지었다는 설도 있어요. 마는 우리말로 '삼'이라고 하며, 질겨서 동앗줄을 삼거나 삼베를 짜는 데 쓰이는 일년생 풀입니다.
6월 코스로 태화산을 고른 까닭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기가 왕성한 땅에 적송(赤松)이 울창하니까 송림 그늘을 걸으면서 나무의 정기 가운데 으뜸이라는 적송의 기운을 받자는 점이요, 둘째는 천년고찰 마곡사에서 천년 묵은 법화(法花)를 받아 회원 모두 건강과 행복을 다지기를 바라는 바요, 셋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라 우리 회원들이 오붓하게 산행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리자는 것이었지요. 한국 등산인구가 1,7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잘 알려진 코스를 가면, 앞 사람 궁둥이만 바라보고 다른 산꾼들과 어깨를 부딪히다가 끝나는 '도떼기 산행'을 하기 십상이지요.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정안나들목-604국도를 타고 마곡사 입구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 오는 도중 차안에서 이강식 부회장이 마곡사에 숨은 일화를 들려주었지요. 하나는,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청년시절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에 대한 분노로 1896년 일본군 장교를 척살하고 이 곳에 숨어 지낸 얘기였습니다.
실제 광복후 이곳을 다시 찾은 백범은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만 같구나”(去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마곡사 대광보전 기둥에 쓰인 글을 보고 감개무량해 했다고 합니다. 그때 백범이 심은 향나무는 꿋꿋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왜놈 장교라면 칼솜씨도 제법이었을 텐데, 중인환시리에 그 자를 단칼에 쓰러뜨린 걸 보면 백범은 무예 실력도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제법 풍월에 밝은 나도 처음 들어보는 기적의 삿자리 이야기였습니다. 나중에 내가 은근슬쩍 마곡사 보살에게 확인취재를 한 결과 전설의 소상한 실체는 이렇습니다. 마곡사 큰 법당인 대광보전 마루바닥에는 삿자리가 깔려 있습니다. 백여년전에 한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 찾아와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자른 참나무 조각을 정교하게 엮어 만든 귀물입니다.
100일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자리를 짜서 30여평이나 되는 넓이의 법당 안에 삿자리를 다 깔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 법당 밖으로 걸어나갔다고 합니다. 간곡한 그의 정성에 부처님이 감복하여 하반신 마비를 말끔히 고쳐주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그 법력의 은덕을 보여준 그 삿자리 위에다 비닐 장판을 깔아서 보호하고 있더군요. 다음에 마곡사에 가게 되면 꼭 이 삿자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불치병을 고친 영험한 기운을 받으세요. (술만 잘 마시는 사람으로 알기 쉬운데, 나와 동기인 이강식 님은 몸통이 엄청 큰 만큼 그 통 안에 들어 있는 지식과 감성도 큰 풍류남아임을 잊지 마세요.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방학 한달 동안 마곡사 근처 농촌에서 일손돕기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아저씨, 날 찾아주어 고마워요"
산행코스는 은적암 옆 숲속으로 들어가 활인봉에 오른 다음, 다시 나발봉을 거쳐서 토굴암 을 지나 마곡사 경내로 내려오는 5km 정도입니다. 알맞게 울창한 숲길이라 햇볕을 피하기 좋고, 나뭇잎이 쌓인 부드러운 흙길이라 발이 편하지요. 공주 땅에서는 "봄은 마곡사요, 가을은 갑사(甲寺)"라고 자랑하여 봄철 태화산 꽃풍경을 으뜸으로 치지만, 봄에 좋은 산이 여름이라고 안 좋을 리 없지요. 몸이 불편해 오랜만에 산행에 나온 김유주 선배나 노향기 선배도 쉬엄쉬엄 걷기 좋다고 하더군요.
두 시간을 걸어서 활인봉을 거쳐 나발봉 정상에 도착했어요. 그곳 산정의 정자에서 점심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4월에 가입한 서예가 난정 김순환 님과 이영순 님이 갖가지 별미를 준비해와 밥상 차림이 큰 잔치 수준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명실 공히 ‘통일산악회 대장금’으로 군림해온 원영애 님이 위협을 느끼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날은 오지 않았더군요.
두루두루 전망 좋은 산꼭대기에 아담한 정자가 서 있고 정자 안에는 스무 명쯤 둘러앉을 수 있는 통나무 식탁이 놓여 있으니, 그만하면 밥자리도 더없이 좋았어요. 자기 품에 안긴 산꾼들을 어여삐 여겨 나발봉 산신령께서 시원한 산바람까지 산들산들 보내주어 술도 맛있고 밥도 맛있었습니다.
식사 중반까지 발이 느린 몇 분이 도착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미스터 메트로’ 님이 단호하게 “중간 갈림길에서 마곡사로 내려갔다”라고 특종(?) 보도를 했거든요. 그런데, 점심이 끝나갈 무렵 그분들이 허위허위 도착했으니, 이미 산해진미도 술도 다 동이 나 머쓱했지요. 다행스럽게 이 분들 또한 배낭에 술과 밥과 안주가 넉넉해서 자급자족하고도 남았습니다. 다행이었지요. 앞으로 ‘미스터 메트로’님은 예단성 기사로 오보를 하지 마세요.
나발봉에서 마곡사로 내려가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점심과 휴식을 마친 다음 다시 행장을 꾸리고 예나 지금이나 선승이 면벽으로 깨달음의 뿌리를 뽑아대는 토굴암을 거쳐 마곡천이 졸졸 흐르는 길로 하산했습니다. 마곡사 뒷산에 여기저기 중창 불사를 하느라 땅을 마구 파헤쳐 청계수이던 마곡천 물은 상당히 흐려져 있었습니다. 발 담그기 싫었어요. 산 중턱까지 차가 드나들도록 도로도 닦고 있더군요.
그냥 자연 그대로 놔두고 소박하게 살면 좋을텐데, 개발의 삽질을 하지 못해서 안달인 건 산중 스님네들도 마찬가지인가 싶습니다. 마곡사를 감싸고 S자 형태의 만곡을 이루며 흐르는 마곡천은 이른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인데다, 세속의 티를 씻어주는 청계수로 무척 사랑받았거든요. 산행 막판에 맑고 찬 계곡물에 땀을 씻고 발을 담그는 재미는 그만 아닙니까. 사이다도 그만큼 청량하지 않습니다. 삽질이 끝날 때까지 마곡천 맑은 물을 만나기 힘들게 생겼습니다.
내려오는 중턱 길가에는 산나리꽃이 피었더군요. 산나리는 산처녀처럼 발갛게 웃으며 “서울 아저씨, 저를 찾아주어서 고마워요”라고 수줍게 인사를 하더군요. 대대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땅에서 자란 산나리 양이라 그런지 귀티가 나고 순정해 보였지요. 태화산 근처에 세계 제일의 금세공술로 만든 미려한 왕관이 발굴된 무령왕릉도 있습니다. 산나리 양 조상들은 아마 천년동안 무령왕 무덤지기를 하며 붉게붉게 피었을 겁니다. 짙은 녹음 속에서 심심할 만하면 패랭이꽃도, 엉컹퀴꽃도, 방긋 웃고 나타났습니다.
말궁둥이나 닦으면 안성맞춤인 자가 왕이었으니...
더 내려오니까 마곡천 변 등산로에는 하얀 망초 꽃이 무성하게 피었더군요. 흰색 천지의 메밀꽃밭 같았어요. 누가 일삼아서 수천평 망초 밭을 가꾸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거의 어른 키 높이로 자란 망초 숲을 헤치며 내려오며 슬픈 환상에 젖었습니다.
조금 과장을 하면, 백제의 삼천 궁녀들이 다시 살아나서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나를 맞이하고 배웅하는 듯했으니까요. 그 중 가장 해맑은 궁녀의 볼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충신을 다 죽이고 나라를 빼앗긴 의자왕보다는 훨씬 마음에 든다고 하대요. 열일곱 살 꽃같은 나이의 그 궁녀 이름은 류단실(柳丹實)이고, 금강 웅포(熊浦) 나루에서 상단무역을 하는 중인(中人) 유리달고(柳里達古)의 딸로 출생했지요. 미색이 출중해 열다섯살 때 간신 채홍사(採紅使) 양을귀(梁乙龜)의 눈에 띄어 반강제로 입궁당했습니다.
웅포나루에서 단실이가 관선에 실려 부여로 갈 때 피눈물을 흘리면서 울던 동갑내기 소년이 있었으니, 웅포 객점주 아들 계선(階宣)이었습니다. 황산벌에서 전사한 계백 장군의 먼 조카뻘 되기도 하지요. 천년이 흐르고 계선은 등산객으로 단실은 망초꽃으로 공주땅 태화산 마곡천변에서 상봉하게 됩니다. 망초꽃길을 내려오면서 계선은 단실이의 영혼에게 바치는 추모시를 지었지요.
<망초꽃길을 걸으며>
-의자왕의 열일곱살 궁녀 단실에게
왔구나 흰꽃으로 왔구나
천년이 흘러도
늘 열일곱 살
오늘 망초꽃으로 왔구나
단실아
네 세상이 그랬듯이 내 세상도 흔들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자들은
난장을 친다
그렇게 강물에 내던질 꽃이라면
꺾지나 말지
궁녀 삼천은 무엇이고 주지육림이 가당한가
마굿간에서 말궁둥이나 닦으면 딱 맞을 자가
왕이라니,
제 몸속의 짐승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자에
천하를 맡겼으니
백 번 망해도 싸지, 싸고 말고!
단실아
왜 목숨을 끊느냐
그 자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이처럼 서럽게 개망초꽃으로 돌아올 길을
가느냐 말이다
궁(宮)을 떨치고 나와
어느 산 이름 모를 나뭇꾼의 아내로
한 세월을 견딜 일이지,
내 가슴 천길 낭떠러지에 와 투신하느냐 말이다.
읊고 나니 <천년유혼>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에 슬픔이 기쁨보다 많으니...
그럭저럭 마곡사에 당도했어요. 마곡사 너른 경내에서 30여분 동안 참배할 사람은 참배하고, 쉴 사람은 쉬고, 약수 마실 사람은 약수를 마시다가 기념사진을 찍고 마곡사 일주문을 나와서 뒤풀이하러 갔지요. 뒤풀이 집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군요. 상호는 한밭식당(041-841-8091)인데 여기 별미는 해물파전입니다.
그날의 영광을 위해 주도(酒道)에 정진하라
밀가루로 부치는 게 아니라 도토리가루로 파전을 부치기 때문에 그 맛과 향이 독특하거든요. 안주인 인상이 좋아 불쑥 들어간 집인데, 나중에 보니까 그녀의 아들이 최 학 님의 제자이더군요. 방학 중에 엄마의 장사를 돕다가 그 대학생은 졸지에 스승님을 모시는 기쁨을 누렸지요. 뒷풀이를 다 끝내고 버스가 떠날 때는 한밭식당 주인과 아들들이 모두 나와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어요. 역시 제자를 잘 기르는 훈장과 동행하니, 덩달아 섬김을 받는 수가 있긴 있더군요.
다시 뒤풀이 얘기로 돌아갑니다. 사방이 탁 트인 별채 마루에서 푸짐하게 판을 벌였으니 ‘저승사자’가 아니라 우리의 독보적인 괴물 ‘주승사자’가 가만있겠습니까. 맨날 주림(酒林)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지만, 영원한 그의 구호인 “위하고!”와 “러브 샷!”은 연중무휴입니다. 그런데, 사발주 차례를 지목 받는 이마다 질려 하지 않으니 그의 은퇴는 늘 미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타고난 술고래입니다. 그래서 수년간 그의 무지막지한 사발주 돌림에 시달린 내가 방법을 터득했지요. 내가 소시 적에 그런 대로 '쓸 만한 머리'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전술은 간단해요. 고래를 맞상대하면 절대 안 됩니다. 협공을 해야 합니다. 상어급 다섯이 줄기차게 덤비면 태평양 범고래도 너끈히 잡을 수 있지요.
고려대 교우회 산하에 등산회는 2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 정통을 가리자면, 우리는 우리라고 믿는데 다른 산악회는 자기들이라고 우기겠지요. 언제인가 우열을 가릴 진검승부의 기회가 올 겁니다. 교우회장기 쟁탈 등반대회가 열릴지 모르니까요.
다른 등반대회와 달리, 산타기 시합만을 하는 게 아닐 겁니다. 원래 조상들이 사또 심부름을 해먹던 통인(通人)의 자손들은 발이 빠르고 산도 잘 탑니다. 볼기 맞지 않으려면 걸음이 빨라야 합니다. 순전히 통인을 부리기만 했지 직접 산 다람쥐 노릇을 해본 적이 없는 반가(班家) 핏줄인 우리 산악회 멤버들은 아마도 산타기 종목에서는 3위 안에 들기 힘겹지 않을까요.
하지만, 등반 후 벌이는 막걸리 시합에서는 금메달을 예약해 놓았다고 할 만하지요. 70대, 60대, 50대, 40대, 30대, 세대마다 골고루 호가 난 장안의 주당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그 시합에 나갈 선수를 꼭 누구라고 지금 여기에서 공개적으로 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스스로 대표선수로 자인한 다음 긍지를 갖고, 통일산악회의 이름을 만방에 떨칠 그 날을 기다리며 가일층 주도(酒道)에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품위와 풍류도 심사기준이니까 목마른 황소 물마시듯이 술만 마시지 말고, 음양으로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체력을 높이고, 소리를 배우고, 시작(詩作)도 해서 가무음곡과 주흥시(酒興詩)에서도 단연 발군의 실력을 키워갑시다.
5명의 산적, 웃통 벗고 '소폭'에 푹 빠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도 술판이었습니다. 버스 뒷 칸에 ‘막걸리 카페’를 차리고 주구장창 마셔댔으니까요. 카페 주인은 나였고, 미모의 ‘알바 여대생’으로는 난정(蘭亭) 여사가 뛰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7만원의 팁이 생겼더군요. 서울 도착 후에 호프집 술값에 보탰습니다.
이 정도면 딱 좋은데, 그만 두주불사형 선수들이 남아 골목 순대국 집에서 주종을 ‘소폭’으로 바꿔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길가 목로에 앉아서 웃통을 벗어붙인 채 얼마를 마셨던지 막판에는 나도 필름이 흐려졌어요. 여름밤, 태화산에서 내려왔다는 덩치가 절구통만한 산적 다섯이 진짜로 웃통 벗고 마셔대니까 오가는 사람마다 조폭 일당이 아닌가 놀라더군요.
주승사자 이모씨, 회장특보 권모씨, 꽃미남 김모씨, 젊은 오빠 전모씨, 그리고 등반대장 아무개씨---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아예 술통 속으로 잠수하자는 겁니까. 이 등반기를 쓰고 있는 익일 아침까지도 내 몸에서는 술 향기(?)가 진동합니다. 다 쓰고 나면, 산행버스에서 거침없이 광고한 내 비법대로 마늘 넣고 생강 넣고, 대추도 몇 개 넣은 다음 옻 우려낸 물에 토종닭을 푹 삶아 먹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헛개 열매로 만든 녹두만한 알약을 30알쯤 삼키면 주독은 슬슬 빠져 나가기 마련입니다.
며칠 전에 마누라가 해외로 여행 떠나 홀로인데, 어느 자비로운 손이 있어 이 외롭고 속 아린 사내의 내장을 다스려주리요. 자력이 갱생이요, 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도 돕는다지 않습니까. 그냥 주독을 방치하면 하루 종일 방안퉁수 앉은뱅이가 되어 끙끙대기 십상입니다. 대광보전 삿자리를 짠 선인이여! 오후가 되면 이 술병을 깨끗이 고치고 나도 당신처럼 벌떡 일어나 집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슬슬 아파트 뒷산에 올라가 만보(漫步) 산책을 해야지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활인봉에서 듬뿍 받은 활기를 되살려 나발봉 산신령이 불어준 상큼한 산바람처럼 산들산들 한달을 살렵니다. 산행을 함께 한 선배님들과 아우님들, 그리고 이 글로 간접산행을 한 모든 분들, 다음 산행 때까지 아무리 무더위와 장마가 괴롭혀도 태화산 태극 정기를 잘 간직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심신의 활기를 지키면 한여름 터널, 그까이거는 가볍게 통과하고 말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