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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16(월). 고려성경연구소
냉수 한 그릇의 상
[본문] 마 10:40-42
변 종 길 (고려성경연구소장)
1. 먼저 41절, 42절의 "선지자의 이름으로", "의인의 이름으로", "제자의 이름으로"가 무슨 뜻인가? 주석에 보면 대개 "그가 선지자(의인, 제자)임을 알고서/인식하고서"라고 설명한다(France, Nolland 등). 문맥으로 보면 이런 뜻이 될 수밖에 없는데, 헬라어 "에이스 오노마 ..."가 왜 그런 뜻이 되는지에 대한 문법적 설명은 거의 없다. Zerwick-Grosvenor의 A Grammatical Analysis에 보면 "에이스 오노마 (프로페투)"에 대해 "on the ground of / in view of his being a prophet"라고 설명하고 Zerwick의 Biblical Greek §98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여기를 찾아보면 전치사 eis와 pros에 대해 드물긴 하지만 "on account of"(... 때문에)의 의미로 사용된 구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그래도 문법적으로 제일 근거가 있는 설명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그 의미는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이란 뜻이 된다. '오노마'(onoma, 이름)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존재 또는 신분을 나타낸다. 전치사 eis는 원래 '안으로'(into)의 뜻이지만 헬레니즘 시대에는 en(in, with)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고, 아주 넓게, 모호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는 바 "...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고 할 때는 "에이스 토 오노마 ..."인데, 여기서는 관사 '토'(to)가 빠졌다. 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는 어려운데, 관사가 없으면 좀 덜 공식적이고 덜 의식적인 감이 든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과 초대 교회에서 정형화된 세례 문구의 "... 의 이름으로"(eis to onoma ...)는 아니고, 선지자(의인, 제자)라는 존재, 신분에 초점을 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상'의 헬라어 '미스또스'(misthos)는 원래 노동의 대가로 받는 '삯, 임금'(wages)을 뜻하는데, 나아가서 어떤 일에 대한 보상(reward)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물론 후자의 의미인데, 각각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물론 '제자의 상'은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내용상 의미는 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각자 자기가 행한 선한 일(선지자를 영접하고, 의인을 영접하고, 제자를 영접한 것)에 대해 각자에게 합당한 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각각의 행위에 대한 보상의 '비례성'(evenredigheid)을 말한다(Grosheide).
3.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상'은 무엇일까?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그리고 냉수 한 그릇 주는 자가 받는 상은 무엇일까? 이것을 '구원'이나 '영생' 또는 '하나님 나라'로 볼 수는 없다. 천국에서의 구별되는 상급을 부인하는 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상'에 대해 믿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받는 '구원' 또는 '영생' 또는 '하나님의 나라'로 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극단적인 행위 구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자들을 대접하고 성도들을 돕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 구원 사상은 성경이 극구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은 하나님의 '인정', '칭찬', '영광'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선을 행한 자를, 예수님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기억하시고 갚아 주신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꼭 이 상을 목표로 하고 그 상 때문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마땅히 하였을 따름이다. 아니,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여야 할 일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 주석가는 이 구절들은 행위의 '공로성'(verdienstelijkheid)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개신교가 틀렸다고 말한다(Keulers). 그러나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uit genade, 롬 6:23), "그리스도 때문에"(om Christus' wil, 고후 1:20; 6:1) 주신다고 말한다(Statenvertaling 마 5:12의 각주). 우리에게 상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행위이며 그의 기쁘신 뜻이다. 따라서 이 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하된 백성의 마땅한 도리이다. 끝까지 이 상을 받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역하는 죄가 된다.
4.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에는 구별이 있고 차이가 있다. 구원과 영생과 천국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으로 주시지만, 각자의 행위에 따른 상급에는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 5:12에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헬라어로 '폴뤼스'인데 '많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할 때에는 하늘에서 상이 많다는 것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 구약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도 핍박당할 때에 하늘에서 상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당하고 순교한 선지자들이 단지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선지자들이 받는 상이나 보통 신자들이 받는 상이나 차이가 없으며, 또 '많다', '적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5.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개혁 교의학』 제4권 마지막 섹션(§580)에서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해 다룬다. 자연에 다양성이 있듯이 천국에도 다양성이 있으며 상급에도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천국에 각자 '영광'(heerlijkheid)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주후 4세기에 Jovinianus와 종교개혁 시대에 어떤 Socianus주의자들과 Gerlach와 몇몇 개혁주의자들(Martyr, Camero, Tilenus, Spanheim 등)이 상급의 차이를 부정하였지만,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상급의 차이를 인정해 왔으며, 그것은 각자 '영광'의 차이이며 '광채'의 차이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을 사람의 행위에 의한 '공로'로 보았으나,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본다. 우리가 선을 행했기 때문에 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시키신 일을 한 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이다.
6.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에 초점은 그리스도인의 선행, 특히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선행의 중요성, 그리고 연약한 그리스도인에게 베푸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여야 한다. 복음 전하는 자들, 선교사들을 돕고 지원하고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특히 연약한 자들에게 구제와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이 꼭 기억하시고 갚아 주시는 귀한 일임을 강조하고 권면하여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우리는 결코 선행을 등한히하지 않는다. 우리는 선행을 힘쓰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결코 우리의 공로나 권리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우리가 믿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을 행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7. 앞으로 좀 더 공부하고 살펴볼 것은 오늘날 새 관점 학파에서 미래의 심판을 말할 때, 이것을 너무 칭의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미래의 심판, 최후 심판은 각자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인데(마 16:27; 롬 2:6; 벧전 2:23; 계 2:23; 20:12-13; 22:12 등), 이것은 단지 '구원 심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와 함께 또한 '상급 심판'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우리 믿는 자들도 서게 될 것이다(롬 14:10; 고후 5:10).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다 깨끗이 사함받고(이미 사함받은 것을 확인받고, 즉 이미 죗값을 치룬 것을 확인하고) 의롭다 선언받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또한 그가 행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상이 있을 것이다. 이 상은 각자 행한 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상'이라고 해서 무슨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이다. 상이란 것은 원래 그 내용을 모르는 게 진짜 상이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상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자들이 이 미래적 심판에 대해 너무 '칭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니 문제가 생기게 된다. '현재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했는데, 왜 '미래 칭의'는 행위로 된다고 하는가? 그러니 '현재 칭의'는 믿음으로 받고 '미래 칭의'는 행함으로 받는다고 하는 이상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중세에 있었던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이다(믿음 + 행함 -> 구원). 종교개혁자들이 강하게 반대해서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를 확립한 것인데,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 칭의를 자기의 행위로 받는다고 하면 이 세상의 아무도 의롭다 함 받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인본주의적 자력구원의 종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교나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도덕 종교와 차이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는 근본 출발점 중의 하나는 미래의 심판을 너무 '칭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래 심판은 '구원 심판'뿐만 아니라 '상급 심판'도 있는 것이다. 미래의 칭의란 것은 현재 받은 칭의(구원의 보증, 구원을 인침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것)를 '확인'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행'받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제 마지막 때에 실행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고, 한 명의 낙오자도 없게 된다(믿음이 확실히 있으면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상급 심판'이 흔들리게 되니 '칭의'도 흔들리게 되고 신학 체계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톨릭의 공로 사상에 기반한 상급은 반대하지만, 그리고 일부 부흥사들의 세속적 상급 개념도 반대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해서는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헤르만 바빙크가 그의 『개혁 교의학』 제4권 마지막 섹션에서 잘 말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의 근본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요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