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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섭을 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두 가지다. 눈이 부실 정도의 외모로 뒤덮인 화려한 껍데기가 먼저다. 하지만 극소수의 마니아 팬들은 소지섭의 무거움을 알고 있다. 화려한 포장지 속에 감춰진 진짜 속내를 말이다. 소지섭은 그런 사람이고 그런 배우다. 연예계에서 소지섭을 말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의리’다. 그 만큼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반대로 그 관계의 중요성을 알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털어 놓지도 또 곁을 주지도 않는단다. 하지만 한 번 곁을 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남자가 바로 소지섭이다. 배우 소지섭이기 전에 인간 소지섭의 얘기가 궁금하다. 이제 시작한다. //편집자 주.
# 사춘기 소지섭
외모에 풍기는 인상 때문에 참 많은 부분에서 오해를 산다. 아마도 대한민국 남자 배우 중에 외모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 받는 사람을 꼽자면 내가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자랑은 결코 아니다. 한때는 그 외모 때문에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 자체를 짓뭉개는 말을 내 뱉은 분도 있으니. “넌 그 눈 때문에 안 돼. 네가 배우로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 분이 장을 지졌는지 궁금하지 않나.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가끔씩 이쪽 일을 하면서 그 분을 뵌 적도 있다. 그 분 역시 기억을 하시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 시절 나란 존재를 까먹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으면서 인사 하는 정도의 사이다. 기억하신다면 혹시 속으로 “아차”하는 탄식 정도는 내뱉으실지 않을까.
성공이란 기준을 어디에 두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기준으로 보자면 아마도 절반의 위치는 오지 않았을까. 결국 그 기준의 성공을 따지자면, 내 외모에 대한 평가도 분명 큰 몫을 했다. 여성 팬들에게 어필한 남성적 이미지 또는 배우 소지섭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의리 정도. 물론 낯간지럽지만 나에 대한 속내를 얘기할 수 있는, 이 기회를 통해 속 시원히 풀어내볼까 한다. 당연히 내 가슴 속에만 품고 갈 부분에 대해선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밝힐 수 없는 점을 팬분들은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그것 또한 배우 소지섭, 또는 인간 소지섭, 나아가 남자 소지섭의 한 부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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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쪽 계통 일은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렇게 흘러오던 시간에 나를 맡긴 채 좋아하던 운동을 하면서 나름의 미래를 설계하던 나는 수영 선수 소지섭이었다.
고교 시절까지 꽤 잘나가던 수영선수였다. 정확하게는 ‘물속에서 하는 핸드볼’인 수구 선수였다. 이래봬도 실력도 인정받았다. 주니어 수구 국가대표였다고 하면 아마도 좀 놀랄까. 정말 즐겁게 운동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단체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할까봐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물속에서의 자유로움은 나를 해방시키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원 없이 물살을 갈랐고, 내 몸을 치고 나가는 그 느낌은 사춘기 시절 자칫 방황과 일탈로 이어질 뻔 한 나를 잡아줬다. 운동은 내게 참 고마운 존재였다. 아니, 지금도 가장 고마운 친구다.
사춘기 시절 나의 일탈을 막아 준 친구. 누구나 겪는 또 자신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춘기 시절. 나에게도 분명 있었다. 데뷔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입으로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피해왔고, 참 어른스럽게 대처했던 것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아온 예민한 고교 수영 선수 소지섭에게 당시에는 감당치 못할 사건이었지만 말이다.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갑작스럽게 두 분의 결정을 받아 들여야 하는 나로선 좀 혼란스러웠다. 부모님께 투정이라도 부려볼걸 그랬다. 내심 부모님도 그런 점을 바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두 분의 결정이었고, 난 자식 된 도리로 그 결정을 존중해 드려야 했다. 그랬기에 두 분께 의지하는 아들이라기 보단 빨리 독립의 개념을 깨우쳤는지도 모른다. 돈을 벌어야 했다. 아니, 빨리 돈을 벌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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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 소지섭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가요계를 휩쓸던 대세 듀스의 해체는 나에겐 충격이었다. 너무 좋아했던 그룹이었다. 듀스의 음악은 내겐 또 다른 해방구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해체를 선언하다니. 너무 화가 났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정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다. 듀스 멤버 중 고 김성재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내가 김성재를 볼 수 있다고?” 내 귀를 의심했다.
한 청바지 브랜드의 광고 촬영 현장이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순간이 다가왔고, 때를 맞춰 아르바이트 거리가 내게 왔다. 그것도 김성재를 볼 수 있다는 보너스까지 주어지면서. 앞뒤 생각 없이 보조 출연을 지원했다. 운 좋게도 덜컥 합격해 김성재와의 촬영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성재가 죽었다고?’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한때 우상이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잠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늘은 천재의 능력을 시기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내 마음 속 우상이 떠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우상의 갑작스럽 죽음은 내게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기회로 다가왔다.
보조 출연자였던 내가 갑작스럽게 메인 모델로 발탁됐다. 그때 만난 승헌 형(송승헌)과는 지금도 단짝이다. 운동을 하면서 위계질서에 대한 강박증을 타고난 나로서는 한 살 위의 승헌 형을 깍듯이 대우했다. 물론 정말 나하고 잘 맞고 통하는 부분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웃긴 게 처음 만난 당시 서로 꾸뻑 인사 한 번 한 게 다였다. 그런데 그 인사 한 번이 17년이란 세월을 이어주고 있다. 승헌 형은 참 말이 없다. 나하고 성격도 비슷하다. 둘이 만나면 정말 적막감이 흐를 정도다. 오죽하면 둘이 만나서 하는 일이 서로 피곤해 잠을 잘 정도였으니. 뭐 지금은 승헌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많이 활달해졌지만 아직도 둘이 만나면 정말 재미없다. 물론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 “너희 둘이 만나면 대체 뭐하고 있니?” 우린 그냥 서로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은데 말이다.
잘못 들으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만나면 별다른 얘기가 없다. 그냥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얼마 전 개봉한 ‘회사원’ 시사회에도 말없이 찾아와 줬다. 시사회가 끝나고 몇몇 친하게 지내는 후배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도 형은 별 말이 없었다. 그냥 어깨 한 번 두드려 주고 “수고했다”란 말 한마디뿐이다. 참 고마운 형이다.
승헌 형과 함께 고마운 친구가 또 한 명 있다. 아니 이젠 정말 미운 친구고 너무 그리운 친구다. 뭐 지금도 자주 그 친구를 보러 간다. 그땐 꼭 나 혼자 간다. 그 녀석이 정말 좋아했던 게 있는데 그걸 꼭 손에 쥐고 간다. 그곳에 가면 그 녀석은 항상 웃는 얼굴로 날 반겨 준다. “이제 왔냐? 오늘은 좀 늦었다. 요새 새 영화 개봉했다며?” 얼마 전 ‘회사원’ 개봉 뒤에도 손에 그 녀석이 좋아하던 그걸 사들고 찾아 갔었다. “용하야 잘 지내지?”
녀석과의 첫 만남은 1998년 이었다. 녀석이 드라마 ‘보고 또 보고’로 큰 인기를 끌던 당시였다. 난 그냥 풋내기 신인 정도. 당시 경주에서 열렸던 고 ‘앙드레 김’ 선생님의 패션쇼에 용하와 난 모델로 참가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나와는 달리 용하는 해피 바이러스 그 자체였다. 먼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왔다. 서로 동갑인 것을 알았다. 그냥 녀석의 그 활달함에 매료됐다. 그렇게 이유가 없이 친해졌다.
누구에게나 잘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대하는 용하와 낯을 많이 가리고 말수도 적은 내가 친하다는 점에 주변에선 참 의아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그랬다. 그만큼 용하가 날 많이 챙겨주고 아껴줬다.
녀석이 하늘로 그렇게 떠나간 그 날 바로 전까지 우린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한때 이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고 고민하며 힘들어하던 내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도 녀석이었다. 한편으론 내겐 애인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녀석이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하고도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내 친구 용하가 여자친구와 헤어질 위기라니. 그대로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내가 나서서 그 여자 친구를 설득했다. 그렇게 다시 화해의 자리를 주선해줬다. 나중에 내게 고맙다고 하면서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나 역시 흐뭇했다. 그냥 녀석이 웃는 게 좋았고, 나 역시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떠나갔다.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아니 믿기 싫었다. 장례식장에 오자 사진 속에서 웃는 녀석의 얼굴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 줄 몰랐단 사실에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녀석이 너무 야속하기도 했다. 내게 힘들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지. 솔직히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우린 서로의 가족 관계라던지, 개인사에는 별다른 얘기를 주고받지 않았다. 그냥 그랬던 것 같다. 만나면 웃고 떠들고 정해진 얘기만 하면서 서로에 대해 다 안다고, 정말 친한 친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다. 그리운 친구다. 정말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용하야, 잘 지내지?
# 예능 소지섭
소지섭과 예능이라.. 배우로서 예능 출연을 기피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를 생각하면 피한다고 능사는 아닌 것 같다. 물론 피하지도 않았다. 대중은 내가 워낙 예능 출연을 안하니‘무한도전’ 출연 모습만 떠올린다. 하지만 벌써 데뷔 17년차다. 초반에는 쇼 프로그램 메인, 서브 MC도 맡았고 예능에도 자주 얼굴을 비췄다.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도 출연했었는데 기억하실 분이 있을까.
‘무한도전’과의 인연은 순전히 준하형 때문이다. 첫 녹화에서 준하 형이 머리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촬영이 무산됐다. 이후 다시 한 번 출연하리라 결심했고, 그 결심이 대중들이 기억하는 예능 소지섭을 만들었다.
정준하는 내가 연예계에서 정말 친한 사람으로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는 몇안되는 인맥이다. 의외라고 느끼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형 덕분에 ‘무한도전’ 출연을 결심할 수 있었고, 팬들도 그 방송을 통해 보여준 색다른 모습을 좋아해주신 것 같다. 제작진도 끊임없이 나에게 러브콜을 보내, 안 나가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무한도전’은 내게 정말 도전 그 자체였다. 예능에 나가서 어떻게 웃겨야 하는지, 또 내가 과연 웃길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이 컸다. 막상 나가보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리고 TV에서 보던 것보다 실제 멤버들의 팀워크가 정말 좋다는 느낌도 받았다. 순발력도 뛰어나더라. 그런 걸 보면 난 개그맨 안 하길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머리도 좋아야하고, 웃겨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상당한 것 같았다.
원래 내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도 잘 못했다. 무뚝뚝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물론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무한도전’에서는 그런 내 모습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정준하 유재석 박명수 형님과 하하 노홍철 길 정형돈에게 그냥 날 맡기기로 했다. 물론, 웃기려고 무지 노력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안 되더라. 그냥 날 막대해달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날 막대하기 시작하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의 하이킥은 정말 따끔하더라. 하하야 나 쪼금 화났었다. 하하하.
최근 ‘회사원’ 시사회 현장으로 생각지도 못한 화환이 배달됐다. ‘무도’ 형들의 작품이었다. '무한상사로 이직할 생각없나?'란 내용이 적힌 화환,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하지만 다시 ‘무한도전’에 출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내가 썰렁 개그도 좋아하고, 슬랩스틱도 좋아하지만 연기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당분간 그런 유쾌한 모습은 예능이 아닌 연기로만 보여 드릴 생각이다.
예능에 출연 안 한다고 섭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못 보여드린 연기가 더 많으니, 부족한 건 그걸로 만족해주면 안될까.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연기였지만, 이제는 그게 정말 재밌다. 내 달라진 모습을 예능이 아닌 다양한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다. 그 안에서 변화를 주려 노력도 하고 있다. 나의 변신을 기대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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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달려간다.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간다. 감사한 분들도 많다. 하지만 일일이 찾아뵙지 못해 항상 죄송하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하려한다. 지켜봐주셔서 감사하고, 믿어주셔서 감사하다. '감사' 너무나 좋은 단어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감사'를 외친다. 그리고 또 외친다. '사랑한다'고...
글: 소지섭
편집: 황용희 (이슈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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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왘ㅋㅋㅋ소간지+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