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주일오전/종려주일)
본문 : 마가복음 11:1~10
제목 : “호산나”
찬송 : 15, 139, 140, 141, 57장
종려 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기도하고,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 날이기도 합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 날 예루살렘에 살던 백성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심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해서 종려주일(悰櫚週日, Palm Sunday)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던 무리가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쳤다하여 호산나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도 합니다.
당시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행하여지던 풍습이라고 합니다.
즉, 로마의 압제 속에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 유명하고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사회적 메시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유대인의 왕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인정 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동방의 박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을 때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뇨?”라고 물었었지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시기도 했었고, 심지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도 스가랴 선지자가 스가랴 9:9에서 예언한 대로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끌어 오라고 하시고서는 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으니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해방자요, 유대인의 왕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지한 백성들의 허망한 요구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이유와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입성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큰 목적과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무지한 이 땅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루살렘 백성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자기들의 것 옷을 길에 펴놓고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화려한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기 위해서 입성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셔서 그 십자가에 달여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다고 자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부른 “호산나”는 어떤 의미의 호산나입니까?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서 믿는 믿음, 사업의 번창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드리는 예배, 부자가 되고, 권세를 잡고, 건강하기를 소원하며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한다면 결코 그 믿음을 옳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업하기 위해서, 장사하기 위해서, 본질에서 벗어난 다른 꼼수로 교회에 다니는 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헛된 욕망에 눈이 멀었던 무지하고 어리석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친히 복음이 되셨습니다.
어리석음과 무지함 가운데서 헛된 욕망을 위해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에게 친히 복음이 되셨던 것입니다.
왜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항상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만을 불쌍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세도 있고, 땅과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혼이 병들어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결국 이 땅의 모든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 불쌍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직장에서 사역할 때 영통에 자재창고가 있었는데, 그 땅 주인이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이는 몇 살 되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이 많아서 여기저기에 땅이 많고, 그 땅들 위에 창고를 지어서 임대사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문에는 수백억대 부자라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2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고, 심장이 좋지 않아서 심장박동기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돈만 믿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향락을 일삼는 가운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티코를 타고 다녔어도, 그 사람의 벤츠가 부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불쌍했고, 가련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벤츠가 무슨 소용이고, 수백억이 무슨 소용입니까? 가끔 만날 일이 있으면 열심히 전도를 해봤는데, 돈 쫌 있다고 얼마나 교만하던지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더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기 삶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고전 9:26의 말씀처럼 “달음질을 해도 향방 없는 것 같이 하고, 싸우기를 허공에 치는 것 같이 하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중 [에릭 리들]이라는 영국(스콜틀렌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 때에 100m 달리기의 유력한 금매달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선경기가 주일에 잡히게 되자 “나는 주일에는 뛸 수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출전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영국에서는 ‘조국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린 옹졸한 신앙인’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금메달을 땄다고 시민들이 뿌려주는 꽃가루보다, 하나님께서 씌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을 더 소망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결단하고 경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100m는 출전을 못했지만, 400m에서 금메달을 따고 인터뷰할 때, “처음 200m는 최선을 다해 달렸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달렸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중국 선교에 헌신했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불의 전차”라는 제목으로 책도 나오고 영화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에릭 리들은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평생을 달리고 승리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알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빌1:20-“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는 바울의 고백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참 된 길을 모르는 사람’,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찾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인 것입니다.
예) 큰돈을 들고도 쓸 줄 몰라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눈앞에 길이 있는데도 길을 찾지 못해 더듬거리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먼저 만난 우리들이,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우리들이 갈 길을 몰라 엉뚱한 곳에서 헛된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은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를 짓고 경치 좋은 곳에 멋진 수양관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권세를 잡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뒤집어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사명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를 모른다고 말하는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좋은 것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참 길을 전하는 곳입니다. 전도란 예수님을 훌륭한 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참 구주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1등, 금메달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목적이라고 외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00여년 전 예루살렘에서 울려 퍼졌던 ‘호산나’와 오늘 우리들의 입에서 흘러넘치는 “호산나”는 무엇이 달라야 할까요?
무지하고 어리석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구원, 복음의 은혜가 이제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주변의 많은 이웃들에게까지 충만하게 흘러넘칠 수 있기를,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