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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문화 유적지에 갔다와서
가주초등학교 5학년
김 희 우
첫째날
: 8월 2일 아침 6시에 잠실 5동 동사무소 앞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 국제 공항으로 갔다. 중국에 왜 가냐면 고구려 역사탐방을 하려고 '현장체험 주말학교' 라는 단체에서 간다.
인천 공항에서 집합을 한 후, 환전을 하거나 짐검사, 그리고 짐을 부치고, 하이젝 검사(몸에 위험물이 있는지 검사하는 것)도 하고, 대한항공 비행기로 10시 30분에 인천을 출발해서 중국의 심양으로 갔다. 중국으로 가는 내 마음은 참 설래였다.
가는 도중에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하였다. 그리고 1시간 30분을 걸려서 심양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도저히 입맛에 안 맞아서 밥만 조금 먹었다. 밥을 먹고 자유시간을 가진 후, 심양역으로 가서 단동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런데 역이 우리나라 시골 역보다 훨씬 낡았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꽤죄죄 한 것 같았다.
단동까지 갈 때 까지는 약 5시간이 걸렸다. 가면서 우리는 카드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차창 밖을 보았더니 건물이 우리나라보다 더 적었다. 그래서 참 한적하였다.
우리는 밤에나 되어서 도착하였다. 역에서 내려서 단동에 있는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역시 입맛에 않맞았다), 방에 투숙했다. 이 호텔은 단동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1주일간의 중국 여행 일정은 인천에서 출발해서 심양 단동 환인 집안 이도백화(백두산) 연변의 용정 심양에서 다시 인천으로 오는 것이다.
둘째날(8월 3일)
: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압록강에 배를 타러 갔다.
우리는 이 배를 타고 북한에 가까이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북한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통일합시다!"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북한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거의 다 빨가벗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줌마가 아이스께끼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땅에서 한 10m되는 곳까지 갔다. 그러니까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 군인이 총을 빼는 것을 보고 나는 겁이 났다. 그들이 우리가 남한에서 왔다는 것을 알면 총을 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위화도도 보았다. 위화도는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러 갔다가 다시 군사를 회군한 곳이다. 만약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러 갔으면 지금 만주 땅은 우리 땅일지도 모른다.
통일이 되지 못해서 바로 10m앞도 못가서 참 안타까웠고, 분단의 현실을 느꼈다. 그러면서 얼른 통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옛날에는 신의주가 단동보다 더 번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단동에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신의주는 한가롭다. 그걸로 보아서 북한은 경제개발이 느린 것을 알 수 있다.
배에서 내린 후, 우리는 무너진 압록강 철교에 갔다.
이 철교는 단동과 신의주를 이어주는 다리인데 6.25전쟁때 미군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지금은 조종철교중 2분의 1만 남아있다.
점심을 먹고 옛 졸본성인 환인으로 출발하였다.
환인으로 가는데는 약 6시간이 걸렸다. 가는 도중에 계곡물에서 놀았다. 그런데 물이 너무 깨끗해서 물 부족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사람과 집만 빼면 영락없는 우리나라 산이였다.(우리는 산길로 갔었다.)
중국에는 휴게실 시설이 없어서 가다가도 풀밭에 볼 일을 봐야 했었다.
환인에 도착해서 우리는 호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호텔시설이 너무 않좋았다. 왜냐하면 나는 5층이었는데 앨리베이터도 없어서 다리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음식이 몸에 안 맞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토하고, 설사를 하였다.(나도 하고, 엄마도 하였다.)
그러나 공기는 너무 깨끗해서 기분이 좋았다.
셋째날(8월4일)
: 환인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졸본성의 피난성인 오녀산성에 올라갔다.
졸본성이라고 추정되는 것은 하고성자와 상고성자가 있는데 상고성자는 물에 잠겨서 하고성자가 졸본성이라고 한다.
졸본성은 고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이다.
그런데 올라가는데 계단이 999개나 되었다. 그래서 참 힘들었다. 중국사람들은 이 위에까지 레일로 음식을 운반한다고 한다.
정상에 올라가니 오녀산성 터가 있었다. 그리고 지구전에서 제일 필요한 물이 있는 연못 '천지'(이 천지는 백두산 천지가 아님)가 있고, 왕궁터가 있었다. 이 왕궁터에는 주춧돌이 여러개 있었다.
또 오녀산성에서 제일 높은 장대에서 아래를 보았다. 이 절벽은 수백 미터가 넘어서 아래가 구름으로 안 보였다. 이곳은 너무 높아서 아래가 장난감처럼 보이고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곳장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오녀산성에서 내려올 때에는 길이 너무 험했다. 우리는 계단을 타고 내려왔는데 비 온 뒤여서 계단이 너무 미끄러웠다. 이 때, 나는 다리가 너무 후들거렸다. 또 계단이 끝난 후에는 돌아서 내려가는 길이어서 너무 힘들었다. 가다가 누가 벌집을 건드려서 거의 다 벌에게 쏘였다. 그래서 참 힘들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환인에서 옛 국내성이 있는 집안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가는데만도 6시간이 걸려서 오후를 다 까먹었다.
고구려 제 2대 왕인 유리왕이 어떻게 환도를 했는지 상상이 안 된다.
도착한 후 호텔에 투숙했는데 이 호텔자리가 국내성 왕궁터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내성 왕궁터에서 잔 것이다.
넷째날(8월5일)
: 호텔에서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나서 집안박물관에 갔다. 그 곳에는 고구려 유물과 벽화와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있었는데, 관리가 너무 허술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벌금을 만 위엔 (우리돈으로 약 150만원)을 문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지도 못해서 참 안타까웠다.
그 다음에는 오회분을 보러 갔다. 이 오회분 오호묘는 옛 고구려 사람들의 무덤이다. 이 곳에는 많은 벽화들이 있는데 참 화려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광개토대왕비를 보았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18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제 1대 동명성왕에서 제19대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가 적혀져 있어서, 그 당시의 유일한 기록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 약 300m정도 가면 장군총이 있다. 장군총은 누구의 무덤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광개토대왕의 능일 것 같다. 그 이유는 장수왕은 평양으로 갔으니까 무덤을 집안에 만들리는 없다. 또 능과 비석은 같이 있는데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는 서로 같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점심으로 불고기를 먹었는데 고기가 중국것이라서 그런지 맛이 이상했다.
점심을 다 먹고, 압록강을 보트로 타면서 유람을 하였다.
나는 그중에서 돌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의 90도로 기울어서 한 쪽이 물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보트를 다 타고 나서 만포철교를 보러 갔다.
만포철교는 북한과 중국을 잇는 철도인데 하루에 한 번씩 기차가 지나간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는 마침 기차가 오는 시간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기차를 보았다. 그다음에 우리는 북한경계선을 넘어서 북한땅을 밟았다. 그런데 나는 그 전에도 중국 헌병 몰래 몇 번 밟아서 5발자국 정도 넘어갔었다.
다리에서 내려와서 환도산성을 보러 갔다. 환도산성은 오녀산성과 같이 수도의 피난성으로 이용되었다. 이 환도산성은 세 면이 산인 곳을 중심으로 성이 되 있어서 방어하기 제일 좋은 곳이다.
그 다음으로 집안 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우리는(나, 이원택, 조민국, 이정환, 이승환)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모이는 곳까지 갔다. 이것은 너무 재미있었다.
밤에 기차를 타고 이도백하(백두산)까지 가야 되므로 오후 4시쯤에 묘향산 식당에서 국수를 먹었다. 이 식당은 북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어서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식사가 끝나자 북한 누나가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참 잘 불렀다.
저녁을 다 먹고나서 기차를 탈려고 통화역까지 갈려고 하는데, 제일 큰 형들이 없어져서 그 형들을 찾다가 한 선생님과 가이드 선생님만 남고 출발하였다.
집안에서 통화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린다. 기차는 9시 기차고 우리는 6시 30분에 출발하여서 참 급했다. 게다가 포장이 잘 안된 산길로 가서 더 느렸다.
그런데 또 돌발상황이 일어났다. 가다가 앞차의 바퀴가 돌인가 유리조각에 찔려서 터졌다. 그래서 속도를 더 느리게 가야 됐었다.
우리는 9시 5분에 도착했다. 다행히 기차가 아직 출발을 안 해서 우리는 겨우 다 탈 수 있었다. 그 형들은 모이는 곳을 잘 못 들어서 길을 잃은 것이라고 했다. 마침 선생님이 그 형들을 찾아서(그때가 한 8시정도였다) 택시로 산길을 시속 120킬로미터로 왔다고 한다.
다행히 그 형들은 기차가 떠날 때 영화의 장면처럼 기차를 타서 우리는 다 탈 수 있었다.
이 기차는 침대기차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기차였다. 방은 4인 1실이여서 2층 침대로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아는 형과 같은 방이 되었는데, 내가 그 형과 다른 형 사진도 찍어주고, 그 형들이 나와 어떤 아이에게 과자도 주었다.
오늘은 참 바쁜 날이었다.
다섯째날(8월6일)
: 약 8시간 30분을 걸려서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5시 반에 도착했다. 일어나보니 5시여서 옷을 두껍게 입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도착하자 내렸는데 너무 추웠다.
우리는 백두산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동을 하는 중에 백두산 식당이라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백두산 입구에서 지프차 타는, 고도 2500미터까지 가는 길에는 미인송들이 있었다.
백두산에 도착하자 먼저 천지먼저 볼려고 지프차를 탈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천지에는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장백폭포를 보러 갔다.
장백폭포는 백두산 천지 물이 흐르는 곳으로 높이가 67m이다. 그런데 이 물은 옥색이고 너무 깨끗했다.
장백폭포에서 다시 오는 길에 온천물에 삶은 계란을 사 먹었다.
그런데 이 계란은 이상하게 노른자먼저 익는다고 한다. 보통 계란을 삶을 때에는 흰자먼저 익는데 여기서는 이상하게도 노른자가 먼저 익는다. 그 비밀을 온천물에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에 우리는 온천에 갔다. 오랜만에 온천에서 쉬니까 기분이 좋았다.
온천이 끝나니까 마침 그때에는 천지에 가도 된다고 하여서 지프차를 타고 올라가서 천지를 보았다.
그런데 안개가 너무 많이 껴서 천지가 잘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10m앞도 안보였다. 우리가 천지를 보는 곳은 400m절벽 위여서 까닥해도 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천지를 그때 3번 보았다. 어떻게 세 번 보았냐 하면 안개가 걷히면서 몇 초 동안은 천지가 다 보이는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말하시길 안개가 없는 천지보다는 안개가 걷치면서 보이는 천지가 더 웅장하고 멋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 멋있는 천지를 본 것이다.
또 중국법으로는 백두산에 있는 풀이나 나무를 건들거나 돌을 줍기만 해도 감옥에 간다고 한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온갖 머리를 써서 돌을 주웠다.
나는 힘들어서 않는 척을 하면서 돌을 주웠고, 이정환은 넘어지면서 돌을 슬쩍 했다. 또 원택이는 미끄러지면서 슬쩍했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2개를 가져왔다.
천지에서 내려와서 아침에 들렀던 그 식당에서 한식으로 먹었는데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많이 먹었다.
그리고 나서 호텔에 투숙했는데 그때가 4시였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들과 같이 카드놀이도 하고, 일기도 쓰고 TV도 보고, 컵라면도 먹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제일 남는 것은 중국아이들과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창 밖을 보니 중국아이들이 놀고 있어서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아는 말을 동원해서(우리가 아는 말은 "니하우마(안녕)"와 "셰셰(감사합니다)"였다)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원택이는 밖에다 대고 "니내 뻐큐 아니?"라고 계속 말해서 결국 우리방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천지의 모습이 참 웅장하였다. 그 모습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여섯째날(8월7일)
: 미인송호텔에서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용정으로 이동하였다.
용정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다. 연변은 중국에서 단 하나인 조선족 자치주이다. 이곳에 있는 간판들은 다 한글로 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런데 요즘와서 연변에 조선족이 계속 빠져나가서 처음에는 68%였던 것이 지금은 38%라고 한다.
용정에서 먼저 일송정을 보았다. 일송정은 정자인데, 그 근처까지 못 가고 1∼2km정도 떨어진 곳에서 보아서 정자의 윤곽만 보았다.
다음에는 해란강에 갔다. 해란강은 일송정 노래에 나오는 강으로,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되었다. 그래서 참 아쉬웠다.
그 다음에 우리는 대성중학교에 갔다. 그 학교는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인데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었다.
중학교에 있는 전시관을 다 보고 나오는데, 몇몇 형들이 그곳에 있는 5,6학년 아이들하고 축구하는 것이 보여서 선생님이 심판을 보고 축구를 하였다.
그런데 말이 5학년이지 키가 우리나라 1,2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체력이 우리보다 훨씬 좋아서 고등학교형까지 다 꼈어도 겨우 1대 0으로밖에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남의 나라에 사는 아이들하고 축구를 해 보아서 참 즐거웠다.
축구를 다 하고 난 후에 점심을 먹고 나서, 북한 국경지대를 볼려고 도문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두만강 하류를 보았다. 그런데 다리까지는 못가서 잘 보지 못했다.
심양까지 가는 밤기차를 타기 위해서 조금 있다가 출발하였다. 역은 연길에 있는데, 기차가 4시 기차이다. 그리고 도착은 새벽 6시에 한다고 하니 14시간이 걸릴 것이다.
연길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좀 남아서 친구들과 돌아다니면서 소매치기를 만나면 어떻게 할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그리고 기차가 와서 기차에 탔는데, 어른들은 8칸이고 우리는 12칸이어서 약 6칸을 가야 됬었다. 그래서 옷을 가지러 가기 참 힘들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4인 1실인 대신 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6인 1실이어서 문이 없고 사다리로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됬었다.
이번에 나는 2층에서 잤는데 뛰어내려도 괜찮은 만큼 낮았다. 그런데 3층은 엄청 어지럽다고 했다.
이번에는 밤에 놀기로 했는데 9시 30분에 불을 끈다고 해서 9시 30분에 잤다.
내일이면 집에 가니까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았다.
일곱째날(8월8일)
: 어제 밤에 자기 전에 우리(나와 내 친구들)는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다 깨우기로 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일어난 아이가 4시 47분에 일어나서 나도 그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옷차림은 중국에 올 때와 비슷하게 하였다. 그리고 씻고 나서 짐을 챙긴 뒤, 친구들하고 놀다가 심양에 도착하니까 내렸다.
아침은 뷔폐식으로 먹었다. 그리고 나서 북릉공원과 심양고궁을 갔다.
그런데 심양고궁에서 나를 포함한 5명만 빼고 다 선생님을 놓쳐서 우리만 중요한 곳까지 다 보았다.
그다음에 점심으로 불고기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그때 우리는 서울이 물에 잠긴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불고기를 먹고 난 후에 심양공항으로 가서 한국에 갈 준비를 하고, 비행기에 탈려고 했는데 비행기가 작아서 버스로 간 후, 계단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비행기 내부를 보니 보통석밖에 없고, 자리도 훨씬 적었다.가
그리고 기내식을 먹었는데 샌드위치였다. 맛이 약간 있었다.(치즈맛이 약간 맛이 없었지만)
중국시간으로 4시에 비행기를 타서 한국시간으로 6시 30분에 도착하였다.
1주일만에 조국땅을 밟아보니 기분이 좋았다.
이번 1주일 동안 고구려에 대해서 많이 알았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도 많이 알았다.
답사후기
나는 2학년때부터 지금까지 역사탐방을 많이 갔다 왔다. 그러나 다 남한에 있는, 신라, 백제, 조선의 유적지밖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북쪽에 있는 고구려와 고려의 유적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중국탐방을 갔다와서 고구려의 졸본성과 국내성을 보고, 많은 고구려 유적들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유적과 유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박물관에 있어도 관리가 너무 허술해서 참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더 마음이 아픈 사실은 우리 것인데도 사진도 못 찍고, 장군총의 돌들과 국내성의 돌들도 중국사람들이 집 짓는 데에 써서 많이 훼손이 되고, 또 고구려 무덤들의 벽화 같은 것들도 거의 다 도굴당했다는 것이다.
만약 신라가 스스로 통일을 했거나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그 드넓은 만주 땅과 많은 유물들이 우리 땅일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 때부터 중국에 맞서서 싸워 왔다. 고조선 때에는 끊임없는 중국의 침략을 다 막아냈지만 결국 한나라에 의해서 망했고, 고구려는 중국의 군사를 물리쳤다. 백제도 중국과 국교는 맺었지만 중국의 속국은 아니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힘을 합쳐서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고려도 몽고에 40년동안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 몽고의 속국이 되었지만 몽고(원나라)가 약해지자 다시 독립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중국이 큰 나라이므로 고려는 침략을 못 한다고 회군을 하였다. 또 이성계는 나라 이름조차 명나라에게 물어서 지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의 속국인 셈이었다.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땅은 우리의 땅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회군을 하였다.
그래도 우리 조상은 중국에 맞서서 계속 싸웠다. 그리고 지금은 한중 수교 10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과 많은 것을 주고 받았다.
내가 중국에 가 보니까 에어콘이 거의 다 LG회사 것이어서 우리나라가 참 자랑스러웠다.
중국은 백두산을 개방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백두산을 그냥 놔 두어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백두산을 개방한다면 북한은 돈을 벌고, 우리는 쉽게 갈 수 있어서 1석 2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13억의 많은 인구가 살고 있지만 경제개발이 안되어서 우리가 다니기에 참 불편하였다. 또 워낙 문화가 다르다 보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거의 다 배탈이 났다.
내가 중국에 대해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재를 잘 보호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를 망치기 때문이다.
이번 중국 역사 탐방으로 중국의 문화를 많이 알았고, 고구려의 많은 것에 대해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