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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32대
1.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고려 조정의 혼란
(1365~1389년, 재위기간 : 1374년 9월 ~ 1388년 6월, 13년 9개월)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어린 우왕(禑王)을 즉위시킨 이인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한다. 한편 명나라의 개국으로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고려는 외교적 난관에 부딪혀 명나라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처지가 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왜구의 노략질로 민심은 동요하여 민간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진다.
우왕은 공민왕의 장남이자 시비 반야 소생으로 136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모니노, 이름은 왕우(王禑)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야 했다. 공민왕은 원래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돈이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쳐 아이를 얻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공민왕이 반야와 동침했고 얼마 뒤에 그녀가 아이를 잉태했다. 반야가 만삭이 되자 신돈은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겼다.
능우의 어머니 집에서 아이를 출산한 반야는 1년 뒤에 신돈의 집에 가서 기거하였다. 신돈은 동지밀직 김횡이 보낸 여종 김장을 유모로 삼아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1371년 신돈이 역모죄로 몰려 수원으로 유배되자 공민왕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음을 백관들에게 밝히고 반야의 아들 모니노를 궁궐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공민왕은 당시 수시중으로 있던 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기에 가까이 하였더니 아들을 얻었다.” 면서 왕우를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궁궐에 들어온 모니노는 명덕태후 홍씨에게 맡겨졌다. 이 때 공민왕은 문신들을 모아 모니노의 이름을 고칠 것을 명령하여 ‘우’ 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시중 경복흥, 밀직제학 염흥방, 정당문학 백문보 등을 불러 의논한 후 왕우에게 강녕부원대군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백문보, 전녹생, 정추 등으로 하여금 왕우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당하던 달인 1374년 9월에, 이미 사망하고 없는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다음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또한 우왕 즉위 후에 한씨에게는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 2년에 자신이 왕의 친모라고 주장하다가 이인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만다.
공민왕이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말한 것은 반야가 신돈의 여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야가 자신을 우왕의 친모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고, 따라서 이를 염려한 공민왕은 이미 죽고 없는 궁인 한씨를 우왕의 친모라고 꾸며서 말했던 것 같다.
사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 세력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은 공민왕의 씨앗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다.
어쨌든 1374년 9월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 등에 의해서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 등은 왕우를 고려 제32대 왕으로 옹립하는데 이 때 우왕의 나이 불과 10세였다.
왕우를 왕으로 세울 때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 홍씨는 이를 반대했다. 태후는 공민왕이 죽은 다음 날 경복흥과 함께 종친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인임은 왕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양 세력 간에 팽팽한 설전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판삼사사 이수산이 나서서 종실에 맡기자고 하였다. 하지만 영녕군 왕유와 밀직 왕안덕이 공민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왕우를 왕으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옹립했던 이인임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인임의 신임을 받은 최영도 이 때부터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우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원에서는 심양왕 왕고의 손자 탈탈불화를 고려 국왕에 봉한다. 이 때문에 원의 장수였다가 명나라에 투항한 나하추는 공민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누가 왕위를 계승했느냐며 고려 조정을 힐난한다. 1375년 8월, 고려 국왕에 책봉된 심양왕 탈탈불화가 즉위식을 갖기 위해 고려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일시적으로 불안에 떨게 되지만 이인임이 탈탈불화 일행을 저지하여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1377년에 북원이 우왕을 정식으로 고려 국왕에 봉함으로써 왕위계승 문제는 해결된다.
이처럼 당시까지도 원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1378년에는 명나라에도 우왕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같은 이중적 외교관계 때문에 고려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목사 김사혁을 패주시키고 공주를 점령한 사건이 벌어진다. 고려 조정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왜구 소탕작전에 나서서 1376년에는 최영이 홍산(논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등이 화약과 화포로 적선 5백여 척을 불사른다. 또한 이 해에 황산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하고,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에서 수백 척의 적선을 궤멸시킨다.
고려 조정은 무력전 이외에도 외교책을 통해서도 왜구 퇴치작업을 병행했다. 1375년에 판전객시사 나홍유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왜구 토벌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고, 1377년에는 대사성을 지낸 정몽주를 보내 규슈와 이마카와에 붙잡혀 있던 고려인 수백 명을 귀환시켰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 만호부를 두고 왜인들이 살도록 하는 유화책도 실시하였으나 이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구에 대한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노략질은 끊이지 않았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점점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변방의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명나라는 고려가 북원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을 상국으로 섬기며 조공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는 북원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이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388년 2월 명나라는 일방적으로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귀속시키겠다고 통보해왔다. 철령 이북이 원나라에 속했으니 당연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회의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한편으론 개경의 방리군을 동원하여 한성의 중흥성을 수축하고 전쟁에 대비하였고, 다른 한편으론 밀직제학 박의중을 시켜 철령 이북 지역은 옛날부터 고려 영토였다는 편지를 명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명나라는 요동도사로 하여금 2명의 지휘관에게 1천의 군사를 내주어 철령 이북 지역을 접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곧 명나라의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고려 조정에 보내왔다.
이에 우왕은 요동 진공 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였다. 또 세자와 왕족들은 모두 한성으로 피난시키고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른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역설하며 우왕을 설득하였다. 이성계는 식량이 풍부한 가을이 요동정벌의 적기라고 주장하면서 출병을 반대했지만, 최영의 반대로 하는 수 없이 출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해 5월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 군사와 함께 압록강의 위화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들은 불어난 물 때문에 진군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우왕에게 회군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협의하여 군사를 돌려 회군을 단행했다.
좌우군이 회군했다는 소식을 들은 우왕은 머무르고 있던 봉주에서 급히 서경으로 돌아와 좌우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한편 개경으로 가서 최영으로 하여금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하였다. 좌우군은 개경 근처에 도착하여 진군을 계속하다가 최영의 급습에 밀려 일시적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진압군은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을 뿐 아니라 이미 전의를 상실한 터라 좌우군을 이길 수 없었다. 6월 중순에 도성은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의 좌우군에게 접수되고 최영과 그의 측근들은 체포되어 유배지로 떠났으며, 우왕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1389년 11월에 강릉으로 이배되었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그의 아들 왕창(王昌)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1년 5개월 만에 폐위되었다. 그리고 1389년 12월 신종의 7세 손 공양왕이 즉위한 후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죽이도록 하였다. 이 때 우왕의 나이 25세였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능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실록도 편찬되지 않았다. 조선의 개국 세력들은 우왕의 치세에 관한 기록을 「열전」의 ‘반역자’ 편에 실었으며, 『고려사』 편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우왕의 가족들
우왕은 근비 이씨를 비롯하여 영비 최씨, 의비 노씨, 숙비 최씨, 안비 강씨, 정비 신씨, 덕비 조씨, 선비 왕씨, 현비 안씨 등 9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근비 이씨에게서 왕창을 얻었다. 이들 가족 중 아홉 왕비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이들 아홉 왕비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후비전」 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반역자전」 의 ‘신우’ 편과 『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나는 기록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정리한다.
근비 이씨(생몰년 미상)
근비 이씨는 고성 사람 이림의 딸이다. 이림은 당시 세력을 형성했던 이인임과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따라서 이림의 딸이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이인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근비 이씨가 왕비로 책봉되어 입궁한 것은 이인임이 최영과 협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379년 4월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80년에 왕자 왕창을 낳았다. 이 때 우왕의 나이가 불과 16세였다.
그녀가 왕창을 낳자 그녀의 아버지 이림도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고 우왕이 폐위되어 외손 창왕이 오른 뒤에는 문하시중의 직위에 오른다. 하지만 1389년 이성계 일파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면서 이림은 충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한다.
이러한 이림의 삶을 통해 근비 이씨의 삶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왕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적자를 낳은 몸으로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을 것이고, 우왕이 폐위된 이후에도 아들이 왕위에 오른 덕으로 그녀는 대비에 올라 여전히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창왕이 폐위된 이후에는 자신의 아버지 이림처럼 폐출되어 서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영비 최씨(생몰년 미상)
영비 최씨는 최영의 딸로 1388년 3월에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시기가 최영과 우왕의 요동정벌이 감행되던 시점이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우왕은 권력의 핵심에 서 있던 최영의 보필이 절실하였다. 그는 요동정벌 이후에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보필해줄 든든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최영은 자신의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기를 원치 않았다. 영비 최씨는 측실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왕은 간곡하게 영비를 원했고, 이에 최영은 삭발을 하고 절로 들어가겠다는 표현을 하면서까지 우왕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우왕은 필사적이었다. 결국 우왕은 자신의 뜻대로 영비 최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우왕은 영비를 맞아들인 뒤에 최영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 이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격을 싫어하여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던 그였다. 이는 영비가 최영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기 위한 우왕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우왕이 필사적으로 영비를 맞아들인 것은 정략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6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정벌군 5만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 영비는 우왕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또한 이듬해 11월 우왕이 강릉으로 이배되자 영비도 함께 이배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우왕이 살해되자 그녀는 우왕의 시체와 함께 생활했다고 전해온다. 그 상황을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10여 일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밤낮으로 곡하였으며, 밤이면 반드시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혹 곡식을 얻으면 정성껏 밥을 지어 올리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가련하게 여겼다.”
의비 노씨(생몰년 미상)
의비 노씨는 서운부정의 직위에 있던 노영수의 딸로 한때는 근비 이씨의 궁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우왕의 눈에 들면서 총애를 얻게 되고, 결국 의비에 봉해졌다. 우왕은 그녀를 위해 덕창부를 설치하여 관속을 두는 등 그녀에 대한 배려가 대단했다. 또한 그녀의 오빠 노귀산이 과거의 중시(中試)에서 떨어졌는데도 종시(終試)를 보게 하는 특혜를 주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총애를 받던 그녀는 우왕이 폐위되자 폐출되었다.
숙비 최씨(생몰년 미상)
숙비 최씨는 최천검의 서녀로서 이름은 용덕이었다. 그녀는 의비 노씨의 궁녀로 있다가 우왕의 눈에 들어 숙비에 봉해졌으며, 그 덕분에 최천검은 밀직사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와 최천검은 한때 덕비 조씨의 모함을 받아 전주에 유배되고 어머니와 오빠가 교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하지만 다시 소환되어 최천검은 천양부원군에 봉해져 다시 위세를 떨친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후 창왕이 즉위했을 때 근비와 현비 안씨를 제외한 나머지 왕비들은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가게 되는데, 숙비도 이 때 서인으로 전락하여 사가로 돌아갔다.
안비 강씨(생몰년 미상)
안비 강씨는 판삼사사를 지낸 강인유의 딸이다. 그녀는 원래 다른 사람과 정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우왕이 그녀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강제로 입궁시켰다. 1385년 1월에 입궁한 강씨는 곧 안비에 책봉되어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의 거처에 머물렀다. 하지만 우왕이 폐위된 이후에 그녀 역시 다른 왕비들과 함께 사가로 폐출되었다.
정비 신씨(생몰년 미상)
정비 신씨는 판사를 지낸 신아의 딸이다. 그녀의 혼인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1385년 11월 우왕이 신아의 집에 들러 그 딸을 보고 며칠 뒤에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기록만 있다.
그녀 역시 다른 왕비들과 마찬가지로 우왕이 폐위된 직후에 사가로 폐출되었다.
덕비 조씨(생몰년 미상)
덕비 조씨는 조영길의 딸이며 이름은 봉가이였다. 조영길은 이인임의 여종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인임이 그의 딸을 우왕에게 소개시켜 총애를 얻게 하였다. 그래서 조영길은 면천하여 전농부정이라는 하급관료직에 올랐다. 그리고 몇 년 뒤 조영길은 밀직부사라는 대단한 직위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왕의 총애를 받던 숙비 최씨가 질투를 하며 봉가이와 힘 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숙비 최씨는 오히려 봉가이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 최천검과 함께 유배되고, 최씨의 어머니와 오빠는 교살되었다. 이 때 봉가이는 덕비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우왕이 폐위될 때 사가로 내쫓겨 서인으로 전락하였다.
선비 왕씨(생몰년 미상)
선비 왕씨는 왕흥의 딸이다. 그녀는 원래 1383년 9월에 변안열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혼인 전날 우왕이 명을 내려 결혼을 정지시키고 왕씨를 입궁시키라고 하였다. 왕흥은 집을 비우고 도피하면서까지 우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위협을 이기지 못해 딸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입궁한 왕씨는 선비에 봉해졌다.
왕흥은 이 같은 우왕과의 혼인관계 때문에 우왕 폐위 후에 유배되었으며, 선비 역시 사가로 폐출되었다.
현비 안씨(생몰년 미상)
현비 안씨는 안숙로의 딸이다. 안숙로는 공민왕의 제4비 정비의 남동생이다. 우왕은 즉위 후에 부왕의 왕비인 정비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숙소를 자주 출입하곤 하였다. 이 바람에 세간에는 우왕과 정비가 서로 간통했다는 추악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정비는 우왕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의 조카인 현비 안씨를 소개시켜주었던 것이다.
현비는 정비의 후원에 힘입어 우왕이 폐위된 이후에도 폐출되지 않았다. 정비는 이성계에 대한 옹립교서를 내렸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세력은 굳이 정비와 현비 안씨를 내쫓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출처] 고려 제32대 왕 우왕실록 ㅡ ② 우왕의 가족들|작성자 여름을청하다
3. 최영의 요동정벌 전쟁과 위화도 회군
우왕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은 요동정벌이다. 명나라의 영토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감행한 이 일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요동정벌을 주도한 인물은 최영이었다. 그는 1316년에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장성한 뒤엔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 있으면서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52년에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호군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으로 진급하였다.
1355년에는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인당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파사부 등 세 곳을 격파하였다. 또 1357년에는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로 왜구 토벌에 나서 오예포에서 왜선 4백 척을 궤멸시켰으며, 1359년에는 홍건적 4만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하자 이를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덕분에 이듬해엔 서북면도순찰사에 오르고,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개경을 함락하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외에도 1363년에는 김용의 난을 평정하였고, 이듬해에는 최유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처럼 전장을 누비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최영은 1365년 강화도에 침범한 왜구를 막던 중에 신돈의 참소로 인하여 경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유배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1371년 신돈이 숙청되면서 다시 소환되어 육도도순찰사에 올라 70세 이상 되는 장정에게는 군역 대신 쌀을 거두어들이는 등 무리한 군수 보충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사헌 김속명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김속명이 유배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고 이인임의 보필을 받은 우왕이 즉위하면서 조정은 이인임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권력을 쥔 이인임이 친원정책을 실시하다가 김구용,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의 탄핵을 받게 되자 최영은 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인임을 편들어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귀양 보내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그 후 그는 1375년에 판삼사사가 되었고, 1380년에는 왜구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해도도통사에 오른다. 하지만 이 때 병을 얻어 개경으로 돌아와 요양하던 중에 수시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중앙의 중책을 맡게 된다. 그리고 1384년에는 마침내 재상직인 영삼사사가 되었고 곧 문하시중에 올랐다.
문하시중에 오른 그는 한동안 판문하부사로 이전하였다가 1388년에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그동안 이인임과 함께 정권을 농단하던 염흥방, 임견미 등을 숙청했다. 이 때 이인임은 정계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경원부에 정배되었다가 최영의 배려로 풀려난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 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오면서 고려와 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명나라가 요동부의 관리를 보내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려 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주청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최영의 요동정벌론을 받아들인 우왕은 전국 5도의 각 성에 성을 수축할 것을 명령하고 군사를 서북방면에 집중 배치하여 명나라의 급습에 대비하였다. 또한 개경의 방리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중흥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전쟁 상황에서 왕족들을 중흥성에 이주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측근으로 확정하기 위해 그의 딸을 맞아들여 영비로 삼는다. 이 때 “나의 아버지가 밤에 잠을 자다가 해를 당하였는데, 나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말을 한 것으로 봐서 최영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최영은 전쟁 준비를 하면서 요동정벌에 강하게 반대해왔던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죽여버린다. 그 무렵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가 명나라의 요동도사가 보낸 지휘관 2명이 병력 1천을 거느리고 철령위를 접수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명나라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이에 우왕은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명령하여 개경을 지키게 하고 5부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편성하도록 한 후 자신은 서해도로 가서 요동 진격을 준비했다. 이 때 세자 왕창과 정비 및 근비, 그 외 왕비들을 모두 한양산성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개경을 떠난 우왕은 곧 봉주에 도착하여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공략을 명령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요동 공략에 반대하며 이른바 ‘4불가론’ 으로 일컬어지는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는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니 불가한 일이고, 셋째는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할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고, 넷째는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왕은 출병을 강행하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에 다시 이성계는 군대를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가 가을에 출병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출병에 앞서 우왕은 서경으로 가서 각 도의 징병을 독촉하고 압록강에 배다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또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군대에 편입하고 경기도 병력을 양분하여 동강과 서강에서 왜구를 방비토록 하였다. 그리고 최영을 8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군도통사에 임명하였다. 그 외에 서경도원수 심덕부, 서경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양광부원수 이승원, 경상도 상원수 박위,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안동원수 최단 등을 좌군에 속하게 하고 안주도 도원수 정지, 상원수 지용기, 부원수 화오림, 동북면 부원수 이빈, 강원도부원수 구성로 등을 우군에 속하게 하였다. 이 요동정벌에 출병한 병력 수는 좌우군을 합쳐 총 5만여 명, 동원된 말은 2만 1,682필이었으나 적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해 10만 병력이라고 말하였다.
좌우군은 배다리를 이용하여 압록강을 건너 하중도인 위화도에 머물렀다. 그리고 며칠 뒤 홍인계, 이의 등이 선발대로 요동에 침입하여 적진을 공략한 후 되돌아왔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되는 바람에 압록강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에게 회군 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우왕과 최영은 내시 김완에게 명령하여 금과 비단, 말 등을 위화도로 보내며 진군을 독촉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 회군 명령을 요청하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최영은 진군을 독촉하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회군하기로 결심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위화도를 빠져나왔다.
좌우군이 모두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전사 최유경은 급히 봉주에 머물러 있던 우왕에게 회군 사실을 전했다. 우왕은 급히 말을 몰아 개경으로 가 최영에게 좌우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좌우군과 중군의 대치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에게 사람을 보내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우왕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관직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현보를 우시중, 송광미를 찬성사로 삼아 반란군 진압 명령을 하달하고 조민수와 이성계 등 회군 장수들을 붙잡아오는 사람에게 상과 작위를 주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우왕의 진압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성계는 지문하사 유만수로 하여금 숭인문, 좌군으로 하여금 선의문을 공략토록 하였다. 하지만 최영이 이끄는 중군의 역습을 받아 물러났고 그 뒤에 다시 조민수가 우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회군 병력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궁성 병력은 수적으로 불리한 데다가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최영 역시 그 같은 대세를 읽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을 우왕이 머물고 있던 화원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회군 병력은 곧 화원을 겹겹이 둘러싸고 항복을 요구하며 화원의 담을 무너뜨리고 안으로 밀어닥쳤다.
최영은 곽충보 등 화원으로 뛰어든 몇 명의 장수에게 붙잡혀 유배길에 올랐고, 한편 궁성을 장악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명나라의 연호는 물론 의관을 착용하도록 함으로써 명과의 싸움을 피했다.
이렇게 하여 최영과 우왕이 추진했던 요동정벌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귀양길에 오른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고양)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합포(마산)로 이배되었다. 그 뒤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1388년 12월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이 실패로 끝난 것은 조민수, 이성계 등의 신군벌 세력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요동정벌 자체가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고려는 전국이 왜구의 침입으로 항상 전쟁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또 만일 일시적으로 요동정벌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막강한 기세로 일어난 명의 반격을 막아낼 역량은 없었다. 때문에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해 충분한 외교적 노력을 지속시키며 좀더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최영은 고려의 국력을 과신하고 무모할 정도로 급하게 전쟁에 임했다. 이러한 무모한 행동이 결국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신군벌 세력에게 회군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왕시대의 세계 약사
우왕시대 중국은 명나라가 힘을 강화하여 북쪽과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편 북쪽으로 쫓겨간 북원은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동남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명나라에 조공하여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유럽은 그레고리우스 11세의 죽음으로 로마교회가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되는 등 종교적 혼란을 겪는다. 또 독일에서는 도시 간에 전쟁이 일어나 한동안 지속됐다가 종결되고, 한자동맹이 체결된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가 즉위하고, 영국에서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 런던을 점령하는 등 유럽 각국이 전쟁과 분열에 시달린다.
고려 제33대
어린 창왕의 짧은 치세와 신진 세력의 득세
(1380~1389년, 재위기간 : 1388년 6월 ~ 1389년 11월, 1년 5개월)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 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하지만 이들은 조민수 세력과 이성계 세력으로 갈라져 패권다툼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 양 세력의 대립은 차기 왕을 세우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는 데 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왕창(王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조정 내 세력이 크지 않았던 조민수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조민수의 도움 요청을 받은 이색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왕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로써 우왕의 맏아들이자 근비 이씨 소생인 왕자 창이 고려 제33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왕이 즉위함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 이색과 조민수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색과 조민수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 협의하여 개혁을 단행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많은 신진관료들이 이에 찬성하고 있었다.
이성계파의 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은 조준이었다. 그는 관제, 신분, 국방 등 국정 전반에 대한 혁신을 주장하고 그 내용들을 이성계, 정도전 등과 협의하여 1388년 7월에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소를 올렸다. 이 때 조민수는 이들의 개혁안에 대해 지나친 거부 반응을 보이다가 이인임과 친척관계로 한때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해 8월에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조민수의 유배는 이색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문하시중으로 있던 이색은 이림, 우현보, 변안열, 권근 등과 함께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에 대한 주장을 억제하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그러나 이색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1388년 10월에 대폭적인 조정개편이 이뤄지면서 이색, 문달한, 이성계, 안종원 등이 모두 판상서시사에 오르고 조준이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에 임명되면서 대세는 완전히 이성계파로 기울고 말았다.
이에 이색은 명나라의 힘을 이용할 요량으로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 장단으로 가서 머물렀다. 창왕이 사람을 보내 여러 번에 걸쳐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색은 등청하지 않았다.
이색이 조정에서 사라지자 정권은 이성계 일파가 쥐었다. 이성계를 비롯한 조준, 정도전 등은 정몽주와 결탁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로 창왕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들은 우왕을 폐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창왕이 자신들을 척결하려 할 것이라는 판단에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 김저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호군을 지낸 김저는 부령을 지낸 정득후와 모의하고 예의판서 곽충보를 매수하여 이성계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김저는 붙잡히고 정득후는 자살한다. 그리고 김저를 국문한 결과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왕안덕, 우홍수 등이 공모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는 그들을 모두 척결한다. 그러나 척결된 이들이 한결같이 반이성계파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왕 복위사건은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기 위한 전초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389년 11월의 이 사건으로 반이성계파가 대거 축출되자 곧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달인 12월 신종의 7세 손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창왕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 때 창왕의 나이 불과 10세였다.
우왕과 마찬가지로 창왕도 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실록이 편찬되지 않았다. 대신 『고려사』 「반역자전」의 ‘신우’ 편에 그 치세과정이 함께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능도 조성되지 않았으며 시호도 받지 못했다.
고려 제34대
1.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45~1394년, 재위기간 : 1389년 11월 ~ 1392년 7월, 2년 8개월)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 복위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이로써 조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고 급기야 그들은 역성혁명을 노리게 된다.
공양왕(恭讓王)은 고려 제20대 왕 신종의 6세 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요(王瑤)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34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 앞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은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종실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결의한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정창군 왕요를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나 이성계의 정치참모 역할을 하고 있던 조준은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조준은 왕요가 부귀한 환경에서 자라 가산을 다스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라를 다스릴 인물은 못 된다고 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나서서 왕을 세우는 데는 인물됨됨이가 중요하지 촌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되자 참석자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성석린의 주장대로 왕요를 포함한 종실 인물 중에서 몇 명을 선택하여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선택한 인물들을 놓고 표 대결을 벌인 결과 정창군 왕요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 이성계를 비롯한 아홉 명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를 찾아가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을 차기 국왕으로 옹위한다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익비가 별다른 저항 없이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을 차기 국왕으로 결정한다는 교지를 내림으로써 왕요는 국왕에 오르게 된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이성계 등의 아홉 대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일시적으로 이색이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대간에서 창왕의 즉위를 도운 일을 탄핵하는 바람에 복귀 한 달 만에 파직당해 아들 이종학과 함께 유배되었다. 이 때 창왕 즉위에 공로가 컸던 조민수도 함께 탄핵되어 삼척으로 이배되었으며 이숭인, 하륜, 권근 등도 유배길에 올랐다.
이색과 조민수 등 창왕 옹립 세력이 유배된 후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공양왕은 몇 번이나 결정을 유보하다가 결국 이성계파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강화도에는 대제학 유구를 보내 창왕을 죽이게 하고, 강릉에는 정당문학 서균형을 보내 우왕을 사사토록 하였다. 이 무렵 이성계는 문하시중의 직위에 올라 조정을 장악하였으며, 이성계를 포함하여 공양왕을 즉위시킨 아홉 명의 대신들에게는 공신녹권이 주어졌다.
신진 유학 세력인 이들 아홉 공신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과감한 유교 중심의 개혁작업을 시도하였다. 우선 정치 발전을 위해 경연제도를 도입하여 정치논쟁을 활성화시키고 과거에 무과를 신설하여 군대의 질을 높였다. 관제에서도 전리사, 판도사, 예의사, 군부사, 전법사, 전공사 등의 명칭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6조로 개편함으로써 성종조에 확립된 6부제를 부활시켰다.
또한 유학의 진흥을 꾀하기 위해 개성의 오부와 동 · 서북면의 주 · 부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이념에 따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하고 양반 출신 중에 출가한 자들은 환속시켜 본업에 종사토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기 위해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하였으며, 오교양종(五敎兩宗)을 해산하여 군대를 보충하였다.
경제개혁으로는 서강에 광흥창과 풍저창, 개성 오부에 의창을 세워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고, 조준의 주장에 바탕하여 현 · 전직 관리의 직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대폭 개혁하였다. 이는 신흥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닦는 요체가 되었다.
이외에도 인물추고도감을 설치하여 민 · 형사법에 해당하는 노비결송법과 결송법을 정하였고, ‘도선비기’ 에 따라 1390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천도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되자 이듬해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신진 세력의 개혁정책은 이처럼 가속화되었지만 남은, 조준, 정도전 등의 급진 세력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교적 왕도정치를 꿈꾸던 그들에겐 고려왕조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들은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등의 온건개혁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 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역성혁명을 꿈꾸는 남은 등을 경계하며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하지 못하자 4월에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의 급진파를 탄핵하여 유배시켜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되돌아와야 했고,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들 온건개혁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조영규 등의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한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조정은 다시 이성계파가 득세하였다. 그래서 온건개혁파인 김진양, 이확, 이래, 이감, 권흥, 정희, 김묘, 서견, 이작, 이신, 이숭인, 이종학, 조호 등이 대거 축출되어 유배길에 올랐다. 반면 유배 중이던 조준이 정계에 복귀하여 이성계파를 결집시켰다.
이성계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나머지 세력들에 대한 척결작업에 돌입하여 이첨, 이사형, 설장수, 강희백, 유기, 최함 등을 차례로 제거하는 한편 6월에 남은과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중책에 앉혔다.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역성혁명은 구체화되었고, 마침내 한 달 뒤인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폐위되고 이성계가 고려 국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 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개국한 지 474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시켜버린다. 그 바람에 왕씨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거나 전(全), 옥(玉), 용(龍), 전(田)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살아야 했다.
한편 폐위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이배되었다. 그 후 다시 삼척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성계의 명령에 의해 1394년 4월 50세를 일기로 사사되었으며, 1416년(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능은 경기도 원당과 사사지인 강원도 삼척 두 곳에 있다. 원당에 있는 고릉에는 ‘고려공양왕고릉’ 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삼척에는 비석은 없고 공양왕릉이라는 말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공양왕실록은 1398년 조선 왕조에 의해 공민왕실록과 함께 편찬되었다.
공양왕의 가족들
공양왕은 순비 노씨에게서 세자 왕석과 숙녕, 정신, 경화궁주 등 1남 3녀를 얻었다.
순비 노씨는 교하 사람으로 창성군 노진의 딸이며 공양왕이 정창군으로 있을 때 시집와, 1389년 11월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순비에 책봉된다. 이 때 공양왕은 그녀를 위해 의덕부를 설치하고 관속을 두었다. 그러나 1392년 7월 공양왕이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자 공양왕과 함께 원주에 유배되었고 그 후 공양왕이 고성, 삼척 등지로 이배함에 따라 그녀도 유배지를 옮겼으며, 1394년 4월 공양왕이 사사될 때 함께 죽었다. 그녀의 능 역시 공양왕릉과 함께 경기도 원당과 강원도 삼척 두 곳에 있다.
세자 왕석은 공양왕의 장남이며 순비 노씨 소생으로 초명은 왕서이다. 처음에 정성군에 봉해졌다가 공양왕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391년에 이원평의 딸을 맞이하여 세자빈으로 삼았다. 1391년 말에 공양왕을 대신하여 신년축하 하례차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조준, 서균형, 이지 등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으나 1392년 7월 조준 등의 이성계 일파에 의해 공양왕이 폐위되자 부왕을 따라 원주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삼척에서 공양왕이 사사될 때 함께 사사된 것으로 보인다.
2.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와 두문동 72
공양왕 즉위 후 조정은 그를 옹립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 9명의 공신들이 장악한다. 공신들 중 이성계, 지용기, 박위 등 3명의 무장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모두 신진유학자들이다. 이들 개혁 세력들은 다시 온건파와 급진파, 중도파 등으로 구분된다. 온건파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개혁을 완성해가자는 지용기, 설장수, 정몽주 등이었고, 급진파는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자는 이성계, 조준, 정도전, 박위 등이었다. 그리고 심덕부와 성석린은 중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건파와 급진파의 힘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중도파였던 성석린과 심덕부가 역성혁명파(급진파)에 가담함으로써 고려개혁파(온건파)의 힘이 약해진다. 하지만 고려개혁파를 이끌고 있던 정몽주가 이색의 문하생들을 모두 끌어안음으로써 양 세력은 대등해진다. 그러나 1391년에 고려개혁파에서 유일하게 무력적 기반이 있던 지용기가 처의 재종 왕익부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면서 힘의 균형은 깨진다. 역성혁명파에는 이성계라는 거목이 강력한 무력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고려개혁파는 오로지 문신관료들만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역성혁명파의 핵심 인물인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1392년 3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등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공양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정몽주는 이성계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측근들과 함께 역성혁명파의 핵심 세력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켜버린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가마에 몸을 싣고 개경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불편한 몸으로 입궐할 수도 없는 입장인 데다가, 설사 입궐한다고 해도 측근 핵심들이 모두 유배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몽주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 그는 무장 출신답게 과감한 결심을 하였고, 이성계의 마음을 읽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수하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피살하게 된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기 전에 그를 찾아가 몇 번에 걸쳐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주창할 것을 권했지만 정몽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버티고 있는 한 역성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살해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피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대의 어느 누구도 정몽주의 정치력을 능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단한 정치력은 그의 지난한 삶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몽주는 영일 정씨 습명의 후손 정운관의 아들로 1337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몽란 또는 몽룡, 호는 포은이다. 성인이 된 뒤에는 몽주로 개칭하고 1357년 21세의 나이로 감시에 합격한 후 1360년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장원하였다.
1362년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라 1363년에는 정4품의 합문지후, 동북면도지휘사종사관을 거쳐 1367년에는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가 되었고, 이 무렵 주자학에 대한 뛰어난 강설을 펼쳐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 라는 극찬을 받는다.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태상소경과 성균관 사예, 직강, 사성 등의 학문직에 종사하면서 사상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이 때 풍랑을 만나 일행 중 열두 사람이 죽었지만 그는 13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간신히 명나라 해군에 구조되었다. 귀국 후에는 경상도 안렴사, 우사의대부 등을 거쳐 1376년에는 학문직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 하지만 이 해에 이인임, 지윤 등이 중심이 된 배명친원 정책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듬해 풀려난 그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 무렵 왜구의 노략질이 극성을 부리자 규슈에 가서 일본 조정에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였다. 그의 일본행은 권신들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음모로 추진된 것이었지만, 정몽주는 오히려 뛰어난 논리와 달변으로 일본 조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왜구에게 잡혀갔던 수백 명의 고려인들을 귀환시키는 등 대일외교에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일 이후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어 우산기상시, 전공사, 예의사, 전법사, 판도사 등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고 1382년에는 진공사와 청지사로 다시금 명을 다녀왔다. 1384년에 정당문학에 올라 또 한 번 명나라를 방문하여 악화일로에 있던 대명관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1387년에 명의 무리한 조공요구와 최영의 대명강경책으로 여명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와 명의 이런 관계 때문에 1388년 2월 우왕은 최영과 함께 요동정벌 전쟁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성계와 조민수 등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이 축출되고 조정은 친명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친명정책의 기수였던 정몽주는 문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며 이성계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또한 1389년에는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볼 때 정몽주는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정몽주는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와 함께 왜구토벌에 참여했고, 1382년에도 동북면조전원수로 있으면서 이성계와 함께 지내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이성계 스스로도 정몽주를 친구라고 부르곤 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같은 친명 세력이었고, 또 개혁을 함께 주도하던 동지관계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서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몽주는 개혁을 통해 고려왕조의 발전을 기대했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 했다. 따라서 정몽주는 이성계가 꿈꾸는 새로운 왕조 개창에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둘 다 유교적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유교정치에 비중을 두었다면 이성계는 새로운 사회에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역성혁명을 통해 이성계 자신이 직접 새 왕조를 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교적 충절을 중시하던 정몽주는 혁명을 꿈꿀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같은 꿈을 꾸던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의 충절을 폄하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개창하는 유교사회가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를 살해한 이방원 역시 1405년에 그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하여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학문은 김종직, 조광조 등의 사림파에게 전승된다.
정몽주는 이처럼 고려왕조의 충절이었지만 오히려 조선 선비들에게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정몽주 이외에도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신하들은 많았다. 이른바 두문동 72현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으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동네의 동서쪽에 문을 세워 걸어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는 말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조선왕조의 어떠한 관직도 받지 않고 두문동에 묻혀 살던 72현에 대한 구체적인 면면은 잊혀지고 임선미, 조의생, 성사제, 박문수, 민안부, 김충한, 이의 등의 이름만 후대로 전해온다.
하지만 조선의 정조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1783년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72현의 충절을 기리게 됨으로써 그들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로 남는다. 비록 고려왕조는 비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절의를 꺾지 않은 72현의 충성심 덕분에 그나마 찬란한 최후를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관제 및 주요 관청 및 그 외 조직들
3공 3사(三公三師)
태위, 사도, 사공 등 3공과 태사, 태부, 태보 등 3사는 정1품의 벼슬로 행정권과는 별도로 주어진 명예직이다. 이것이 언제부터 주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종 대에 정착되었다. 3공 3사는 각 1인으로 하고 모두 정1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기구는 왕의 고문 구실을 하였으며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일반적으로 적격자가 없으면 비워두는 것이 관례였고, 왕족에게도 수여되었다.
고려는 봉작을 상속시키지 않았는데, 모든 공(公) · 후(侯) · 백(伯)의 아들과 사위에게는 봉작 대신 최고의 관직인 사도나 사공이 명예직으로 내려졌다. 또한 일반 신하에게는 명예직인 검교직으로 내려졌다.
3공 3사는 사공 · 사도 · 태위 · 태보 · 태부 · 태사의 순서로 진급하였으나 품계는 모두 정1품으로 동일하였다. 하지만 이 순서는 3공보다는 3사가 상위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3성(三省)
중앙관제의 최고기관으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통칭한 것이며, 당나라 제도에서 유래하였다. 고려는 이 제도를 변형하여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이라 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고려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양성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초에 태봉의 관제를 답습하여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을 근간으로 하는 3성체제가 갖춰져 있긴 했으나, 이것은 당나라에서 도입한 3성 조직과는 차이가 많았다. 따라서 3성체제는 성종이 982년에 내사문하성과 어사도성 및 어사6관(선관, 병관, 민관, 형관, 예관, 공관 등으로 후에 6부로 개편됨)을 설치한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995년에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편됨으로써 고려의 3성체제는 골격을 완성하게 된다.
내사문하성은 문종 15년인 1061년에 중서문하성으로 개칭된다. 중서문하성에는 수상격인 종1품 중서령 겸 문하시중을 장관으로 하여 20여 명의 품관이 있고, 그 아래 정8품 이하로 된 270명 가량의 이속(吏屬)이 딸려 있었다.
20여 인의 품관을 열거해보면 수상격인 종1품 문하시중, 부수상격인 정2품의 중서시랑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평장사 · 문하평장사, 종2품의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 정3품의 좌산기상시 · 우산기상시, 종3품의 직문하, 정4품의 좌간의대부 · 우간의대부, 종4품의 급사중 · 중서사인, 정5품의 좌헌납, 우헌납, 종5품의 기거주 · 기거랑 · 기거사인(또는 좌정언 · 우정언 · 좌사간 · 우사간), 정7품(또는 종7품)의 검의녹사(또는 문하녹사) · 중서주서 등이다.
한편 상서도성은 문종 대에 상서성으로 개칭된다. 상서성제가 처음 성립된 성종 대에는 상서도성과 6부 및 9속사로 이뤄졌으나 중복되는 기관이 많아 문종 대에 상서성과 6부 2속사로 축소 개편되었다.
이 상서도성 내에는 상서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가 딸려 있었고, 이 중 이부에는 고공사가, 형부에는 도관이 속사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6부가 독립된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도성은 6부의 실질적인 지휘기관은 되지 못했다. 당나라에서는 상서6부를 관할하는 도당이 설치되어 있어 상서성의 기능이 강화되어 있었지만 고려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상서성은 중앙의 6부와 지방의 주현 사이의 공첩(公貼)을 중계하거나 국가행사를 주관하는 사무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상서성에는 종1품의 상서령과 정2품의 좌 · 우복야, 종3품의 좌 · 우승, 정5품의 좌 · 우사낭중, 정6품의 좌 · 우사원외랑 및 종7품의 이속 40인 정도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상서령은 종친에게 제수하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좌 · 우복야가 실질적인 장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상서성이 주로 사무기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좌우복야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이러한 3성체제는 무신정권 이후 중방, 정방, 교정도감 등의 기구들이 등장하면서 권한과 기능이 대폭 축소된다. 그리고 충렬왕 대에 가서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첨의부로 통합되고, 공민왕 대에 다시 중서문하성은 도첨의부, 상서성은 3사로 각각 개편되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6부(六部)
중앙관제인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를 통칭한 것으로 성종대에 설치된 어사도성의 어사 6관에서 비롯됐다. 995년에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편되면서 그 하부조직으로 6부가 유지되었는데, 업무상으로는 상서도성의 지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적인 기관으로 이해됐다.
6부는 형식적으로는 3성의 하부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과 연결되는 기관이었다.
이 제도는 당나라에서 도입되었지만 고려에 와서 다소 변형된다. 당나라의 6부가 상서성의 도당에 의해 관리되었는 데 비해 고려의 6부는 상서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직접 정무를 처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6부는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서열로 되어 있었으나 고려는 이 · 병 · 호 · 형 · 예 · 공의 서열이었다. 이는 고려가 병부를 중시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6부의 각 기능을 살펴보면 이부는 주로 인사를 담당하였고, 병부는 군제와 군사를, 호부는 재정과 호적관리를, 형부는 형벌 및 재판과 노비문제를, 예부는 과거 및 일반 상례를, 공부는 도로 · 교량 · 도량형 등을 관리했다.
6부 역시 3성과 마찬가지로 충렬왕 대에 원나라의 강압으로 인해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 등으로 축소 개편된다. 그 후 1356년에 공민왕의 개혁에 의해 복구되었다가 1362년 다시 친원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 · 예의사 · 전공사 등 6사로 개편된다. 그러다가 1369년에 선부 · 총부 · 민부 · 이부 · 예부 · 공부로 개칭되어 공양왕 즉위년인 1389년에 이성계, 정몽주 등의 고려 개혁세력에 의해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6조로 개편되지만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조선 개국 후 비로소 6조로 정착된다.
6부에는 각각 종2품의 판사, 정3품의 상서, 종3품의 지부사, 정4품의 시랑, 정5품의 낭중, 정6품의 원외랑 등의 품관이 있었으며, 종7품 이하의 이속이 15명에서 20명 정도 있었다.
3사(三司)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 및 조세를 관장하며 백관의 녹봉을 지급하던 기구로 중서문하성, 중추원과 함께 중요한 권력기구를 이루었다. 이 제도는 원래 송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종 대에 설치되었다.
3사는 형식적으로 국가의 전곡 출납을 총괄하는 기관이었지만 재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재정에 대한 권한은 호부에 더 많이 주어져 있었다. 따라서 3사의 기능은 주로 국가의 수입과 세무, 녹봉 관리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에 설치된 3사는 1014년에 상장군 김훈과 최질의 난 이후 혁파되어 도정사로 개편된다. 그러나 1015년에 김훈, 최질 등의 무신정권이 실각하게 되자 1023년에 복구되었다.
3사에는 정1품 판삼사사 1인과 정3품의 3사 2인, 종4품의 지동사 1인과 부사 2인, 판관 2인 등의 품관이 있었으며, 40여 명의 이속이 있었다.
중추원(中樞院)
군사기무와 왕명 출납 및 숙위를 담당하던 중앙관부로 중서문하성과 더불어 양부(兩府)라고 불리었다.
중추원은 성종 10년인 991년에 한언공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의 추밀원을 모방하여 설치되었다. 그 후 현종 대에 중대성으로 개칭되었다가 1011년에 다시 중추원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문종 대에 직제가 정비되어 종2품의 판중추원사 1인, 중추원사 2인, 지중추원사 1인, 동지중추원사 1인과 정3품의 중추원지주사 1인, 좌 · 우승선 각각 1인, 좌 · 우부승선 각각 1인, 정7품의 당후관 2인 등의 품관을 두었으며, 주사 · 시별가 · 영사 · 기관 · 통인 등 이속 36명을 두었다.
이 가운데 판중추원사로부터 직학사까지를 추밀 또는 추신이라고 하고, 지주사 이하 부승선까지를 승선 또는 승제라 하여 구분시켰다. 이는 추신들과 승선들이 추부와 승선방에서 따로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추신과 승선들은 단지 근무처만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위와 직능에서도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추신들은 승선들보다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밀접하였기 때문에 흔히 재추(宰樞) 또는 재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직능에서는 추신이 군사기무를 맡고 승선은 왕명 출납과 숙위를 맡았다. 그런데 군사기무는 병부와 도병마사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추신의 군사기무권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추신은 정치적 의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실질적인 업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흔히 임금의 말을 대변한다고 하여 용후(龍喉) 또는 후설직(喉舌職)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095년에 중추원은 추밀원으로 개칭되었으며, 1275년에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밀직사로 개편된다. 그리고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의해 추밀원으로 환원되었다가 1362년에 친원정책이 실시되면서 밀직사로 다시 개편된다.
어사대(御史臺) ㅡ 사헌부(司憲府)
법을 통하여 시정을 논하고 풍속 교정, 백관규찰, 탄핵 등의 일을 맡아보던 사정기관으로 신라 진흥왕 대인 544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신라의 제도와 중국 당 · 송의 제도를 융합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재편했다.
태조 때에는 사헌대라고 하던 것이 성종 대에 어사대로 개칭되었고, 현종 대에는 최질 등의 난으로 금오대(金吾臺)로 일시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다시 사헌대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충렬왕 대에는 사헌부, 공민왕 대에는 감찰대와 사헌부 등으로 불리었다.
구성원으로는 정3품의 판사 1인, 대부 1인, 종4품의 지사 1인, 중승 1인, 종5품의 잡단 1인, 시어사 2인, 정6품의 전중시어사 2인, 감찰어사 10인 등이 있었고, 그 외에 이속으로 정7품의 녹사 3인을 비롯하여 영사, 서령사, 계사, 지반, 기관, 산사, 기사, 소유 등 약 50명 정도 있었다.
어사대는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인 낭사와 함께 간쟁 및 시정논집 등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고 이를 위하여 불체포, 불징계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한림원(翰林院)
왕의 칙명과 조서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곳으로 주로 학자들이 재직했다. 이들은 이외에도 고시관, 즉 지공거로서 우수한 관리를 뽑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고려 문신들은 한림원에 재직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한림원에는 정3품의 한림학사승지 1인, 정4품의 한림학사 2인, 정5품의 시독학사 4인, 종8품의 직원 4인, 정9품의 의관(醫官) 2인이 속해 있었다. 이외에 녹사 2인을 비롯해 8명의 이속이 포함된다.
한림원은 충렬왕 대에 사림원으로 개칭되었다가, 충선왕 대에 사관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 되었다. 그 후 충숙왕 대에 예문관으로 독립했다가 공민왕 대에 한림원으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대에 다시 사관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사관(史館)
시정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史官)들이 주로 실록 및 역사서를 편찬하던 기관이다.
사관은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직사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겸관으로서 감수국사는 시중이 겸하고, 수국사와 동수국사는 2품 이상이 겸하고, 수찬관은 한림원의 3품 이하가 겸하고, 직사관은 4인으로 되어 있다.
이 기관은 충선왕 대에 한림원과 합쳐져 예문춘추관이 되었다가, 충숙왕 때 예문관으로 독립되어 이후 줄곧 춘추관으로 불리게 된다.
그 외 기관들
국자감(國子監)
992년에 설치된 국립대학으로 태조 대의 국학을 계승한 것이다. 충렬왕 대에 국학으로 명명되었다가 충선왕 대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배원정책을 실시하던 공민왕에 의해 국자감으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성균관으로 불리게 된다.
비서성(秘書省)
경전이나 축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곳이다. 고려 초에는 내서성이라고 불리었다가 성종 대에 비서성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298년 충렬왕 대에 비서감으로 격하되었고, 1308년에 전교서로 개칭되었다가 예문춘추관에 편입되었다.
합문(閤門)
조회와 의례 등의 의전을 주관하던 부서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홍보를 담당하여 왕명을 전달하는 기능을 맡기도 하였다. 1274년에는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어 통례문으로 고쳐졌으며, 1298년에 복구되었다가 1372년에 다시 통례문으로 개칭되었다.
위위시(衛尉侍) : 의장(儀仗), 즉 의식에 쓰이는 그릇이나 기구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전농사(典農司) : 국가의 큰 제사에 사용될 곡식을 맡아보던 기관이다. 원래 사농경이었다가 전농시로 개칭된다. 그 후 1369년에 사농시로 고쳐지면서 폐지되었다가 1371년에 다시 설치된다.
사천대(司天臺)
천체의 운행과 기후를 관측하고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며 시간을 관장하던 곳이다. 원래 명칭은 사천감, 관후서 등이었으나 문종 대에 사천대로 정착되었다. 그 후 1308년에 서운관(書雲觀)으로 개칭되었다. 관원은 정3품의 판관 아래에 품계별로 20여 명이 있었다.
[출처] 고려시대의 관제 및 주요 관청 및 그 외 조직들|작성자 여름을청하다
고려의 군사조직과 형법
고려의 군사조직은 2군 6위의 중앙군과 지방군인 주현군으로 되어 있었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이뤄진 국왕의 친위대이며, 6위는 좌우위 · 신호위 · 흥위위 · 금오위 · 천우위 · 감문위 등을 일컫는다. 그리고 주현군은 서해도, 교주도,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등의 5도와 북계와 동계의 양계에 포진하고 있는 지방군 및 변방군을 일컫는다.
2군 6위
중앙군을 이루고 있는 2군 6위를 합쳐 흔히 경군(京軍) 또는 8위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숫자는 45령으로 4만 5천 명 정도였다.
먼저 2군을 살펴보면 응양군이 1령으로 1천 명이었으며, 용호군은 2령으로 2천 명이었다. 또한 6위는 좌우위가 1만 3천(13령) 명, 신호위가 7천, 흥위위가 1만 2천, 금오위가 7천, 천우위가 2천, 감문위가 1천이었다. 이들 중 2군은 왕의 친위대이고, 좌우위 · 신호위 · 흥위위 등은 개경과 변방의 방위를 맡았다. 또한 금오위는 경찰 업무를, 천우위는 의장 담당, 감문위는 궁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들 2군 6위의 지휘관은 정3품의 상장군, 종3품의 대장군, 정4품의 장군, 정5품의 중랑장, 정6품의 낭장, 정7품의 별장, 정9품의 위, 종9품의 대정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상장군과 대장군은 각 군과 위마다 1명씩 포진했으며, 장군 이하는 군사 숫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배치되었다.
2군 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은 무반의 합좌기구인 중방을 구성하여 군사문제에 관한 회의를 하였는데, 이 때 의장인 반주는 응양군의 상장군이 맡았다.
주현군
지방의 주현군은 남부의 5도와 북부의 양계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5도의 주현군은 주로 수령의 지휘 아래 치안과 방수 및 공역의 임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평시에는 농사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군역을 치렀다. 따라서 주현군은 일종의 예비군이었던 셈이다. 이에 비해 양계에는 국경지대인 까닭에 초군 · 좌군 · 우군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하였다.
형법
고려의 형법은 총 71조로 이뤄져 있다. 이를 세분하면 옥관령 2조, 명례 12조, 위금 4조, 직제 14조, 호혼 4조, 구고 3조, 천흥 3조, 도적 6조, 투송 7조, 사위 2조, 잡률 2조, 포망 8조, 단옥 4조 등이다(이들 법령 중 몇 가지를 정리한다).
ㅁ 명례 : 명례는 형벌의 명칭과 집행규례를 말한다. 형벌의 명칭으로는 대쪽으로 볼기를 치는 태형, 곤장형인 장형, 징역형인 도형, 귀양형인 유형, 교형과 참형으로 이뤄진 사형 등이 있다. 명례는 이들 형벌에 대한 집행규정과 형벌에 쓰는 매의 규격을 정해놓고 있다. 또한 유죄 기간인 고한(辜限)을 마련해놓고 있는데 손과 발로 사람을 쳐서 상하게 한 자의 유죄 기간은 10일, 다른 물건으로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20일, 칼로 상하게 한 자는 40일, 팔다리를 꺾거나 부러뜨린 자는 50일로 정하고 있다. 이 외에 왕의 제삿날이나 명절 등에는 형벌 집행을 금지하는 금형이 있다.
ㅁ 위금(衛禁) : 4조로 된 위금, 즉 금지조항으로는 본족 · 외족 · 처족 등 친척간에 같은 부서에서 벼슬하는 것을 금하는 상피, 말을 탔을 때 길을 피하는 규정인 피마식, 서울과 지방의 관리들이 올리는 공문서 양식을 규정해놓은 고첩상통식 등이 있다.
ㅁ 직제(職制) : 14조로 된 직제는 관리들에 대한 처벌규정인데, 여기에는 뇌물수수, 횡포 등을 비롯해 간비, 즉 간통죄에 관한 규정까지 마련해놓고 있다. 간통죄에 대해서는 관리에게도 일반인과 같은 처벌이 이뤄지는데, 서로 합의하여 간통한 화간의 경우에는 도형 2년, 강간의 경우에는 3년에 처해진다. 또 화간한 여자 쪽은 남자보다 한 등급 가볍게 처벌되며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통했을 경우에는 한 등급 높게 처벌된다. 종이 상전과 간통했을 경우는 화간은 교형, 강간은 참형에 처하고 역시 화간한 여자에 대해서는 남자보다 한 등급 낮게 처벌한다.
ㅁ 호혼(戶婚) : 호적법과 혼인법을 위반한 죄를 다루는 호혼은 4조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장정의 숫자를 속여 조세를 탈세하거나 관가나 사가의 노비 또는 양민의 자식을 불법으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도 있다. 또 처가 제마음대로 집을 나갈 때나 개가를 했을 때도 2년 내지 2년 반의 도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이외에 친족을 살상하는 죄인 대악, 사람을 부상시켰거나 죽인 죄에 해당하는 살상 등을 다루고 있다.
ㅁ 그 외의 법은 주로 금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ㅡ 부모나 남편의 상사가 났다는 말을 듣고도 슬픈 생각을 잊어버리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도형 1년, 상이 끝나기 전에 상복을 벗고 보통옷을 입는 자는 도형 3년, 초상난 것을 숨기고 초상을 치르지 않는 자는 2천 리 밖으로 귀양, 조부모의 상사가 났다고 거짓말을 하여 휴가를 청하거나 직무를 회피하는 자는 도형 3년에 처한다.
ㅡ 훔쳤거나 협잡한 장물인 줄 알면서 고의로 산 자는 피륙으로 환산하여 한 필에 매 20대, 두 필에 30대, 네 필에 50대를 각각 치고 다섯 필에는 곤장 60대를 치며…….
ㅡ 남의 포전에서 오이나 과실을 훔쳐간 자는 피륙으로 환산하여 한 자에 곤장 60대, 한 필에 70대, 두 필에 80대…….
ㅡ 다른 사람의 경지에 몰래 무덤을 만드는 자는 매 50대, 묘지에 속한 땅인 경우에는 곤장 60대를 치며 경지의 주인은 이정(이장)에게 고하고 무덤을 옳겨 묻어야 한다. 이정에게 고하지 않고 옮겨 묻는 자는 30대를 친다.
ㅡ 소를 도살한 자는 양민, 천민을 막론하고 얼굴에 낙인을 찍어서 형이 끝난 뒤에 먼 지방의 주 · 현으로 보낸다.
ㅡ 남에게 빚을 주고 관가의 승인 없이 채무자의 재물을 강탈한 자는 피륙 한 자에 매 20대, 한 필에 30대…… 열 필에는 도형 1년, 20필에는 도형 2년…….
ㅡ 조세를 부당하게 받아서 사복을 채운 자는 피륙 한 자에 곤장 1백 대를 치고 한 필에는 도형 1년, 두 필에는 1년 반, 세 필에는 2년…….
ㅁ 도적에 대한 법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ㅡ 절도를 범한 액수가 5관에 달하면 사형에 처하고 5관이 되지 않으면 척장 20대를 쳐서 3년 동안 귀양 보내고, 3관이 되지 않으면 척장 20대를 쳐서 2년 동안 귀양을 보내며, 2관이 되지 않으면 척장 8대를 쳐서 1년 동안 귀양을 보내고, 한 관 이하는 죄상에 따라 처결하되 여자는 귀양을 보내지 않는다.
ㅡ 절도범이 귀양 중에 도망쳤을 때는 자자형을 가하여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을 보낸다.
ㅁ 죄인에게 아량을 베푸는 휼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ㅡ 유형지로 가거나 유형지를 옮기게 되는 자가 현지에 닿기 전에 고향에 있는 조부모나 부모의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7일간 휴가를 주어 발상을 하고 초상을 치르도록 한다.
ㅡ 구금 중에 있는 부녀가 해산달이 가까워졌을 때는 보증을 세우고 나가게 하되 사형죄는 산후 만 20일, 유형죄 이하는 만 30일로 한다.
ㅡ 70세 이상의 부모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그 아들이 섬으로 귀양 갈 죄를 저질렀더라도 집에 있으면서 부모를 봉양하게 한다.
ㅁ 소송에 관한 법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ㅡ 서울이나 지방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자가 요행수를 바라고 거짓으로 고발하는 경우에는 즉시 감찰관원으로 하여금 절도죄에 준하여 처벌한다.
ㅡ 공사 노비에 대한 판결문건은 2부를 작성하되 한 부는 그 주인에게 주고 한 부는 관청에 보관하여 후일의 증거가 되도록 한다.
ㅡ 판결이 있은 이후에도 판결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난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ㅁ 노비에 관한 법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ㅡ 종이 양민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을 때는 주인이 그 내용을 알고 있었으면 곤장 1백 대를 치고 여자의 집주인은 도형 1년에 처하며, 종이 자의로 장가를 들었으면 도형 1년 반에 처하고 양민이라고 속였을 대는 도형 2년에 처한다.
ㅡ 도망노비를 숨겨준 자는 베 30척을 징수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되 시일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노비의 몸값을 넘지는 못한다.
ㅡ 남종의 나이가 15세 이상 60세 이하일 때는 몸값으로 베 1백 필, 15세 이하 60세 이상일 때는 50필로 한다. 또 여종일 경우 15세 이상 50세 이하일 경우에는 120필, 15세 이하 50세 이상일 때는 60필로 한다.
ㅡ 노비를 산 자가 자손이 없으면 친척에게 넘기고 친척이 없으면 관청에서 부리되 판 사람은 도로 찾아갈 수 없다.
[출처] 고려의 군사조직과 형법|작성자 여름을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