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명(德明) 처사(處士) 순흥안공(順興安公) 휘(諱) 상택(商澤)이시다.
1931.음 12.11~2024.음 4.28(양 6.4), 향년 94세 졸이다. 장례는 함안하늘공원장례식장에서 가졌고, 4일장으로 발인은 6.7(금) 09:30, 장지는 의령군 지정면 성당리 선영이다.
거주지는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이고 유년 시절 출향지는 지정면 독소리와 성당리 독대(이칭 : 쪽대)마을 일대이다. 독대마을은 순흥안씨 집성촌으로 순흥 안씨 문중의 흥산재(興山齋)가 있다.
배위자(미망인) 안약이씨(安岳李氏) 이명남(李命男) 여사는 1931.음 9.23생 94세 동갑으로 아직 건강하시다.
자녀는 2남 2녀, 손주(손자ㆍ손녀) 6명, 외손주(외손자ㆍ외손녀)는 5명으로 5복(五福)의 하나인 자손중다(子孫衆多)로 인구절벽 세태에 대비하여 번창한 편이다.
오복은《서경 홍범편》과《통속편》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민간에서 바라는 《통속편》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귀(貴), 자손중다(子孫衆多)이다.
※ 장례식 추모 사진을 《 1 》《 2 》《 3 》부로 나뉘어서 올린다.
덕명(德明) 안상택(安商澤) 처사(處士)는??
안상택 처사의 덕명(德明)' 호(號)에서 말해 주듯이 향년 94세 농부로 살아온 삶에서 인생과 인품 자체를 대변하고 상징한다.
함안군 대산면 지역사회와 순흥안씨 종문에서도 신망(信望, 믿고 바람, 또는 그런 믿음과 덕망)이 두텁고, 품행(品行 : 품성과 행실)이 점잖하시고, 덕행(德行 :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과 건실(健實 : 건전하고 착실함)함으로 됨됨의 인성(人性)이 널리 알려졌다. 도시로 출향한 근방의 지역민까지도 호평하는 증언이 있었다.
'덕(德)'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행하려는 어질고 올바른 마음이나 훌륭한 인격을 말한다.
'명(明)'은 유학에서는 밝음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미혹(迷惑)을 소멸하고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인 지혜(智慧)와, 참된 말로 불타의 깨달음이나 서원(誓願)을 나타내는 진언(眞言)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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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雅號)는 피휘의 관습 때문에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긴 유교 문화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나 연소의 위아래를 막론하고 본 휘(諱)이나 자(字) 외에 별명처럼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이다.
별호(別號), 당호(堂號), 호(號)라고도 하는데 사실 대중들 사이에서 역사 인물을 칭할 때 호라고 하면 주로 이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아호라는 말 대신 그냥 호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닉네임이나 필명, 예명도 호의 일종으로 볼 여지가 있다. 남이 붙여주기도 하지만 자기가 짓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 나무위키 요점 발췌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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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이상(理想)으로 삼는 것, 자신이 지향(志向)하는 것, 특별한 취향을 나타낸 것,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특징이나 장점이나 결점, 자기의 고향, 고향의 산천 이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표시하는 것, 그리워 하는 것 등등을 가지고 전통적으로 호를 삼았다.
호는 자기가 짓기도 하고, 친구나 스승이 지어 주기도 하고, 부형이 지어주기도 한다.
《 호(號), 되살리려면 올바르게 사용해야 : 許捲洙/동방한학연구소, 칼럼 인용 》
의령군 지정면 성당리 독대(쪽대)마을의 지명 유래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꼭 천렵때 쓰던 대소고리(대나무 소쿠리)나 싸리소고리(싸릿대로 만든 소쿠리)처럼 생긴 지형이다. 또 고기 잡을 때 쓰이는 족대처럼 오목하다해서 쪽대골로 불러왔다고 한다.
남쪽만 열린 채 동ㆍ서ㆍ북쪽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가장 안쪽 산이 등잔설(등잔불)이라고 하며, 동쪽산이 안산인데 등잔걸이(등경걸이, 등가)에 해당되는 지형이고, 서쪽편 산줄기가 부엉덤산이다.
부엉덤산줄기 끝부분에 담양 전씨문중의 선대묘가 모셔져 있다. 부엉덤 끝부분은 반석인데 유암이라 각자를 해놓았다. 옛날 학자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두 땀을 다 보태야 18세대인데 순흥안씨가 14집이고, 윤씨 3집, 남씨 1집인데 순흥 안씨 문중의 흥산재(興山齋)가 있다.
※ 《 의령군청 주요누리집 지명 유래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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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로 고인이 되신 덕명(德明 : 호) 안상택(安商澤, 94세 별세) 처사는 나의 큰형님 되시는 정영조(鄭永祚, 1929.음 11.27~2006.12.4, 78세 졸)의 손아래 큰처남이 되시고, 큰형수 안맹수(安孟守, 1928.음 5.7~2019.12.4, 92세 졸)의 3살 아래 친정 남동생이자, 장조카 정병권(鄭秉權, 72)의 큰외삼촌이 되시는 분이다.
나는 큰형수 되시는 안맹수의 5째 시동생이 된다. 우리쪽 7남 2녀 형제자매 중 현재 생존자는 서울 거주 정창영(82) 형님, 나, 고향인 함안 유현리 거주 정태영(73) 동생, 합 3명이 남았다.
안맹수 큰형수의 친정 모친의 회갑연(1968~1971 연간 대학 재학생 때) 때 고향 부모님을 모시고 대산면 평림리 안상택 처사의 집을 방문한 기억이 있는데, 오늘 방문한 널찍한 집터(터밭까지 1,500여 평)는 아니었다. 중년에 새로 이주한 집터로 보인다.
고인이 되신 덕명 안상택 처사는 나에게는 사형간이 되지만, 2024.6.7(금) 발인날 장조카와 함께 의령군 지정면 성당리 선영까지 직접 가서 조문했다.
요즈음 장례 조문풍속은 외부 일반 조문객은 장례식장에서 문상을 다 하고, 장지에는 직계 존비속과 가까운 친척만 참석하는 관습화 추세로 가고 있지만 특별히 장조카(장례식장도 기 다녀왔음)와 함께 장지까지 동행하며 조문을 하고 장례 기록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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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초계정씨 가문과 의령군 지정면 득소리ㆍ성당리 일대의 독대(속칭 : 쏙대) 순흥안씨 가문과의 혼맥과 1950년 6.25전쟁 피난지 스토리를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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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조부 정기규(鄭其圭, 호적명 : 鄭其大)의 배위는 순흥안씨 안동희(安東喜)로 친정의 부는 안승호(安昇鎬)이고, 모는 박송동(朴宋同)의 장녀로 친정 원적은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709번지이다. 기동과 대산면을 한자 씩 따서 택호가 기산댁(띠기)이 되었다. 안동희는 옛 마산의 성안백화점 재일동포 사주(안ㅇㅇ : 성명 미 확인)의 큰누님이 된다. 자녀는 6남2녀를 두었는데 남편 정기규가 44세로 조졸했다. 성안백화점 창업주 재일동포 창업주는 큰누님 안동희가 어린 동생을(자기를) 업어서 키웠다면서 생질 2명에게 논 10마지기를 사 주기도 했다.
나의 숙부 정현중(鄭鉉中, 호적명 : 鄭正植)의 배위는 순흥안씨 안봉락(安鳳樂)으로 친정의 부는 안승수(安昇守)이고 모는 곽현풍(郭玄風)의 장녀로 친정 원적은 의령군 지정면 득소리 228번지이다., 안봉락의 택호는 배동댁(가야읍 산서리 배나무실로 이주)이다.
나의 큰형님 정영조(鄭永祚)의 배위는 순흥안씨 안맹수(安孟守)로 친정의 부는 안갑중(安甲中)이고, 모는 김재수(金才守)의 장녀로 친정 원적은 의령군 지정면 득소리 228번지이다. 안봉락은 안맹수의 5촌 고모가 되기도 한다. 의령군 지정면 득소리 득소마을과 성당리 독대마을은 붙은 옆 마을로 옛날에는 모두 순흥안씨 집성촌이었다.
여기서 순흥안씨 집안에서 초계정씨 집안으로 시집 온 3분을 특별히 소개하는 이유는 1950년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여 1950.8.1 전 후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서 1950.9.15 전 후 인천상륙작전 개시까지 약 1달 20일 간의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고향 땅도 천제봉(233m)은 북한 인민군이, 삼봉산(302m)은 미군과 국군이 거점을 확보하여 함안 가야면과 마산으로 진격하려는 북한 인민군에 대한 수호 방어로 다른 낙동강 방어선 구축 전선과 마찬가지로 최대 격전지였다.
6.25전쟁 때 고향 함안 유현리도 북한 인민군의 함안 가야면 점령과 마산과 부산 진출을 확보하기 위한 진격 루트로 전쟁통 불구덩이(북한 인민군 점령지)라 인민군 진격을 막는 미군의 폭격으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선택한 피난지가 3곳이다.
의령군 지정면 쪽대마을(큰형수 안맹수 친정곳) 쪽과 진주시 진성면 내 김대금(金大今) 할머니의 언니집 마을인 진주시 진성면(마을 이름 들었으나 기억 못함) 쪽이다. 중간 피난지 의령군 용덕면까지 3곳이다.
첫 피난지인 지정면 쪽대마을을 향할 때, 법수면 주물리 소재 이물이 나룻배(현재의 함안군 법수면~의령군 정곡면 사이 남강 백곡교 위치)는 인민군이 도하 못하게 불태워졌고, 남강물이 얕은 곳으로 도하한 피난 이야기다.
전쟁통에 피난을 할 적에는 당시에는 식솔이 많아서 끼니도 부담이었고, 사랑채나 아랫 헛간에서 자야 하기에 연고가 있는 사돈간의 인척집을 찾았다. 옛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나도 당시 2살로 피난 중에 비가 많이 내려서 어머니 등에 업혀서 박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이동했다.
큰형님 정영조(1929, 음 11.27생, 당시 21세)는 16세 결혼으로 2살 딸 정윤선이 있었다. 남강을 도하하면서 떨어지는 피아간의 포탄 빗발 소리에 놀라서 8세 정창영 동생을 엎는 다는 게, 먼서 달려와 엎힌 정현관(8세, 동갑으로 아재뻘)를 엎고서 건너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현관은 종조모 순흥안씨 안동희의 5남 2녀 중 5남으로 막내이다.
1차 피난간 의령군 지정면 독대마을 일대도 고향 군북면 유현리와 마찬가지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으로 함안군 대산면과 칠원면 점령과 마산으로 진출하려는 북한 인민군과의 최대 격전지로 완전 불구덩이 전쟁통이라 2~3일을 지나서 2차로 의령군 용덕면 인척집으로 이동, 수일을 지냈지만 이곳도 역시나 격전지였다.
다시 3차로 김대금 할머니의 언니가 살고 있는 진주시 진성면에서 60여 일의 전체 피난을 마치고 귀향했다고 한다. 피난생활에서 어른들은 자식들을 안전하게 거두기 위한 엄청난 고생이었고, 철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식들은 피난생활을 요즈음 야외 캠핑처럼 여겼다고 한다.
조부모(정임규 : 1880년생, 당시 71세ㆍ김대금 : 1883년생, 당시 68세) 2분은 집 뒤 대밭에 굴을 파고서 피난을 가지 않고 현지 마을에 남았다가 실종이 되었는데, 미군에 의해 거제 포로수용소에 안치되었다 6개월 후에 돌아오시어 가족 해후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한다.
피난 식솔은 정기규 종조부 식구를 제외하더라도
정현락 식솔(1912년생, 당시 39세 6남 2녀 출산), 숙부 정현중 식솔(1914년생, 당시 37세, 4남 3녀 출산), 도합 21명이다.
피난 가기전 소 코투레를 풀어서 남산들 풀밭(당시 남강 제방 없었기에 침수 지역)에 방사했는데, 들판에 소가 수백마리였다. 숙부 정현중이 내 소는 어디 있는지 못 찾고 대신 다른 소를 몰고와서 1마리 잡았으나(도축), 군북면 일대가 전쟁 불 구덩이가 되는 바람에 쇠고기를 급히 된장독과 간장독에 담그고 피난했다고 한다.
피난에서 돌아오니 마을 전체는 불타서 없어졌으나, 소고기를 염장한 된장독은 독 상부에 손바닥 만한 독조각(독파편)이 떨어져서 구멍이 나 있었으나 내용물은 안전했다고 한다. 그해 모내기를 하고 2벌 논을 메고 갔는데, 집은 타고 없었으나 하늘이 도왔는지 우순풍조하여 가을에 풍년이 들어서 기근을 면했다 한다. 또 식솔 23명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왔다.
또 덤으로 소 1마리 생 쇠고기가 절여진 된장ㆍ간장 맛으로 인하여 불타고 없는 집터에 가(임시) 오막살이를 짓는 목수꾼과 농사 일꾼 등에 좋은 식자료 음식(된장 씨락국)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다.
피아간 전쟁에서 진격하여 통과해 버리면 피난민이 안전하지만, 교전지역에는 피난민의 희생이 따른다. 점령으로 통과한 지역은 20세 전후 청년은 무조건 징병으로 전선에 투입된다. 큰형님은 징병 대상이지만 격전지 속으로만 피난했기에 1950.9.15 인천상륙작전 이후인 1951.6.18 경찰학교에 자진 입교(제38기)하여 부산 철도경찰대에 근무 피명되어 경찰로서 지리산 공비토벌에 참전했다. 6.25전쟁참전유공자다.
상기 순흥안씨와의 혼맥에서 3명이 더 있어 열거한다. 5촌 당숙 정현향(이하 족보명)의 배위 순흥안씨 대산댁(대산면 옥열리 효사마을), 5촌 당숙 정현길 배위 순흥안씨 상춘댁(대산면 하기리 기동마을), 재종형님 정영술의 배위 순흥안씨 둘안댁(가야읍 산서리)이다. 모두 15~30촌 이내 종친이다.
6.25전쟁 때의 옛 증언자 나이 : 정영조(당시 21세), 정영만(18), 정을남(16), 정삼영(14), 정갑영(11), 정창영(8) 취합이다.
※ 차후 의령군 지정면 득소리 득소마을과 성당리 독대마을을 한 번 탐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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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 내 고향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는 호롱불(등잔불)시대에서 전기가 1973년 1월에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인 1950~1960년대에는 마을에 라디오도 1대 있을까 말까였고, KBS 등 우리나라 방송은 전파가 약했고, 북한 방송은 채널을 돌리는 과정에 전파도 센데다 아나운서의 말씨 억양도 세서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는 기억이다.
여름철 밤에는 모기 모닥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둘러앉아 형님들이나 집안 아저씨 뻘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도란도란 중에는 6.25전쟁 피난 이야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강원도 최전방 인제 원통ㆍ양구 군대생활 전우담, 호랑이 관련 야화, 도깨비(이칭 다양 : 헐기불ㆍ헛그세 불ㆍ허그시 불ㆍ허깨비 불ㆍ괴화ㆍ인불ㆍ인화ㆍ인혼ㆍ불의 구슬ㆍ여우 불), 장가ㆍ시집가는 이야기 등 등 중에도 6.25전쟁 낙동강방어선 격전지 중의 하나인 고향 함안의 피난살이 고생담 이야기는 흥미와 긴박감을 주었던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