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가 넘어서야 관직에 나간 강감찬은 문신이었지만, 70세가 넘어서도 도통사의 직위를 제수받아 요국(遼國)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다.
문헌에는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없다고 되어있다는데 그의 청렴함과 나라를 위한 충청은 대인을 넘어서 성인으로 불리기에도 부족하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은 강감찬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강감찬은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자기의 재산경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것없었으며,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 묻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를 보통사람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가서 국사를 처리하며 국책을 결정할 때에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나라가 평온한 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功德)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그는 외모는 비록 잘생기지 못했지만 위엄이 있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부족한 것 없이 부유한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을 멀리하여 늘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관직에서도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했다.
강감찬은 이처럼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자질을 인정받아 뒤늦게 시작한 벼슬길이지만 착실히 승진을 거듭해 1010년에는 차관급인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요나라의 40만 대군이 고려를 침범해온 것이 바로 그 해였다. 이보다 앞선 993년에 요국(遼國)의 첫 번째 침입이 있었다. 소손녕(蕭遜寧)을 총사령관으로 한 요국(遼國)의 80만 대군이 쳐들어온 그때에는 고려의 중군사(中軍使) 서희(徐熙)가 단신으로 적진에 걸어 들어가 오로지 세 치 혀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인 결과 화의가 성립되어 그대로 물러간 적이 있었으나 이번의 두 번째 침공은 문제가 달랐다.
요국(遼國)의 두 번째 침입이 있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1009년에 김치양(金致陽)이 황제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밀통해서 몰래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려는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미리 안 목종(穆宗)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를 시켜 김치양을 죽이도록 했다. 이때 강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와서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뒤 목종과 천추태후까지 쫓아냈다. 그리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새 황제로 추대했으니 그가 현종(顯宗)이다. 하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조가 내친 김에 목종까지 죽여 없앴고 이 소식을 들은 요국(遼國)의 황제 성종(聖宗)이 트집을 잡아 임금을 죽인 역신 강조를 문죄한다는 명목으로 현종 즉위년 11월에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에 군권(軍權)을 장악한 강조가 행영도통사가 되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적군을 막으로 나갔으나 통주에서 대패하고 자신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12월에 요나라 군사들이 서경까지 밀고 내려오자 고려 조정은 어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거의가 중과부적이요 역부족이니 항복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때 오로지 강감찬만이 반대하고 나섰다.
● 모두가 요(遼)에 항복하자고 할 때 유일하게 반대
"오늘의 사태는 모두가 강조의 탓이니 조금도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힘에 겨운 전쟁이니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하고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비록 차관급이지만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던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강감찬은 황제에게 권해 남쪽으로 파난토록 했다.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하는 동안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정성(鄭成) 등의 맹장(猛將)들이 곳곳에서 유격전(遊擊戰)으로 요국(遼國) 군사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적의 기세를 죽이는 한편 하공진(河供辰) 등은 외교적 노력을 벌여 마침내 강화가 이루어졌다.
현종(顯宗)이 개경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2월이었다. 계책으로 항복의 치욕을 방지한 공로로 강감찬은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승진하였다. 그는 사직단을 수축할 것과 예관(禮官)을 시켜 예절에 관한 규범을 제정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이부상서로 전임되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강동 6성 및 각 지방의 성곽도 튼튼히 정비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했다. 또한 과거제를 활성화시켜 인재를 발탁하고 우대함으로써 중앙집권제와 왕권을 동시에 강화하기도 했다.
당시 강감찬에게는 개령현에 토지 12결이 있었는데, 그는 임금에게 아뢴 뒤 이를 모두 자식이 군대에 간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모두 탄복했다. 이어서 그는 서경유수, 내사시랑 겸 내사문하평장사로 임명되었는데 현종이 임명장의 여백에 이렇게 써서 주었다고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은 전한다.
'경술년 중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공의 책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그해가 1018년 그의 나이 이미 70세였다.
● 해마다 침범해 고려를 괴롭힌 요군(遼軍)
요국(遼國)의 세번째 침입이 벌어진 것이 바로 그해 1018년 12월이었다. 고려 황제의 내조(來朝)와 강동의 6성 반환이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요국(遼國) 마침내 소배압(蕭排押)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파견해 또 다시 고려를 침공했던 것이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이때 요국(遼國) 군사를 총지휘한 소배압이 첫 번째 고려 침공 때에 요군(遼軍)의 사령관이었던 소손녕(蕭遜寧)의 형이라고 전해진다.
그동안 요국(遼國)은 참으로 끈질기게 고려를 괴롭혀왔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요국(遼國)은 해마다 고려에 군대를 보내 크고 작은 싸움을 걸어오는 한편 사신을 보내 고려 황제가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성(上京城)에 들어와 직접 요국(遼國)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라는 무례한 요구를 하고 또 강동 6성을 반환하지 않으면 무력(武力)으로 보복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적통을 자처하고 건국한 고려! 태조(太祖) 이래 북진정책을 추진해오던 고려가 거란 오랑캐의 그따위 돼먹지 못한 공갈협박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따라서 양국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1013년에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야율행평(耶律行平)과 이송무(李松茂)를 보내 강동 6성의 반환을 강요했고 그 이듬해에는 소적렬(蕭敵烈)에게 군사를 주어 통주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홍화진 수비대장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周演)이 맹렬한 전투 끝에 요군을 물리쳤다. 요군은 이듬해인 1015년 정월에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양안에 성을 쌓아 홍화진을 포위했으나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翊)이 고려군을 지휘하여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수성전(守城戰)으로 적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요국(遼國)은 그 해 9월에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되풀이했고 고려 조정은 여전히 냉담하게 거부했다.
끈질긴 요국(遼國)은 1016년에는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烈)이 거느린 군사들을 파견하여 침공해왔고 1017년에도 소합탁(蕭合卓)의 군대를 보내 침공했으나 모두 강민첨(姜民瞻) 김승위(金勝威)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격파되어 패퇴(敗退)하였다. 그러자 1018년 12월에 마침내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요국(遼國)이 10만 대군을 보내 세번째 고려 침공을 개시하자 현종은 강감찬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임명하여 상원수(上元帥)의 직책을 제수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副元首)로 내사사인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 유참(柳參)을 각각 판관으로 삼아 그동안 요국(遼國)의 내침에 대비하여 길러온 20만 8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적군을 막도록 했다.
강감찬이 전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오늘의 안주인 영주에 주력부대를 주둔하여 현재 의주인 홍화진까지 이르게 하고,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의 동쪽을 흐르는 대천(大川)의 물을 막고 기다리게 했다가 적군이 진격해오자 일시에 막았던 물을 터놓게 했다. 강감찬은 적군이 뜻밖의 기습에 당황하여 큰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명령을 내려 적병들에게 활을 쏘거나 접근전(接近戰)을 통해 수많은 적병을 참살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첫 번째 전투는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소배압은 홍화진을 우회하여 개경을 향해 바로 남진했다. 강감찬은 강민첨으로 하여금 요군을 추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처에서 적을 무찔러 무수한 사상자를 내게 했다. 그러나 소배압의 주력부대는 이듬해인 1019년 정월에 이미 개경에서 10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늘의 황해도 신계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 상원수로 출전 요국(遼國)의 10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켜
요군이 개경 가까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도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 들이고 들판의 농작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며, 성 밖의 집들까지 모두 부수게 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이래 우리 민족이 중국 세력 ?G 북방 민족과의 전쟁을 치를 때마다 자주 사용하던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고려 조정은 또 한번 비밀리에 기병 3백명을 금교역으로 보내 어둠을 틈타 적군을 기습토록 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전선(戰線)의 강감찬도 병마판관 김종현(金種鉉)에게 군사 1만명을 따로 주어 개경으로 달려가 수도를 방어토록 하였다. 사상자가 늘어나고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소배압은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곳곳에서 적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남은 적군이 구주에 집결하자 마침내 양군의 주력 병력이 전면전(全面戰)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는 처음에 밀고 밀리는 공방전(攻防戰)으로 전개되다가 김종현이 거느린 고려군 기갑병 1만여명이 합세하자 전황은 급변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었다. 화공을 당하면 큰일이라고 여긴 소배압은 퇴각을 서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감찬의 호령 일하에 고려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요나라의 10만 대군은 거의 몰살하다시피 한 참패를 당했으며 살아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적병은 2~3천 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요국(遼國) 황제 성종은 간신히 목숨만 살아서 돌아온 소배압을 질책하며 패전(敗戰)의 책임을 물어 파직하고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이 구주대첩(龜州大捷) 이후 요국(遼國)은 다시는 고려와의 전쟁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백발백수가 성성한 71세의 개선장군 강감찬이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수많은 포로와 노획 물자를 바치니 현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 나와 연회를 베풀고 극진히 환영했다. 고려사(高麗史)는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전한다.
'임금이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축배를 들어 그를 위로하고 찬양하여 마지않으니 강감찬은 분에 넘치는 우대에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의를 표시했다. 나라에서는 개선을 기념하여 역의 이름을 홍의로 고치고 역리들에게 특별히 주와 현의 아전들이 쓰는 것과 같은 갓과 띠를 주었다.'
요국(遼國)과의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은 뒤 강감찬은 연로함을 사유로 은퇴를 주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3일에 한 번씩 입궐케 하고 작위와 함께 식읍 3백호를 하사했다. 그는 이듬해 6월에야 비로소 실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황제는 은퇴한 그에게 계속 벼슬을 내려 1031년에는 수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이듬해에는 식읍을 1000호로 늘려주었다. 하지만 강감찬은 여전히 평민과 다름없이 검소한 의복과 음식으로 조용히 노년을 보내다가 그 이듬해인 1032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감찬이 죽자 황제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인헌(仁憲)이란 시호를 주고 백관에게 그의 장례식에 참석토록 명령했다.
강감찬! 백성과 군주에게 사랑받았던 위대한 명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