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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 - 광양 비촌마을 참사와 황순모 선봉장
023. 10. 30. 2
우리가 기려야할 황순모 선봉대장과
기억해야할 비촌마을
수어댐 풍경. 일제는 의병마을인 비촌을 불태워버렸다. 1974년 건설된 수어댐으로 비촌은 현재 물속에 잠겨있다. 비촌은 황순모 선봉대장과 황병학의병장의 고향이다.
수어댐건설과 수몰된 비촌마을 |
전남 광양시 진상면에는 수어(水魚)댐이 있다. 수어댐은 1974년 건설이 시작돼 1978년 완공됐다. 여천국가산업단지에 공급할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댐이다. 정부는 1974년 여천에 총 572만 평 규모의 종합화학기지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비상 저수용 댐으로 수어천 댐을 건설키로 했다.
당시 정부는 여천 산단에서 사용할 공업용수를 이곳에서 60㎞ 떨어진 섬진강에서 취수해 공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섬진강은 갈수기에는 물이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연중 40일 동안에는 취수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정부는 수어천에 비상저수 댐을 건설해 여천 산단에 물을 공급키로 했다.
수어댐의 유역면적은 49㎢이다. 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수어천 일대 마을 이주사업도 함께 진행됐다. 이때 비촌(飛村)마을은 물이 차지 않는 인근 불암산 능성이로 옮겨졌다. 삼한시대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 1600~1900여년 만에 제터를 잃어버리고 산으로 옮겨진 것이다. 수어댐 건설로 비촌마을 110세대와 평촌마을 80세대 주민들이 태어나고 자란 터를 잃어버렸다. 비촌마을의 원래 터는 지금 수어댐의 한 가운데 바닥이다.
수어천이라는 이름은 ‘물이 합쳐지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내’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우+내=어우내’가 됐는데 ‘어와 내(川)’에 ‘물 수(水)’자를 넣어 수어천이라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옛날부터 수어, 즉 숭어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어서 수어천이라 했다고도 전해진다.
비촌(飛村)에는 삼한시대 매우 큰 마을(邑)이 있었다고 한다. 삼한 시대 옥룡에 내천현성(奈川縣城), 골약동 중군리에 중군현지(中軍縣地)과 함께 비읍지(飛邑地)가 있었다는 설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마을이 생긴 것은 기원후 1년에서 3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은 1530년쯤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후헌(黃後憲)이 들어오면서 생겼다.
비촌마을의 원래 뜻은 ‘넓은 마을’이다. 비촌마을은 수어천 변에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매우 큰 마을이었다. ‘넓다’라는 뜻을 지닌 우리 말의 ‘넙’이 마을의 뜻을 지닌 ‘몰’과 합쳐져 넙몰이 됐는데 ‘널몰-날몰’로 음이 변화됐고 이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날’을 ‘날 비(飛)’의 ‘날’로 여겨 비촌으로 됐다는 것이다.
비평리(飛坪里)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시 비촌리와 평촌리(坪村里) ,탄치리(炭峙里)를 병합할 때 비촌과 평촌에서 ‘비’와 ‘평’ 자(字)를 따와 비평리라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비촌리의 비(飛)자는 ‘날아가 버린다’는 뜻보다는 ‘높게 되다’, ‘승격되다’, ‘번창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수어댐의 풍경은 평화롭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의 수어댐 풍경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수어댐은 비촌마을의 비극을 품고 있는 곳이다.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수어댐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일제가 의병 마을이라 해서 불태워버린 예전의 비촌마을은 물속에 잠겨 있다.
물속에 잠긴 수어댐에는 비촌마을 주민들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다. 가족들 앞에서 무참하게 숨져간 황순모 선봉장의 원혼과 절규가 자리하고 있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 옆 동네로, 혹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비촌마을 수몰민들의 애환도 함께 스며있다. 수어댐에 잠겨있는 우리 선조들의 나라사랑과 애국혼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이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다.
| 일제가 불태워버린 비촌마을 |
황순모 선봉장의 손자 황부현씨가 비촌마을이 수장돼 있는 수어댐을 가르키고 있다
비촌마을에 살던 황씨 일가들은 집이 불타버리는 비극을 맞게 된다. 광양 백운산(白雲山) 일대를 배경으로 해 활동하면서 일제를 괴롭힌 의병부대 황순모(黃珣模,1873~1908)선봉대장과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의병장이 비촌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황순모, 황병학은 숙질과 조카사이로 200여명의 의병들을 모아 일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일제는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가 광양일대 일본인들을 공격해 처단하는 등 큰 피해를 입히자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일본 헌병과 경찰은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고향마을인 진상면 비촌마을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황순모와 황병학의 소재를 물으며 닦달했다. 일제는 황순모의 집을 포함해 황씨 일가가 모여 사는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비촌마을 황순모 선봉장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그래서 황씨 일가들이 황순모의 집을 중심으로 해 여러 채의 집을 짓고 한울타리 안에 모여 살고 있었다. 황순모선봉대장이 백운산에 은거하면서 의병활동을 벌일 때, 일본에 빌붙어 살던 면장 황모씨가 의병들의 은신처를 일본군에 밀고해버렸다. 황모씨는 의병명단까지 일본군에 넘겼다.
황모씨의 밀고로 일본군은 광양의병대장 황순모와 조카 황병학의 정체를 알게됐다. 일본 헌병대는 즉각 황순모와 황병학의 집이 있는 날몰(광양 진상면 비평리 비촌마을)로 몰려왔다. 그리고 황순모의병장의 가족과 친척들을 협박하고 황순모의병장의 집과 그 일가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런 다음 “황순모와 황병학을 잡아 바치지 않으면 황씨들을 모조리 포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일본헌병대는 비촌마을을 불바다로 만들고, 황순모·황병학 가족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다음 마을을 떠났다. 비촌마을 사람들은 불타버린 집터위에 다시 집을 짓고 살았다. 참혹한 세월이었다.
남한대토벌작전시 일제는 마을을 불태워 의병들의 은거와 지원을 봉쇄했다
비촌마을 입구의 황순모, 황병학 기적비
일본에 나라가 먹힌 뒤 비촌마을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일본 헌병들이 수시로 찾아와 들쑤시고 갔다.
일제에 협력한 일부 황씨 가문사람은 마을사람들을 만날 때면 조용히 살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일제강점기에 비촌마을 사람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광복이 되고서야 비천마을 사람들은 마음 편히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회산황씨유허비와 황순모기적비
그러나 비천마을은 또 다시 비극을 맞게 된다. 수어댐 건설이 확정되면서 조상 대대로 살던 집터를 떠나 불암산 산중턱으로 이주를 해야 했던 것이다. 비촌마을이 수어댐에 잠기면서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던 비촌마을의 비극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수어댐을 바라보이는 곳에외로이 남아있는 황순모 의병장의 묘소만이 그날의 비극과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황순모 선봉장의 손자 황동현씨(좌측)와 황부현씨가 할아버지 황순모선봉대장의 의병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전라도의병부대와 광양의병부대 |
전라도 의병은 1896년 장성과 나주를 중심으로 해 일어났다. 역사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으로 조선백성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일제는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국모를 시해하고 조상대대로 물려오던 풍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려는 일제의 만행에 조선백성들의 의분이 끓어올랐다.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학계에서는 1894년 후반부터 1896년 사이에 일어난 의병들을 전기의병(前期義兵)이라 한다.
친일파 정권이 1895년 11월 15일을 기해 내린 단발령은 호남의병을 촉발시켰다. 단발령은 일제의 경복궁 침입이나 국모시해보다 더 폭발력이 컸다. 단발령은 상투로 상징되는 조선민족의 자존심과 민족혼을 제거시킴으로써 일본에 대한 복종심을 키우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었다. 또 조선민족 개개인이 상투를 잘라냄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체념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호남지방의 전기의병은 전남 장성에서 먼저 일어나고 그 이후에 나주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호남유생들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힘을 모아야하며 단발령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장성의 기우만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창의를 모색했다. 그리고 1896년 음력 2월 7일 장성향교를 도회소로, 양재사를 도회소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의 격문을 받은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은 의병 거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96년 음력 2월 4일 나주의 유생들은 기우만의 창의를 지지한다는 답통(答通)을 장성으로 보냈다. 장성의병은 나주의병과 연합부대를 결성하기 위해 1896년 음력 2월 11일 나주로 이동했다. 이때 나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의 규모는 200여 명이었다. 그러나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고종의 해산종용에 따라 2월28일~29일 사이에 해산해 버렸다.
광양지역에는 명성왕후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졌던 1895~96년 사이에 별다른 의병봉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1906년 후반부터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황병학·황순모 의병부대와 안규홍·조규하·강진원 등 의병부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광양지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의병부대는 백낙구 의병부대이다. 황병학·황순모 의병부대는 백낙구의병부대가 일제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지역민들이 다시 일어선 부대이다.
▶백낙구의병부대
백낙구의 의병활동을 소개한 독립신문
백낙구는 전북 전주사람이면서도 광양 백운산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백낙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을 진압하는 초토관(招討官)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조정대신들의 부패와 외세침략에 무력한 조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이때 눈병에 걸려 귀국했으나 시력을 잃고 말았다.
백낙구는 백운산으로 들어가 눈병을 치료하며 운둔했다. 을사조약 체결소식을 들은 뒤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 기우만과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들어가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백낙구는 경남 서부지역인 진주의 실직한 군리(郡吏)들과 광양주민들을 설득해 200여명의 의병들을 모았다.
진주의 관리출신들은 폭동을 일으키려다 백낙구를 만나 의기투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백낙구는 이승조·이도순·이지상·권창록·안치명(치중)·김봉국 등과 함께 1906년 11월 7일 광양 관아를 점령해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구례를 공격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체포당했다. 백낙구와 의병들은 순천분파소로 이송됐다가 광주로 이감돼 재판을 받았다.
의병장 백낙구는 일제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의병에 투신한 명분과 목적을 아래와 같이 당당하게 밝혔다.
‘슬프다. 오늘날 소위 대한국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과거 을미년에는 일본공사 삼포(三浦)가 수차 마음대로 군대를 풀어 대궐을 침탈하니 만국이 이를 듣고 실색했다. 조선 팔도 사람들이 이를 원수처럼 여겨 애통해 한 이래 12년이 흘렀다. 위로는 복수의 거의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능멸하고서 자칭 통감이라 한다. 그 통(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감(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00년 종사와 삼천리강토, 이천만 동포가 이웃나라의 적신 이등박문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등박문을 사로잡아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기우만은 광주경무서에서 심문을 받다가 백낙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의는 대단했으나 군사가 적어 실패했다.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의만은 죽지 않고, 나라는 비록 망해도 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가 같으면 마음이 같아, 비록 시키지 않아도 시킨 것과 같다”
백낙구는 15년형을 선고받고 1907년 5월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됐다. 그해 12월 순종(융희황제)의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곧바로 전북 전주로 가서 의병에 합류했다. 그는 1907년 말 전북 태인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에 순절했다. 우국 선비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 1맹인 의병장 백낙구의 활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했다. 전투할 때마다 가마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했다. 패할 때도 가마를 타고 도주했다. 세 차례 붙잡혔는데, 결국 총을 맞아 죽었다. 광양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백낙구는 발발(勃勃)한 기개가 있다고 말한다.’
▶황병학· 황순모 의병부대
황순모 선봉대장 초상화
비촌마을을 기반으로 해 의병들을 모아 광양의병 부대를 결성한 핵심인물은 순흥 안씨(順興 安氏) 집안의 황순모와 황병학이다. 황순모와 황병학은 불과 세 살 차이였으나 작은 아버지와 조카 사이였다.
황순모와 황병학, 그리고 이들과 뜻을 같이한 광양지사들은 일제가 고종을 겁박해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백성을 억압하는 것에 통분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떻게든 일본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1908년 35세였던 황순모는 재산을 팔아 의병부대 군자금으로 삼았다. 그리고 조카 황병학과 함께 거사에 참여할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황순모는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광양읍은 물론 인근의 구례와 하동, 순천, 여수 등지의 유지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원당의 최진사, 골약면 중골의 정행원, 지접의 김서임, 장잣골의 유문행 등이 쌀과 현금, 무기 등을 모아 황순모에게 건넸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1908년 음력 7월 26일, 백운산(白雲山) 묵백(墨栢:먹뱅이)에 200명 정도의 의병들이 모였다. 200여명의 의병은 전남 동부 및 경남서부 지역에서 모여든 이들로,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의병들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액이 머리에까지 박두했으니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는가”라며 일제에 항거하다 죽을 것을 맹세했다.
이 자리에서 군자금조달과 의병모집을 주도했던 황순모는 선봉대장에, 지략과 담력이 남달랐던 황병학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황순모 선봉장과 황병학 의병장은 무기를 확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총이 있어야 하고 총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 모아 의병으로 참여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만들어냈다.
생쇠골 야철지
야철로 이정표
백운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의병들의 근거지로 알맞았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 묵백 계곡의 임방골에서 훈련을 하면서 야철로(冶鐵爐:쇠를 녹이는 작은 용광로)를 만들어 직접 무기를 제작했다.
1999년 순천대박물관의 학술조사를 통해 백운산 억불봉 아래 진상면 황죽리 생쇠골과 매봉 아래 진상면 어치리 2곳에 야철로가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생쇠골에 있는 야철로는 지금의 용광로와 비슷한 형태다. 높이는 90cm, 하부직경은 1m, 상부직경은 1.5m이다. 위로 갈수록 너비가 더 넓다. 황병학 의병부대가 무기를 만들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상면 내회마을의 계곡에도 노점(爐店)골이 있는데, 무기제작과 관련된 곳으로 여겨진다.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가 쉽게 철광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생쇠골 아래 평촌(坪村)마을에 농기구와 솥 등을 만들던 철점(鐵店)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들은 평촌에서 무쇠를 구입한 뒤 임방골 등 여러 곳으로 가져가 여기에 있는 야철로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어냈다. 군자금이 넉넉했으며 산포수와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황순모· 황병학 의병부대의 활약상과 황순모 선봉장의 최후 |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는 어느 정도 무장이 되자 가장 먼저 광양 망덕포구의 일본인 어부들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인 어부들은 망덕포구와 일대 바다를 장악하고 조선 어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광양을 비롯한 여수·순천·고흥 등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활동은 일본어부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의 적극적인 조선이주정책에 따라 옮겨온 일본어부들은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를 사용해 어장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일본배가 훑고 가면 조선어부들은 건질게 없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어부들은 안하무인이었다. 조선어부들을 무시하고 윽박질렀다. 일본어민들은 일본 헌병과 경찰의 비호아래 어장 어업권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가 첫 번째 공격목표로 망덕항 일본어선과 어민들을 정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광양어민들의 불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병들은 일본어민들의 횡포를 응징, 광양어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본어부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는 1908년 9월1일 새벽 일본어부들을 기습했다.
일제가 작성한 <전남폭도사>에는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의 망덕항 일본어부 기습사건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9월1일 오전 3시 비도 50명(양총 3· 화승총 25)이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내습, 일인 어부 오까야마현 사람(岡山縣人) 가꾸노(角野仁三郎)와 그의 처 이소 및 장남 아끼라(明)을 총살하고 가옥을 불사른 다음 이 마을의 잡화상 고오지현 사람(高知縣人) 이시다(石田耕作)집에 내습, 고용인 다까하시(高橋吉助)를 바다에 던져 익사케 하고 해안에 매어둔 일본 어선을 불살랐다.’
망덕포구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의 기습 공격으로 망덕항 일본어민과 일본인들이 큰 피해를 입자 일본군은 곧바로 광양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황병학 의병부대 토벌에 나섰다.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광양 옥곡원의 일본군경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황병학 의병장이 부상을 당해 의병부대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황의병장은 광양 옥곡면 뒷산 원등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황병학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눠 독자적으로 활동케 한 다음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며 다친 다리를 치료받았다.
일제는 백운산을 무대로 해 활동하는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것이 쉽지 않자 황순모 선봉대장의 가족들을 수시로 찾아와 위협하면서 귀순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일제에 협력했던 황모면장은 백운산 속으로 심부름꾼을 보내 황순모 선봉장이 귀순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황모씨는 황순모선봉대장이 귀순하지 않을 경우 일본헌병들이 비촌마을에 살고 있는 황순모 선봉장의 늙은 부모를 잔인하게 죽일 것이라고 겁박하기도 했다.
불암산 자락에 있는 황순모 선봉장 가묘
비촌마을 황순모 선봉대장의 묘와 손자 황부현. 황순모선생의 묘에서 할아버지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손자 황부현.
그러나 황순모 선봉장은 이를 악물고 의병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늙으신 부모님이 자식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는 사실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어느날 밤, 부모님의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산에서 비촌마을로 내려왔다. 일본 헌병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헌병들은 황순모 선봉장이 내려올만한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황순모 선봉장을 사로잡았다.
그런 뒤 광양헌병대로 끌고 가 고문했다. 일본에 협조하고 다른 의병들의 소재를 밝히라며 때리면서 강요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한번 보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붙잡힌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일본헌병들이 모진 고문을 하며 의병들의 또 다른 은신처를 밝히라고 협박했지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왔던 다른 의병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순모 선봉대장의 친구이자 의병활동을 같이 하며 생사를 함께 하기로 결의했던 한규순이 총살현장에 찾아왔다. 한규순은 “나는 황사중(황순모)의 부하 한규순이다. 의사(義士)라면 그만이지 장졸(將卒)의 구분이 어디 있으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면서 황순모 선봉장의 몸을 끌어안았다.
일본 헌병은 황순모 선봉장을 끌어안은 한규순을 향해 사격을 했다. 두 사람은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1908년 10월11일의 일이었다. 황순모 선생은 36세의 나이로 그렇게 장렬하게 친구 한규순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황순모 선봉장에 대한 예우와 추모사업 확대돼야
황순모 선봉대장 묘소에서 바라본 수어댐
황순모 선봉대장에 대한 예우와 추모 사업이 다른 의병장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떨어진 외견상 이유는, 황순모 선봉장이 부모님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야밤에 고향집을 찾아갔다가 체포됐다는 사실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이유가 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공적사실을 정리할 1960년대 황순모선봉대장의 공적이 황병학의병장의 공적으로 잘못 정리되는 바람에 황순모선봉대장에 대한 공적평가와 선양사업이 상대적으로 낮춰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적절치 않다. 황순모는 전 재산을 팔아 의병군자금으로 사용했고, 생업을 포기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군자금과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 광양 옥곡원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데 앞장을 섰다. 망덕항 일본인 기습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선봉대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런데 광양의병을 기리는 모든 기록과 장소에는 황병학의병장의 이름만 있을 뿐, 황순모 선봉대장의 이름이 빠져 있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3년 5월 현충시설로 지정한 광양망덕 사적지의 경우도 ‘황병학 의병전투지-망덕포’로 명명돼 있다. 망덕포구에는 ‘황병학의병전투지’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을 뿐, 황순모선봉대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광양읍 유림회관 앞에도 ‘의사황병학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으나 황순모선봉대장을 기리는 비는 없다. 현재 광양지역 의병 선양 및 추모 사업에 있어 그 중심인물은 황병학 의병장이다. 황병학 의병장과 함께 백운산과 광양 일대를 무대로 활동했던 황순모 선봉대장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화돼 있는 상태다.
또 광양의병을 소개하는 각종 안내문에도 광양지역 의병을 이끌었던 인물로 황병학 의병장이 적시돼 있으나 황순모 선봉대장을 거론하고 있는 안내문은 거의 없다. 어떻게 보면 광양의병의 역사가 왜곡돼 있는 것이다. 장렬했던 황순모선봉대장의 희생에 합당한 예우가 바쳐져야한다. 황병학 의병부대가 운용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황순모 선봉장을 함께 기리는 배려가 필요하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독립운동사 정리 및 평가에 있어서 우리는 몇몇의 장수들만을 앞장세우고 기리는데 너무 많은 것을 할애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장군이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이순신 곁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수많은 장졸과 민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순모 선봉장 포장증 황순모 선봉장 훈장
망덕포구 황병학의병전투지 안내문에도 황순모선봉대장 의로움과 활약상 넣어 함께 기려야
나라가 국난에 빠졌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숨져간 그 수많은 장졸들과 이름 없는 의병들을 기리는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황순모 선봉대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순모선봉대장은 광양의병부대 결성과 활동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정부가 초기에 작성한 독립유공자 공적에 황순모선봉대장의 역할과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탓에 광양지역 의병선양사업에 있어서 황순모 선봉대장이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황순모 선봉대장
비촌마을을 지키고 있는 황부현씨 부부
| 황병학 의병장의 최후 |
광양유림 앞에 세워져 있는 황병학의병장 기념비
일제는 1개 연대를 투입해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치며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황병학 의병장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여수의 묘도로 잠적하여 재기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그 즈음에 일본 군경에 발각돼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의병들이 희생당하였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어쩔 수 없이 1909년 후반, 대부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황병학 역시 몸을 숨겼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황병학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다시 활동에 나섰다. 이 때 고흥에 은거 중이던 독립운동가 기산도(奇山度)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러 다녔다. 그 뒤 함께 평안도까지 올라갔으나 기산도는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황병학은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황병학은 1923년 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조선 땅에 잠입하려다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고향인 비촌으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당한 모진 고문으로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결국 193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지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1977년에는 진상면 비촌리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황순모선봉장유허비가 있는 곳
[출처] 전남역사 - 광양 비촌마을 참사와 황순모 선봉장|작성자 네오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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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1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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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남역사 - 광양 비촌마을 참사와 황순모 선봉장|작성자 네오컬쳐
[출처] 전남역사 - 광양 비촌마을 참사와 황순모 선봉장|작성자 네오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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