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책 필요해?”
‘이상’이라는 큰 관점으로 보면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동일하게 바라고 있는 한일 양국의 ‘사랑’과 ‘이성’의 가치이지만, 일상에서는 양국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오해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과 규칙의 대립이다.
필자가 서울에서 하숙 생활을 하던 1992년 당시의 이야기이지만, 일본인 유학생과 한국인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던 하숙집에서는 매일 같이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학생들은 모두 정답고, 연배가 높았던 필자를 ‘형’, ‘오빠’라고 불러 주며 내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없을 추억과 감동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온 지 얼마 안된 필자를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은 그야말로 근대 합리주의가 세계의 보편상식이며 그러한 인간이 제일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매우 시시했던 일들에도 사사건건 갈등한 것이다.
물론 모든 한국 학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컨대 당시 함께 하숙 하던 친한 한국 친구에게 책을 빌려 주면 좀처럼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책 다 봤어? 다 보면 돌려줘”라고 재촉하면 뜻밖의 답변이 나온다.
“그 책 필요해?”
나는 단지 “빌려 준 책을 되돌려 받아야 된다”고만 생각했을 뿐 필요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황하면서 “필요하다”고 대답해서 그 날 책을 받았지만, 책을 열어 보고 볼펜으로 많은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을 보니 또 한번 당황했다. 일본사람 같으면 상대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빌렸을 때 책 상태 이상으로 깨끗하게 읽고 돌려주는데, 그런 문화의 익숙한 필자로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본사람들은 예컨대 500엔을 빌려주었을 때 다음 그 사람을 만나면 500엔이 먼저 머리 위에 떠오른다.^^* “아, 500엔, 빌려 줬었지. 기억하고 있을까?”라고, 머리 위에 500엔이 반짝반짝,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상태에서 입으로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빌린 사람도 빌려준 사람과 같이 “앗, 500엔 빌렸는데 지금 지갑이 없네. 어떡하지? 다음에 갚는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라는 식으로 역시 머리 위에 500엔이 반짝반짝, 빙글빙글 돌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일본사람들이 결코 500엔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근대적인 인간으로서의 ‘소유’ 개념과 ‘대차’라는 약속에 대해 ‘빌린 것을 되돌려 준다’는 규칙을 지키고 싶을 뿐이라는 점이다.
◈ “쓴 사람이 주인이야!”
반면 한국사람들은 일본인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하숙 할 당시 한국에서는 버스용 티켓으로 토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실수로 한국학생의 토큰 10여개를 내 것으로 착각해서 써 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아차려서 토큰 주인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미안해. 사서 돌려줄게"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그가 한 한마디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무슨 말이야, 쓴 사람이 주인이지”
“필요한 사람이 주인이다” ―― 일본사람에게서는 설령 가족사이라도 나오지 않을 듯한 명언을 한국사람들은 규칙이나 소유에 대해 전혀 구애 받지 않는 가까운 사이에서 그렇게 말한다.
인간관계도 근대 사고방식으로 합리화된 일본사람들은 친한 사람 사이라도 더치페이(각자 부담)를 한다. 식당에서 즐겁게 밥을 먹어도 일어나면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나는 돈까스”하면서 자기 몫만 지불하고 나간다. 만약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가장 먼저 가게 주인이 놀래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남남이었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근대적 소유 개념의 영향 때문에 그러한 방식이 합리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방식에는 정(情)과 같은 개념은 들어갈 여지가 없다.
한국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식사 값을 지불한다.^^* 식사를 권한 사람, 손윗사람, 돈 있는 사람, 행동이 빠른 사람 “이번에는 내 차례야”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 등.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가 정을 주고 받는 기쁨을 경험하는 행위들이다. 일본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돈의 주고받음이나 물건의 주고받음이기 때문에 소유의 문제로 의식되어 아무래도 계산이 되어 버리는 반면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의 주고받음이기 때문에 공유의 문제가 되며 주면 준 만큼, 받으면 받은 만큼 정을 경험하고 기뻐할 수 있는 행복의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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