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도 막걸리를 아주 좋아한다. 언제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첫사랑 그 여자처럼 예나 지금이나 남도에서 빚는 막걸리는 내 입맛을 아스라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50대 허리춤을 바라보고 있는 나도 사실 2~30대 젊은 날에는 살가운 벗들과 함께 ‘주종불문’이니 하고 지껄이면서 맥주나 소주, 막걸리를 가리지 않고 마구 마셨다. 어떤 때는 맥주에 소주를 타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소주나 맥주를 타서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30대 끝자락에 들어서자 이상하게도 막걸리가 아닌 다른 술은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남도에 잠시 눌러 살 때는 매일 저녁마다 남도 막걸리에 포옥 빠져 있었다.
막걸리는 사실 다른 술에 비해 술값이 훨씬 적게 든다. 남도에서는 그저 구멍가게에 가서 막걸리 한 병을 사면 주인이 “여그서 마시고 갈 텐가?”라고 묻는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안주로 묵은지와 젓갈, 풋고추와 된장 등은 거저 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30대 끝자락부터 여러 지역에서 빚는 막걸리와 남도 막걸리를 고집하기 시작한 까닭은 사업실패로 어디 밥벌이 할 곳이 없나 싶어 남도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때 동전 몇 개 짤랑거리는 얄팍한 지갑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막걸리에 길들여져 있었다 해도 결코 찐빵처럼 부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께서는 집에서 아버지 중참으로 막걸리를 자주 빚었다. 나는 그때마다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술찌미(술 찌꺼기)에 사카린을 넣어 맛나게 비벼먹는 걸 참 좋아했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었던 그때 달착지근한 술찌미는 면장집 아들이 쪽쪽 빨아먹는 왕사탕도 부럽지 않았다. 물론 욕심을 너무 부리다 술에 취해 몇 번이나 혼땜하기도 했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논에서 소를 몰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아버지 중참 때 막걸리 반 주전자를 들고 신작로를 걸어가다가 목이 타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번 쫄쫄 빨아먹기도 했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시원한 막걸리를 아이스께끼 먹을 때처럼 그렇게 조심조심 빨다 보면 신기하게도 갈증이 싸악 가셨다.
경남 창원이 고향인 내가 지난 15년 동안 전라남도 여기저기를 여행하거나 잠시 눌러 살면서 마신 막걸리는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가운데 기억에 자주 떠오르는 막걸리는 개도막걸리와 여천막걸리, 여수막걸리, 순천막걸리, 목포 삼학막걸리, 해남 옥천막걸리 등이다.
개도막걸리는 여수 개도라는 섬에서 쌀을 주원료로 물맛이 특히 좋은 천제산에서 솟아나는 옥수로 빚는 막걸리로, 은근히 혀를 톡 쏘며 입천장과 목구멍을 휘감는 깊은 감칠맛이 끝내준다. ‘마셔도 마셔도 또 마시고 싶은 바로 그 맛’이다.
목포 삼학막걸리는 달콤한 감칠맛이 많지만 쌉쏘롬해서 웬만해선 질리지 않는다. 여수막걸리와 여천막걸리, 순천막걸리, 벌교막걸리, 해남 옥천막걸리는 하나 같이 혀를 가볍게 톡 쏘는 신맛에 입안을 달착지근하게 헹구는 듯한 깔끔한 느낌이 참 좋다.
남도에는 첫사랑 그 여자와 첫 키스를 할 때처럼 짜릿하고도 달콤한 맛이자 삶에 지쳐 고단할 때 동무가 되어주는 속정 깊은 맛이 우러나는 막걸리가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맛있는 남도 막걸리를 꼽으라고 한다면 어릴 때 어머니께서 직접 빚던 그 손맛이 깊이 배인, 논두렁 내음이 나는 그런 막걸리가 아니겠는가.
이소리 시인
녹색의 땅 전남새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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