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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2005~2020]/번개산행기
2005-11-29 10:37:21
[번외] 설악산 가을산행 2004
2004. 10. 16. / 박광용
참가자 : 이 민영, 박 광용 (총 2명)
기 간 : 2004. 10. 1. (금) ~ 10. 2. (토)
예정코스:
백담사 –수렴동 –쌍폭 –사자바위 –봉정암 –소청 –중청 –대청 –소청 –희운각(1박)
-무너미 고개 –신선봉 –공룡능선 –마등령 –오세암 –수렴동 -백담사 (원점회기)
<프롤로그>
작년 이맘때, 친구 재중이와 설악 등반을 마치고 (오색-대청-천불동-소공원) 돌아오는 길에 재중이 말이 올해에는 꼭 공룡능선을 타보자고 하였으나, 나 자신은 몸과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확답을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주말 나 홀로 산행의 결과 몸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판단하였고, 특히 8월에는 조카와 아들놈을 데리고 감행한 지리산 종주를 성공하였기로, 공룡능선에 대한 도전을 결심하게 된다.
9월 중순 즈음, 재중이에게 연락하니 9/30부터 출장 계획이 있단다. 나 역시 10/9~10/10 주말에는 아버지 제삿날이 끼어 있어 어렵다고 하여, 주말을 이용한 10/2~10/3 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문이나 TV 보도가 단풍이 예년에 비해 좀 빠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어, 주말에는 너무 붐빌 것이라 판단하고 하루를 앞당겨 10/1~10/2 일정으로 감행하게 된다. 서울 산행모임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보니, 민영이가 동참하겠다고 하여 계획대로 추진한다. 9/30 저녁에 부산을 다녀온 민영이와 통화하여 집 부근의 LG-mart에서 준비물을 챙기고, 10/1 5시에 가원초교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산행준비를 완료한다.
LG-Mart에서 준비물 챙기는 동안 권 박사와 민영이가 전화 연락한다. 권 박사는 저녁에 만나 비상시 행동요령이나, 응급처치요령에 대해 미리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일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관계로 저녁식사 함께하는 것은 생략하고, 몇 가지 당부의 말을 기억에 담아둔다. 비옷, 무릎 보호대, 응급약품, 등등을 준비하라는 당부다. 비옷은 민영이의 것을 하나 사기로 하고 매장에 다시 들어 갔으나, 품절되었고 계절이 지나 당분간 진열을 하지 않을 거라 한다. 산행 길에 하나 구입하기로 한다. 무릎 보호대는 압박붕대로 대신하기로 하고.
<산행기>
첫날 (10/01, 금), 04:30 기상하여 냉장고에 얼려둔 삼겹살과 김치, 물통을 준비하고 04:50 집을 출발한다. 구석자리에 있는 자동차 빼는데 새벽부터 힘쓰게 한다. 가원초교 앞에서 시동을 끄고 기다리는데 곧바로 민영이가 나온다. 얼른 타고는 곧바로 출발이다. 송파 IC에서 순환고속도로를 타고 하남에서 내려와 팔당대교를 건넌다. 우측으로 빠지면서 6번 국도로 접어든다. 새벽이라 차들이 없어 신나게 달린다.
양평을 지나면서 날이 밝아오고, 홍천을 지나면서 2개 차선이 1차선으로 좁혀진다. 공사 구간이라 조심스럽다. 백담사 입구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기로 하고, 신남을 지나면서 다시 차로가 2차선으로 넓어지고 그 동안 천천히 달려 온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엑셀을 지긋이 밟아 준다.
어느덧 한계리 삼거리에 당도한다. 우회전하면 한계령-오색-양양으로 가는 길이고, 우리는 좌회전한다. 남교리(십이선녀탕 입구)에는 ‘만해마을’이 조성돼 있으나 어떤 성격인지 잘 모르겠다. 남교리를 지나면 용대리, 백담사 입구이다. 천천히 우회전하여 들어서면 식당, 민박집들이 즐비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첫번째 식당에 주차하고, 황태국을 주문한다. 7시11분이다. 아줌마 혼자서 첫 손님 받기에 바쁘다. 민영이가 갖고 온 신문을 보지만 보고 싶은 기사가 별로 없다. 한참 만에야 식사가 나오고, 아줌마에게 점심 도시락을 주문한다. 1인분에 5천원이란다. 좀 비싸다고 느꼈지만 번거로운 게 싫어 그냥 주문해 버린다. 으~잉, 도시락 밥이 부족하여 밥을 새로 해야 한단다. 역시 번거로운 게 싫어서 그냥 오케이 한다. 기다리는 동안 아침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을 모두 본다.
아줌마에게 내일 찾으러 온다고 하고 차를 모양 좋게 주차한다. 공용 주차장에 주차하면 하루에 8천원이란다. 만육천원 벌었다. 8시10분에 백담 매표소로 이동한다. 좀더 매표소에 가까운 식당에 들렀다면 적게 걸어도 될 일을 첫번째 집에 주차 시키는 바람에 꽤 많이 걷게 되었다. 매표소에서 입장료 지불하고 (매번 갖는 의문이지만 문화재 관람료는 왜 통합 징수하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올라 간다. 매점 겸 식당이 눈에 뛴다. 큰 글씨로 ‘비옷’이라 적혀 있다. 3천원을 주고 한 장 구입하고 민영이 배낭에 챙겨 넣었다. 백담사행 버스요금이 편도 이천원이다. 표를 사고 승강장 앞에서 기다린다.
8시45분 경, 버스가 올라온다. 올라 타고 민영이와 나란히 왼쪽 좌석에 앉는다. 왼쪽이 계곡 경치 감상하기에 더 좋기 때문이다. 차는 출발하고, 왼편으로 보이는 맑은 물과 하얀 바위는 나의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냥 입 벌리고 가쁜 숨만 몰아 쉰다. 이윽고 9시 정각, 버스는 백담사 일주문을 통과한다. 예전에는 버스가 강교·수교까지만 다녔기로, 지금보다 3Km를 더 많이 걸어야 했다. 주차장에서 내리고 배낭 메고, 신발끈 다시 매고, 문화재 관람료 낸 것이 아까워 백담사 경내로 잠시 들러 본다. 한바퀴 둘러보고 우리는 곧바로 산행길로 접어 든다.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이다.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서 평탄한 흙길을 걷기 시작한다. 여기서 수렴동 산장까지는 경사가 별로 없는 평탄한 길이기에 속도를 좀 내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을 실어본다. 9시가 지난 시간에 벌써 내려오는 산님들이 있다. 늙은 처녀인지 젊은 아줌마인지 검정색으로 무장한 산님은 오늘 아침 소청에서 출발하였다는데 벌써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참 부지런도 하셔라!!
오름을 계속하던 중 여럿 산님들을 만난다. 부부로 보이는 두 쌍의 산님들께 정상부근의 단풍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는데, 남자들은 별로 대답이 없는 반면, 여자들은 “아휴, 너무너무 좋아요. 가보세요, 감탄이 절로 나요.” 한다. 아무래도 여자들의 감성이 풍부한 것인가? 아니면, 너무 잘생긴 두 남자를 유혹하는 것인가? (ㅎㅎㅎ 자기 남편 옆에 두고???)
(지금부터는 시간 확인은 없기로 한다. 생각나는 시간은 추정 시간이다.) 새로 불사 중인 영시암(옛 영시암 터는 오세암 쪽으로 0.5~1Km 더 올라가야 한다)을 지나 수렴동 산장에 도착한다. 이때가 10:20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를 백담 계곡이라 하고, 백담사에서 여기까지가 수렴동 계곡이다. 여기서부터 오른쪽 계곡을 따라 봉정암까지를 구곡담 계곡이라 일컫는다. 물론 구곡담 계곡을 구분하지 않고 크게 묶어서 수렴동 계곡이라 부르는 사람이 더 많다. 또한 여기서 왼쪽 계곡을 따라 가면 가야동 계곡이다. 즉 수렴동 계곡과 가야동 계곡을 갈라놓는 능선을 용아능선, 일명 용아장성이라 한다.
사과를 한 개씩 깎아 먹고, 물도 마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 하늘을 보니 비올 것이라는 예보가 틀린 것 같다. 맑은 하늘에 간간히 구름이 노닐고 있다. 날씨가 우리를 도와주기를 빌며, 10:40 배낭을 짊어지고 봉정암 쪽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왼쪽으로는 용아장성이 펼쳐지고 있겠지만, 우리는 계곡의 밑바닥에서 기어가고 있는 형상이라 용의 이빨은커녕 잇몸조차도 구경할 수가 없다. 좀 더 올라 가면 용의 이빨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제부터는 좀 가파른 오르막이 연속될 것이다. 오른편으로 계곡물은 쉼 없이 자기 갈 길을 간다. 하얀 바위 위에 서서 갈 길을 가늠해 보지만, 계곡의 최하단에서 무엇인들 보이겠는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제 갈 길을 간다.
약간은 지루한 오름길에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마음의 위안을 준다. 점점 물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경사가 급해졌다는 얘기다. 약 한 시간쯤 지났을까, 쌍폭이다. 한쪽 폭포는 구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려면 철계단을 벗어나 아래 물가로 가야 한다. 점점 오르막이 힘들어 진다. 계곡에는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12시가 넘어서자 민영이가 점심 먹고 가자 한다. 깨끗한 장소를 물색해 보지만, 마땅치 않다. 그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바위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상을 펼친다. 식당 아줌마가 밥을 너무 많이 담은 것 같다. 김치와 고추와 깻잎 장아치, 황태찜, 그리고 김, 너무 맛있게 먹었다. 많다고 생각되었던 밥도 그냥 다 입 속으로 사라진다. 이 정도의 도시락이 오천원이라니 조금은 비싸다는 느낌이다. 물을 마시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본다. 수렴동에서 보았던 하늘과 사뭇 다르다. 시커멓게 내려 앉았다. 오늘 날씨가 우리의 바램을 져버리지 않기를 빌며 자리를 뜬다.
이제 가파른 오름을 계속하면 봉정암이다. 굉장히 가파른 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철계단이 새로 생겨서 그런지 예전처럼 힘들지 않는 것 같다. 허리가 90도로 구부러진 할머니와 그 일행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치지도 않고 잘도 오르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자바위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지난번 재중이와 81년 11월과 85년 여름에 왔을 때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없다. 배낭을 벗어 놓고,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나 20미터 가량을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해태모양 같기도 하고, 물개모양 같기도 한 바위가 하나 있다. 사자바위라 한다. 민영이는 사자 코를 잡고, 나는 사자 머리 앞에 서서 한 컷씩 사진을 추억 속에 남기고…
여기서 내려다 보는 수렴동 계곡, 그 무엇에 견줄 수 있으랴!! 갓 물들기 시작한 물감이 어떤 색으로 칠해질지 사뭇 궁금하다. 노랑, 빨강, 주황, 모두 엷은 색으로 물감을 뿌리고 있다. 계곡을 타고 오르는 바람이 모자를 날려 버릴 것 같다. 모자에 달린 목끈을 단단히 조이고 주변 사진을 몇 장 찍어 둔다. 계속되는 계곡 길에 조망이 없었던 터라 여기서 마음껏 즐겨본다.
다시 배낭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니 그 20미터 구간에서 바람이 전혀 딴판이다. 위와 아래, 그 강한 바람도 20미터 벽이 가로 막고 있으면 전혀 느낄 수도 없단 말인가? 자연의 신비함을 마음에 담아두고, 봉정암으로 오른다. 저 앞에 보이는 기와집이 봉정암이다. 바로 눈앞이건만 왜 이리도 멀기만 한 것인지…
1시쯤 돼서 봉정암에 도착한다. 곧바로 사리탑을 찾아 올라간다. 봉정암은 우리나라 5대 보궁의 하나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내 개인적으로 이곳 봉정암을 와 보고 싶었던 것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은 모두 들러 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다. 통도사, 상원사, 정암사, 법흥사에 이어 마지막으로 봉정암 사리탑 앞에서 합장하였다. 민영이도 거부감이 없어 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산을 다니다 보면, 5대 보궁 외에도 많은 적멸보궁이 있다고 하나, 그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5대 보궁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지난번 북한산 산행 때 삼천사도 보궁이라 하였고, 지리산의 법계사도 보궁이라 돼 있었다. 지난 81년, 85년 이곳에 왔을 때에는 보궁에 대한 개념조차 전혀 없었던 터라 사리탑으로 올라볼 생각조차 아니 했었다.
이곳 봉정암 뒤의 사리탑은 용아장성 산행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용아능의 끝점인 옥녀봉까지 용의 이빨이 들쑥날쑥, 우리 같은 조무라기들은 근접을 불허한다. 현재 휴식년제 적용구간으로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암릉산행을 할 수 있다. 사리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 둔다.
사리탑에서 내려와 법당에 들렀다. 삼배하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전화기에 13:24로 찍혀 있다), 법당을 빠져 나와 전화를 받으니 재봉선사다. 궁금했던 모양이다. 비는 온다고 했는데 안전산행을 하는 것인지, 고생은 하지 않는 것인지 등등. 아니면 함께 오고 싶었던 마음을 전하고 싶었겠지. 서울에는 비가 오고 있으니 조심하란다. 비와 구름이란 놈은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니…
아니나 달라, 비가 우두둑 소리를 낸다. 배낭커버 씌우고, 우의를 준비만 한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민영이가 절밥을 먹고 싶단다. 공양간에 가서 물어보니 오늘 공양은 국수였는데, 너무 늦었단다. 13:30이 넘은 시간이라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아예 비옷을 차려 입는다. 민영이는 백담사에서 준비한 비닐 옷을, 나는 작은 자형한테서 뺏어(?)온 두껍고 뻣뻣한 1세대 고어텍스 자켓을 차려 입고 배낭을 둘러매고 종무소 뒤로 난 산길을 올라간다.
여기서는 무척 가파르다. 소청, 중청을 들러 대청으로 갈 것이다. 바위는 온통 빗물을 뒤집어 썼다. 미끄러워 진행 속도가 더디다. 올라갈수록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휴식이 잦아진다. 소청산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잠시라도 앉을 자리가 없어 그냥 지나친다.
나이든 어른 한 분이 올라가지 말라 한다. 추워지고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여기서 쉬다가 내려가라 한다. 약주를 조금하신 것 같고, 얘기 길게 하면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아, 알았다고 하고는 우리는 우리의 갈 길로 간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우니 우리의 계획을 사수하고자, 적어도 중청산장까지는 가야 한다. 정 힘들어 진행이 어려우면, 중청산장에서 부벼대며 잠을 잘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고, 비도 이 정도로만 온다면 큰 걱정은 없을 것이라 판단한다.
계속되는 미끄러운 오르막, 민영이의 속도가 떨어진다. 나와의 거리가 좀 멀어진다. 길이 미끄러워 조심하느라 그렇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배낭커버를 씌울 때 스틱을 배낭에 매달기가 여의치 않아, 내가 계속 갖고 다니던 스틱을 민영이에게 준다. 곧 이어 소청봉이다. 넓고 완만한 봉우리로 돌과 흙이 뒤섞여 발 디디기가 예사롭지 않은 밋밋한 봉우리다. 중청, 대청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중청, 대청 방향을 조망해 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낮게 내려 앉아 있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 난 목을 축이며, 중청으로 향한다. 바위길이 미끄럽다. 오르락 내리락 약 30분을 갔을까, 오른쪽으로 난 길과 만난다. 오른쪽 길은 끝청-한계령삼거리-귀떼기청-대승령-안산으로 가는 서북능선 길이다. 중청봉 꼭대기에는 천문대(기상대)가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이 삼거리는 중청봉을 옆에 끼고 8부 능선으로 길이 통하게 돼있는 것이다.
중청봉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능선 안부에 중청 대피소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설악 산장’이라 하였으나, 언제인가 개보수하여 ‘중청 대피소’라 개칭하여 유일하게 설악산 관리공단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산장이다. 산장지기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예약이 없는 사람은 5시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우리는 그때면 이미 희운각에 당도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청을 들러 희운각까지 운행하기로 한다. 중청 산장엔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대고 있다. 침상을 열어두지 않으니 대기실 복도에 사람들이 꽉 차있다. 비를 피해 버너를 켤 공간이 없다.
올라올 때 한 베테랑 산꾼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민영이가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낸다. 들어가서 따끈한 커피를 끓인다. 물이 부족하여 민영이에게 매점에 가서 생수를 사오라고 부탁하고 나는 버너와 코펠을 준비한다. 좁은 공간에서 배낭 두개와 비옷 입은 두 남자가 하는 동작이 우스광스럽다. 민영이가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 지금 생수가 없어 팔지는 못하고, 물병을 가져오면 마시는 물을 주겠다고 한단다. 이 어려운 때에 물병을 가지고 다시 한번 걸음을 해야 한다. 민영아, 미안하다.
그 좁은 공간에서의 따끈한 커피 맛!! 재봉스님, 그 맛, 그 향기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시던 그 커피도 이런 곳에서는 그 맛과 향기가 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큰 돈 주고 배웠습니다. 베테랑 산꾼 아저씨께 감사 드리며, 육포 한 조각을 씹으며 전화 박스를 나온다.
날이 맑다면 빤히 보일 대청봉 오름길도 오늘은 어림없다. 30미터 앞이 보이질 않는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아니라, 끊임 없이 계속적으로 내리는 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미끄러운 바위길을 계속 오른다. 민영이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으나, 나는 그저 부족한 경험 탓이리라 생각하며 내 속도로 올라간다. 민영이의 체력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쉬엄쉬엄 오르막을 계속하고 앞을 보니 대청봉 표지석에서 한 팀이 사진을 찍고 있다. 드디어 다 왔다. 여기가 꼭대기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지만 카메라 꺼내기가 상그럽다. 어차피 비는 맞아야 하는 것이고, 적게 맞게 하려고 요리조리 요령을 부려 본다. 증명사진 각각 두 장씩을 찍어 둔다. 재봉스님 약 올려 주려고 전화기를 꺼내보지만 바테리가 방전되어 버렸다. 중청 산장으로 내려가서 바테리 교환하여 전화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중청 산장이다. 잠시 쉬며 재봉선사에게 전화한 시각이 15:35이다. 이제 우리도 비를 쫄딱 맞았다는 것과 오늘은 희운각 산장에서 잠잘 것이라고 알려준다. 역시 내리막에서 더욱 조심하라고 우리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다. 중청에서 희운각까지 한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소청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아는 길이라 막힘 없이 재촉한다. 민영이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민영이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으나 괜찮다고 한다. 일단 소청에 당도한다. 상의는 비옷을 입었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 옆으로 몰아치는 바람이 하의를 그냥 둘 리가 없다. 올라 갈 때에는 다리의 오른쪽 측면만 젖었었는데, 이제 내려오면서 양쪽 측면 모두가 젖어 버렸다. 민영이는 신발에도 물이 질퍽한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기온이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비를 맞은 것이 더 큰 이유가 되지 싶다.
이제 희운각으로 급한 내리막을 내려가야 한다. 봉정암에서 올라올 때와는 반대 방향이다. 몇 걸음 내려가는데, 민영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배낭을 내게 달라고 하여 앞으로 매고 나니, 두 개의 배낭을 앞뒤로 매게 되었다. 지난 지리산 산행 때와 같은 모습이다. 영신봉을 오르면서 세석으로 넘어 갈 때, 건녕이 배낭을 앞으로 맨 적이 있다. 지금 이곳에서도 다른 방법이 없다. 일단 희운각까지는 가야 한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난간을 붙잡고 옆 걸음으로 게걸음질 친다. 진행 속도가 느리다.
쉬엄쉬엄 쉬어가며 가지만, 미끄러운 바위길이 많아 민영이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양 무릎이 모두 뻣뻣해진 것 같이 동작이 매끄럽지 못하다. 깊이 패인 흙길을 내려갈 때에는 손이 시려 더욱 힘들기만 하다. 몇 번을 짧게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겨우 희운각으로 통하는 마지막 철 계단이 나온다. 너무 반갑다. 다리를 건너자 마자, 우선 산장 매점으로 간다. 앞뒤로 배낭을 맨 사람이 나타나자 의아해 하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할 일에 바쁘다. 저녁 시간이 다 돼가는지라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곳 희운각 산장은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자리를 배정한다. 이곳에는 유선전화도 없고, 휴대폰도 이곳에서는 터지지 않는다. 그러니 예약 시스템이 있을 리 없다. 산장 아가씨(나중에 보니 아줌마였다)에게 자리 배정을 의논하였지만, 늦게 도착한 우리는 정식으로 지어진 콘크리트 막사가 아닌 군용 텐트 막사를 배정 받는다. 추울 것 같아 이불도 1인당 3장을 신청하였다. 침상에 두 자리를 잡아 놓고, 우리도 식사 준비를 한다. 옷이 모두 흠뻑 젖어 있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양말을 벗어 던지고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는 먹을 것부터 챙긴다.
민영이는 다리가 불편하면서도, 내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내가 버너와 코펠을 준비하는 동안, 민영이는 멀지는 않지만 귀찮은 길을 물 뜨러 다녀 온다. 산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식단을 준비한다. 쌀로 밥하는 일은 번거로울 것 같아, 아예 햇반을 챙겨 왔다. 오늘 저녁은 햇반과 삼겹살이다. 어느덧 하늘에는 비는 멎어 있고 구름의 이동 속도가 빠르다. 이제 비는 그칠 모양이다.
큰 코펠에는 햇반을 익히고, 작은 코펠에는 미역국을 끓이기로 한다. 햇반을 익히는 동안, 그 옛날 70년대 말, 80년대 산행할 때를 생각해본다. 무겁고 덩치 큰 기름 버너를 갖고 다녔었다. 점화하려면 알코올로 예열도 해야 하고, 무거운 기름통과 조그만 알코올 통을 따로 갖고 다녀야만 했다. 점화하고 나면 연소하면서 나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런 번거로움이 이제는 없어졌다. 가스 버너 크기도 주먹 하나 정도다. 가스통을 들고 다녀야 하지만 연결하고 스위치만 누르면 자동 점화가 된다. 요즈음은 산행도 자동화 되어가는 느낌이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편리하게 하지만, 인간의 감성은 점점 메말라 가는 것 같다. 요즈음 산행에서 대개가 우리같이 인스턴트 식품이 주류이고, 찌개를 끓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안전하고 느낌이 있는 산행을 하고 싶다.
어느덧 햇반이 완성되고 미역국을 끓였다. 이제 먹으면 된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한 아저씨, 우리보다 먼저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는데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바람막이가 없어 물이 도무지 끓을 생각을 않고 있는 거다. 잠시 바람막이를 빌려 준다. 우리는 밥을 먹고 점심때 남겨온 백담사 식당의 밑반찬과 김치, 김 그리고 미역국, 천하의 일미다. 비 맞으며 힘들게 한 고생은 어느덧 잊어버렸다. 옆의 아저씨가 고맙다며 바람막이를 돌려 준다.
삼겹살을 구워 먹으려고 버너에 점화하는데 스위치가 고장이다.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다. 옆의 아저씨한테 라이터를 빌린다. 이 세상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게 되어 있나 보다. 미리 준비한 은박지를 구이판에 깔아놓고 준비한 삼겹살을 올려 놓는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노랑노랑 익어간다. 냄새도 우리를 유혹한다. 이때 빠질 수 없지!! 쇠주 한잔이 없을 리 없지. 이곳 산장에서는 소주도 오천원, 막걸리는 만원 한다는 발 없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작은 포장(100~150ml ??)의 소주를 2병 미리 준비했었다. 삼겹살을 김치에 싸서 한입 틀어 넣고 소주 한잔이란!!!!!! ㅋㅋㅋ~~~
입가심으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부러울 게 없다. 포만감에 취해 잠시 넋을 잃고 하늘을 쳐다본다. 아직 환하게 걷힌 하늘은 아니지만, 내일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 본다. 이것저것 설거지를 마치고, 이제 침상으로 올라가서 잠을 자두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온통 젖은 옷을 말릴 좋은 방법이 없다. 나는 바지와 티샤쓰 여분을 갖고 와서 다행이지만, 민영이는 방풍 상의 자켓만 갖고 온 모양이다. 일단 추위에 대비하여 갖고 있는 모든 옷을 입기로 한다.
우리 모두 상의는 젖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 나는 양말을 갈아 신고, 티샤쓰를 껴입고, 바지를 이불 속에서 갈아 입고, 준비를 마친다. 입고 있던 자켓은 이미 물기가 빠지고 완전히 말라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행동에 지장 없을 만큼 말라있다. 기능성 섬유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민영이는 갖고 온 샤쓰와 자켓을 모두 껴입는다. 양말이 없어 내가 갖고 온 여분을 민영이에게 주었다. 민영이는 바지가 완전히 마르지 않아 조금은 불편할 터였다. 이제 마른 장소가 확보되었으니 압박붕대를 민영이 양 무릎에 감았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야 할 텐데…
잠자리에 누워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너무 춥다. 갖고 온 옷을 다 입고 있으니 더 이상 입을 것은 없다. 3장의 이불 중에 한 장을 세로로 삼등분으로 접어서 바닥에 깔고, 나머지 이불 두 장을 덮기로 하였으나, 춥기는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이불, 요를 들춰내고 밑바닥에 은박매트를 깔았다. 그러니 한결 났다.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은박매트를 깔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이곳에서는 터지지 않아, 바테리 절약을 위해 아예 전화기를 꺼놓았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 감각이 무디어졌다. 도무지 몇 시인지???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7시30분이라 한다. 이 젊은이는 오늘 울산에서 출발하여 공룡을 타고 왔단다. 비를 맞으며 너무너무 고생했단다. 원래 예정은 서북능으로 갈 생각인데 몸이 지쳤으므로 내일 일어나보고 행로를 결정하겠단다.
아직 소등시간까지 한시간 반이나 남았다. 오늘 산행을 정리해본다. 비를 맞으며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그리고 찍을 배경도 없었다. 대청봉에서 조망하면서 단풍을 즐기려고 한 나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용의 이빨은 구경도 못했다. 작년에 재중이랑 왔을 때에는 아침 8시15분에 대청에 당도했었는데, 바람 때문에 오래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오늘은 바람은 없는 반면에 비와 안개가 나에게 그런 사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카메라와 전화기가 비에 젖었을 세라 휴지로 감싸주고 정리를 마감한다.
내일이 문제다. 민영이가 공룡을 탈 수 있을까? 예전 81년 11월, 재중이가 내 배낭을 매고 봉정암을 올라온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소청에서 배낭 두개를 지키며 기다리고, 재중이만 대청을 다녀 왔었다. 그때가 기억 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신발을 보니 속까지 완전히 젖어 있어 내일 아침 기분이 별로 일 것 같다. 살짝 나가서 휴지 5봉지와 라이터 한 개를 샀다. 한 봉지씩 신발 안에 넣어두면 수분이 빨리 건조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나머지 한 봉지는 설거지하는데 쓰면 된다.
늦은 시간에 9명의 무리가 텐트 막사에 등장한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자리가 비좁다느니, 옆으로 좀 옮겨달라느니, 한동안 어지러이 우왕좌왕하더니 장내 정리가 된 듯하다. 9명의 무리들은 이제야 나가서 저녁을 준비한다. 몇 사람은 잠이 들었는데 코까지 골아댄다. 추워서 잠을 재대로 이룰 수가 없다. 민영이는 코고는 분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다. 바로 옆에서 코를 골아대니 누군들 편하겠는가? 오늘도 잠을 설치게 생겼구나 싶다. 지난 여름 지리산 생각이 난다.
소등 시간이다. 약하기는 하지만 텐트 막사를 밝혀주던 형광등이 꺼졌다. 그래도 민영이는 영~ 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다. 나는 그래도 한시간씩 두어 차례 잔 것 같다. 새벽 4시 반에 깬 잠을 다시 이루기가 쉽지 않다.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데 마려운 것이 있다. 추워서 그런 느낌을 빨리 받나 보다.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하늘을 보니 컴컴한 하늘에 별들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지난번 지리산 뱀사골 산장에서도 그랬었다. 추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이튿날 (10/02, 토), 부지런한 사람들은 몇 사람 벌써 출발 준비에 바쁘다. 자는 사람은 계속 자고 있고, 저마다 삶의 모양이 참으로 다양하다. 생각 같아서는 민영이가 일어나 주면 좋겠다. 여기서 아침을 챙겨 먹고, 5시반 경에는 공룡으로 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완전치 못한 몸으로 잠도 재대로 자지 못한 상태로 무리일 거라 생각하며 그냥 기다린다. 6시쯤 되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난다.
아침을 준비한다. 어제 저녁에 의논하기로 오늘 아침은 라면을 먹기로 하였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라면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햇반 세 개를 준비한다. 밑반찬과 김치, 김이면 충분하다. 명태국이 온몸에 따뜻함을 전해준다. 맛있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한다. 배낭을 꾸리는데 젖은 바지와 양말을 처리하기가 고역이다. 물론 비닐에 싸서 배낭 맨 아래쪽에 처박아 넣었다. 민영이는 젖은 양말을 배낭에 매달고 간다. 준비 끝…
양폭 방향으로 출발이다. 무너미 고개에서 공룡능선과 길이 갈라진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자. 무너미 고개 약간 못 미쳐 전망바위에 섰다. 신선봉에서 시작되는 공룡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따스한 햇살이 전체 능선을 비추고 있는데 더 이상 맑을 수가 없다. 이 세상 먼지가 어제 비에 다 씻겨 내려갔나 보다. 사진을 몇 장 찍어 둔다.
무너미 고개에서 민영이에게 물었다, 공룡 갈 수 있겠는지? 못 가겠단다. 예상하고 있었던 답이라 망설임 없이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어쩌면 공룡 가겠다고 했다면 더 난감해 했을 것 같다. 나무로 설치되어 있는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다. 이쪽이 양폭 방향이다. 며칠을 머리에 맴돌던 공룡의 꿈은 여기서 접어야 한다. 공룡이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까. 내년을 기약하며…
민영이의 걸음이 더디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일이 별로 없다. 힘들면 배낭을 달라고 하는데 괜찮단다. 이제 시간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12시까지는 비선대에 당도할 것이다. 급한 내리막을 천천히 내려간다. 철 계단을 내려올 때 민영이가 더 힘들어 한다. 아예 뒷걸음질치는 게 더 편하단다.
천당폭이다. 각자 사진에 담아두고 갈 길을 간다. 간간히 쉬어 가며 천천히 내려간다. 철계단 따라 좀 더 내려가니 양폭이다. 철계단 위에서 보는 양폭 또한 신비롭다. 계단을 내려서서 옆으로 조금 들어가야 폭포수를 볼 수 있다. 곧 이어 양폭산장이다. 쉬면서 커피와 사과를 깎아 먹는다. 작년에 왔을 때에는 이곳 양폭에서 김밥을 먹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여유롭지는 못했다. 시간에 쫓기는 산행은 아니었지만, 교통체증을 염려하여 조금은 서둘렀던 기억이 난다.
‘계곡의 미’라면 이곳 천불동 계곡이 빠질 수가 없는 곳이다. 서두르지 않으니 이런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가 많아서 좋다. 아직 완성된 단풍은 아니지만 위에서 시작한 물감이 이곳 양폭 부근에도 살짝 뿌려져 있다. 예술적 감각이 무딘 나로서는 더 이상 형언할 언어가 없다. 초등학생 마냥, 그저 ‘좋다’는 말 밖에는…
다시 배낭을 꾸리고, 비선대로 향한다. 이제 제법 몸에서 열기가 난다. 점차 기온이 상승하고 있고, 몸의 움직임이 원활해지니까 입고 있던 상의가 부담스럽다. 나는 자켓을 벗어버리고 티셔쓰와 조끼만 입고, 민영이도 두터운 셔쓰와 자켓을 벗고 조끼 차림이다. 한결 시원하고 가뿐하다.
이제 가파른 내리막은 다 내려온 것 같다. 비교적 평탄한 내리막 길이다. 오련폭포를 지난다. 다섯의 물줄기가 연이어 와폭을 이루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에 담아두고 비선대를 향한다. 곧 이어 칠선 계곡 들머리에서 한 무리의 산행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칠선 계곡을 다녀갈 모양이다. 귀면암이 아직 멀었느냐고 물어보니 약30분 더 내려가라 한다.
귀면암, 귀신 얼굴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일진대 어디서 귀신의 형상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잠깐잠깐 쉬어가며, 주변 풍광에 감탄하며, 우리 갈 길을 간다. 아직 휴대전화가 불통이다. 비선대에 당도해야 통화가 될 모양이다.
비선대가 가까워지는 것 같다. 바위 길을 한참 가야 한다. 이제서야 통화가 된다. 10시50분이다. 집에 전화해도 아무도 없다. 마눌 휴대전화에도 통화해 보지만 받지 않는다. 민영이는 전화기를 켜더니 여기저기 통화하느라고 바쁘다. 창국이 하고 통화하더니 무슨 약속을 한다.
어느덧 비선대 도착이다. 11시 10분쯤 되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가장 수고를 많이 한 발도 씻어주고 신발 안쪽도 햇볕에 말린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다. 초콜렛을 한 개 씹어 먹고 소공원으로 출발이다. 여기서부터는 고속도로이니 만큼 큰 걱정할 일은 없다. 민영이도 스틱을 접어 내 배낭에 매단다. 비선대를 내려오는데 가게가 즐비하다. 막걸리 한 잔을 하고 싶지만 다음 가게에서 하기로 마음 먹고 유혹을 뿌리친다.
한 20분쯤 내려 왔을까, 다시 가게들이 모여 있다. 제일 끝 집으로 들어간다. 계곡 물가에 자리잡고, 좁쌀 막걸리 작은놈으로 한 사발하고 감자전을 주문한다. 설악산을 올 때마다 맛보는 감자전이지만, 오늘은 돌미나리 부침도 덤으로 내 준다.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며, 이번 산행을 정리해 본다. 목적한 공룡을 타진 못했지만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야말로 고속도로를 타고 소공원에 도착할 즈음, 휴대전화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가 들린다. 10:53에 보낸 문자인데 11:59에야 도달된다. 대학 같은 과 동기이자 고등학교 한해 후배인 김재동 군의 부친상 소식이다. 동창회 일을 맡아 수고하고 있는 장현삼 군이 문상하러 부산을 다녀올 것이라 한다. 현삼이에게 전화하여 오만원 부조해줄 것을 부탁하고 서울 가서 송금해주기로 한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설악산 골짜기에서도 전국을 커버할 수 있겠다 싶다.
드디어 신흥사 청동대불 앞을 지나, 소공원에 도착한다. 권금성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왔다 갔다 한다. 작년에 왔을 때에는 공사 중이었는데 보수 공사가 다 끝난 모양이다. 소공원에서 바라보는 설악산군의 모습은 대청부근에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직 푸른 색이 바뀔 기미가 별로 없다. 주변을 둘러본다. ‘장관이다!’ 하는 말밖에 달리 말이 없다. 웅장하다. 민영이는 오늘 아침 미뤄 놓았던 볼일들을 본다.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부탁하여 민영이와 둘이서 함께 소공원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아 둔다. 이번 산행에서 둘이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이로서 우리의 산행을 마감한다.
소공원을 나와서 온천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다. 일반 택시인데 검정색 그랜저XG다. 목우재를 넘어 편안하게 척산 온천에 당도하고, 아저씨에게 목욕 마치고 백담사까지 태워줄 것은 약속하고 2시간 후에 온천장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따뜻한 온천 물에 샤워를 하고, 민영이가 가져온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이게 아주 고급인 모양이다. 보통의 샴푸는 우유 빛깔인데 이것은 약간 노란 빛을 띄면서 투명하다. 탕 안에서 반신욕을 한다. 한 20분이 지났을까 온 몸에서 땀이 쏟아진다.
다시 몸을 헹구고 옷을 입는다. 한 시간 만에 목욕을 마쳤다. 민영이 무릎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좋겠다. 기사 아저씨한테 전화하니 곧바로 오겠다 한다. 다행이다. 삼만원을 주고 나의 애마가 있는 백담사로 간다. 꼬불꼬불 미시령 고개,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언제 완공되는지 모르겠다. 터널과 도로 확장이 완공되면 서울에서 속초까지 2시간 반이면 충분하겠다. 우리집에서 백담사까지 2시간 10분 소요되었는데, 구간구간 편도 1차선이 2차선으로 확장된다고 하니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리라.
백담사 입구, 나의 애마가 기다리고 있다. 식당 아줌마에게 고맙다는 인사하고, 다음 기회에 풍성한 식사를 하겠노라 약속하고 차를 움직인다. 이때가 2시가 넘었다. 설악동에서 먹은 감자전 때문인지 배고픈 줄을 모르겠다. 민영이도 그냥 가자고 한다. 가는 길에 기름도 넣었는데 민영이가 지불한다. 나중에 정산하기로 하고 계속 차를 몬다.
간간히 잠이 밀려온다. 민영이는 잠깐 눈을 붙인다. 너무 졸려 차를 식당으로 몰고 간다. 막국수 전문 식당인데, 차량이 많이 주차 돼있다. 맛이 괜찮겠구나 생각하고 막국수와 감자전을 하나 주문한다. 막국수 감자전 모두 양도 많고 맛도 좋다. 들기름으로 양념을 하나 보다. 고소한 내음이 참기름보다 부드럽다. 나만 그런가?
포만감을 느끼며 양평을 지나는데 이제 잠도 달아났다. 양수리가 다 돼가는지, 갑자기 재봉선사가 생각난다. 지난번 신림이와 사무실에 들렀을 때, 지나가는 길에 들르라고 하던 부탁의 말이 생각나서 전화를 한다. 봉정암으로 전화해 주며 안전을 빌어준 관심에 대한 보답(?)이다. 곧 당도할 것 같던 차는 약 20분 이상을 더 지나서야, 재봉선사 사무실에 도착한다. 우리가 전화하지 않았으면 재봉선사 홀로 예봉산을 가려던 참이었단다. 우리가 괜히 찾아 온 것인가??? 등산화 신발끈 묶고 있을 때 우리가 전화한 셈이었다. 커피 한잔 마시며 우리산행을 긴급 보고하고, ‘건강은 건강할 때 챙기자’는 우리 모두의 공감대를 확인한다.
우리 산행모임의 보다 활기찬 활동을 기대하며 각자의 집으로 출발한다.
<에필로그>
산행 떠나기 전, 챙겨주는 친구가 있어서 좋다. 권박사의 말대로 ‘차근차근 모두 챙겨 갔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무릎 보호대는 약국에서 찾아보니 너무 비쌌었다. 하나에 거금 삼만오천냥! 엄두가 안 난다. 지난 여름 지리 종주 때, 써버린 보호대를 미리 갖추어 놓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권박사한테 꾸중들을 건 들어야지 뭐…
공룡능선을 타지 못해 못내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똑 같은 상황이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안전보다 우선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룡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열심히 운동하여, 내년에 단체로 공룡 타러 갑시다!!!
민영아, 다리 괜찮나???
재봉스님, 담배 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