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답사(2024. 2. 20) 자료 안내
*부산 답사는 1차 ‘15.02. 09, 2차 ’20. 01.21, 3차 23.02.21 등 3차례나 탐사한 적이 있지만, 이번 답사지의 가덕도, 영도의 태종대, 부산 유엔기념공원 등은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유적지이다. 그리고 이번 안내자료는 이동 거리와 이동시간 및 답사소요시간까지 조사하여 안내함은 물론 답사지와 관련된 [꿀탭 자료]도 2편을 함께 안내하고자 한다. 1. 가덕도(加德島) 탐방 ㅡ대구 반월당→가덕도 : 이동거리 123km, 이동시간 110분, 답사시간 120분
가덕도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에 위치하여 부산과 거제도를 잇는 역사의 섬이다. 이곳의 관광명소로는 가덕대교, 거가대교, 가덕도등대, 가덕도척화비 등이 있는 부산 유일의 유인도다.
가덕도와 가덕신공항 조감도 가덕도는 예로부터 섬에서 더덕이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곳에 설치된 가덕대교는 거가대교 건설 사업과 함께 ‘03년에 착공하여 ’10년에 개통되었다.
부산 가덕대교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부산-거제와의 거리는 140km에서 60km로 단축되고 편리해졌다. 앞으로 가덕신공항이 설치되면 부산 및 경상남도로 연결되는 주요 통행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 거가대교 1)대항전망대 대항항(大項港)은 가덕도 남쪽 어촌마을의 항구다. 예전에는 섬이라 배를 타고 드나들었으나, 가덕대교가 개통되어 접근하기 쉬워졌다, 그러나 앞으로 가덕신공항이 개설되면 항구나 마을 전체가 사라질 곳이다, 대항전망대는 가덕도 천성에서 대항마을로 가는 중간에 있다.
대항항 전망대 전망대 정상에는 남기남 작곡가의 “내 고향은 가덕도” 노래비와 함께 박상호의 “대항전망대에서 바라본 낙조”라는 시비가 있다. ‘연대봉 산허리에 실안개 휘감기면 등댓불도 수줍어서 깜빡깜빡 웃고 동백꽃 아름다운 내 고향은 가덕도… 대항포 앞바다에 숭어 떼 춤을 추면 신이 난 어부들이 바쁘다’라는 가사와 넓은 바다를 향한 꿈과 희망이 비등하고 숭어들의 밀어와 갈대숲의 연가도 어우러진다. ‘나그네여 이토록 황홀한 유혹의 향연을 본 적이 있는가’라는 시구절이 대항전망대의 매력으로 느껴진다. 최근 가덕도 신국제공항에 대한 부산 시민의 관심을 대변하듯 바다 위로 떠 있는 비행기 모형과 붉은 동백꽃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에는 “가덕도에 오길 잘했다”라고 적혀 있다.
대항항 전망대의 포도존
이번 답사의 대항항 전망대를 위성지도로 검색해 보니, 승용차 주차공간은 있으나 대형버스의 주차 공간이 없는 걸 봐서 노폭이 그리 넓지 않은 것같아 버스통행의 불편이 다소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위성지도로 본 대항항 전망대 주차장
2)대항항(大項港 ) 포진지 동굴(砲陣地 洞窟) 가덕도 포진지 동굴은 자연동굴이 아니라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무려 40여년간 군사 요새를 구축하여 주둔하던 곳으로, 태평양전쟁 말기에 대항항 해안 절벽에 인공으로 동굴을 만들어서 포진지를 만든 곳이다. 그런데 이 동굴은 우리나라의 광산인부들이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져 애환이 많다. 가는 길은 해변의 낭떠러지로 가파르지만, 나무 덱 길로 만들어 계단도 그리 많지 않아 걷기에도 좋다. 그러나 5개 동굴을 모두 답사하려면 시간이 다소 요소될 것 같다.
관광지도로 본 가덕도 관광지 위성지도으로 본 가덕도 답사지
첫 번째 동굴로 들어가서는 세번 째 동굴까지 동굴 속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 동굴 길이는 짧지만 이렇게 조명도 해두고 안내문도 설치되어 이해하기에 편하다. 동굴을 따라 걷다 보면 두 번째 동굴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 포토존도 설치되어 있어 다들 사진을 많이 찍는다.
포진지 동굴로 가는 나무 덱 길 위성 지도로 살펴보면 모두 5개의 포진지 동굴이 있다. 그중 제1~제3 동굴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총 길이 175m이다. 제3 동굴은 소원동굴로 다른 사람들이 적은 소원을 전시한 곳이다. 이 제3 동굴 옆에서 숲 안쪽으로는 제4, 제5 동굴이 같이 있다.
대항항 포진지 제1 동굴
포진지 제2 동굴의 포도죤
대항항 포진지 동굴
3)가덕도등대, 가덕도등대는 조선 말기에 건설된 유인(有人) 등대 중 하나로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에 세워진 가덕도등대로 마산항의 개항 이래 일본인과 러시아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인 조계지(租界地)다. 등대가 설치됨으로 이곳을 드나드는 선박들이 늘어나고 특히 일본의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들어서면서 선박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조선 정부에서 1909년 가덕도에 등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가덕도 등대 가덕도등대는 동서양 건축양식이 함께 어우러진 모양을 하고 있다. 등탑(燈塔)은 고딕형으로 프랑스 등탑 형식과 비슷하고, 출입구에는 진입 계단의 폭에 맞게 목재를 이용한 튀어나온 경사 현관을 설치하였으며, 위의 현판에는 창덕궁 인정전에 있는 조선 황실의 상징인 오얏[李] 꽃문양이 새겨져 있는 등 한국, 일본, 유럽의 건축양식이 섞인 구조로 되어 있다.
위성지도로 본 가덕도등
특히 가덕도등대는 전국의 아름다운 등대 16경 중의 하나로 당초에 만들어진 등탑의 등대 신호 반경을 늘리고, 점점 증가하는 선박들의 안전을 위하여 2002년 높이 40m의 등탑을 최신형으로 만들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탑이 되었다. 2009년 12월에는 가덕도등대의 100주년 기념관을 설치하여 등대의 역사와 가덕도 역사를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군사 시설 보호 구역으로 되어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을 통하여 해군사령부의 사전 승낙을 받고 출입해야 한다. 지금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는 탐방하기 어려울 것같다. 그곳도 위성지도로 확대 검색해보니, 군사시설이라 진해 해군사령부의 사전 승인은 물론 대형버스로는 갈 수 없는 산길[林道]을 4km이상 가야하기에 상당한 무리가 따를 것으로 예상되어 답사에 많은 아쉬움이 남을 것같다.
대항항 방파제 등대(大項港 防波堤 燈臺)
특히 당시에 건립된 여러 곳의 등대가 대부분 원형이 크게 훼손된 데 비해 가덕도등대는 상당 부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돋보이는 문화재이다. 그리고 항구의 방파제 양쪽에 세워진 등대는 방파제 등대로 입출항하는 배들의 좌표가 된다.(붉은 등대는 입향하는 배에서 봤을 때 동쪽[오른쪽]이라 동대항항 방파제 등대이고, 흰 등대는 서쪽 방향이므로 서대항항 방파제 등대라 한다.) 2. 부산 태종대 탐방 ㅡ가덕도→태종대 : 이동거리 31km, 이동소요시간 약 35분, 답사소요시간 90분(태종대 다누비 열차 순환일주 운행시간 20분, 모자상, 영도등대, 태종사 등 3개소 탐방 각각 25분 등 총 75분) 태종대는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전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부터 오랫동안 군사 요충지로 사용되었던 관계로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제한됐다. 그러다가 1967년 건설교통부가 유원지로 고시하였고, 뒤이어 1969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태종대 순환도로는 총연장 4.3㎞로 1973년 완공하였다. 1972년 부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태종대유원지 조성계획에 의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였다. 2005년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제17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에는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정되었다.
태종대 위치도
'태종대(太宗臺)'라는 이름에 관한 내력은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무열왕이 활을 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았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태종이 일본을 토벌하기 위해서 태종대에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정확하게 검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태종대가 고대 사회부터 지역적으로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
『동래부지』(1740년)에 신라(新羅)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이곳에 와서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이곳 이름을 '태종대'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또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성리학자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태종이 대마도를 칠 때 태종대에서 머물렀다는 설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 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 : 임금이 거동하는 어가를 멈추고 머물거나 묵던 일)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은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외침에 대한 방어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또 조선의 태종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조선 제3대 태종(太宗)이 말년인 1419년에 큰 가뭄이 들자, 그해 5월에 태종대를 찾아와 비가 오기를 빌어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로부터 음력 5월 초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르게 됐다. 『동래부지』에서 밝힌 대로 가뭄이 닥치면 동래부사는 태종대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모두 태종대가 국가 안녕을 비는 기원의 성소(聖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태종대는 영도뿐만 아니라 부산을 대표하는 해안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명소가 함께 있는 천혜의 관광지이다. 이곳은 그야말로 난대에서 온대로 이어지는 다양한 식생을 지닌 울창한 숲과 해식 절벽, 반딧불이, 공룡 발자국, 보라매 서식지 등 풍부한 자연생태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명승지이다. 태종대는 이처럼 천혜의 자연생태자원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태종무열왕과 조선의 태종이 관계된 설화를 지닌 공간으로 역사문화의 이야기가 복합되어 명실공히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태종대 전망대 다누비 열차의 첫 기착지가 태종대 앞바다 멀리 수평선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순환도로 서남쪽 끝 부근의 전망대다. 1999. 8월 재건축된 이 건물은 총 526평(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전망대와 레스토랑, 간이매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망대가 건립된 자리는 본래 자살바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바위가 서 있던 곳으로 1970년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극심한 생활고나 실연 등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음으로써 사회문제를 불러일으키곤 했던 곳이다.
태종대 전망대 *태종대 영도등대 태종대 다누비 열차의 두 번째 기착지가 태종대의 영도등대다. 영도등대는 1906년 설치되어 지난 100여 년 동안 부산항의 길목에서 영롱한 불빛을 밝혀왔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로 2004년에 새로운 등대 시설물로 교체되어 부산지역의 해양관광 명소로 거듭났다. 등대의 구조는 35m 백색원형 콘크리트조이며, 백섬광 18초 3섬광의 등질을 가지고 있다. 새로 건립된 영도등대는 등대시설, 예술작품 전시실 그리고 자연사 박물과 등 3개동(연면적 7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대시설은 기존 등대와 같이 백색의 원형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높이가 35m이며 불빛은 40km까지 나아간다.
전시실은 시민들과 방문객을 위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자연사 박물관은 등대 바로 옆 신선바위 등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과 백악기 공룡서식지로 추측되는 이곳을 기념하는 공룡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영도등대는 등대와 바다, 천혜의 절경과 해양갤러리에서 미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가족단위나 연인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친숙한 해양문화공간으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태종대 영도등대
*태종대 태종사 태종대 다누비 열차의 세 번째 기착지인 태종사는 태종대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1976년에 건립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1983년 9월 스리랑카 한국 유학생 오병문의 소개로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1과와 보리수나무 2본을 기증받아 이곳에 봉안 및 생육하고 있으며, 태종사 경내에는 10여종 약 3,000그루의 수국이 군락을 지어 있으며, 개화기인 6월부터 9월까지 만개해 꽃들의 향연을 펼쳐지는 곳이다.
태종대 태종사
* 꿀팁 자료-1 원주의 태종대 조선 3대 태종의 태종대는 지금은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치악산 동쪽 산자락에 있으나, 조선 시대에 원주부에 속했던 땅이다. 그래서 지금도 원주의 태종대라고 한다. 고려 후기 때 정치의 문란함에 개탄하며 출사하지 않은 운곡 원천석(1330년 ~ ?) 선생은 고향인 원주로 낙향하여 치악산 동쪽의 변암 부근에 살았다.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세로 세상에 염증을 느껴 젊은 나이에 벼슬길을 포기하신 운곡 선생은 1365년 36세 되던 해에 아들을 잃었고, 다음 해인 1366년에는 부인과도 사별하고 남 후, 1372년에는 어머님의 상까지 당하니 삶의 무상함에 젖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싶어 낙향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13세 때 운곡 선생을 찾아와 글을 배웠다. 또 무척 존경하였다. 정도전도 또한 운곡 선생과는 과거시험 동기생으로 친구인 운곡을 찾아 원주를 다녀가실 정도로 몹시 가까운 사이였다. 한편 태종이 등극한 후, 운곡을 출사하도록 여러 번 종용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자 1419년 11월에 그리움에 젖어있던 스승을 찾아 이곳을 거동하게 되었으나, 운곡은 태종을 만나지 않고 몸을 피해 변암 쪽으로 가면서 물가에서 빨래하던 할머니에게 어떤 손님이 와서 내가 간 곳을 묻으면 선생이 간 반대편의 강물을 따라갔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운곡 선생이 태종을 피하신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태종이 등극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각종 의롭지 못한 일’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강원도 원주의 태종대 암각 얼마 후, 태종 일행이 당도하여 운곡이 간 곳을 묻자 그 할머니는 선생의 말대로 어느 곳의 바위를 가리키며 그쪽 물길로 갔다고 거짓 대답했다. 태종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다가 운곡을 기다리려 수레를 멈춘 곳이라는 뜻으로 ‘태종대(太宗臺)’ 또는 ‘주필대(駐蹕臺)’이라고 한다. ‘태종’을 강조하면 ‘태종대’가 되고, ‘임금의 수레를 멈춤’을 강조하면 ‘주필대’가 된다. 주(駐)는 ‘말이나 수레 따위가 머문다’는 뜻이고, 필(蹕)은 ‘왕의 수레, 즉 어가(御駕)’를 뜻이다. 그래서 주필은 ‘왕의 수레가 멈춘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臺)는 ‘돈대 대’자로 ‘왕인 태종의 수레가 멈춘 돈대’가 된다. 대(臺)란 불쑥 솟아오른 높은 언덕을 말한다.
원주 태종대 그러나 태종이 그쪽으로 향하여 길을 떠나고 난 후, 빨래하던 할머니는 비로소 그 손님이 임금이신 줄 알고 임금을 속인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빨래하던 물가의 바위에 올라가 이 물웅덩이에 몸을 던져 죽는다. 그래서 이 물웅덩이를 ‘노구소(老嫗沼)’ 또는 ‘구연((嫗淵)’이는데, 이는 우리말로 ‘할미소’라고도 한다.
노구소(老嫗沼)과 횡지암(橫指巖) 노구(老嫗)는 늙을 노(老)와 할머니 구(嫗)자를 합한 글자로 ‘늙은 할미, 즉 노파’라는 뜻이고, 소(沼)나 연(淵)은 ‘물이 깊이 고인 곳’ 곧 물웅덩이를 뜻한다. 따라서 노구소(老嫗沼)는 구연(嫗淵)과 마찬가지로 ‘늙은 할미의 물웅덩이’이다. 그러나 자세히 설명하면 ‘늙은 할머니가 몸을 던져 빠져 죽은 물웅덩이’라는 뜻이다. 또, 횡지암(橫指巖)은 할머니가 바위를 가리키며, 그쪽 물길로 갔다고 대답하였던 바위다. 여기서 횡(橫)은 ‘어긋날 횡, 또는 가로 횡’이라고 읽고, 지(指)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다’는 뜻이다. 운곡이 간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바위가 바로 횡지암이다.▣ 3. 부산국립해양박물관 탐방 ㅡ태종대→해양박물관 : 이동거리 3km, 이동시간 10분, 답사시간 60분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는 국립 박물관으로 세계 최초로 건립된 종합해양박물관으로 세상의 바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해양 역사·인물, 해양 문화, 해양 산업, 항해 선박, 해양 영토, 해양 과학 등의 해양과 관련된 각 분야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국민의 진취적인 해양 기상을 높이고, 해양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건립되어 완공과 동시에 해양 강국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국립해양박물관은 2006년 12월 국립해양박물관 조성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및 12월 국회 예산안 의결 때 2007년도 임대형 민간투자사업 사업으로 결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 2007년 5월 국립해양박물관 건립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어 9월에 타당성·적격성 조사 및 시설사업기본계획이 수립되었다. 2009년 12월 국립해양박물관 건립공사를 착공하여 2012년 4월에 준공하여 그해 7월에 개관하였다.
부산국제해양박물관
국립해양박물관은 다양한 분야의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나의 바다,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를 가지고 해양 역사·인물, 해양 문화, 해양 산업, 해양 선박, 해양 과학, 해양 영토, 해양 생물 등 해양과 관련된 여러 가지 분야를 전시관의 콘셉트에 포함시키고 있다.
해양 역사·인물 영역에는 ‘바다를 향한 도전과 지혜’라는 전시 주제로 역사 속 해양인들의 활동과 해양 의식의 변화 및 발전내용을 가지고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해양 문화 영역에는 ‘바다에서의 삶’이라는 전시 주제로 전통 어로와 해양 신앙을 테마로 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해양 산업 영역에는 ‘바다가 주는 경제력과 생산력’이라는 전시 주제로 전통적인 해양 산업부터 해양 산업의 현재와 미래상도 제시할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부산국제해양박물관 제3층 전시실
항해 선박 영역에는 ‘선조들의 기술력과 해양력’이라는 전시 주제로 전통적인 우리 배의 생김새, 교류 기록과 유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해양 과학 영역에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해양 탐사’라는 전시 주제로 해양 과학사와 해양 탐사 장비, 극지 연구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해양 영토 영역에는 ‘바다가 시사하는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전시 주제로 대한민국의 해양 영토 등을 제시하는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밖에도 해양 생물을 전시하기 위한 아쿠아랩, 기획 전시관, 해양 체험관, 4D상영관, 어린이 박물관이 마련되었다.국립해양박물관 내에 전시할 유물은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조사가 진행되었고, 언론 매체를 이용한 홍보를 통하여 기증받거나 구입하는 방법으로 확보하였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종합해양박물관이 항구 도시인 부산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부산 시민들을 비롯한 방문객으로 하여금 해양에 대한 접근을 돕고, 여가 공간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부산의 주요 문화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재한유엔기념공원(在韓UN紀念公園) 탐방 ㅡ유엔공원해양박물관→유엔공원 : 이동거리 13km, 이동시간 약 20분, 답사 시간 90분 ㅡ대구 귀가 부산 유엔기념공원→반월당 : 이동거리 111km, 이동시간 약 90분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번에 있는 유엔군 묘지이다. 1951년에 만들어졌으며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기념묘지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입구
이 공원은 유엔에서 직접 관리했던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이며 성지이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정문과 추모관이 있다. 정문은 한국의 전통적 조형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고, 추모관은 참전 16국의 의미를 담아 내부를 디자인하였으며, 외형은 다국적‧다종 교관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여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상징물로 그 의미가 크다. 1955년 11월 대한민국 국회가 토지를 영구히 기증하고, 성지로 지정할 것을 유엔에 건의하였으며, 1955년 12월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되었다. 1959년 11월 ‘유엔기념 묘지 설치 및 관리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고, 2021년 11월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의 면적은 14만 4146㎡(43,700여 평)로 크게 3개 구역인 상징 구역, 주묘역, 녹지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상징 구역은 6·25 전쟁 참전 21개국과 대한민국의 국기, 유엔기가 연중 게양되어 있으며, 각 국명은 개별적으로 청동비에 표시되어 있다.
주묘역은 대부분의 유해가 안장된 곳으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터키, 영국, 미국 등 7개국의 묘역이 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나 항공기 사고 등으로 유해를 찾지 못한 386명 용사들을 추모하는 영연방 위령탑은 1965년 5월 영국 정부가 건립하였으며, 묘역 낮은 동편에 있다. 1998년 11월 호주 조각가가 기증한 호주 기념비는 서편 호주 묘역에, 캐나다 한국 참전 기념사업회가 기증한 캐나다 기념 동상은 2001년 11월 캐나다 묘역에 설치되었다. 2007년에 프랑스 정부, 2010년에 영국 정부에 의해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녹지 지역은 재한유엔기념공원의 묘역을 정숙하고 경건하게 유지하기 위한 완충 지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녹지 지역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세워진 유엔군 위령탑,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및 제2 기념관, 무명용사의 길, 한국·태국 우정의 다리와 2개의 연못이 있다. 기념 건축물로는 1966년 11월 부산 시민이 기증한 정문을 비롯하여 추모관과 기념관이 있다. 기타 시설물로는 부산 유엔 묘지에 안장된 전사자 중 열일곱 살로 숨진 호주 병사 돈트(J PDaunt) 병사를 기리는 돈트 수로[Daunt 水路],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복합 건물 등이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기념탑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 유엔군 전사자 약 11,000여 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일부 국가에서 유해 대부분, 혹은 일부를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대한민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영국, 미국과 아울러 무명용사와 비전투원 등 2,300명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묘지
특히 이곳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가슴 아픈 역사에 대한 교훈과 함께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협력 정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역사적·상징적 의미가 큰 유적이다.
꿀팁 자료-2 부산 유엔 묘지와 정주영 회장 1952년 정주영(1917~2001) 회장에게 참으로 기발한 공사 제의가 들어왔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겨울이고 유엔군 묘지는 한창 조성 중이라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곳을 6ㆍ25 한국전에 참전한 각국 유엔 사절들이 내한해서 참배할 계획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8군 사령부는 정주영 회장이라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맡긴 것이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의를 받고 참배 날짜까지는 불과 한 주일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난감한 정주영 회장의 기지가 발휘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미군이 요구하는 것은 잔디가 아니다, 파란 풀이면 된다. 그렇다면 참배객이 둘러보는 동안 파란 풀만 눈에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이 정주영이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정 회장은 아이디어 경비를 포함해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했다. 돈이 문제가 아닌 미8군 측은 당장 계약을 체결하였고, 모든 것을 정 회장에게 모두 일임하였다. 계약을 맺자마자 정 회장은 트럭 30대를 끌어모아 낙동강 둔치의 보리밭으로 갔다.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하게 남아 있는 건 보리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자란 정 회장은 주변에 있는 보리밭의 보리를 몽땅 구매하여 흙과 함께 트럭으로 실어 날라 유엔군 묘지를 조성하였다. 미국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를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감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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