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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4-17(21)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복 2023. 8. 6
최근 트랜드에 미인의 조건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피부입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시대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이전에는 이목구비와 날씬한 몸이 미인의 조건이었는데, 이제는 ‘착한피부’가 미인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피부미인이라고 해도 미의 기준은 바뀌지 않습니다. 미스코리아에서 심사를 담당하였던 성형외과 의사 한분이 이런 말을 합디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눈과 귀, 코와 입이 제대로 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고 합니다. 잘 생겼다는 것은 얼굴에 균형이 매우 잘 맞는다는 것을 말 합니다”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맞게 자리 잡고 있고, 귀가 형태적으로 제 자리에 있으면 아름답고 멋진 얼굴이 됩니다. 팔 다리도 적당하게 비율을 맞추어야지 아름다운 몸매가 됩니다.
하지만 얼굴 생김이 제 자리에 자리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목구비가 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제 기능을 잘 발휘하고, 듣는 귀가 제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자입니다. 아무리 사슴처럼 크고 예쁜 눈이 있어도 잘 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네스북에는 세계 진기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구나무서서 오래 걷기”라는 것이 있더라구요. 왜 발로 걷지 물구나무서기로 걷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무슨 유익이 있지요? 제가 별나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데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신체마다 그 독특한 기능을 주셨는데, 그 기능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올바르게 잘 보고, 귀로 잘 이해해서 듣고, 입으로 올바르게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욥은 큰 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특히 보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고난을 다 겪은 후에 욥 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눈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은총을 받았다면, 사무엘 선지자는 듣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삼상 3:10절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를 때에 그 부르는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응답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는 크리스천이 매우 많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였는데, ‘우연히!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는 이상한 헛소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세상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분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헛더리 짚으면서 실수하는 것입니다.
몇 해전이지요. 북한군 병사 한 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한 적이 있습니다. 휴전선 넘어 귀순한 것이 특별한 점이 아니라, 이 북한군 병사가 삼엄한 군사분계선인 휴전선을 뚫고 한참이나 걸어와서 우리 측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는 막사까지 온 것입니다. 이 북한군 병사는 아군 막사에 와서 노크를 하면서 자신의 귀순 사실을 알렸습니다. 북한 군인이 아군 막사에 와서 노크를 할 때까지 우리 군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비아냥거리는 말로 <노크귀순>이라 조롱하는 말로 세간에 화자되었습니다. 막사 안에 병사들은 잠을 자도 분명히 철책을 지키는 보초병들도 있었을 것이고, 24시간 감시하는 cctv도 있었을 터인데, 노크할 때 알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나중에 수습을 위해 하는 보고를 들어 보니 cctv가 설치는 되어 있었지만 작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 아무리 수십억 들여 설치한 고성능 cctv가 있다고 하더라도, 작동하지 않고 멈추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철책선의 cctv는 24시간 365일 일 분 일 초도 멈추지 않고 눈과 귀의 역할을 하라고 설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철책선 경계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 귀순이니깐 다행이지, 북한 군인이 악한 마음을 먹고 철책을 넘어와서 무방비 상태에서 자고 있는 병사들의 숙소 안에 수류탄이라도 던졌다면, 이는 참극 중에 대 참극이 일어날 뻔 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눈과 귀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눈이 있으면 보아야 하고, 귀가 있으면 들어야 합니다.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는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런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인이라 말하면서, 특히 육적인 눈과 귀는 멀쩡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전혀 보지 못하고,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적인 기준으로 말하면, 복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니 매우 불행한 자들입니다.
신 29:4,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을 눈으로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게다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도 보고, 40년 동안 하나님이 챙겨 주시는 맛나를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과 귀를 주시지 않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눈과 귀가 밝고 영혼과 육체가 늘 건강하여 복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1. 눈은 보는 복이 있습니다.
16절,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말합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합니다. 내 눈이 보는 기능을 제대로 충실하게 행하고 있다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눈이 많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는 이런 형벌이 없지만, 옛날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을 뽑는 극악한 형벌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사물을 보지 못하고 분간하지 못하도록, 산 사람의 눈을 뽑았다는 것은 가장 큰 상처요, 굴욕이요, 패배입니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눈이 뽑혔다고 말하면, 누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나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천하장사 삼손입니다. 이방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립니다. 힘센 삼손에게는 굴욕적인 일입니다.
또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시드기야 왕의 눈앞에서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고 갑니다. 아무리 작은 나라 왕이라고 해도, 두 눈이 뽑혀서 끌려가는 시드기야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순간입니다.
가끔 노화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린 분들이 시력 회복을 위해 눈 수술을 한다는 말을 들어 봅니다. 오늘날처럼 과학과 의료기술이 매우 발달해 있는 시기이지만, 시력회복을 위한 눈 수술은 매우 어려운 수술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120만개의 섬유조직이 있는데,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120만개의 섬유조직이 눈에서 뇌까지 정확하게 순서를 맞게 붙여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120만개의 수많은 섬유조직이 하나하나 제 역할을 다하도록 올바르게 연결해야지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눈 수술이지만, 제대로 성공하면 앞으로 볼 수 있기에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안과를 찾아 라식이나 라섹 수술을 해서 시력을 좋아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 수술의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눈 수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안과의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육신의 눈이 침침하고 나쁘더라도, 내 영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 게을리 해서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과 마주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세상만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기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러 사도들과 달리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은 사도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다 순교하거나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사도 요한은 홀로 생존해서 밧모 섬에 유배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밧모 섬 귀양에서 환상 가운데서 하늘나라를 보고 기록합니다. 그 기록의 말씀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계 21: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요한은 하늘나라를 눈으로 보고 기록을 합니다. 요한이 쓴 계시록을 통하여 우리는 아직 하늘나라에 가보지 못했지만, 하늘나라를 본 것처럼 믿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복이 오늘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함께하는 축복이 되길 소망합니다. 시 123:1에는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고 합니다. 눈을 주께 향하면 주님이 보입니다. 눈을 돌리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보는 눈으로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기를 소망합니다.
중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땅속 어디에 금이 묻혀 있는지도 말고, 어디로 물길이 흐르는지도 바로 알아냅니다.
당시에 아주 악하고 욕심 많은 왕이 이 소문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을 회유하여 자신의 왕궁에 머물면서 모든 보화를 가지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왕의 욕심을 아는지라 왕의 명령에 따라주지 않습니다. 왕은 끙끙 앓아 눕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내 왕궁에 머물면서 내 창고에 보물이 많이 쌓이게 할꼬?”밤잠 자지 못하고 끙끙 거립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왕의 고민을 들은 왕비가 한 가지 행동을 합니다. 며칠 후 아침 대신들 회의에서 쟁반에 담겨져 있는 눈알 두 개가 올라옵니다. 왕이 깜짝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질문하자. 신하가 말합니다. “왕후마마의 명령으로 제가 그의 눈을 뽑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절대 어디로 가지 못하고, 누구를 부자 되게 하지 못합니다.”인간의 욕심은 이처럼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보는 눈이 있어야 하지만 눈만 있어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우리 몸에 있어야 하고, 몸이 우리의 생각과 일치해야 보입니다. 우리에게 보는 눈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올바로 보고, 올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2.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습니다.
16 하반절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면 답답함을 넘어 저주스러울 것입니다. 내가 정성스럽게 말하였는데, 상대방이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딴 짓을 하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냥 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귀가 중요하고, 들어도 엉터리로 듣지 말고 잘 들어야 하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등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들으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또 외칩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 담아 듣지 않고 깨우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고 홍수로 멸망시킬 것을 말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 천사의 말을 듣고 사위들에게 소돔을 피해 도망하라고 권하지만 사위들은 듣지 않습니다.
성경에 사위들의 모습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창 19:14,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냥 농담으로 여기고, 하찮은 잔소리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엉덩이에 고집과 아집의 뿔이 크게 솟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습니다.
요 5:24,“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고 주님께서 확고부동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듣는 귀는 복이 있습니다. 잘 듣는 귀로 인해 영생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설교 말씀을 잘 듣는 성도가 복 받는 성도입니다. 잘 들어야만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은 오프라 윈프리라고 합니다.<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그녀의 성공비법은 “경청(傾聽)”이라고 합니다. 경청이 무엇이에요? 경청은 “귀를 기울여 잘 듣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오프라는 허리를 구푸려 듣습니다. 그녀가 들을 때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혼모 흑인 오프라를 성공으로 이끈 비결입니다.
제가 질문하나 할깨요. 듣는 것이 어떻습니까? 쉬워요 어려워요? 잘 듣는 것은 매우 어려운 행동입니다. 특히 내가 꼬라지 보기 싫은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은 더 그렇습니다. 어떤 심리상담가나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이 하는 말을 귀 담아 듣는 것은 머리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 내는 고통과 같다”얼마나 듣기 힘들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 많은 것이 허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고, 상대방의 말을 다 받아 주는 것으로 비난을 받는 예는 동서고금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하기 보다는 잘 듣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욥 34:16에는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영혼의 귀를 기울이면 영혼의 소리가 들립니다. 들을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탈무드에는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말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배나 많아야 합니다. 말을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자가 복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8월 첫째 주일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의 귀를 가장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어떤 곤충의 소리일까요? 바로 매미입니다. 땅 속에서 춘하추동 계절이 7번 바뀌는 시간, 무려 7년을 버티다가 세상에 나옵니다. 세상에 나와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불과 20일 정도 짧게 살다가 죽습니다. 7년의 세월을 땅속에서 버티다가 살아서 세상에 나온 수컷은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맴맴 거리며 운다고 합니다. 목청이 터져라 울어야만 자신의 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짝인 암컷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다하고 죽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다 듣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우리 모두는 다 듣고 있는지 자신을 반문해 봅시다. 무더운 8월이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보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