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1장17절 이하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만찬의 전통을
칭찬하지 않는 이유는 성찬을 잘 못하면 분파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루터파와 칼빈파가 갈라진 원인도 성만찬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루터파가 주장한 화체설도 일리가 있고 칼빈의 기념설도 맞습니다.
다만 원리가 중요합니다. 제도가 문제가 아닌 겁니다.
화체설은 말씀을 따라 떡을 먹으므로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이며 기념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물질인 떡과 잔이 실제의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주장은 억지가 맞습니다.
만약 고린도교회처럼 성만찬으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면 그 성만찬이 해롭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의 첫째는 18절의 분당입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사실 교회의 편당은 불가피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옳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옳다 인정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지금 기독교는 진리를 놓고 편당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건 지극히 정상입니다.
19절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0절 이하는 그만 각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당이 되면 각개의 활동이 되어버리므로 유익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리는 겁니다. 기독교 안에서 하나가 되자 하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한 떡이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떡덩이가 되어 한 몸이 되었다면 하나된 걸 지키겠지요.
모래 같은 사람은 뭉쳐지지 않아서 문제이고 진흙은 줏대가 없어서 문제이긴 합니다.
21절 이하는 분당이 각각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당시의 성만찬의 개념은 식사였습니다. 요즘처럼 예식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뷔페입니다. 그러다보니 한 쪽은 흠뻑 취하고 다른 한 쪽은 굶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생긴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모임과 성만찬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식을 강조하다보면 내용과 중심이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성찬예식을 집례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데가 많습니다. 저렇게 해로운 의식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은데 하고 말입니다.
22절 성만찬을 각각 취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성만찬을 잘 못 행하므로 성령으로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됩니다.
그 다음에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므로 주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죄가 됩니다.
마15장처럼 전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밟아 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칭찬 받지 못하는 성만찬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민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랴’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바울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하라고 했다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편리한대로 주장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교회에 성만찬을 주신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묵상을 많이 해야 합니다.
23절 진정한 전통의 의미는 주께 받은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떡을 통해 자신의 몸을 주심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24절 ‘행하라’인가? ‘기념하라’인가?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도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성만찬의 참 의미는 성령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걸 생각나게 하는 겁니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분과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된 비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의식이 성만찬입니다.
따라서 루터와 칼빈이 직접 만나서 성만찬에 대한 대화를 했다면 간단했을 겁니다.
그들의 제자들은 화체설과 기념설의 해석 차이로 서로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말씀과 떡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영이 된 상태를 현장에서 받아들이는 실제와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한 몸으로 그 떡을 기념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을 이해하면 다른 복음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대신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접이며
새 언약입니다. 이것을 행하라 하심은 내가 주님 안에 영접을 받아 내가
주님 안에 내가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새 언약을 성취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몸을 성령 안에서 기념하면 행하는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제대로 행하면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근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은 자들이 그 떡을
먹고 눈만 껌벅거리고 있으니 이건 개구리 낯짝에 물 끼얹기 의식일 뿐입니다.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 그리고 주의 죽으심을 전하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출애굽을 한 1세대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불과 구름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2세대들이 법궤(말씀)를 매고
요단강을 건넌 다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세례(침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들에게만 스며들어 옵니다. 서서히 배어듭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한 섞음(교제, 코이노니아)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지 못하면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말이 빈말이 되고 맙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나를 먹으며 살리라(요6:57) 말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예수가 개인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새 언약이 이루어진 사실을 성령을 통해 배워 언제 어디서나 주의 몸과 피를
기념하므로 그와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된 실제적인 능력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첫댓글 아멘아멘~~
아멘!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