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김부전(법련화) 보살
한국 불교 재건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무주상 보시
‘금강경’ 설법 듣고 불교 귀의
국제극장 사장 역임한 재력가
효봉 스님 따르며 불사 매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이라.
마음이 머무는 곳에 애착과 번민이 생기고 고통이 싹튼다.
우리의 마음은 허공의 구름과 같아 머무는 바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니,
한낱 마음에 끄달려 집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자유로이 놓아버려라.
그 순간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스님의 일갈에 일순 눈앞이 번쩍했다.
몽둥이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민의 해답,
그 첫 번째 열쇠를 비로소 움켜쥔 기분이었다.
생애 처음 경험한 전율에 몸이 떨렸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시름이 깊었던 1941년 어느 날의 일이다.
금강산 정양사 법당의 한구석에서 앳된 얼굴의 21살 처자는 그렇게 불현듯 불교와 만났다.
스님의 설법은 그녀를 옭아매던 모든 속박을 산산이 깨부쉈고,
그 어떤 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참된 자유로움을 전했다.
그것은 곧 이 세상 모든 차별과 구분에서 비롯된 집착을 내려놓고
내 마음의 본래 면목을 찾아나서는 삶이었다.
온갖 사회적 잣대와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고통 받고 번민하며 살아왔던
지난 삶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일대의 순간이다.
이날 스님이 설한 것은 ‘금강경’의 한 구절인 ‘응무소주 이생기심’.
‘금강경’의 골수를 담은 핵심 구절로,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 스님 역시 이 구절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고 전해진다.
혜능 스님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 역시 이날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재정립하는 기준이 됐으며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불법에 귀의하는 계기가 됐다. 마치 운명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한순간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으로 불법의 진리에 맞닥뜨린
이 처자의 이름은 바로 김부전(1922~1973)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무너진 한국불교 위상 확립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희사했던 대표적인 청신녀로,
후대에는 본명보다 법명인 ‘법련화 보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법련화 보살은 불교 정화운동 당시 깊은 신심과 재보시로
스님들을 외호하며 당당히 한축을 담당했으며,
비구·대처 분쟁과 한국전쟁으로 몸살 앓았던
조계총림 송광사의 대규모 불사의 화주보살로 그 사격을 바로 세운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한평생 모은 마지막 재산마저
불교 포교를 위해 희사하는 등 남다른 신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송광사에 이 같은 그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공덕비문이 전해진다.
사찰 내 여성 재가불자의 공덕비는 극히 이례적인 일임을 감안하면,
법련화 보살이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력을 익히 짐작할 만하다.
공덕비에 따르면 법련화 보살은 조계사 불교정화기념회관 건립과
양주 흥국사 중창불사,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법당 건립과
대전 공군법당의 불상 조성, 조계총림 송광사 중창불사 등 크고 작은 불사에 재물을 보시했다.
또한 임종 전 종로구 사간동 자택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정리해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 건립을 발원하고
부전장학회와 송광사에 모두 희사하는 등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말 그대로 가진 모든 것을 한국불교에 바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교를 제외한 그 삶의 여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불교와 관련한 행적은 공덕비를 통해 대략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그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나마 알려진 사실은 생몰연도와 황해도 출신이라는 것,
해방 이후 국제극장과 동도산업사 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수완 좋은 재력가였다는 정도다.
1931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기사 중
‘11세 글씨 신동 김부전’이 그녀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황해도 출신에 출생연도가 그녀와 정확이 일치하며
쌍꺼플 없는 눈에 검은 곱슬머리 또한 꼭 닮았다.
혹 기사의 주인공이 그녀가 맞다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대신해 글씨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정양사에서 처음 불법을 만났던 1941년 그녀의 나이가 21세였으니,
아마도 그 삶은 더욱 혹독한 고난에 직면해 있지 않았을까.
민족의 암흑기, 과년한 나이의 미혼 여성에 가해졌을 온갖 제약들은
그녀에게 필시 무거운 짐이 되었으리라.
이후 1952년까지 10년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시기 그녀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피해 서울로 내려왔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52년 서울 도봉산 불교양로원 건립을 시작으로
그녀의 보시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덕비에 따르면 법련화 보살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2년,
재산을 희사해 불교양로원을 설립했으며
2년 뒤에는 경기도 의정부에 광명보육원을 건립한다.
양로원과 보육원은 각각 6~7년 운영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마도 그녀는 한국전쟁 이후 민족의 처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가장 의지할 곳 없는 약자층인 어린이와 노약자를 품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수라장이 된 전쟁 통에 고통 받는 노인들을 보며
그리운 부모님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추하건데 결혼은 하지 않았을 듯 싶다.
그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1952년 이후에도
남편이나 자식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그녀가 40년대 후반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이나
정치인 이재학의 내연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당시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정치 권력과 긴밀한 협조를 기반으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그 중에서도 여성인 법련화 보살이 유독 뛰어난 사업수완을 보였다는
사실로 인해 불거진 소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1950년대 종단 정화불사 한축
마야부인회 발족해 승단 외호
마지막 재산으로 법련사 건립
1957년 경 그녀는 특유의 사업 수완을 발휘해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국제극장을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
숱한 화제를 낳은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극장은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상당했다.
여성의 몸으로 서울 한 가운데 대규모 극장을 쥐락펴락했으니
그 무렵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많은 관심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 남겨진 행적들을 살펴볼 때
그녀가 재산이나 사업의 확장을 위해
남자 혹은 특정 권력에 기댔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녀는 불자답게 당당한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지 않았을까.
법련화 보살은 국제극장 사장으로 활동하던 시기 종단 정화불사를 비롯,
한국 불교 발전을 위한 공식적인 활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당대의 선승으로 알려졌던 효봉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에서 비롯된 행보다.
효봉 스님은 ‘판사 출신 선사’, ‘절구통 수좌’, ‘통합종단 초대종정’ 등으로 알려진
한국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그녀는 1954년 안국동 선학원에서 정화불사를 위해 상경한 효봉 스님에
깊이 감화돼 한평생 스승으로 따랐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법련화 보살은 효봉 스님의 철저한 수행 정신과 검박하고
청빈한 무소유 정신에 깊이 감동해,
이후 어디라도 스님이 법석에 오르는 곳이라면 거리를 마다 않고 뒤를 좇았으며
깊은 존경심으로 스님을 보필했다고 한다.
효봉 스님을 향한 그녀의 존경심이 얼마나 깊고 공고했는지는
당시 스님의 상좌였던 고은 시인의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은 시인은 이 소설에서 법련화 보살에 대해
“효봉 스님만 서울에 나타났다하면 당장 모든 일을 접어두고 달려오는 보살”,
“미모에 배짱을 갖춘 황해도 여자로 스님께
신신백화점의 맛있는 찹쌀떡을 항시 공양 올렸던 재력가”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법련화 보살은 효봉 스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으로
정화불사 당시 여성 재가불자의 한사람으로 불교 정화운동에 적극 나섰을 뿐 아니라
재가자들을 결집하고
스님들에게 쌀과 땔감을 공급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8년에는 선학원에 마야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조계종의 안정을 위해 승단을 외호하고 지원했으며,
그 일환으로 조계사 불교정화운동 기념회관 건립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이듬해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과 섭외부장을 역임하며
재가불자 조직화에 진력했을 뿐 아니라 태국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국제적인 역량 강화에도 적극 나섰다.
일생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의 장례식은 물론,
사리탑과 행적비 건립에 앞장섰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효봉 스님의 다비식 사진을 통해 법련화 보살이
다른 상좌 스님들과 함께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여성의 몸이지만 유발상좌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이후 그녀는 효봉 스님의 상좌 구산 스님과 지속적인 인연을 이어가며
한국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조계총림 송광사의 사격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적지 않은 재산을 희사했다.
송광사 수선사를 중건하고 대웅전에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하는가하면
송광사 후원단체인 불일회를 발기하는 등 송광사 중창불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가진 것을 보시해 한국불교 발전을 일궈내고자 했던 그녀이기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불교를 놓지 않았다.
1973년 11월, 그녀는 임종을 직감하고 전재산 일체를 정리해 송광사로 향한다.
종로 사간동의 자택은 송광사 서울 분원 포교당으로 설립토록 유언했다.
3000여평의 땅을 구입해 송광사에 헌납하고 남은 가산은 현금으로 정리해
학생들을 위한 ‘부전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홀연히 송광사에 입산했다.
방장 구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삭발염의한 그녀는
출가수행자로 하루를 보낸 이튿날 대중 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임종을 맞았다.
‘금강경’의 한 구절에 삶을 통째로 뒤흔든 불법을 만났고,
한평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무주상보시를 실천했으며,
단 한 순간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불법을 지키고 승단을 외호해 온 김법련화 보살.
평생토록 가진 모든 것을 나누었고 마지막 재산마저도
불교를 위해 남김없이 희사한 그녀의 삶이야말로
그 자체로 불법의 길을 걸어간 보살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공덕비에 남겨진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울린다.
“여기 남달리 신심이 견고하고 희사를 좋아하는 장한 청신녀가 있다.
인간사 무상하여 공수래 공수거라지만 청신녀 김법련화의 자취는
근래 보기 드문 보시바라밀의 본보기다.
이에 그 사연을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남긴다.”
2013. 07. 24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