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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의 역사와 삶
1. 입향과 문호의 형성
의성 김씨가 처음 안동에 입향하게 된 것은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낸 김거두金居斗가 안동의 풍산현으로 낙향하게 되면서이다. 전서공의 웃대 태권台權은 벼슬이 문예부좌사윤으로 공민왕 12년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鏞의 난에 여러 시종대신과 함께 희생되는데, 직후에 전서공이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어머니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의 증손녀로 그 집안이 풍산일대에 재지기반을 둔 여말 신진사대부였기 때문이다. 뒷날, 전서공의 아들 천洊은 나라의 운명이 기우는 것을 슬퍼하여 안동부 율세동 부근으로 이거하였다. 율세동의 옛 이름은 방적골인데 우거할 때에 “나라가 망하려 하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꼬(邦之革矣我安適歸)”라 한탄한 데서 붙여진 말이라 한다.
낙향 이후 토성이족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출사出仕를 위한 향촌 기반을 구축한 후 선초 세종조世宗朝부터는 上京從仕하기도 하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 때 다시 낙향하여 그 때까지 어느 정도 공고해진 기반 위에서 마침내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말 이래 조선전기의 사회상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는 여말의 무신의 발호와 불교의 타락, 부원세력附元勢力의 권귀화權貴化와 모점冒占 등의 여러 사회문제로 기인한 극도의 혼란을 새로운 이념과 사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 사회적 주체로 부상하였던 신흥사대부의 정권이다. 독서유생인 사士와 전현직 관료인 대부大夫가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이 되어 초기의 정권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여말의 신흥사대부가 왕조교체를 계기로 집권사대부와 재야사대부로 나뉘어지고, 15세기 이후의 왕위찬탈 및 정정 혼란의 와중에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분기되어 갔다. 내앞 김문의 선조 김거두와 아들 천이 안동부 풍산현과 부치 방적동에 우거하고, 세종 문종 조에 출사하여 청요직을 역임했던 김한계가 관직을 떠나 향촌에 은거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또 입향 이후 재지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배경에는 한편 사림세력의 성장 및 분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당시의 혼속과 재산상속제가 깊이 관계되어 있다. 여말까지는, 특히 지방 향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부자나 형제 사이에도 향리鄕吏와 관인官人이 공존하였고, 吏族도 의연히 고을의 한 지배세력으로서 과거나 군공을 통해 사환에 진출하였으니만큼 士族과 이족의 신분적 구별 자체가 희미하였다. 따라서 둘 사이에 빈번한 혼인관계가 맺어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 균분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낙향과 상경종사 모두가 처가 또는 외가를 통한 반연과 경제적 지원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특히 상경종사자가 낙향할 경우에는 토성인 안동권씨와의 인척관계 유무가 재지기반을 위해서 결정적이었다.
내앞 김씨가 안동에 입향하게 된 배경은 바로 안동김씨와 권씨가 처향 또는 처의 외향으로 이미 향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성 김문은 이후에도 안동권씨를 비롯한 재지명문사족들과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한다. 우선 김천의 아들 영명永命은 문종文宗의 장인 권전權專의 사위였고, 그의 장자 한계漢啓는 문과를 거쳐 승문원 등 청환淸宦에 재직하였는데 세조 찬탈 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게 된 내력도 문종왕후의 인척이며 단종과 이종 간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한계의 장자 만근萬謹이 안동부 속현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졌던 오계동吳季童의 사위가 되어 비로소 내앞에 정착하게 되고, 다시 아들 예범禮範을 거쳐 청계靑溪 김진金璡---극일克一 형제의 세대로 이어지면서 문호가 크게 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안동 권씨 뿐 아니라 진성이씨와도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은 김만근의 아우 충순위 만신萬慎의 장인이고, 이계양의 아들, 곧 퇴계의 바로 윗어른 이식李埴은 김한계의 아우인 한철漢哲의 사위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주촌周村(두루)의 참봉 이희안李希顔은 승지 김예범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계와 처남매부 간이며, 청계의 손자 운천雲川 김용金溶은 퇴계의 손서이기도 하다.
2. 청계 김진과 문호의 창달
흔히 선비의 고장으로서 안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내앞이라 하며, 그 이유는 안동을 대표할 만한 한 문헌의 집안이 십수 대, 오백여 년을 이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그 문헌의 집안을 말하면서 개창의 주인공인 청계 김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설명에 문헌이란 역사적 사실을 증험하는 데 필요한 문적과 현인을 뜻한다 하지 않았던가.
김진金璡은 관향이 의성, 자는 영중瑩中, 세칭 청계靑溪는 그 호이다. 연산군 6년 1500년 2월 내앞 본가에서 출생하여 1580년 영양 청기 흥림초사興林草舍에서 작고하니 향년 여든 하나였다. 의성김씨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 석을 득관 시조로 하고 의성군 석으로부터 9세를 전하여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를 지낸 용비가 의성군을 습봉함으로써 그를 중시조로 삼는다. 다시 삼대를 내려와 위에서 언급한 바, 12세 고려 문예부 좌사윤 태권台權이 흥왕사에서 김용金鏞의 난에 순국하는데 이 좌사윤공이 청계의 7대조이고 6대조인 전서공 거두居斗 때에 안동에 입향한다. 이후의 가계는 5대조 천洊, 고조高祖 영명永命 증조曾祖 한계漢溪 조부祖父 만근萬謹 아버지 예범禮範을 거쳐 청계공에 이르는데 임하에 처음 기틀을 잡은 이는 조부인 망계望溪 만근萬謹 공이다.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6세 때에 청송에 있던 종고모부 권간權幹에게서 수학하고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5대손 민세경閔世卿의 사위가 되었는데, 처숙 민세정閔世貞 공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바로 이 처숙을 종유하며 당대의 현사들과 사귐에 견문이 크게 진전되었다. 26세(152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각별한 친교를 맺고 각지에서 온 명사들과 사귀는 등 학업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 이후 곧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와 향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후대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일을 경영하는데 천전을 기반으로 인근의 임하 신덕 망천 추월 사빈 송석 선창 낙연까지 반변천 중상류를 개척하여 가원을 삼았으며 나아가 중년에는 멀리 강릉 땅의 금광평을 입안 개척하였고 영양의 청기를 개척하여 별업을 삼았다.
금광평은 현재의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어단리, 학산리 일대로서 당시 동서 십리, 남북 십리의 황무지였다. 청계는 이 땅을 입안 개척하여 후일 자손들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다. 155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영양 청기에 들어가 미개지를 농경지로 개척하고 영양에서는 처음으로 서당을 세워 강학과 향림교화에 정열을 기울였다. 백년 대계의 초석이 될 경제적 기반을 마련코자 한 일이거니와 이는 16세기 재지사족의 새로운 농장개척, 집단촌락 형성 등 문호확장 사업의 선구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청계공의 사업이력을 연조에 따라 간추려 메모해 본다.
23세(1522년) : 맏아들 극일 출생
26세 : 사마시 급제. 서울 태학에 유학.
29세-39세 : 둘째 수일守一, 셋째 명일明一, 맏딸 유실柳室, 넷째 성일誠一 출생.
41세(1540년) : 부친 승지공의 상을 당함.
42세 : 막내 아들 복일復一 출생
47세(1546년) : 맏아들 약봉 문과(갑과) 급제.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 상을 당함. 이때부터 속현하지 않고 학봉(8세) 아래 남악(5세)과 젖먹이 딸들까지 모두 8남매를 직접 보살펴 양육함.
48세 : 마을 건너 부암(현 백운정 아래)가에 독서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자제와 고을의 영재를 모아 교육함
58세(1557년) : 귀봉의 장자인 손자 용涌(운천雲川)이 출생함. 이 무렵 청기에 별업을 짓고 그 곳에 기거함.
65세(1564년) : 위로 약봉, 귀봉이 대 소과에 급제하고 약봉은 벼슬길에 나아감. 아래 삼형제가 모두 진사회시에 동방급제함.
67-69세 : 선유정仙遊亭을 지음. 학봉이 대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름. 이때쯤 귀봉에게 백운정을 짓게 함.
71세 : 둘째 귀봉, 셋째 운암과 막내 남악이 대과 응시를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운암의 병세 악화로 운암과 귀봉은 귀향하고 막내 남악만이 대과에 응시, 등제함. 귀향길에 운암은 용인 금량역 부근에서 끝내 요몰함.
73세 : 화공에게 진영을 그리게 하고 선유정 남쪽 벽에 걸게 함.
77세(1576년) : 오토산 입석 발문을 짓고 묘역을 수축함.
78세 : 1570년대 초반에 영양사림에 통지하고 영해부사 양사기공의 협력을 얻어 건립을 추진하였던 영산서원이 이 해에 완성됨.
80세(1579년) : 팔순을 맞아 육남매와 대소가 친척들이 청기에 모임. 이 무렵 대과에 오른 세 아들, 사위 이봉춘李逢春 등의 네 문관이 영산서원의 향회에 참석함.
80세(1580년) : 윤사월 신유, 청기 우사에서 돌아감. ‘나이 여든이 넘었으니 천수를 누렸다. 하늘이 내게 내린 복이 이처럼 많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며 태연히 임종함.
대강의 이력에서도 자세히 보이듯, 청계의 평생은 자손의 교도와 향리의 흥학양속으로 점철되었다. 시례詩禮를 자손의 장래를 위한 계책으로 삼아, 차례로 도산문하陶山門下에 집지執贄케 한 일이며,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덕목을 강조하여 제사를 성심으로 받들 것을 유훈으로 남긴 일, 친척인아親戚姻婭 간의 돈목敦睦을 몸소 실행하여, 재산의 분배에서 문권을 남기지 않아도 원망이 없도록 처사한 일이나, 멀고 가까운 친척과 이웃 사이에 한결같이 후박厚薄이 없도록 대우한 일, 고아가 된 외손이나 가난한 생질들을 거두어 자애로 육성하고 안돈시킨 일 등은 모두가 당장은 문호의 기풍을 두터이 하는 일이면서 결국은 향리의 습속을 두텁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중년부터 고향의 부암에 서당을 열어 마을 자제들을 훈도하고 만년까지도 그제껏 무무한 해읍의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영양英陽(당시는 영해寧海의 속현이었다)에 영산서당英山書堂을 발기하여 글 읽는 풍습을 이끌어내고 수많은 사류를 성립시킨 일들도 이러한 일의 연장에서 가능하였다.
항상 강조하였던 바, ‘인신된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하다가 명예롭게 죽을지언정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신명을 보전하여 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군자로서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살아남는다면 나는 오히려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는 말은 세전世傳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어 넷째 자제 학봉의 구국활동으로 구체화되었을 뿐 아니라 한말 이후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의 역사적 삶을 규정하는 제일의적 규범이 되었다.
청계와 그 다섯 자제의 유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의 서문에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하늘이 인재를 냄이 잦지 않아서 한 대를 걸러서 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몇 대를 지나 한 사람을 내기도 하였다. 그 부자 형제가 발굽을 잇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일은 수백 대에 겨우 한 둘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중략--- 우리 부자께서 언젠가 자천子賤(공자의 제자)을 두고 말씀하기를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품덕을 배웠겠는가’라고 하였거니와 이 말을 해설한 이는 ‘다른 사람의 선행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부형과 사우에 근본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지극히 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청계선생이 아버지로서 경사를 길러 음덕을 쌓는 일을 앞에서 하셨고 퇴계선생이 스승으로서 재덕을 이루고 창달하는 일을 나중에 해주셨으니 비록 오형제 분의 높은 자질과 품성은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훈도와 점염의 공은 부모와 스승의 도움에 바탕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청계와 그 다섯 자제가 대소과에 올라 한 가문의 문호를 일거에 크게 열어놓은 내력을 칭상한 말일 것이다.
3. 자연과 문화
1) 백운정과 내앞의 산수
정자의 이름 ‘백운’은 당나라 초기의 현신 적인걸狄仁傑의 ‘등고산 망백운 사친재기하登高山 望白雲 思親在其下(높은 산 올라가 흰 구름 바라보니, 그리운 부모님 그 아래 계시다)’라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마루에 오르면 종택과 내앞 아래 웃동네가 한 눈에 보이며 서북편으로 개호송 너머 비리실(비리곡)에 계신 승지 예범禮範(청계공의 웃대)공의 산소가 보인다. 적인걸의 시의詩意가 꼭 맞아떨어지는 정명亭名이다.
정명 편액의 글씨는 미수眉壽 허목許穆이 썼다. 미수는 퇴계학맥의 한 갈래를 한강寒岡 정구鄭逑로부터 전수하여 성호星湖 이익李瀷에 이음으로써 근기학파近畿學派의 선구가 된 바로 그 어른이다.
헌함을 좌우의 주사로 들어가는 중문과 마루 동편에 각각 게시된 조양문朝陽門 이요문二樂門의 두 현판은 퇴계의 필적이다. 조양은 ‘봉명조양鳳鳴朝陽’의 준말로 시경詩經 권아卷阿의 시구에서 취의한 것인데, ‘어진 인재가 언젠가 때를 만나 일어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요는 <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의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의 두 ‘요자樂字’를 가져다 쓴 것이다. 산수를 좋아하여 늘 일정하며 쉬지 않는 그 지기를 배우라는 뜻이다.
정자 내에는 역대 문내외 어른의 창수시가 무수한데 게판된 시는 청계의 원운源韻과 약봉 귀봉 학봉 운천 표은의 시판과 동악 이안눌 제공의 시편이다.
청계의 원운은 이러하다.
절벽을 깎아 정자 세운 푸른 산머리, 鑿壁開亭翠巘頭
강산도 명미하다 사람 눈길 씻어 내네. 江山明媚拂人眸
한낮의 맑은 물에는 물고기 무늬 얼비치고 日臨鏡面魚紋動
구름 걷힌 하늘 가운데 기러기 떼 날아가네 雲掃天心雁字稠
고을 원님 노닐 곳으로 일찍부터 알려지니 百里遊歌曾物色
정자 부근 풀꽃들도 아름다운 덕을 머금었다. 一區花草亦光休
술동이 앞 가없는 풍류 좋은 줄 알거니와 知有樽前無窮樂
자손들이 유령劉伶처럼 취할까봐 걱정일세 祗恐兒孫醉似劉
영가지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임하현의 북쪽 이리, 부암연 위에 있다. 증판서 김진 공이 지은 것을 아들 수일이 옛 제도에 더하여 개축한 것이다. 김진의 시는 이러하다. 鑿壁開亭翠巘頭 依然風景集雙眸 日臨鏡面魚紋動 風掃天心鴈字稠 百里遊歌曾勿色 一區花草亦光休 江山合是棲身地 祗恐兒孫醉似劉
보다시피 수련의 대구와 함련의 기구, 미련의 기구가 게판된 내용과 약간의 출입이 있다. 용만龍巒이 처음 백운정 관련 기사를 등재할 때 익숙한 곳에 대하여는 송영하던 것을 기억하여 게재하였을 것이다. 항용 그렇듯이 기억은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이 오차가 1791년에 청성서원에서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와 원장 귀와龜窩 김굉金굉(土변의 宏)의 주도 아래 교정이 진행될 때나, 나중 그로부터 다시 백이십여 년이 지나서 간행될 때도 바로 잡히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김굉은 주지하다시피 청계의 방손이며, 더구나 이 때 교정의 도감은 바로 청계공의 7대손 우고雨皐 김도행金道行이었고 일기유사나 정서유사가 모두 문내 자질들이었다 (우고는 바로 갈암의 신원으로 유명한 홍문관 교리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질자이며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의 종제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영가지의 간행경과와 청계공 제백운정 원운이 실린 연방세고의 간행시기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이때 연방세고와 표은문집은 바로 우고와 포산匏山 김용보金龍普(운암의 8세 주손)의 편차에 의해 공간되어 있었으니 연방세고가 대산 이상정의 서문을 달아 간행된 것은 1785년이었다. 육년 전이다.
지금 판각 영인되어 유통되는 영가지는 이 때의 교정작업을 거쳐 거의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899년에 간행된 것이다. 이 간행작업 때도 실무를 담당한 김시락, 김대락, 김도화 등의 인물은 모두 청계의 본손이거나 방손이었다. 때문에 당시에 백운정 기사의 출입이 무지의 소치이거나 무관심의 결과일 가능성은 극히 적다. 따라서 아무래도 선현의 수적에 다소의 와오訛誤가 발견된 경우라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가르침에 따라 함부로 산삭하지 않는 당시의 풍토 때문이었으리라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재 게판된 시의 여러 주인공들 중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은 문내 본손이나 잦은 혼반으로 맺어진 연비간도 아니며 더구나 인근 지역에서 교유가 잦을 수 없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동악은 선초 해동강서파로 황진黃陳(송대의 문호 황정견과 진사도)을 배웠으나 답습의 흔적이 없이 완연히 자성일가하였다는 세평을 얻었던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증손이며 고문사대가로 유명한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재종숙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함께 선후를 다툴 만큼 당대의 천재로 유명한 시인이다.
동악의 시는 이러하다.
임하에서 일찍이 옛 나루 들머리 지나쳤는데 臨河曾過古津頭
오늘에야 병조兵曺영감을 뵙고 다시 눈을 닦네 今對兵曺更刮眸
정자가 오랜 가문을 좇아 내려오는데 樹石摠從家世遠
풍월연파 노래한 시편도 많아라 風煙偏入品題稠
백운이라 편액한 정자에 공이 장차 떠나려하니 白雲有扁公將去
벼슬살이 무심한 나도 따라 쉬고 싶네 朱紱無心我欲休
어찌하면 이웃하여 이로二老 될 수 있을까 安得卜隣成二老
삼은이 못되면 주류朱劉라도 좋겠네 未容三隱數朱劉
백운정에 게판된 이 시는 동악이 영해부사로 재임할 때 안동의 명승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계의 원운에 차운한 것이다.
동시대에 문명을 떨쳤던 그의 재종질 택당 이식은 선대로부터 훈구벌열이었으며 인맥이나 친소관계로 본다면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과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 자신은 조정에서의 진퇴를 엄정히 하는 등 당론을 애써 멀리하고 중립을 지킨 이로 이름났다.
다음은 택당澤堂의 글 해사록발海槎錄跋이다.
왜란이 처음 일어날 조짐을 보일 당시 우리 조야 또한 의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우리 쪽에서 사신을 보낸 것은 우선 저들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저들의 형세를 엿보기 위함이었지 서로를 진실로 믿고 교분을 두텁게 하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저들이 바야흐로 업신여기고 한결같이 사납게 대하며 온갖 행태로 날뜀에 동행한 여러 사람들이 겁에 질려 지조가 흔들리자 저들은 점점 더 우리를 깔보았다. 선생이 일개 부사副使로서 그 사이에 꿋꿋하고 결단성 있게 대처하여 예로써 자신을 절제하고 꺾이지 않자, 오히려 저들이 두렵게 여기고 넋을 잃었다. 저들 스스로 자기들의 종을 죽여 사죄함을 보이는 데까지 이르니 당시 행중行衆은 오직 선생만을 의지하였다.
사행을 마치고 복명할 때에 동행한 사신들은 저들에게 유약하고 나태하게 대처하다가 봉욕한 사실을 덮어 감추기 위해 적정의 급박함을 장황히 늘어놓았다. 선생은 그와 더불어 논란하다가 말이 좀 지나쳐 드디어 빌미를 잡힌 것이니, 요컨대 적의 실정에 밝지 못한 조정이 애당초 선생의 말씀 때문에 방비를 철수하고 도적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이상 그 형세가 기울고 사정이 긴박하여 미처 조처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선생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우리의 좋은 품성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의 풍성과 교화를 사모하여 다시는 지난날처럼 함부로 날뛰거나 능멸하지 못하였고, 그 이후 우리 사신들은 모두 선생의 행적을 표준삼게 되니 비록 인품이 혹 선생에게는 미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국명國命을 욕되게 하는 데에 이르지 않은 것은 한결같이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선생께서 ‘한 나라는 한 사람으로써 중重하게 되고, 한 사람은 말 한 마디로써 중하게 된다’고 하신 말씀은 더욱 믿을 만하다. 아아, 군자는 정도에 거하면서 그 의리를 바르게 할 뿐이다.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미리 예측해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멀고 오랜 뒤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 어찌 한번의 계교로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후략----
당시 서인 집정의 조정에서 선조실록 개수 시에 학봉의 일본 사행시 행적과 녹훈이 걸맞지 않는다고 시비하자, 그 자신, 당론을 떠나 실정을 그대로 등재하여야 한다는 주장 아래 선왕시의 녹훈이 마땅하다는 조의를 정하는 데 앞장 선 바 있다. 이 사실과 함께 동악의 백운정 방문과 제영은 덕수 이문이 안동의 여러 문중, 특히 내앞과 시사를 보는 관점을 통하고 있지 않았나 짐작케 한다.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은 청계 김진의 장자로 특히 시에 뛰어 나, 퇴계 문하의 초기 제자들이 첫손으로 꼽았다. 영가지에 실린 시편만도 20여 수인데, 영가지의 시 편편이 해당 산수를 읊은 것으로 당시까지의 절창을 엄선한 것임을 감안할 때, 당대 사류들의 평가가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제백운정題白雲亭은 이러하다.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吾年過五十
고을을 네 번이나 지냈네 四佩左魚章
게다가 아버님 오래 사시고 況復父兮壽
인하여 아우들까지 건강함에랴 因兼季也强
솔바람은 잠자리에 부채질 돕고 松風供扇枕
흐르는 강물이 술잔을 권한다 江水助添觴
이제껏 얻은 바가 적지 않으니 所得誠非淺
한 곳에 머무름을 탓하지 말게 休言滯一鄕
온 집안 이끌고 피서를 와서 全家來避暑
날이면 날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았네 日日坐松簷
산비가 그쳤다가 다시 내리고 山雨止還作
물결은 줄었다가 다시 불어나 江波減復添
늙은 아내는 갈옷 마련에 공을 들이고 老妻工製葛
어린 딸은 제법 어구를 엮을 줄 안다 幼女解鉤簾
시원한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어오니 萬里天風至
맑고도 한가함을 나 홀로 겸하였네 淸閒我獨兼
오랜 가뭄이 오랜 장마 되니 恒陽變恒雨
높은 곳 정자도 어둡고 침침하다 高閣亦昏霪
작약꽃 이파리가 온통 젖으니 花藥紅全濕
거문고와 책들도 반나마 곰팡이라 琴書綠半沈
물 목이 불어나 건너기 어렵고 濟盈難揭厲
길마저 끊어져 찾는 사람 드문데 路絶寡參尋
홀로 모랫벌의 목 긴 황새만 獨有沙頭鸛
날거니 울거니 잘난 체 하네 飛鳴得意深
시렁에 공문서 던져두고서 熊軒抛簿牒
소나무 난간에 의관을 말리자니 松檻曬衣冠
어지럽던 정신이 비로소 깨이고 瞑眩酲初折
깊던 근심과 걱정 모두 사라지네 幽憂病盡刪
아잇적 낚시하던 앞 강물과 釣魚童子水
다 자라 약초 캐던 뒷 산이 採藥丈人山
저절로 내 분수에 편안하리니 自可安吾分
제관에 들어가기 생각 마세나 休思入帝關
2) 임하구곡臨河九曲과 선유정
임하구곡이란 임하의 백운정 상류를 거슬러 도연陶淵의 선유정仙遊亭에 이르기까지의 강산에 서리었던 명승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름난 경치에는 그 곳을 사랑하여 마음에 담거나 그 곳을 닮으려 한 사람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옛사람의 별호에 무슨 산山, 봉峯, 대臺, 정亭, 주洲, 애涯, 천川, 탄灘, 호湖 등, 승지勝地의 이름을 따른 것이 많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구곡이라는 명칭은 대개 주자朱子가 만년의 강학지 무이정사武夷精舍 일대의 절승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명명하고 구곡가를 지어 자신의 산수를 통한 수양의 지취를 읊은 데서 보편화 되었다.
이곳 임하 구곡 일대에는 의성김씨 일문의 고적이 많이 흩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위아래 처음과 끝은 단연 백운정과 선유정이며 모두 청계 김진의 유촉이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은 백운정 중수기에서
“임하에 아홉 구비의 승경이 있는데 백운정은 그 중 하나이다. 내앞 큰 마을과 강 하나 사이로 겨우 수백 보 거리이니 여염의 연기나 불빛이 맞닿고 사람의 말소리가 가까이 들릴 듯하다. 세속의 경계와 멀지 않아 그리 기이할 게 없을 듯하나 막상 정자에 올라 굽어보면 맑은 물 세찬 여울이 아래 위를 비쳐 두르고, 긴 모래톱과 갯벌이 굽이치며, 너른 임야와 줄지은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 대개 강호의 절승과 산림의 풍치가 구비된 곳으로 임하 구곡 가운데 선유정의 기이한 경치만이 이곳과 견줄 만할 뿐, 나머지는 모두 이에 못 미친다. ------ 서書에 긍당긍구肯堂肯構를 일컬었는데 그 전傳에서는 선계선술善繼善述을 기렸다. 선조가 물려주신 대관 궁실을 온전히 전하여 기울거나 상하지 않게 하는 일이 또한 긍구계술堂構繼述의 하나이니 이번 중수는 진실로 아름다워 기강 삼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선세의 업적 중 여러 대 승계되어 후예에 교훈될 일이 이보다 큰 일이 있으니 우리 자손이 더욱 두렵게 여겨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문호의 쇠퇴가 심함이여! 시서를 도타이하고 효우돈목을 강론하여 집안 대대로 물려온 풍교를 실추하지 않고 다시 일으키려 하는 자들이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는가?”
라 하여 백운정이 선유정과 함께 임하구곡의 으뜸이 됨을 말하고 이 속에 노니는 후예들이 선대의 도덕 기풍을 이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은 청계의 증손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가져온 국치 후,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자처, 도연陶淵의 와룡초당臥龍草堂에 복거하면서 세사를 끊고 도학에 잠심한 사람이다. 나중에 사헌부 집의의 증직이 내렸다. 도연에 숭정처사 유허비가 있어 선유정 지척의 또 다른 명승이 되었다. 다음은 그의 시 한거잡영閑居雜詠 네 수이다.
작은 갯마을에 봄비 그치니 小村春雨歇
먼 산 봉우리에 석양이 붉었네 遠峀夕陽紅
버들 솜은 방초에 나부끼고 柳絮飄芳草
송화가루는 미풍에 흩어지는데 松花落細風
산그늘 속에서 꾀꼬리 울고 鸎歌山影裏
여울물 소리 속에 백로가 섰네 鷺立水聲中
갈대 기슭 너머엔 고기잡이 노래소리 漁唱隔蘆岸
외로운 배 하나 어옹은 어디 갔나 孤舟何處翁
시흥 이는 바람에 긴 둑에 나가 乘興出長堤
소요음영 하다보니 해가 기우네 逍遙日欲西
붉은 꽃을 찾자니 원근이 다 붉고 尋花紅遠近
푸른 숲에 쉬자니 위아래가 다 푸르다 憩樹翠高低
외딴 절 종소리 이윽고 그치자 孤寺鍾初歇
한적한 개울가에 어지러운 새소리 幽溪鳥亂啼
입신양명 두 가지 버리고 나니 身名兩俱遣
세상의 온갖 일에 이미 서툴 뿐 萬事已筌蹄
절벽에 올라 높직이 기대서서 欹危登絶岸
긴 하루 담담히 돌아갈 길 잊었네 永日憺忘歸
스님은 꽃 사이 오솔길 쓸고 僧掃花間逕
물새는 버들 아래 돌 위에서 조누나 鷗眠柳下磯
맑은 개울 물결은 반짝거리고 晴川波閃閃
저문 골짝 그림자는 일렁이는데 晩壑影依依
어린 아들 멀리서 바라보다가 稚子遙相望
아비를 부르며 사립문에 기댔네 呼爺倚短扉
한적한 초당에서 푸른 산 마주하니 閒齋對碧峯
그윽한 구경거리 끝이 없어라 幽賞自無窮
바람은 쌍쌍이 학을 날려 보내는데 風送雙飛鶴
심상한 봄날에 홀로 취한 늙은이 春尋獨醉翁
버들 가 아지랑이 푸른빛에 잠겼고 柳烟微鎖綠
도화우 가랑비엔 분홍빛이 스몄네 桃雨細含紅
만물이 모두 다 무리를 이루다니 萬物盡成衆
태허엔 오히려 종적이 있었구나 太空還有蹤
한적한 계거의 정취와 처사의 맑은 삶이 그림처럼 선연하다.
표은 이후의 내앞 김문의 가학의 흐름을 후인들은 금적제구로 압축하여 말한다.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이 그들이다. 금옹 김학배는 표은의 재종손이자 문도로서 표은의 행장을 쓴 사람이다. 현종 4년에 대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 춘추관기사관 고성현감을 지냈다.
금옹의 문도이며 금옹 사후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에게 집지하여 갈암의 적거 이후에 금양강학錦陽講學의 물적 토대를 만들었던 적암 김태중은 반변구곡의 산수풍월이 ‘내 집 물건(吾家物)’이라 하였다. 그의 시 제선유정題仙遊亭에서
청명한 바람 속에 자갈 길 다 지나니 踏盡晴風亂石川
석양 비낀 정자엔 계단 길이 가파르네 花宮斜日步層顚
풍월 찾는 시인 붓에 구름이 일어 騷人覓句雲生筆
촌로도 바람 타고 신선이나 될 듯해라 野老乘風骨欲仙
만리에 가을 들어 온 계곡이 단풍인데 萬里秋容粧絶壑
보름 달 차가운 빛 하늘에 가득하다 一輪霜月滿諸天
오늘부터 이 강산은 모두 다 내 차지니 江山自是吾家物
좋은 경치 가져다가 남에게 전하지 마소 莫把奇觀世外傳
라 한 것을 이른다. 적암은 평생을 전야에서 독서하며 사환의 길에 초연하였던 사람이다. 불구문달不求聞達(명성이나 영달을 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의 생애를 지탱하였던 힘이 강호취며 산수벽이었을 법하다. 함께 갈암의 문도였으며 영조英祖 신임辛壬 연간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혐의로 평생 낙백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포헌逋軒 권덕수權德秀는 적암에 대한 만사 칠률에서 이렇게 적어 그의 생애를 요약하였다.
너른 저 물 볼 때마다 임하를 생각노니 洋洋流水想臨河
운곡서당 거처에서 읊은 시도 많았었지 雲谷幽居雜詠多
--- 중 략 ---
백운정 물 위에 뜬 달은 옛날과 같건마는 依舊白雲潭上月
슬프다 오늘 후로 누구 차지 되려는고 可憐從此屬誰家
임하 앞을 흐르는 반변천은 안동부 동쪽의 와부탄에서 낙강과 합류한다. 포헌은 와부탄과 영호루의 아래 쪽 청성산 앞에 살았다. 송암 권호문의 주손이다. 임하를 생각한다는 말은 하류에 사는 포헌이 상류에 살았던 적암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하류는 상류의 흐름에 힘입는 법이니 두 강의 합류로 드넓어진 강류를 보면서 방금 세상을 떠난 적암을 ‘山高水長’의 도덕에 비긴 것이다. 포헌의 생각에 그 의경과 도덕의 원천은 백운정 주위의 산수풍광이었다. 적암 생전에는 그 모든 것이 적암의 차지였는데 이젠 그 풍월의 주인이 죽고 없다고 탄식한 것이다.
또 구사당 김낙행은 내앞 안쪽의, 금옹과 적암의 자취가 배인 운곡서당이 퇴락하자 문내 인사와 더불어 그 중수를 주도하고 기문을 지었는데 여기서 “가만히 생각컨대 이 곳 산천의 승경은 우리 가문의 문헌 전승을 도왔다. 금옹의 유허가 지척에 있고 적암의 구택이 주춧돌 하나 사이에 있으니 선현 후현의 학문 수수와 덕업 계승은 하늘의 뜻이요, 진실로 우연이 아닐 것”이라 하였다.
구곡에 관련된 일들은 향내 인사들의 수창이나 문집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무래도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영가지永嘉誌>와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이 빠질 수 없다. 영가지에는 백운정에 대하여 “백운정은 임하현의 북쪽 이 리, 부암연 위에 있다. 증판서贈判書 김진 공이 지은 것을 아들 수일守一이 옛 제도에 더하여 개축한 것이다”라고 한 후, 백운정에 게판된 시 중 청계의 원운을 소개하고 있고, 또 선유정에 대해서는 “임하현 동쪽 선찰사 앞에 있다. 김진이 지은 것이다. 동쪽에 있는 산을 봉일산이라 하고 뒤에 있는 것을 무학산이라 하며 앞에 있는 것을 장륙산, 왼쪽을 옥병산, 오른쪽을 취병산이라 한다. 취병의 봉우리는 도경봉이요, 옥병의 봉우리는 탁천봉이다(<永嘉志> 卷三, 樓亭條)”라 하고 있다.
택리지에서는 이상적인 가거지 중 한 형태로 계거를 들고 계거의 대표적 유형으로 안동의 도산, 임천, 하회, 유곡을 들고 있다. 여기서 임천은 말할 나위 없이 임하의 임천서원(후에 송현의 호암으로 이건하였다.) 일대이며, 청계 김진 이래 내앞 김문 집성지역을 지칭한다.
구곡이 각각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자세하지 않아 선현이 남긴 자료로 대략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은 그의 동유십소기東遊十小記에서
복주 동쪽에 임하현이 있다. ------ 처음 청계 김공이 이 곳에 터를 잡아 한 지방의 이름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강 하류로부터 상류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유촉이 닿은 곳이라 혹은 정자를 세우고 혹은 사당을 세우기도 하니 드디어 내앞 김문의 고장이 되었다. 내가 요사이 외숙 정재선생定齋先生(한들의 정재 유치명을 가리킨다)께 학업을 닦으러 다니는 여가에 걸어서 내앞으로부터 도연까지 구경한 적이 있다. ------ 김사원金士遠의 말에 ‘임하에 구곡이 있다’고 하는데 내 아직 알지 못하여 구곡의 이름을 물었더니 아무도 모른다. ------ 드디어 그 경치를 뽑아 동유십소기를 짓는다. (<愼庵集> 東遊十小記)
라 하고 백운정으로부터 상류를 거슬러 가며 임천臨川, 사빈泗濱, 송석松石, 선창仙倉, 석문石門, 낙연落淵, 표옹유허瓢翁遺墟, 선유정仙遊亭, 상선암上禪庵의 십승에 짤막한 기문을 붙였다. 그런데 이들 중 석문과 낙연은 사실 하나이고 선유정과 선찰사의 상선암은 동일한 구역에 있으므로 두 구역에서 하나씩 낙연과 선유정만을 택하면 구곡 중 여덟 곳은 뚜렷해진다.
여기에 안동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에 소장된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 (虛舟府君山水遺帖. 藏書閣 第 3集,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0. 7.)의 열세 폭에 실린 그림 중에서 백운정과 도연 사이의 승경을 그린 것은 모두 7폭인데 이들을 대조해보면 나머지 한 곳을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임하구곡 지역에 해당하는 일곱 폭 중, 첫째 그림의 화제畵題는 운정풍범雲停風帆이다. 백운정과 하류의 개호송, 그 건너편 내앞 마을의 정경을 부감俯瞰하여 사실적인 필치로 그렸다.
두 번째 그림은 칠탄후선七灘侯船이며 세 번째는 망천귀도輞川歸棹이다. 칠탄은 지금의 임하에서 망천 사이의 깊은 여울이며 망천은 임하댐으로 수몰된 옛 夢仙閣 주변의 경승이다. 칠탄은 숙종조에 섬계剡溪 이잠李潛이 그 때 동궁이었던 경종을 보호하려다 장폐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조정에 나포되었던 김세흠金世欽의 별호이기도 하며, 몽선각은 자신 또한 산수화에 뛰어나 도산서원의 풍광을 그렸던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이 꿈에 소동파를 만나 노닐고서 만년 장수지소로 얽은 정자이다. <택리지>의 계거溪居 조에도 이 몽선각에 대한 언급이 실렸을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 승지인데, 신암의 동유십소기에는 이 칠탄과 망천이 빠져 있다.
네 번째는 사수범주泗水泛舟. 사의 동구와 사빈서원 앞에 배를 띄우고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사수 상류, 경출산 남록에 청계 김진의 묘소가 있다. 묘소에서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오 리 가량 상류의 맞은 편 지점이 대박大朴 김철金澈의 재궁이 있던 송석이다. 가정이지만 허주가 동양산수의 또 하나 큰 주제였던 구곡을 염두에 두고 구곡도를 계획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사수범주와 그 다음 그림인 선창계람 사이에 송석과 관련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 다음은 선창계람仙倉繫纜이다. ‘선계의 만물상’이라는 뜻에서 명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섯 째 그림은 낙연모색落淵暮色이니 도연폭포의 저물녘 풍경이다. 마지막은 선사심진仙寺尋眞이다. 그림의 광경은 이 선유船遊의 종착점이라 할 선유정에 당도한 유객들이 청계의 영정影幀을 봉심하는 장면이다.
동유십소기에서 빠져있는 칠탄은 망천輞川 몽선각 앞의 징연澄淵과 이어진 여울이며 그 밖의 다른 경승과 유사한 선인의 행적에 관련된 정사나 유허 등의 구조물이 없으므로 사실 상 망천 하나로 합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유십소기의 중복된 경물을 뺀 여덟 승지와 이 망천을 합하여 구곡을 비정할 수 있다. 임하구곡은 일곡의 백운정으로부터, 이곡은 임천과 임천서원, 삼곡이 망천과 칠탄, 사곡은 사수의 사빈서원, 오곡은 송석, 육곡은 선창의 수석, 칠곡은 낙연현류, 팔곡은 선찰사와 선유정, 구곡은 표은 유허가 되는 것이다.
우리 선인들의 산수취미는 출처관의 핵심과 닿는다.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論語> 泰伯篇)라거나, ‘숨어살면서 자신의 지향을 추구하며, 의를 행하여 자신의 도를 달성한다’ (<論語> 季氏篇)라 한 언급은 경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숨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속의 티끌, 즉 물욕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산수 간, 전원 간에 은거함을 말한다. 나라의 정치 사정이나 사회적 여건이 천리를 구현하려는 나의 지향과 합치하면 세상에 나아가지만 그러한 나의 지향과 다를 때는 재야로 물러나 세상의 명리를 멀리하며 심신의 수양에 전념한다는 뜻일 터이다.
특히 이 은일청유隱逸淸遊의 사상은 요산요수, 난진이퇴, 삼공불환, 임천고치 등의 수신일의修身一義의 개념을 생활로 실현하려 한 의식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훗날의 사대부 사이에 보편화되어 시문詩文이나 도화圖畵의 오랜 테마가 되었다. 예컨대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려 하면서도 사정상 그 속에 부침浮沈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하자. 이 사람이 산수취山水趣를 통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할 텐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므로 그림이나 시문에 지취를 가탁하여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청계 김진의 산수 강호취江湖趣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적극적이다. 종래의 문인 한사는 자신의 산수취미를 충족하기 위하여 선계仙界의 풍치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것을 당실堂室 안에 걸었다. 한적한 수석의 풍치를 남이 개입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옮겨와 독점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계는 선유정의 산수를 그려 완상자적하는 대신, 자신의 초상을 그려 선유정에 걸어두게 하였다. 초상에 담긴 스스로의 넋이 길이 선유정 부근의 자연과 일체가 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평생 누린 강호취미 아직도 미진하니 生平未盡江湖趣
노경의 내 모습 그려 정자 남쪽에 걸어 두네. 爲寫衰眞寄舍南
주인공의 시의가 바로 보물 1221호인 <청계 김진 영정>이 그려진 사정이려니와 여하간 이 이후로 선유정 일역의 도연에서부터 내앞의 백운정과 개호송에 이르기까지의 아홉 구비가 내앞 문헌의 산수고장이 되고 후예들의 삶의 표상이 된 것이다.
4. 학봉 김성일의 구국혈성으로 발화한 내앞의 지절과 인물
가성家性이나 가풍家風이라는 말은 어떤 집안의 집단적 성품이나 기풍을 뜻하니, 그 구성원의 기질과 성향이 동일한 역사와 환경 속에서 꾸준히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한 결과를 가리킨다. 왕왕 그것이 긍정적인 내용을 가졌을 때 가성(家聲)이라는 말로 대체해 쓰기도 하는데, 가문의 명성名聲이나 성망聲望을 뜻한다. 개인의 기질과 성향이 주변 인물이나 자연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듯이, 가성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가문의 기풍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그 가문의 역사와 인물, 주변 환경에 주목하는 법이다. 옛 풍습에 처음 만나는 사람과 수인사를 행할 때, 관향은 어디를 쓰며, 어디에 살며, 현조로는 어떤 어른이 계시는지를 자세히 물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가성에 비추어 처음 만나는 그 사람의 대략의 기질이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게 수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흔히 내앞의 가성은 사환仕宦에 따른 부귀보다 학문행의學問行誼에 바탕한 지절指節에서 두드러진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중흥조 청계 이래의 가문의 역사와 문화, 또 내앞을 중심한 수상水上 수하水下의 산수山水 속에서 발양되고 전습, 심화된 결과일 것이다. 청계의 아랫대 중 이러한 가성을 이루는 데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단연 학봉 김성일이다.
1) 학봉 김성일의 구국 활동
잘 알려진대로 학봉 김성일은 통신사로 왜에 다녀온 후, 사행 복명에서 정사 황윤길과는 달리 왜의 침공 조짐을 부정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임란으로 인한 국가 위난의 책임이 학봉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란 직전의 백성이 처해 있었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면 학봉이 왜倭의 침공설에 동조했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온 나라가 장차 다가올 침공에 대비하여 전시체제의 동원과 축성 보수의 부역에 힘을 기울였다 가정한다 하더라도 임란의 발발, 즉 왜의 침공 자체를 미리 막을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학봉이 나주 등지의 목민관牧民官과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를 수행하는 동안 눈으로 목도한 백성의 피폐상을 감안하면 전란이 발발하기 전에 민란 수준의 내부적 혼란에 먼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아사 직전의 백성들이 유리 도산하여 민정을 소집할 수 없었고, 관청의 군기는 창검槍劍과 궁시弓矢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어 새로 갖추기커녕 보수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실제로 전란 초기에 적정敵情에 동화同化하여 지리에 어두운 왜군의 길라잡이를 자담하거나, 왜성倭聲을 쓰는 등, 왜병을 가장하여 향촌에 출몰하며 침탈하였던 적당들은, 조정의 무능과 관차의 침학에 몰리다 기어이 향촌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산지유민散地流民들이었다. 수령과 군관은 이들 유민과 나라의 안위安危에 떨쳐 일어선 향병을 동일시하고 핍박을 일삼아 김시민金時敏이나 곽재우郭再佑조차 적당으로 몰았으며, 향병은 향병대로 예봉을 돌려 관군과 부딪칠 때가 많았다. 관군과 의병이 목전의 외침을 치지도외하고 갈등 반목에 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위에서 이미 이반한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어 향병으로 결속시키고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제調劑 화합和合시킴으로써 임란 초기 삼대승첩의 하나인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이끌어낸 것은 학봉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조실록의 “영남 사민이 성일誠一의 초유招諭와 효시曉示에 의지하여 안집安集하고, 다시 흩어지지 않았으니 영남의 인심을 수습한 것은 성일의 공이 가장 크다.”라 한 사신의 말은 당시의 최악의 상황을 성혈誠血로 반전시킨 학봉의 공로를 평가한 것이다. 경상좌도 방면의 왜병의 기세가 치열해질까 우려한 조정이 학봉을 좌도감사左道監司로 옮겨 제수함에 따라, 학봉이 임지를 떠나려 하자 우도사민友道士民의 실망이 막심하였다거나, 나아가 통문通文을 돌리고 유회儒會를 열어 진정서와 상소를 올리는 한편, 가는 길을 막아 우도에 계속 머물러 줄 것을 호소하였다는 데서도 초기 전란 극복 와중에서 점했던 학봉의 역할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학봉은 결국 1593년 봄부터 삼남에 돌았던 역병에 걸리어, 스스로 진주성 사수를 효유할 때 말한 바의 ‘삼남三南의 요로要路요, 호서 호남 곡창의 보장堡障이니, 곧, 온 나라의 기틀’이었던 진주 감영에서 별세하였다. 자신과 함께 왜적의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던 경상우병사 김면金沔을 같은 돌림병으로 앞세워 보내고 제문을 지어 곡한 직후였다. 둘째 아들 혁(삼수변의 奕)도 전쟁 중의 아버지를 수행하며 시중을 들다가 전정 만 리의 나이, 스물넷에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학봉 행장行狀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학봉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대개 영남이 앞을 다투어 왜이倭夷로 화하지 않은 것은 의로운 선비들이 창기한 공로이지만, 의병의 활약을 그처럼 끝내 성취토록 한 것은, 실상 선생이 혈성血誠으로 사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고, 진주성을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은 까닭은 비록 김시민金時敏이 역전한 공로이지만, 이 또한 선생의 지원指援과 응책應策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으니, 그 자신, 살아서는 일도인심一道人心의 의지하는 장성長城이 되고, 돌아가서는 대소사민大小士民의 울며 서로 위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2) 일제하 안동 계몽운동의 본산 협동학교와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고종 을미년(1895)에 명성황후 민씨가 강도 일본의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을미개혁이라 하여 단발령과 복제혁파의 조명朝命이 잇따라 내려오자 안동의 유림은 전국 최초로 창의를 결의하고 일어섰다. 조선祖先으로부터 이어온 형체를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하회의 석호石湖 유도원柳道聖, 검제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구미의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등 향중 원로가 주도하여 닭실(유곡)의 성대星臺 권세연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선임하고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소위 을미의진이다.
이 때 향중이 일체가 되어 거병했음에도 마침 내앞에서는 거의 창의에 가담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대종손과 운천 종손, 또 향중에 명망이 높았던 도사都事 김진린金鎭麟이 잇따라 작고하여 온 동네가 상갓집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각 문중에 배정된 군자금을 부담하고, 상례에 대한 구애가 없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검제의 학봉파에서 많은 장정인력을 내는 한 편, 일흔이 넘은 서산 김흥락이 의진義陣의 주획에 적극 합류하는 정도의 형편이었다.
내앞을 중심한 안동유림의 근대적 변용變容은 1906년의 흥학조령興學詔令이 반포된 후 향촌에서도 계몽운동의 사조가 전파되던 시기부터 본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임동 면장에 재임하던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이 내앞 종손인 김병식金秉植과 그의 재종형제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의 협력과 김긍식金肯植(김동삼의 본명)의 적극적 활동에 힘입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처음에는 협동학교가 서당식의 구제도를 혁파하고 신문물 수용을 적극 지향하는 모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백하 김대락까지도 그의 매부인 석주石洲 이상룡李象龍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신문명을 제창하자 계몽운동의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여기에는 활발하게 움직임을 보이던 종손 김병식이나 백하의 아들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 일송 김동삼 등 청장년 층의 꾸준한 설득 노력도 일정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협동학교가 표방한 것은 그 설립취지문設立趣旨文과 권면문勸勉文에 잘 드러난다. 취지문은 “열강의 각축이 풍운을 몰아오는 이 때, 예로부터 인물의 고장이었던 안동이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새 기풍을 세우고 인물을 길러 능동적으로 새 시대를 맞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면문에서는 동양의 학문에 근거하여 “경도經道와 권도權道를 구분한 위에 ‘나의 도道를 道로 세우고’ ‘저의 기술技術을 技術’로 쓸 수 있다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이른 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내앞의 협동학교에 관계하던 모든 인사가 도만한 후 협동학교는 수곡의 한들로 옮겨가고 1919년의 챗거리 장터의 만세운동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마감했다. 그러나 협동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던 인사와 여기서 배출된 인사의 면면은 도만 이후 경학사, 신흥학교, 백서농장의 주체로서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그들의 장엄한 독립전쟁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3) 백하 김대락과 일송 김대락의 멸사봉공의 일생
독립운동가 백하白下(또 다른 호는 비서賁西이다) 김대락金大洛은 자제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 등 일가와 함께 1911년 1월, 67세의 고령으로 가솔을 모두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백하의 웃대 진린鎭麟(호는 愚坡우파)공이 도천道薦으로 도사都事를 지냈으므로 세칭 ‘도사댁’이라 하는데, 지례의 지촌댁, 망천의 화동댁과 함께 ‘글 안 빌리고, 제수祭需 안 빌리고, 말[馬] 안 빌리는’ 삼불차三不借의 집이라 하여 도만渡滿 이전까지는 형세 좋기로 인근에서 으뜸으로 여겼다.
한말 이후 이 집안의 행로는 안동 법흥의 임청각과 거의 똑같은 궤적 위에 있었다. 백하는 당시 임청각 주인이었던 임정초대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象龍과 처남매부지간이다. 똑같이 검제의 서산西山 문하에서 수학하여 존주근왕尊周勤王의 유가적儒家的 경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라의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의 수용이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세 인식의 산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의 설립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이었다.
백하는 당초에 협동학교가 지향하는 신문물의 수용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마침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든 석주의 입장에 공감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그 이후, 백하는 학교의 운영기금으로 호계서원 등, 향내 서원의 재정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내앞과 무실, 외내의 중진들을 설득하던 동산이나 일송의 후견 역할을 자담하게 된다. 종전의 자세가 어떠했든, 남의 이목이 어떻든,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실행으로 옮기는 데 전혀 주저가 없었다. 교사校舍로 쓰려 했던 가산서당可山書堂의 사용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사랑채를 동산 유인식 일송 김동삼 만원 김형식등 협동학교를 창도하던 신진기예에 선뜻 내놓은 것도 그 일면이었다.
그 당시까지도 향중 척사유림의 의식을 지배하는 논리는 ‘왜이에 부화하여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 = 민지의 발휘를 운운하며 신사조를 주창하는 세력 = 매국역적’의 완고한 등식이었다. 을미년 국모의 시해와 단발령 시행으로 불타올랐던 안동의 을미의병 운동이 겨우 10여년 전의 일이었던지라, 단발은 신조류며, 곧 일제의 책동이니 매국매족이 된다는 인식이 일반에 설득력 있게 인식된 것도 일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정척사 의병의 일대가 협동학교에 난입하여 교감 김기수와 교사 및 학도 수 인을 격살(바로 지금의 사랑채 앞 바위 부근이라고 전한다)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위정척사와 구습혁파, 신교육을 통한 인재의 양성이라는 두 사조의 갈등을 극명히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경술년의 국치를 당한 후, 백하와 석주는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이 국내에서보다 만주지역에서 새로 개척한 기지에서가 유리할 것이라는 신민회의 전망에 공감한다. 섣달 말에 백하가 먼저 가산을 정리하여 떠나고, 석주는 달포 뒤 쯤, 일정의 감시를 피하여 도만 길에 올랐다. 더구나 백하는 만삭 잉부의 몸인 손부를 소달구지에 싣고 북만주 그 먼 길을 떠났다. 타고 걷기 달포 넘는 고단한 길 끝에 압록강을 건너고, 손부가 해산하자 태어난 아이의 아명을 ‘쾌당快唐’이라고 짓는다. 원수 일제의 아귀를 벗어나 중국에서 아이를 얻으니 통쾌하다는 뜻이다.
도만 4년이 되는 1914년 말에 백하는 연세가 일흔이었다. 워낙 고령인데다, 수토가 다르고 풍속이 다른 곳에서 기지의 개척은 그만두고라도 우선 정착을 위해서 문사구전問舍求田에 동분서주하는 자질들의 고생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 않아도 좋았을 만년 고난이 어떠했던 간에, 당대의 어른 백하가 함께 있다는 믿음은 국내 활동시기 이들 계몽사상가에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도만 이후 허허벌판에 새 움을 틀어야 했던 구국운동가들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이 갈 만한 일이다.
일송 김동삼은 초명이 긍식肯植, 자字는 한경漢卿이다. 뒷날 이름을 동삼東三, 자를 성지省之, 별호를 일송一松으로 짓게 되는 것은,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이라는 비밀활동의 편의를 위한 이유도 있었겠으나, 당신 스스로의 평생 지향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과 자, 별호를 그대로 나열하면 ‘동삼성지일송東三省之一松’, 곧 ‘동북 삼성의 한 그루, 청청한 소나무’라는 뜻이 된다.
내앞 운천종가와 동쪽으로 담 하나를 격한 본제에서 귀봉공의 11대손 계락繼洛과 영해 신申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생가는 일송이 일가를 이끌고 도만한 후 풍우에 퇴락하자, 쓸쓸한 유지를 방치할 수 없다 여긴 먼 일가가 중수하여 지금까지 삼대를 이어 살고 있다. 구옥의 모습은 간 데 없지만 바로 이 터가 1907년 협동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하여 1909년 백산 안희제 서상일 등의 동지와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1911년 도만 이후의 불퇴전의 의지로 펼쳤던 항일구국활동의 태실이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 5조약을 늑결하자, 일송은 비분강개하여 보수의 구습을 혁파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몽사상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의 나이 29세 되던 1907년 이상룡 유인식 김후병 하중환 등의 인사와 함께 사립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취임하였다. 또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에도 참여하였고,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약하는 등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경술늑약 후 그는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한계를 맞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협동학교 제 1회 졸업생이 배출되자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 후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정열을 쏟아 유하현 삼원보에 설립된 자치단체 경학사에서 조직과 선전을 맡는 한 편, 경학사가 중국 현지인과의 화합을 위한 방편으로 채택한 변장운동에 전념하여 중어학원을 설립하고, 이주한인들에게 중국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일 간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중국과의 연합을 다방면으로 모색하다가 여의치 않자 독자적으로 혈전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부민단 간부들을 주축으로 백두산 서록에 백서농장을 꾸리고 장주로서 대일 무장투쟁을 준비하려 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에 고무되어 서간도 일대에도 항일독립군단의 정비와 새로운 결성이 활발해지는데, 이 때 일송은 이상룡李象龍, 이탁李沰 등의 인물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한족회로 확대개편하고 서무부장을 맡았다. 한족회가 설립한 군정부가 상해 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지구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재편되면서 참모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송은 통의부 총장, 상해 국민대표회의 의장, 전만통일회의 의장, 정의부 외교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두 차례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만주에서의 대일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전념하겠다는 표면상의 이유보다는 상해임정의 외교중심 독립운동의 노선과 자신의 무장투쟁을 통한 국내 진공 노선이 상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28년에는 정의부 대표로서 김좌진, 지청천 등과 두 차례에 걸쳐 삼부통합회의를 진행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혁신의회 의장을 맡았으며 민족유일당 재만 책진회 중앙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31년 일제의 침략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북만주로 가던 길에 일제의 경찰에 붙들려 형무소에서 순국할 때까지 그의 모든 활동은 그 자체로 만주일대의 독립투쟁의 확고한 기초가 되었다.
일송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자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사람은 만해 한용운이다. 일송의 옥중 서거 소식을 들은 만해가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통곡하자 만해의 제자 김관호가 그 연유를 물었다. 만해의 대답이 이러했다. “광복된 나라와 민족을 통합하고 이끌 유일무이한 지도자를 잃었으니 그 애통함이 이천만 동포를 다 잃은 것과 마찬가지이다.”(만해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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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