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과 인식 과정
시적 표현과 더불어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들
2. 국면과 관점
일정한 시각을 가진 한 사람 앞에 존재하는 시적 대상은 우선 하나이다. 그 하나인 대상은 동시에 하나의 세계로서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물이든 관념이든 그 대상은 각각 의미의 세계, 의미의 우주인 까닭이다. 특정한 대상, 즉 특정한 시적 대상이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은 그 대상이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제, 많은 국면aspect으로 어우러진 하나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고도 극심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⁶
시적 대상을 보다 바로 이해하기 위해 그 다양성을 축소하여 도식화해보자. W라는 대상을 공원이라고 해보자. 그럴 때, 일차적으로 공원은 하나이다. 그러나 개념상으로 하나인 공원은 넓은 땅을 공원이게 하는 수많은 공원적 사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공원은 수많은 다른 공원적 요소와 분위기로 가득 찬 부분 부분(w의 1~8)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적 대상을 개념상으로 볼 때는 하나(W)이지만 하나의 세계로 볼 때는 많은 것을 포함한 하나(1~8을 포함한 W)인 것을 알 수 있다. 일차적으로 공원(W)은 개념적인 존재이다. 그 공원(W)을 누군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인 것(w)으로 그 실상을 드러낸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큰 공원이라면 지구는 그 큰 공원(W)의 한 장소(W1~8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지구를 큰 공원으로 본다면 서울·뉴욕·도쿄·베이징 등등은 그 큰 공원(W)의 제각기 다른 한 장소(w1~8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W w
어떻든 그 세계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 세계는 우리가 지각해야 할 국면으로 다가온다(이때의 지각은 물론 미적 지각이다). 그 국면 앞에 선 인식 주체는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양분된다. 하나는 관념적 관점, 다른 하나는 실재적 관점이 그것이다. 관념적 관점은 구체적 현상을 사상시키고 개괄적인 입장에서 대상을 그 나름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이고, 실재적 관점은 구체적 현상을 통해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도표로 예를 든다면, w의 1~8이라는 부분 또는 사실을 사상하고 W의 세계를 추론의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관념적 관점이며, W의 1~8 가운데 어느 부분 또는 1~8의 개별적·구체적 현상을 극대화함으로써 W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실재적 관점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向하여 흔드는
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標ㅅ대 끝에
哀愁의 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旗ㅅ발」⁷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山턱에 등불 두셋 외롭구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뚝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렸다. -박남수, 「밤길」⁸
두 작품 가운데 「기ㅅ발」이 관념적 관점, 「밤길」이 실재적 관점이다. 「기ㅅ발」은, 작품을 보아 알 수 있듯, 그 깃발이 어떤 종류의 것이며, 어떤 장소에 꽂혀 있으며,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인가 등등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사상하고 깃발이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를 밝히려 하고 있다. 이와 달리 「밤길」은 밤길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어느 특정한 날(“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의 현상적 사실을 선택적으로 가시화하여 밤길에 대한 우리의 정서를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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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적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미적 지각에 필요한 작가의 적절한 태도의 문체라면, 시적 대상과 관점과의 문제는 감지의 시각angle of vision과 관련되어 있다. 미적 인식이 그 무엇에 관한 정서의 형식화된 표현이라면, 모든 시에는 좋은 시이든 그렇지 못한 시이든 구별 없이 어떤 형태의 정서가 개별적 편차를 보여주며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개별적 편차 속에는 일정한 양의 작품들이 공통으로 숨기고 있는 관점상의 패턴이 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감각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 표현 행위의 적절성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시각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7 정한모, 김용직 편, 『한국현대시 요람』, 박영사, 1982, p. 472.
8 같은 책, p. 714.
『현대시작법』 오규원
2024. 7. 3
맹태영 옮겨 적음